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설흔•박현찬. p293
인문실용소설? 인문+실용+소설
독서의 참된 가치는 여백의 미에서 비롯된다? 사색의 빈틈을 만들어준다!
“아는 글자가 없습니다.”
“알았네. 지금부터 자네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네.”
“과거에 응시해서는 안 되네.”
“자네는 앞으로 공부법부터 바꾸어야 하네. 많이 읽고 외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야. 하나를 알더라도 제대로 음미하고 자세히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네. 알아들겠는가?”
“우선 『논어』를 천천히 읽게. 할 수 있는 한 천천히 읽어야 하네. 그저 외우려 들지 말고 음미하고 생각하면서 읽게. 잘 아는 글자라고 해서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네. 반드시 한 음 한음을 바르게 읽게.”
느리게 읽으라는 것은 다시 말해 꼼꼼하게 읽으라는 뜻이었다. 꼼꼼하게 보니 예전에는 별 의심 없이 지나쳤던 구절들이 하나하나 걸렸다. 그럴 때면 더 이상 책장을 넘기지 않고 그 구절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런 식으로 한나절을 노려보며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그 의미가 이해되는 것이었다.
“이유당 이덕수 선생은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독서는 푹 젖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푹 젖어야 책과 내가 서로 어울려 하나가 된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주는 첫번째 가르침이다.”
정밀하게 독서하라!
“네 스스로 ‘약 約’과 ‘오悟’의 이치를 꺠달았구나.”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는 거리를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네가 이러저리 걸으며 까마귀를 본 것이 그 방법이었다. 그럴 때 비로소 문제를 객과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것을 일컬어 약의 이치라고 하느니라.”
“문제를 인식하고 나면 언제가는 문제의 본질을 깨닫은 통찰의 순간이 오는 법. 네가 갑자기 깨달았다고 한 그 순간이니라. 통찰은 결코 저절로 오지 않는다. 반드시 넓게 보고 깊게 파헤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을 일컬어 오의 이치라고 하느니라.”
“선생님, 그런데 왜 하필 까마귀를 관찰하게 하셨습니까?”
“문자로 된 것만이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책에 세상 사는 지혜가 담겨 있으니 정밀하게 읽을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늘 책만 본다면 물고기가 물을 인식하지 못하듯 그 지혜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즉, 요약하고 깨달아야 하는 대상은 문자로 된 책뿐만 아니라 천지만물에 흩어져 있다는 뜻이다. 그런 눈으로 보면 세상이 하나의 커다란 책이고, 그때 비로소 천지만물은 제 안의 것을 보여주느니라. 이것이 바로 네가 깨우쳤으면 했던 붉은 까마귀의 이치다.”
“요즘 사람들은 도통 천지만물을 제대로 읽고 음미할 줄을 몰라. 『천자문』이 ‘천지현황’, 즉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고 나와 있으니 그저 그런 줄만 알 뿐이지 스스로 그렇다고 느끼지는 못해. 네가 보기에도 하늘이 정녕 검으냐?”
“알아들었으니 다행이로구나. 이제 비로소 약과 오, 두 자를 익힌 셈이다. 법고의 단계를 깨달았다고나 할까.”
관찰하고 통찰하라!
“변할 ‘변’자 정도를 겨우 알게 된 듯 싶습니다.”
“연암이 늘 내게(박제가) 당부한 것이 하나 있었네. 옛 글의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좋으나 새것만 추구한 나머지 가끔 황당한 길로 가는 경향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이야. ‘전’이라 함은 현실에 대응하여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지만 바른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지. 지금 생각하면 내게 꼭 필요한 충고였네. 그 충고를 듣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이 꼴로 살고…”
“자네가 꼭 내 제자 같아 잔소리 삼아 한마디만 더 하겠네. 기왕 시작했으니 붓 끝을 도끼 삼아 거짓된 것들을 찍어버릴 각오로 글을 쓰게나, 알겠나?”
원칙을 따르된 적절하게 변통하라. 의중을 명확히 전달하라.
사마천과 반고를 배우되, 지금 여기에 맞는 글을 써야 한다.
이명과 코골이는 또 어떠한가. 자기만 알고 남들은 모르는 것이 이명이고, 자기만 모르고 남들이 다 아는 것이 코골이다. 둘 다 잘못된 것이다. 쓰는 사람이 자신의 의중을 읽는 사람에게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좋은 글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집과 독선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정밀한 글을 써야 한다.
‘이는 살에서 생기는가, 옷에서 생기는가?’
바로 살과 옷의 사이에서 생긴다고 해야겠지.
“사이는 법고나 법고창신과는 또 다른 경지니라. 사이의 묘를 깨닫게 되면 법고니 창신이니 하고 구분하는 것이 다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양쪽의 중간, 이쪽 저쪽을 꿰뚫는 사이의 묘를 깨닫지 못하고 쓴 글은 헛것이지. 사람 사이의 만남도 마찬가지니라. 사이의 묘를 알아야 사귐의 참의미가 깊어지는 것이다.”
“..양쪽을 고려하되 반드시 새롭고 유용한 시각을 창출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내가 서 있는 자리와 사유의 틀을 깨고 나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초정이 낸 문제의 핵심이자 사이의 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니라.”
“이로써 한 자를 더 익혔구나.”
“네, 사이 간間 자를 비로소 알았습니다.”
관점과 관점의 사이를 꿰뚫는 ‘사이’의 통합적 관점을 만들라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어고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벗.
글을 잘 짓는 자는 아마 병법을 잘 알 것이다.
“병법을 잘 하는 자는 버릴 만한 병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자는 가릴 만한 글자가 없다. 말이 간단하더라도 요령만 잡으면 되고, 토막말이라도 핵심을 놓치지 않으면 험한 성이라도 정복할 수 있는 법이지. 그러므로 글쓰기는 곧 병법이니라.”
‘인순고식 구차미봉(因循姑息苟且彌縫)’
“아버님께서 만년에 가장 사랑하신 글귀일세.”
“낡은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눈앞의 편안함만 좇으며 임시로 변통하려 하는구나.”
“천하 만사가 이 여덟 글자에서 비롯된다고 말씀하셨네.”
“형님, 조금 전에 이 책에 있는 내용이 다 사실이냐고 물으셨지요?”
“제가 대답을 바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사실이자 사실이 아닙니다.”
“바로 소설입니다. 이야기를 있을 법하게. 그걸듯하게 꾸미는 것이지요. 그래서 읽는 자가 사실인가보다 하고 깜빡 속아 넘어가게 됩니다.”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글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왜 글을 쓰게 되었는지 잊지 않고 모든 기쁨과 분노와 슬픔을 글에 쏟아 붓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 없이 쓴 글은 모두 헛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한순간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되지요.”
사마천은 오랜 세월 동안 참고 견뎠던 슬품과 분노, 수치심, 아쉬움 등을 온전히 글에 녹여냈던 것이다. 한 번 뱉으면 사라지고 마는 말이 아니라, 지극한 진심으로 한 자 한 자 새긴 글로써 세상에 자신의 뜻을 증명했던 것이다.
연암은 글 쓰는 사람의 자세를 알려주려 했던 것이다. 세속의 명예나 이익이 아닌 순정한 마음으로 쓰는 글, 거짓된 소리가 아닌 진심으로 쓰는 글만이 세상과 맞설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가르쳐주려 했던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연암이 과거를 포기하고 평생토록 글을 쓰고 살면서 얻고자 바랐던 가치일 터였다.
사마천의 분발심을 잊지 말라
#후기
연암의 문장론을 다루는 본격 소설이면서 동시에 실용적인 글쓰기 방법을 배울 수 있다는 차원에서는 ‘인문실용소설‘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인문과 실용은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본래 대립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우리는 연암이 법고과 창신을 대립으로 보지 않고 그 모두를 품어 안고 넘어서는 길을 택했듯이, 인문과 실용의 ‘사이’를 꿰뚫는 모험을 시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