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마을 헤이온와이. 리처드 부스. p403
“헌책의 새로운 정의를 아십니까? 대형 마트에서는 팔지 않는 물건, 그렇기 때문에 작은 마을의 희망이 되는 물건, 그게 바로 헌책입니다!”
#”바보들이나 서두르는 거라고”
“여긴 쓰레기 청소부도 프로이트처럼 이야기하는 동네로군!”
“쓰레기는 없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설은 없다는 뜻이요.”
나는 헤이스팅스와 같은 사건들 때문에 기고만장해졌다. 돈을 무한대로 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 가지 걸림돌이 있다면 쓸만한 직원을 구하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대학 교육을 받은 치들은 대도시로 건너가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대학 교육을 못받은 치들은 책 수집가의 별난 성격을 이해 못한다는 게 문제였다. 시골 생활에 잘 적응하면서 헌책 장사에 소질이 있는 직원이 필요했다.
스테헤르트 하프너의 운명을 보았더니 앞으로는 베스트셀러의 유혹을 이기고 매장의 수준에 더 중점을 둘 서점이 없겠구나 싶었다. 내 눈앞에는 단테, 홀버그, 실러의 전집이 놓여 있는데 회계사들은 『갈매기의 꿈』을 위해 이 책들을 해치울 궁리만 하고 있었다. 나는 헐값으로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나는 운반작업을 만만하게 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여섯 사람이 뉴욕에 몇 주 동안 머무는 체재비와 운송비, 여기에다 헤이에서 본 손실까지 겹쳤던 것이다. 켄터티에 사는 여자 친구가 빌려준 거금이 아니었더라면 말 그대로 땡전 한 푼 없는 신세가 될 뻔했다.
#헤이온와이의 왕이 되다
『헤이의 독립지침서』는 실질적인 독립 선포인 셈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유머는 오래가지 못했다.
“진지한 발상이십니까?”
“물론 아니죠. 하지만 정치인들이 벌이는 수작보다는 진지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내가 보기에 일본은 최첨단기술로 세계를 구한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전통산업을 제대로 보호하는 나라 같다. 적어도 미국 쌀 수입만큼은 막았으니 말이다. 우리 장인어른도 지적했다시피 “영국의 어려움은 곡물법을 폐지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교육, 기독교, 미국 정부, 이 세 가지가 미국 인디언 최대의 적이라오.” 나는 러셀의 말을 듣고 두 권의 소책자를 집필했다.
내가 보기에 대영제국의 전성기는 프랑스를 개척하고 물리치던 18세기였다. 대학교가 지나치게 많은 비중을 두기 시작한 19세기부터 비극은 시작되었다.
내 서점을 뒤져보면 몇 년 동안 먼지만 뒤집어쓴 독특한 논문들이 제법 있었다. 그 중 한 개가 『대형 마트를 위한 선불자극전략의 개발』이었다. 이걸 보면 홍보에 수백만 달러를 쏟아 붓는 대형 마트가 있는 상황에서 구멍가게들이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대학가에서는 패스트푸드의 소비를 장려하고 인간이 아닌 기술 활용의 장점을 부각시켰다. 학생식당을 가보면 자동판매기뿐이었다…플라스틱 봉지에 담을 수 있는 음식이라면 무엇이든 자동판매기로 해결됐다. 대학은 후원금을 내는 기업과 식품산업의 충실한 몸종이었다.
사실은 대형 마트 때문에 헤이의 상점들이 사라진 것이고, 그나마 활발하게 돌아가는 곳이 서점뿐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대형 마트는 편리한 서비스와 값싼 제품의 상징일 뿐 그 때문에 많은 상인들이 일터를 잃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할 테니까. 대형 마트는 ‘농장에서 갓 배달된 신선한 제품’을 선전하지만 사실은 농장을 파괴하고 있다고 보면 맞다.
미국에서의 사업은 실패했지만 그 덕분에 나는 발상의 전환을 경험할 수 있었다. 시 외곽에 자리 잡은 쇼핑몰의 등장으로 사회구조가 붕괴되는 모습은 전쟁이었다.
대형 마트에 의해 무너지는 소매상의 숫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숫자보다 훨씬 많았고 이로 인해 서구사회가 흔들리고 있다.
3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예측한 존 해컷 장군은 미국 구(舊)시가지의 생활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무장경관이 순찰을 도는 대형마트 한 개가 있는 거리보다는 천 년의 전통을 이어온 상정들로 북적대는 거리가 사회 안정에 이바지하는 부분이 더 크지 않을까?
미국 사람들은 대형마트를 탓하지 않았다. 내가 미국 구시가지의 몰락원인으로 대형마트를 지적했더니 한 손님은 “마약 때문”이라고 했다. 식푼산업이 붕괴되면서 자연스럽게 마약 중심으로 경제활동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책 마을 열풍이 불다
동독이 못 사는 이유를 자본주의의 부재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인 대세이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무너져가는 시골에 살면서 작은 상점들이 문을 닫고 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농경문화가 파괴되는 등 자본주의의 폐단을 똑똑히 목격했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후기 자본주의 철학 비슷한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마흔 살에 백만장자와 수상, 두 가지 목표를 이루려는 젊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체제이다. 책 마을은 젊고 굶주린 자본주의자가 아니라 고향을 걱정하고 이웃사랑이 남아 있는 시골에서 자그마한 일을 하며 보람을 느끼는 중년을 위한 공간이다. 나는 이들을 ‘황혼의 산업일꾼’이라 부른다.
#헌책 제국의 황제로 추대되다
나는 공항에서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주로 책을 읽는데 유명 기업가를 찬양하는 책을 딱 질색이다. 전 세계 공항에 있는 서점에는 그런 책들이 차고 넘친다. 이보다 더 저급한 문학은 없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나에게 지옥의 맛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은 도널드 트럼프의 『협상의 기술』 20권만 준비하면 된다.
헤이에서 40년 동안 살다 보니 시간이라는 것이 연극의 막간처럼 느껴지곤 한다. 언론에 자주 등장하면서 이메일이 공개된 이후로 옛 친구들의 연락을 자주 받는다.
작은 사업을 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나하고 비슷하게 천하에 쓸모없는 컴퓨터와 아무것도 모르는 비서들 때문에 고생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컴퓨터로 사시이거나 말을 더듬는 고객 명단을 만들어서 한 명도 빠짐없이 파티에 초대하면 되지.”
레그 클라크가 말했다. 컴퓨터 용도로는 이게 최고인 것 같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원래 개정판이 금세 나오기 때문에 헌책 시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품목이다. 하지만 꾸준히 늘어나는 도서판매량을 보면 인터넷과 컴퓨터는 정보체계 면에서 책의 경쟁상대가 못 된다. 정보의 단순한 습득이 아닌 이해가 인생의 주요 과제이기 때문이다.
도서관 한가운데 서 있으면 팔이 닿는 거리에 있는 지식마저 모두 내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백만을 곱해서 컴퓨터로 옮기다보니 이보다 더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을까?
인류는 지금 새로운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500년 종이정보의 역사가 50년 전자기술의 역사에 흔들리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 전통 문화의 정신세계의 무대역할을 했던 책을 지키는 것이 헌책업자들의 몫이다.
1998년 독립선포 21주년 행사는 일대 사건이었다.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를 ‘황제’의 자리에 추대한 것이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지만 책 마을을 전 세계에 알린 주역이니 만큼 황제가 될 만한 사람이 있다면 나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21년 전부터 죽 생각해왔던 바이지만 시골 마을에 필요한 것은 관료조직이 아니라 인간이다.
관료조직은 사악한 사기꾼들이 쓰는 가면에 불과하다. 전장에서 날아오는 포탄을 막기 위한 연막전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