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교육정책은 역사를 불행하게 하는가. 전성은·이재강. p192
“정책은 쏟아진다. 그런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좋은 정책은 드물다. 정책을 뒷받침한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 교육의 문제를 성장 중심의 교육철학에서 찾고, ‘평화를 위한 교육’이라는 뚜렷한 대안을 제시한다. 그래서 그가 제안한 교육부의 독립, 교과서의 자유화 등의 교육제도 개혁안은 곱씹어 볼 만하다. ‘절망의 교육질서’를 넘어서 ‘희망의 교육질서’를 상상하고 실현하는 데 통찰을 제시하는 이 책을 교육에 관련된 모든 분들에게 권하지 않을 수 없다.”-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불행한 역사를 바로 세울 학교교육을 꿈꾸다
젊은 시절 나는 성장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온 국민이 근대화에 한참 몰두해 있던 당시, 나의 아버지(전영창 교장선생님)도 나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조국의 근대화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믿음과 같았다. 그리고 근대화는 곧 성장이었다. 경제가 성장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리고 그것을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냄으로써 조국의 근대화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굳건히 믿었다.
로마의 황제들은 아우구스티누스 황제 때부터 세계를 전쟁으로부터 구원해주었다고 해서 ‘구세주’라는 칭호를 사용해왔다…무자비한 세계정복이 ‘평화, 정의, 구세주’라는 이데올로기로 둔갑한 것이다.
『로마서』의 주제는 평화이며, 그 평화는 성장추구와 날카로운 대립관계에 있다. 당시 로마가 추구했던 무궁한 부국강병 곧 로마의 성장은 세계의 평화를 짓밟은 무서운 죄악이라는 사실을 ‘인류 구원’이라는 유대교적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지배국가·지배계급은 자본주의 경제제도를 통해 부국강병책을 ‘경제성장’이라고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다. 이 ‘경제성장’은 어느 국가에서난 어느 사회에서나 당연한 ‘정의’가 되었다. 이때부터 ‘성장=정의’라는 등식이 생겼다. 노예무역으로 공짜 원료와 공짜 노동력을 확보하여 엄청남 성장을 이룩한 유럽 국가들은 다른 대륙보다 먼저 산업혁명에 성공했다. 유럽 국가들은 앞을 다투어 더 많은 공짜 원료와 공짜 노동력과 넓은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전 지구를 식민화하는 데 성공했다. 유럽 국가들은 모두 기독교 국가들이었다.성장의 신에 미쳐버린 유럽의 기독교는 식민지 쟁탈전을 방조한 정도가 아니라 축복해주었다.
경제가 발전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으로 치부되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선 그런 사람은 ‘빨갱이’라고 부른다. ‘성장’이라는 구호는 이제 구호가 아니라 현대인의 ‘신’이다.
내가 나의 성서 공부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렇다. ‘경제 성장추구’가 악의 축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내가 경제학자가 아니라서 그것을 경제학적 이론을 통해 설명할 학문적 능력이 없어서다.
‘닉슨 쇼크’? 달러의 금태환 중지. 고정환율제가 무너지고 변동환율제가 시작. 그로 인해 끊임없이 각국의 통화 간 차익을 노린 금융투기가 성행하게 되었다. 이제 인간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내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에 쓰이는 돈보다 86배다 넘는 돈이 ‘돈 놓고 돈 먹기’의 투기판에 쏠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도달한 최종단계다. 전 세계가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판이 되었다. 이래도 자본주의 경제가 계속되어야 한단 말인가? (현재의 전 지구적 ‘카지노 경제’는 죄악이고 끝나야 한다!)
비주류 양심적인 학자들은 자본주의의 성장은 이제 한계,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어떤 분야나 양식적인 사람들은 비주류일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성장이 최고의 가치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더 높은 가치다. 인류의 평화가 더 놓은 가치임에 틀림없다…희생의 대상이 다수인건 소수인건 다른 사람의 희생을 통해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죄악이다.
이제 종교마저 성장의 논리에 휘말려 정신을 잃었다. 신도 수의 증가를 종교의 성장이라고 믿는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진리에서 거리가 먼 것이 보편적이었고, 역사 속에서 진리는 항상 소수였는데도 수적 성장이 곧 예수를 영광스럽게 하는 길이고 부처를 받드는 길이라 믿고 교세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예수와 부처의 영광을 숫자, 즉 양으로 평가하는 것은 종교적으로 표현하면 ‘신성모독’죄다. 예수도 부처도 인류의 평화와 안녕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고난의 길을 가신 분들이다. 그분들은 계급의 비인간성과 싸운신 분들이다. 그분들은 역사를 계급과 민족의 담을 넘어 ‘모든 인간의 평등과 자유와 안녕’을 위해 온 몸을 던지셨던 분들이다.
나의 세 권의 책은 학교교육인 경제성장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 올바른 일인가 묻는 작업이다. 성장추구라는 절대적 가치를 부정하고 그 대안으로 학교교육이 가야 할 길을 모색해 온 이야기다. 또한 멋모르고 조국의 근대화와 발전에 이바지한답시고 아이들을 휘몰아쳤던 나의 젊은 시절 20여 년의 교육적 범죄행위에 대한 참회록이기도 하다.
교육은 인간 활동의 외딴 섬이 아니다.
다른 분야 특히 인간 활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정치와 경제의 문제를 학교교육의 문제에 끌어들여 논의해야 할 때가 되었다. 어쩌면 인간의 삶에 지나치게 영향력과 지배력을 행사해 온 정치, 경제가 정의를 탐구하는 대신에 교육이 서야 할 때가 된 것 같다…정치적 정의나 경제적 정의와 무관한 교육이 있을 수 있을까? 정치·경제적 정의를 학교교육에 관련시키는 문제를 고민할 때가 되었다.
첫째, 정치와 경제의 권력이 추구하는 성장의 수레바퀴에 치인 아동들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
둘째, 국가의 최고 목표가 부국강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학교교육이 어떻게 국가권력에서 멀리 떨어져나가 독립할 수 있을까?
이제 그 길을 찾아내는 것이 교육학이 인류에게 봉사하는 길 아닐까?
나의 결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학교교육의 최종 결정권은 개별 학교·교사가 가져야 한다. 행정은 학교가 결정권을 가지고 교육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구여야 한다. 그리고 사회는 그 학교와 행정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평가권을 가져야 한다.(덴마크 자유교육)
나의 교육 3부작 마지막 책. 이 책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학교교육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기 위해 함께 고민했던 교육혁신위원회 동료들의 책이다. 알게 모르게 들려오는 남들의 가당찮다는 비웃음을 함께 견뎌냈던 교육혁신위원회 가족들의 책이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던가? 특히 인재양성론을 교육학의 핵심 가치라고 믿는 교육계 동료들의 비웃음은 참으로 가슴 아팠다.
#추천사를 대신하여_김민남_경북대 명예교수
현안의 근본에 맞게 해결하는 혁신정책은 가르치는 자의 평가권을 온전하게 부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덴마크의 자유교육)
교사는 당연히 국가와 대학으로부터 학생평가권을 돌려받는다. 학생평가권은 기록 가능한 교육활돌의 조건이다. 가르치는 자의 평가권은 아이를 판정하도록 유인하는 선발 중심 교육체제의 해체를 수반한다.
따지고 보면 상식에 속하는 한국교육의 혁신론인데, 우리의 혁신론은 한국사회의 기간 질서를 무너트리는 어설픈 이상론이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불행한 역사를 만든 교육정책
#우리 교육사에 정책이란 존재하였는가
“지금까지 수많은 교육정책들이 시행되었는데 왜 학교교육은 조금도 변화가 없는가?”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해방 후 지금까지 한 번도 교육정책이 실행된 적이 없다.”
“정책이란 평화라는 일정한 방향을 향해 한 단계씩 제도를 업그레이드하는 일이다. 그런데 해방 후 한 번도 ‘평화’라는 학교교육의 목적을 위해 한 단계씩 앞으로 나아가는 제도의 업그레이드가 없었다. 그러니 교육정책은 없었다.”
우리의 학교교육은 해방 후에는 그 목적을 ‘반공’에 두었다가 다시 그 무게중심을 ‘경제 산업 발전의 수단’으로 바꾸어 아동을 점점 더 가열되는 경쟁의 도가니로 일관되게 몰아넣었다. 어찌 아이들뿐이랴. 부모들은 자식의 성공과 출세가 학교 성적에 달렸으니 온갖 희생을 감수하면서 아이들의 성적 경쟁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그 결과..이렇게 온 국민의 경쟁 강화로 얻는 국민의 높은 교육열로 경제성장을 달성했지만, 경쟁에 이겨 성공하는 것이 인생의 최고 가치라는 비인간적 가치관에 온 국민이 매몰되고 말았다. 이는 우리 교육이 국민에게 저지른 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정책을 ‘평화를 향한 제도를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하는 일’이라고 정의할 때, 교육정책은 우리 교육사에서 한 번도 실행된 적이 없다!
#교육정책의 목적은 무엇인가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정책학자인 라스엘Harold D. Lasswell은 정책을 이렇게 정의한다.
“정책이란 사회에서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며, 우리 사회가 당면한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 존엄성의 상실’이다.”
대한민국이 직면한 문제가 무엇인가를 명확히 보려면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의 위기라고 할 때 그 위기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이라서 위기인가, 아니면 단순히 당의 이익에 관한 위기인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인간 존엄성 훼손이 지금 우리가 직면한 위기다.
나는 자본이 전 지구를 식민지화한 오늘날 인류보편의 문제는 ‘평화’의 문제라고 본다. 라스웰이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인간의 존엄성’으로 본 것과 같은 맥락이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다수의 희생 위에 소수에게 권력과 부를 집중시키는 세상을 평화로운 세상이 아니다.
평화는 모든 사람들이-모든 계급, 모든 지역, 모든 민족- 평등하게 안녕과 번영을 누리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모든 사람들의 안녕과 번영을 공동선이라고 한다.
‘현대’는 종잡을 수 없는 시대.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시대는 공동선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 인류는 공동선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감정의 골이 깊어진 국민의 분열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킨다. 모든 공직의 선거가 합리적인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정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 공직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은 당선을 위해 그 감정을 이용한다. 결국 합리적인 정책은 선거에 등장하지 않고 감정을 자극하는 프로파간다가 선거를 좌우한다. 그래서 공약公約은 공약 空約이 된다…민주주의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민주주의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빈부의 결차가 벌어지게 마련이고, 따라서 점점 더 많은 권력과 부와 특권이 소수에게 집중된다.
공동선이 없는 곳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정책의 목표는 공동선의 추구를 통한 평화여야 한다.
#인간 사회에서 제도란 무엇인가
오늘날 모든 제도는 법으로 규정되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법으로 제정되어 구속되는 것이 좋다 또는 나쁘다 식의 문제를 떠나 그렇게 된 것이다.
전문화·관료화된 국가의 기능은 국민 즉 인간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제도가 사람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것도 아주 세분화되어 인간(국민)의 삶 구석구석까지 지배하고 있다…사람이 죽으면 죽었다는 사실을 국가가 인정해주어야 한다. 국가가 사망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장례도 치를 수 없다.
인디언보호구역? “너희는 여기에서 살아라. 이 안에서 살고 밖으로는 나오지 마라. 밖으로 나오면 죽는다.” 그것이 자유민주주의를 세계에 전파할 사명을 가졌다는 미국이 만든 법이다…이런 부당한 말살 정책도 법으로 제정된 제도이니 정의라고 말해야 하는가?
제도를 뒷받침해주는 법을 만드는 결정권은 힘이 없는 집단보다 힘이 있는 집단에게 더 많다…현대에 와서 제도는 세세한 인간 즉 국민의 삶까지 통제, 규제한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제도는 발생 경위가 어떠했건 그 제도가 지닌 선한 성격보다는 악마성이 더 커졌다.
모든 제도를 인간화시켜야 한다. 제도를 인간화시키지 못하면 인간은 제도의 노예가 된다….제도의 악마성을 최소화하고 제도의 신성을 최대화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현대 정책의 목적이다. 결국 정책의 목적은 제도의 인간화다.
#제도와 이데올로기의 관계
종교와 교육은 권력과 자본의 신과 맞서 싸워야 할 의무가 있다
지배 세력이 만들어준 제도를 하늘로 믿고 거기에 예배하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정의요, 질서라는 이데올로기로 정신 무장되어. 자유를 집권세력과 지배세력에 팔아버리고, 그들이 만들어준 소비문화에 빠져 정신을 잃고, 유행에 뒤처지지만 않으면 마냥 행복해하며 살아가는 것이 현대인의 슬픈 모습이다.
현대인에게 불행은 유행에 뒤처지는 것일 뿐이다.
제도가 신이 되어버린 시대에 정책이란?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틀 즉, 제도를 평화를 향해 업그레이드해나가는 일이다. 평화를 향한 한 걸음이다.
#제도는 불변한 것인가?
역사는, 억압에서 자유로/ 불평등에서 평등으로/ 착취에서 공존으로 나아간다.
부인이 넷인 육십대로 보이던 마흔 살의 이집트 카이로 노점상과의 우연한 대화. 뜻밖의 이야기?
“요즘 부자 놈들은 외국에 나가서 공부를 해. 그쪽 물이 들어서는 마누라를 하나밖에 안 데리고 살아. 돈 많은 놈들은 열 명은 부양해야 하는데. 요즘 도덕이 땅에 떨어졌나니까.”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으니 당연히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부양해야 한다?!
일부일처제가 절대적이 아닐 수도 있다? 제도는 절대적으로 변하면 안 되는 것인가?
동성동본 결혼? “이런 천인공노할 놈들!” “전주 이씨는 하도 수가 많아 백만 명이 넘는데 몇 촌까지 혼인이 안 되는지 정해주어야한다”? 불과 몇십 년 전의 일이다.
힘을 가진 집단이 제도와 법을 만들어 힘을 가지지 못한 집단을 억누르고 지배하다 보면, 그 제도와 법이 바로 자신들이 만든 제도요, 법이라는 사실을 잊고, 스스로도 그 제도와 법이 하늘이 내린 하늘의 제도요, 법이라고 믿는 병에 걸리고 만다. 그것이 제도와 법이 가진 무서운 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는 끊임없이 변해 여기까지 왔다.
#제도와 인간의 조건
제도를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정책이다
2009년 3월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도 없이 달러의 환율을 300원이나 올렸다. 하룻밤 사이에 수출 대재벌들은 수백억에서 수천억을 벌고,원료를 수입하여 대재벌에 납품하는 중소기업들은 수십억에서 수백억의 손해를 보았다…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그 제도를 마치 사제도인 양 착각하고, 자신을 대통령이 되게 해주었다며 재벌들에게 보답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아무리 좋은 환율제도라도 악마성을 발휘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설마 그런 이유로 환율을 올렸으리라 믿고 싶지는 않을 뿐이다.
공동선이 위기에 처하면 그 결과 모든 제도가 위기에 처하게 된다. 제도는 끊임없이 점검되고 업그레이드되어야 한다. 정책은 개혁이고 개혁은 제도의 업그레이드다.
유신헌법에 의한 제도는 정당한가? 중앙청과 전국의 대학교 정문에 탱크를 들이대고 선포한 유신에 의해 만들어진 헌법도 정당한가? 그 유신헌법에 의한 선거도 선거니까 정의로운가? 유신헌법 제도에 의해 당선된 대통령이니 역시 국가의 원수인가?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기를 멈춘 것이다.
“…본인은 민족의 역사에서 참으로 중대하고 획기적인 이 전환의 시기에, 본인에게 대통령이라는 막중한 소임을 맡겨준 국민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와 경의를 드리는 바입니다…본인에게 압도적인 성원을 보내주신…”
1981년 2월 25일, 장충체유관에서 전두환이 대통령에 당선. 총선거인 5,271명, 4,755표(90.2퍼센트). 코미디를 방불케 하는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어도, 강압적 법에 의한 선거 제도일지라도 제도는 제도이니까 정당성을 갖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 대한민국 사람은 사람이기를 멈춘 것이다.
이 코미디를 보고도 ‘제도면 다 제도인가?’라는 질문이 가슴속에 떠오르지 않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들은 영리하다. 그리고 그들은 불리하면 숨을 죽이고 있다가도 기회만 오면 놓치지 않고 반격하여, 어렵게 이루어 놓은 변화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만든다. ‘어둠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지헤롭다’는 예수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은 잠시 사라질 뿐 절대 죽지 않는다.
“개혁은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의 자성을 통해 지난 것을 되새겨 바로잡고 하나의 원칙 아래 모두의 마음이 통하는 공감의 장을 만드는 일이다.”-도산스님, 한국불교태고종 25대 총무원장 취임법회 취임사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잃어버린 10년’을 마치 무슨 주문처럼 외우면서, 과거 정부를 전면 부정하면서 출범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시작한 일은 무조건 뒤집고 중단했다. 대한민국 역사에 그런 오만한 정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개혁은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라, 지난 것을 되새기는 자성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한 걸음 내딛기다. 세상에 절대적인 제도란 없다…끊임없이 자성을 통해 바꾸고 또 바꾸어 나가야 한다. 그래야 역사는 진화한다.
##불행한 역사를 바로세울 교육정책
#교육제도개혁을 꿈꾸다
시카고 개발지역의 허름한 창고 학교 기억? ‘아, 이렇게 캠퍼스라는 틀을 갖추지 않고도 학교가 교육을 할 수 있구나’. 교육제도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뜬 곳이다
농촌학교의 위기? 샛별 초등학교 교장시절 학생 600명, 교직원13명, 1년 예산이 5억. 그런데 학생 수 36명, 교직원 15명인 인접 학교의 예산이 무려 15억이었다!
교육 선진국들의 다른 점? 교육부 장관은 있는데 교육부가 없다/ 학교가 인가제가 아니다. 누구나 학교를 세워 원하는 학교교육을 할 수 있다(『덴마크의 자유교육』)
교육개혁은 반드시 ‘교육제도개혁’이어야 한다.
먼저 “학교교육의 목표를 ‘평화’로 바꾸었을 때 거기에 맞는 교육제도는 무엇인가”를 묻고, 다음으로 “그 교육제도는 어떤 순서를 거쳐 달성되어야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초·중등·대학교육의 목표는 무엇인가
초등교육의 목적은 아동들의 재능, 소질, 관심을 발견하는 데 두어야 한다.
중등교육의 목적은 선거에서 투표를 바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데 두어야 한다
대학교육은 아동들의 재능과 소질과 관심을 선발하여 최대화시켜주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정책1. 교육개혁은 교육부의 독립이 목표다
‘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학교교육이 실현되려면, 학교가 국가권력의 통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부국강병을 기치로 ‘성장과 발전’을 국가의 최대 목표로 하는 한, 학교가 국가권력의 중앙집권적 통제로부터 벗어나지 않고서는 학교에서 평화를 위한 교육이 일어날 수 없다.
교육개혁의 최종 목표는 교육부의 독립이다.
교육부는 교육개혁의 제1호 대상이다?
정치계와 경제계의 요구가 비교육적일 때, 즉 학교교육을 단순히 국가가 필요한 인재를 만들어내는 인재공장으로 전락시키라고 요구할 때 ‘No’라고 말해야 하는 곳이 바로 교육부다…그것이 국민을 위한 교육부요, 교육관료집단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의무를 다한 교육부장관은 없었으며, 교육관료집단도 없었다. 그 결과 오늘날 학교교육에 대한 국민의 질타와 분노가 교육부에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정책2. 장애인 교육을 최우선으로 확립한다
시혜가 아니라 섬김이어야 한다
한 국가의 특수교육을 보면 그 국가가 인간을 위한 교육을 하는 국가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정책3. 교과서의 자유화로 가야한다
학교교육은 이데올로기의 악영향에 맞서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중학교 3학년 도덕 교과서가 이런 내용으로 시작된 시대도 있었다? “자유는 혼란을 가져온다. 강력한 통제가 안보와 질서를 가져온다.”
교과서가 아이들 지성의 놀이터가 되려면 ‘이것이 정답이다’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그 정답을 국가가 정해주어서는 안 된다. 그런 국정교과서는 과거 공산국가들과 군사독재국가들에서 만들어져 사용되어왔다.
한때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일사불란이란 말이 유행했다..교육현장에서도, 학교경영은 물론 학교의 모든 교육활동의 운용원리가 ‘일사분란’이었다.
일사분란은 망국의 원리다. 구소련과 동구권을 보면 그 원인을 알 수 있다.
일사분란이 운용의 원리가 되면 절대로 안 되는 분야가 있다. 하나는 종교(신앙)의 세계요, 다른 하나는 학문의 세계다.
국정교과서는 학문의 일사분란화다. 학교는 다양한 생각과 방법과 방향을 만나는 곳이 되어야 한다…교과서가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확정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교육의 목표가 홍익인간이어서는 안 된다? 홍익인간이 나쁜 것은 아니다. 홍익인간의 세상을 열려면 중고등학교의 교육목표는 ‘정책판단 능력’을 기르는 것이어야 한다. 유럽 여러 나라의 중등교육욱 목표가 그러하다. 그 결과, 그들은 우리보다 앞선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이러한 능력을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과 교과서가 만들어져야 한다.
현대에는 인종문제보다 계급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
국사 대신 동북아사를 다루어야 한다. 국사 교육은 ‘우리나라 좋은 나라, 이웃나라 나쁜 나라’ 식의 편협한 애국심을 심는 교육이 되기 쉽다.
유럽 중심의 세계사 교육에서 탈피해야 한다. 유럽의 나라들에 대해서는 상식 이상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정작 동남아사는 잘 모른다. 이제 유럽 중심의 세계사를 벗어나 동남아사 중심의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우리가 그들의 편이 되고 그들이 우리 편이 되도록 만들 수 있다.
세계에는 다양한 음악과 미술이 있다…우리 음악을 우리 몸에 익히고 우리 미술에 대한 기본 소양을 갖추는 것이 우리가 세계 음악과 미술에 공헌하는 길이다.
정치적, 경제적 식민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문화적 식민이다. 지금처럼 ‘유럽 음악은 고상한 음악’이며 ‘우리 음악은 덜 훌륭한 음악’이라는 의식이 더 이상 지속되면 안 된다.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일. 좀 살 만해지자 시마다 시립교향악단을 설립, 한 해 수십억에서 수백억의 예산을 쓴다. 그런데 언제 우리나라의 시들이 우리 음악을 위해서 그런 돈을 썼는가…언제부터인가 유럽 음악가들의 100주년 200주년까지 챙겨주느라 바쁜 나라가 되었다.
#정책4. 직능지향 목적형 직업학교를 위하여
직능지향 직업학교는 규모가 작아야 한다. 조직이 커지면 관료화되기 마련이고, 관료화되면 일의 집중과 선택이 어렵다. ‘규모의 경제’ 경영 원리, 편익/비용의 경제성만 따져서는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학교는 수익사업이 아니다.
#정책5. 전인적 대학입시제도
“유사 엘리트들은 사회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변혁을 거부하고 현상을 유지하려는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 국제무대에서는 경쟁력이 전혀 없으면서 외국에서 얻은 학력과 경험을 빌미로 국내에서 사회·경제적 지위를 누리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다.
정치·경제·사회적인 성공의 문에 들어가야만 엘리트로 보는 시각이 바뀌지 않는 한, 단지 좋은 학교에 들어가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한 극심한 경쟁은 격화될 것이며, 유사엘리트의 오만은 지속될 것이다. 엘리트 교육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특목고, 자립형 사립고, 그리고 그 밖의 영재교육을 염려의 눈으로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김민남, 『한국교육론』
학교는 소위 엘리트라 칭하는 사람들을 길러내는 곳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 곧 보통사람을 길러내는 일을 하는 곳이다.
정상적인 사람, 보통사람은 책임의식을 가지고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여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자기의 삶을 자신이 직접 만들어가는 데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역사를 거슬러 살지 않을 뿐 아니라, 독재정권에 표를 찍지도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사회에 필요한 사람들이다.
대학의 학생선발 방식이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심지어 미취학 아동의 교육까지 지배하고 있다. 유치원 때부터 대학진학을 위한 조기교육의 열풍은,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고 싶은 부모들의 어깨를 누르고 있다. 이러한 대학입시의 절대적 규정성으로부터 학교교육이 상대적으로 자율화할 수 있으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교육이력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