내 아버지 김홍도. 설흔. p175
“두 가지 근심스러운 일이 무엇이냐고? 권태에 빠지는 것이 그 하나이고, 사소한 이익을 다투는 게 다른 하나일세. 어쩌면 둘은 하나일지도 모르지만, 자네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을 테지만.”
“한강의 모래가 얼마나 많은지 자네는 아는가?”
“모릅니다.”
“나도 모른다네. 내가 아는 건 한강의 모래만큼 많은 것이 내게도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시간이라는 물건일세.”
“그래, 가을이다. 하지만 나는 눈에 보이는 가을을 그린 것이 아니라.”…어쩌면 그림은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을 그리는 것일 테니까요.
“내가 그린 것은 소리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린 것은 가을이 오는 소리이다.”
그림이 귀로 듣는 소리를 느끼게 할 수 있을까요? 그림을 다시 보고서야 나는 아버지의 말을 이해합니다. 나는 그제야 내가 들었던 바람 소리가 밖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다시 본 그림 속에서는 정말 소리가 나고 있었습니다.
“소리가 들리기는 하는데 무슨 소리라 말하기가 힘듭니다”
그런 나를 보며 아버지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라면, 들을 줄 알았다. 그게 바로 가을이 오는 소리이다.”
“가을의 겉모습은 어떠하냐. 하늘을 맑고 햇살은 깨끗하지 않으냐. 바람은 적당하고 구름도 드높지 않으냐. 그래서 사람들은 그 겉모습을 보고 가을을 아름답다 여긴다. 그러나 실제의 가을은 그렇지 않다. 풀빛의 색이 변하고 나뭇잎이 떨어진다. 이마의 주름이 는ㄹ고 머리 색이 옅어진다. 맑은 하늘과 깨끗한 햇살은 실은 냉정함이다. 정당한 바람과 드높은 구름은 실은 광폭함이다. 가을은 그 냉정함과 광폭함으로 사물과 사람의 기운을 뺴앗는다. 누가 겨울이 춥다고 하느냐? 세상은 보이는 것과는 다르다. 사람들은 그저 겉만 보며 겨울이 춥고 가을은 좋다고 말한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가장 추운 계절은 겨울이 아닌 가을이다. 가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겨울은 가을이 파괴하고 산산조각낸 것을 가까스로 수습하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가을이 파괴하고 산산조각낸 것이 겨울이 되어야 비로소 보이니 사람들은 그저 겨울이 모질고 춥다고 느끼는 것뿐. 그러니 네가 들은 그 소리는 바로 가을이 오는 소리이다. 사람들이 제대로 듣지 못하는 소리, 가을이 오는 소리이다. 가을은 결코 조용히 오지 않는다. 가을은 요란스럽게 온다. 가을은 냉정하고 광폭하게 온다.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그래서 나는 가을이 오는 소리를 그려 보인 것이다.”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립니다. 내 귀에 들리는 가을 소리가 너무도 무서워 아예 귀를 막고 눈물을 터뜨립나다.
“세상의 고결한 선비들이 앞다투어 내 그림과 내 인품을 칭찬했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느냐?”
“이용휴 선생은 내 그림의 선과 색이 정교하고 묘하다 했다. 그런데도 경망스럽게 붓을 놀리지 않았으니 그것은 바로 내 인품이 높은 까닭이라 했다.”
아버지가 나를 보며 아버지로선 드물게 목소리를 높입니다.
“네가 한 짓이 곧 내가 한 짓이다. 그게 나라는 사람이다.”
나는 아버지를 압니다. 그림 그릴 때의 아버지를 알고 악기를 연주할 때의 아버지를 압니다. 아버지에게는 흥이 있습니다. 흥은 배우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흥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흥으로 그림을 그렸고 흥으로 악기를 연주했습니다. 그럴 때면 꼭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날 제자로 받아들인 표암 선생이 내 준 첫 번째 과제가 무엇인 줄 아느냐?”
“생황 소리를 그리라 했다.”
“너라면 어떻게 했겠느냐?”
라 친구였는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불면 물은 흔들립니다. 악기를 연주해도 물은 흔들립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생황 소리를 그릴 때 그 사실을 떠올리긴 어렵습니다. 아버지는 그걸 깨달은 것입니다. 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던 그 어린 아버지가 말입니다. 아버지이 말이 이어집니다.
“표암 선생과 난 비슷한 점이 참 많았다. 어쩌면 우리는 사제가 아니라 친구였는지도 모르겠다.”
(벗이 아닌자 스승이 될 수 없고, 스승이 아닌자 벗이 될 수 없다!)
“너는 좋은 화가가 될 재능을 여럿 타고났다. 그림 보는 눈도 갖췄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보는 예민한 감각도 갖췄다. 단 하나 부족한 게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네 마음을 표현할 줄 모른다. 내 그림에는 내가 들어 있다. 그런데 네 그림에는 네가 없다. 그러니 네가 그리는 그림은 죽은 그림이다….”
“…단원자가 그림만 잘 그린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군. 글도 좋고 글씨도 좋고. 하나 무엇보다도 좋은 건 바로 단원자의 따뜻한 마음이고.”
아버지는 화원이 아니라 화가였다. 그림 한 점 없는 『유묵첩』이 바로 그 증거였다. 글씨를 보고 편지를 읽으면 아버지가 어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는지가 보였다.
“…여래는 온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는 것이라네.”
“여래 또한 없는 것이지요. 『금강경』도 없는 것이고요.”
“결국 자네와 단원자는 같은 곳을 보게 되었군…”
실은 아버지는 선비였다. 광대였다. 떠돌이였다. 중이었다. 그리고 달이었다.
그건 바로 아버지가 화가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며 선비의 삶을 살았고, 광대의 삶을 살았고, 떠돌이의 삶을 살았고, 중의 삶을 살았고, 달의 삶을 살았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내게 마지막으로 말한 것은 그것들이 되지 못한 안타까움이 아니라 그림 그리며 그것들이 되어 살아온 삶이 끝나간다는 뜻이다. 그 말을 내게 한 뜻을 이제 나는 안다. 남들을 위한 그림을 그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만을 위한 그림만 그리라는 뜻이었다. 화원이 되지 말라는 뜻이었다. 화가가 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는 더 말하지 않고 침묵만 흐르게 내버려 둔다. 때로는 침묵이 가장 아름다운 소리인 법이니까.
#작가의 말_소년은 어떻게 어른이 되었는가
어찌되었던 김홍도를 이해하기엔 부족함이 없는 작품들이 많다?
그런데 왜 또 김홍도냐고요?
변명 하나 더 덧붙이자면 김홍도에겐 아들이 있었으니까, 일 것이고요….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김양기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소년은 어떻게 어른이 되었을까요? 내가 궁금한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글의 주인공은 김홍도가 아니라 김양기입니다. 조선 최고의 화가 김홍도가 아니라 무명에 가까운 그의 아들 김양기가 바로 이 글의 주인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