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 박맹수. p381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정말 제대로 된 생각을 가지고 제대로 된 삶과 사회를 만들려고 한다면, 시간적으로는 동학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합니다. ‘생명’이라는 가치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저항입니다. 생명은 저항하는 것 같습니다. 생물학을 하시는 분이 항상성이라는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모든 생명체는 비정상적 상태에 있을 때 정상적 상태로 가기 위해 몸부림친다는 거죠. 사람으로 보면 부당한 억압과 체제와 잘못된 것에 대해서 저항하는 것과 같습니다.
타 종교난 사상·문화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개방적 태도를 취하면서도 나는 내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열려 있으면서도 자기 주체성을 갖는 것이 바로 동학인 것 같아요. 보편적인 걸 인정하면서도 내가 서 있는 지금 바로 이 자리에 충실하는 것. 따라서 1860년에 등장했던 동학은 제 나라 제 땅에서 제대로 된 생각을 가지고 제대로 된 세상과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사상이었습니다.
이처럼 동학은 미래지향적인 실천운동이었는데, 실패했다는 이유로 120년간 짓밟히고 폄훼 당하고 왜곡 당했던 역사가 아닌가 합니다.
살림의 사상, 살림의 군대
시천주(侍天主)와 유무상자(有無相資): 한국적 평등사상과 공동체 정신
동학에 뛰어들면 굶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유무상자입니다. 단순히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거나 일방적으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고, 재물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람이 서로 도왔다는 것입니다. 재물이 있는 사람은 재물로, 없는 사람은 노동으로, 많이 배운 사람은 문자를 못배운 사람에게 깨우쳐주고, 기술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을 가르쳐주고, 이러한 유무상자가 갑오년까지 끊이지 않고 실천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늘, 밥이 하늘-해월 사상의 구체성
그런 동학을 있게 한, 가장 결정적으로 큰 공을 세운 분이 바로 해월 최시형(1827-1898) 선생입니다. 1861년에 동학에 뛰어들어 1898년에 처형될 때까지 38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동학사상을 전파하고 제자들을 기르고 조직을 재건하고 경전을 집성하고 전국을 네트워크로 연결했습니다.
수운 최제우.
“도대체 선생님의 가르침인 동학과 서학이 어떤 관계이고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운즉일(運則一)이고, 도즉동(道則同)이며 이즉비(理則非)라” 운은 하나요, 도는 같으며, 이치는 다르다.
##동학과 생명평화, 한살림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동학, 그리고 생명평화
저는 군대에서 5월 광주항쟁을 겪었습니다. 그때 고급 정보를 취급하는 사단사령부 벙커에서 연락장교로 근무를 했는데, 매일 새벽6시에 사단장님이 출근하면 그 전날부터 새벽까지 일어난 일을 브리핑하는 게 제 주된 일과의 하나였습니다…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어났는가를 날짜별 시간대별로 브리핑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왜 나는 그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던가?”라는 고민을 거듭하다가…민주화운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습니다.
대학원에 들어가서는 오늘의 한국사회의 문제의 근원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좌절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이 들어 1983년부터 본격적으로 동학 공부를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됐습니다.
해월 선생을 좋아하는 도사님? 장일순 선생님!
“예 맹수야! 넌 다른 놈들은 다 전봉준에 미쳐서 거기에 푹 빠져 있는데, 무슨 생각으로 해월 선생을 연구하게 되었냐?”
동학을 ‘하는’ 분들의 가장 큰 특징은 “제 발과 제 힘, 제 생각을 가지고 제대로 된 삶과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제 인생에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 준 사건이 바로 『한살림선언』을 처음 접했던 순간입니다. 저의 인식의 대전환은 무위당 선생님과의 만남에서도 이루어지지만, 결정적인 대전환은 바로 『한살림선언』을 손에 넣고 읽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선언을 읽자마자 바로 떠오른 생각은 ‘동학이 바로 이거야!’였습니다. 동학이 새롭게 부활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 『한살림선언』이라는 뜻입니다.
‘혁명’의 꿈? 개인의 구원과 사회의 구원을 제 삶으로 통합하는 것이 꿈이었거든요.
영성과 혁명이 통일되었던 분이 바로 해월 선생님이시고, 그런 온전한 인격을 갖추신 해월 선생님을 무위당 선생님께서 그토록 존경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해월과 무위당이 서로 다른 두 분이 아니라 늘 한 분이셨어요.
#생명사상으로 보는 한살림
“생명에 대한 종래의 부분적·분리적·이원론적 이해를 넘어선 총체적 이해.” 바로 그 지점이 우리 한살림의 출발점입니다.
권정생 선생의 연애? 시골교회 문간방을 거리낌 없이 드나드는 생쥐들과, 개구리들과, 강아지와, 그 외 온갖 풀벌레들과 연애를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권정생,「유랑 걸식 끝에 교회 문간방으로」,『우리들의 하느님』
제 생각으로는 생명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하게 되면, 우선 ‘내가 잘났다, 만물 가운데 사람이 제일이다,…’라는 식의 교만한 생각, 잘난 체하는 생각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초혜 시인의 시「어머니」
한몸이었다
서로 갈려
다른 몸 되었는데주고 아프게
받고 모자라게
나뉘일 줄
어이 알았으리쓴 것만 알아
쓴 줄 모르는 어머니
단 것만 익혀
단 줄 모르는 자식처음대로
한몸으로 돌아가
서로 바꾸어
태어나면 어떠하리
“아! 이 시야말로 생명이 변화해 가는 원리’를 읊고 있는 시이구나”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생명의 원리, 생명의 질서? 생명은 생명 속에서 태어나, 생명과 더불어 살아가고, 생명과 더불어 자기 변화를 이룩해 갑니다!
#120년 전 보은취회, 120년 후 보은취회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에 새 하늘 새 땅을 열기 위해 조선 각지에서 수만명의 민초들이 이곳 보은 장내리에 모였습니다. ‘보은취회’가 열렸던 것입니다.
13자 주문?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하늘님을 모신 나는 스스로 조화를 정하여 평생 잊지 아니하고 하늘의 도에 맞도록 행하겠습니다 http://idnine.tistory.com/365 )
우리 5천 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민회’라는 말이 이곳 보은 장내리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수운 선생. 이것이라면 세상 사람들을 살릴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지고 1861년 음력6월부터 동학을 본격적으로 펴지 시작.
120년 전에는 ‘사람이 하늘이니’ 맞았습니다. 민초들이 살 길이 없었던 시대였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사람만의 위기가 아닙니다. 뭇 생명의 위기고, 전 지구의 위기입니다.
“정말 제대로 된 운동을 하려면 추운 티기 없어야 한다. 나쁜 놈이나 좋은 놈이나 잘난 놈이나 못난 놈이나, 사람을 대할 때 추운 티기 없어여 된다. 상대방과 내가 한몸이라는 실감, 체험, 깨달음이 안 되면 안 된다.”
동학의 동(東)자는 서에 대한 ‘동’이 아니었더라고요. 중국, 일본, 우리나라 학자들이 모여서 ‘ 동‘의 의미를 추구해 보니, 우리나라가 처음 생길 때 우리 조상들이 원래 중앙아시아에서 왔다고 하죠? ’동’은 바로 광명이요, 생명이요, 빛이었더라고요.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_’한일 시민이 함께 가는 동학농민군 전적지를 찾아가는 여행’의 성과를 중심으로
일본,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두개골이 방치된 상태로 1백년 만에 발견된 사건
한국의 근현대사는 사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해 온 고통스러운 역사 그 자체였습니다
“운동가에게는 로망(희망)이 없어서는 안 된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 말씀. “사회 변혁을 꿈꾸는 운동가는 로망(희망)이 없으면 안 되는 법이다. 자신이 꿈꾼 가운데 99%가 모두 실패했더라도, 남은 1% 속에서 희미한 가능성이 남아 있다면 바로 거기에서 로망(희망)을 느끼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운동가다.”
지금은 ‘근대’ 문명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시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인재를 넘어선 문명재,문명의 재해)
동학사상에서 강조되는 ‘후천개벽’의 새 문명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문명을 말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을 바로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문명”이 아니겠는가 하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같은 동학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동학농민군의 ‘12개조 기율’
“참된 문명이란 산을 황폐하게 하지 않으며, 강을 더럽히지 않으며, 마을을 파괴하지 않으며,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이다.”-다나카 쇼조
#민중 전선과 민족 전선을 넘어 생명 전선으로
120주년, 선결되어야 할 과제? 그것은 바로 동학을 바라보던 시선을 전면적으로 바꾸는 것이다(인식의 전환)
왜곡의 세월 120년을 넘어.
역사 발전의 주된 동력으로서 외적 요인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외재적 요인 중시 태도에서 벗어나 내재적 요인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로 코페르니쿠스적 방향 전환이 필요한 시기가 지금이 아닐까 한다.
##생명사상으로서의 동학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의 세계사적 의미
세계에 부는 동학의 바람
『도올심득 동경대전』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과 사상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세계적 보편성을 함께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위대한 혁명이자 세계사적으로 최고이자 최대 규모의 민중혁명으로서 자랑스러운 ‘세계 유산’이 아닐 수 없다.
「무장포고문」에 나타난 동학농민혁명의 대의
‘4대명의’ 및 ‘12개조 기율’에 보이는 동학농민군의 도덕성
제1차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이 파죽지세로 승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백성의 군대’로서 농민군이 발휘했던 높은 도덕성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동학농민군의 높은 도덕성의 사상적 배경에 바로 동학사상이 있었고, 그 동학사상의 핵심이 바로 시천주였으며 보국안민 정신이었다.
한국에서 자생한 사상 가운데 가장 세계적이면서 보편적이고,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사상을 꼽는다면 두 가지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 하나는 수운 최제운 선생이 창도한 동학이요, 다른 하나가 바로 혜강 최한기 선생이 확립한 기학이라는 것이다. 또한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 영성 사상가 루돌프 슈타이너의 제자이자 일본 신지학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다카하시 이와오 선생 역시 21세기 인류를 구원할 사상으로 동학을 꼽는다.
#동학 창도와 개벽사상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도’의 원리가 바로 ‘무위이화(無爲而化)’라고 수운은 말한다.
요컨대 수운이 제시한 ‘다시 개벽’과 ‘무위이화’는 자연의 질서, 즉 천도로부터 일탈함으로써 빚어진 모순으로 가득한 낡은 시대와 낡은 문명을 극복하고, 다시 천도를 회복하고 천도에 일치함으로써 새 시대 새 문명을 열고자 하는 조선 민중의 비전으로 제시된 획기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해월은 40여 년에 걸친 긴 세월 동안 도망자의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체포되기 전날까지도 짚신을 삼으며 노동하기를 즐겼다. 제자들이 옆에 다가가 ‘그만 쉬시라’ 하면 ‘하늘님이 쉬는 것을 보았느냐?’하면서 나무를 심고, 짚신을 삼고, 새끼 꼬는 일을 계속하였다.
#범부 김정설의 동학 이해
#공공(公共)하는 철학에서 본 동학의 공공성
오늘날 지구적 위기 상황의 근저에는 ‘사(私)’와 ‘공(公)’의 분열, 즉 개인의 생활세계와 국가라는 제도세계의 분열과 후자(제도세계)에 의한 전자(생활세계)의 지배·억압·약탈 구조가 존재하고 있다…그렇기 때문에 생활세계가 제도세계로부터 일단 자립하고 난 후 양쪽을 함께 결합하고 연결하며 서로을 살리는 다양성·다중·다층의 ‘매개’가 필요한데, 이러한 공매의 세계를 일러 공공세계라고 하며 공공하는 철학은 바로 이 공공세계 구축을 지향하는 철학이다.
공공하는 철학에서 ‘공공한다’는 것은 대화하고, 공동하며, 개신하는 것을 말한다.
활사개공(活私開公). 멸사봉공으로 강조되던 수직관계에서 수평관계로 전환
‘활사’는 타자를 살리는 것을 의미, ‘타자의 사’를 죽이는 것은 결국 ‘자기의 사’를 죽이는 것으로 이어지고, ‘타자의 사’를 살리는 것은 그대로 ‘자신의 사’를 살리는 데로 연동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과 ‘사’ 사이의 대화·공동·개신을 통해 궁극적으로 ‘공의 구조개혁’ 즉 ‘개공’을 하자는 것이 바로 공공하는 철학이 추구하는 활사개공의 올바른 의미이다.
#문명재(文明災)와 새로운 상상력_일본에서 바라본 생명의 위기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와 ‘문명’의 문제에 대한 검토
천재가 아닌 인재이자 문명재. 인재의 차원을 초월한 문명재
일상화되고 있는 문명재의 비극
『공생공빈(共生共貧)』
‘문명재’ 극복의 길은 아주 간단명료하다.
그것은 우리 모두 우주 대자연의 자연스러운 운행을 끊임없이 거스르는 인위적 ‘문명’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우주 대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는 삶으로 전환하는 데 있다. 그 간단명료한 길을 일본의 쓰치다 선생과 한국의 김종철 선생은 ‘공생공빈’으로 제시하였다. 두 분의 혜안에 깊이 공감하면서 나도 한마디 하고자 한다.
“우리 모두 공생공빈의 길로 함께 가자. 가다 못가면 잠시 쉬었다 가더라도.”
#120주년은 맞는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현주소
동학농민혁명을 1894년 1월의 고부농민봉기에서 시작되어 1895년 3월 전봉준의 처형으로 종결된 단조로운 사건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왜 패배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설명입니다…그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정부 대 정부의 싸움에서는 양자 사이에 타협이 있지만, 민중 대 정부 간의 싸움일 경우 민중은 승리할 때까지 타협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생명운동으로서의 동학농민혁명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왜 혁명인가
대부분 역사교과서 ‘동학농민운동’…일반 시민들에게 ‘동학농민혁명’이란 용어는 아직도 낯설기만 하다.
동학의 혁명사상. ‘다시 개벽’-문명혁명/ ‘동학’-사상 또는 종교혁명/‘보국안민’-정치혁명/‘시천주’-사회혁명(만민평등 사상)/‘유무상자’-경제혁명(경제공동체 건설)
#녹두장군 전봉중과 다나카 쇼조의 공공적 삶_한국과 일본의 근대를 읽는 사례로서
#용암 김낙철 대접주와 동학농민혁명
#매천 황현의 동학농민군에 대한 인식
#전라도 유교지식인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강재가 남긴 「일사」는 반농민군 측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긴 하지만 그 구체성과 실증성 덕분에 1890년대 초반에서 1900년대 초반에 걸친 전라도 서남부 지역(강진 장흥 일대) 향촌사회 동향을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결정적 사료의 하나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와 동학문서
일본 정부와 일본 군부의 직접적인 지시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동학농민혁명 다시 일본군에 희생당한 농민군의 숫자는 최소 3~5만에 이르고 있으며, 이 같은 숫자는 청일전쟁 당시 청국 측 희생자 2~3만, 일본 측 희생자 수천 명의 몇 배에 달하는 것이다. 요컨대 일본 측에서 중시하는 ‘청일전쟁’ 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조선 민중이었다. 그런데, 청일전쟁 과정에서 일본군 측에 희생당한 조선 민중의 숫자가 최소 3~5만에 이른다는 사실은 현재의 일본사회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오히려 오늘의 일본사회 안에는 청일전쟁이야말로 동쪽 변방의 왜소한 나라 일본을 세계의 유수한 강대국으로 진입하게 만든 ‘문명의 전쟁’이었다는 왜곡된 선전이 하나의 상식으로 자리하고 있다.
#일본의 동학농민혁명 연구 붐과 그 의의
내유천지(內有天地) 외무소구(外無所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