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 강현정·전성은. p223
전성은. 1965년부터 거창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거창고 직업십계명을 정리.
‘교육론’ 3부작 『왜 학교는 불행한가』, 『왜 교육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가』, 『왜 교육정책은 역사를 불행하게 하는가 』
#여는 글_전성은
직업선택의 십계는 고故 전영창 교장(3대교장)의 가르침을 요약한 열 개의 문장이다.
전영창 교장은 1976년 5월 20일 갑작스레 하늘나라로 가셨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전영창 교장이 돌아가신 뒤, 당시 교감이었던 도재원과 나(전성은)는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그분의 가르침을 남겨놓기로 뜻을 모았다. 우리는 내용을 간추려서 거창고 교지에 번갈아 글을 실었는데, 후에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라는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그 책의 한 꼭지가 바로 직업선택의 십계다.
부모들은 종종 교육자인 나에게 어떻게 하면 자식을 잘 키울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답하곤 한다.
“부모님들 자신들이 잘 살아가야 합니다.”
삶은 어떻게 자식을 잘 키우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자신의 삶은 자기가 살아내야 하는 자신의 몫이다. 자식의 삶은 자식의 몫이다. 내가 내 삶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면서 자식의 삶에 대한 걱정을 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모르는 데서 나오는 오만이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삶을 걱정하는 일이란 얼마나 어리석은가? 내가 자식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있다면 신神 앞에서 신발을 벗고 살아가는 일밖에 없다.
윤동주의 삶처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길밖에 없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삶은 최소한 반역사적인 삶, 반도덕적인 삶, 반인간적인 삶은 살지 않을 것이다.
보통인 강현정이 들려주는 평범한 보통인들의 이야기가 변화를 불러온다면, 그 대상은 부모의 삶이다.
부모가 변하면 아이들은 달라질 수 있다.
#들어가며
전성은 선생(거창고 4,6대 교장)과의 인터뷰. 그때만 해도 거창고의 진가를 알지 못했고, 사교육 도움 없이 공부 잘하는 비결이나 캐낼 요량이었다. 그런데 선생은 한결같이 부모는 자식을 사랑할 의무밖에 없다느니,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느니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답변을 내놓으시는 거다.
동문서답이 따로 없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내 그릇이 너무 작아서 아무리 좋은 얘기를 들어도 가닿지를 못했던 것이다.
유명해진(?) 직업선택의 십계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구절 하나 마음 편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어쩌면 이렇게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말들만 모아놓았는지 원망스러울 정도로 가혹하다.
거창을 처음 찾아간 날부터 이 글을 마치기까지 꼬박 3년이 흘렀다. 우리 가정에도 기적처럼 변화의 조짐이 싹텄다….지금의 나는 아이들을 대견한 마음으로 또 한편으론 안타까움으로 바라본다. 아이의 부족한 점을 찾는 게 아니라 보듬고 싶은 마음에 더 잘해주려 하는 것. 짧지 않은 시간을 거치며 내가 변화한 것이고, 그변화에 따라 아이와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나 역시 삶의 좌표를 다시 잡아 보게 되었다. 아이들은 듣는 대로가 아니라 보는 만큼 자란다고 했다. 특히 전영창 선생은 자녀교육이란 보여주는 게 전부라고 강조한다. 이 작은 변화와 경험을 부모님들과 나누고 싶다.
##아이가 어떻게 자라길 바라세요?
어떤 사람들은 직업선택의 십계를 ‘좋은 직업 찾아가기 위한 열 가지 조건’으로 착각하고 호기심을 가질지 모르겠다. 직업선택의 십계는 소위 말하는 진로와 적성 찾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엄밀히 말해 삶의 원칙에 대한 이야기…직업선택의 십계는 그것에 맞게 살다간, 혹은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느낌으로 전해지는, 그리고 그 감동으로 실천해내는 가치관이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해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직한 어리석음, 그것이 곧 지혜와 현명함의 바탕이고 내용입니다. ‘편리함’ 그것도 경계해야 할 대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편리함은 흐르지 않는 강물이기 때문입니다. ‘불편함’은 흐르는 강물입니다. 흐르는 강물은 수많은 소리와 풍경을 그 속에 담고 있는 추억의 물이며 어딘가를 희망하는 잠들지 않는 물입니다.”-신영복,『나무야 나무야』
내가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점, 그것은 충분히 고민하지 않은 20대와 30대를 보냈다는 것이다. 내 마음이 불편해질까 봐 굳이 외면한 채 청년기를 보냈다는 모종의 부채의식. 나는 그런 부담을 갖고 있었다. 고민을 생략한 덕분에 몸은 편했는지 모르지만 외면한 순간부터 성장을 멈춘 어른이 되었다. 그걸 이제야 돌아보게 되었다.
일본 최초 국산 전투기 개발한 호리코시 지로는 일본의 존경받는 과학자. 자신이 만든 전투기가 전쟁에 사용되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다는 사실을 과연 몰랐을까. 동시대를 산 독일의 비행기 설계자 후고 융커스는 나치에 반대했다…나는 그를 존경받을 만한 과학자라고 인정할 수 없다.
존 폰 노이만은 컴퓨터 기술을 이용해 미국이 소련보다 하루라도 빨리 폭격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믿었다. 반면, 노버트 위너는 당시의 발전하는 기술이 사람을 더 힘들게 만든다고 판단했다. 누가 더 바람직한 인생일까?
#첫번째 거창 여행
문득 거창고 학생들이 부러워졌다. 나도 일찌감치 이런 곳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좀 더 단단한 내 생각을 진즉 가지고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고민을 더 빨리 했더라면 지금쯤 나는 훨씬 단단해져 있을 텐데…거창고를 다녔던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고 내 지나간 시간이 아쉽기도 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배우고 나갔을 가치다. 엄마로 살면서 혼란스러웠던 것은 결국 내 안에 가치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사실도 최근에야 깨달았다.
내가 부모로서 아이를 어떻게 양육하려 하는지, 이 아이와 함께 어떤 삶을 꾸려나가려 하는지,무엇을 추구하는지, 그러기 위해 나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같은 문제에서 아무런 기준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항상 흔들렸다. 누가 그럴듯한 말을 하면 그쪽으로 쏠리고 또 누가 다른 이야기를 하면 그쪽도 솔깃했다…마흔이 훌쩍 넘은 엄마는 교육의 기준 없이 온탕과 냉탕 사이를 오갔다.
내가 삶 속에서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 그걸 찾지 못하는 한, 소중한 인생을 계속 허비할 게 분명했다. 남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고 내 보폭으로 걸어가는 방법, 지금 그것이 절실했다. 그래서 여기에도 온 것이다.
사랑하면 달리 보인다. 안용선과 아내 박순달 이야기.
나보다 약한 자를 섬김이 사랑이다
인생의 궁극적인 성공은 한 사람에게라도 내가 진정으로 사랑을 다 바쳤느냐에 있다고 선생은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상대방을 소유하는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것처럼 부모로서 나는 자식을 잘 이끌어 성공의 길을 걷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내 욕심을 채우려는 전형적인 ‘소유’의 관점이다.
“나보고 사랑을 정의하라고 하면 이렇게 말할 거야. 사랑은 남의 아픔을 볼 줄 아는 것, 남의 아픔에 눈이 뜨이는 거라고.”
남의 아픔을 볼 줄 아는 마음이 사랑이다. 그래서 그 아픔을 보고 섬기는 것이 사랑이다…남의 아픔을 볼 줄 모르면 사랑이 없는 것이다. 남의 아픔이란 곧 시대의 아픔, 역사의 아픔, 이웃의 아픔이다.
“남의 아픔에 무관심한 사람은 교육받은 사람이 아니다”
모든 행위는 발생하는 ‘장소’와 ‘때’를 가지고 있다. 장소와 때가 있다는 것은 역사성을 가진다는 의미다. 역사성을 가지고 날카롭게,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질문해야 한다…시대의 고민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르네상스 시대의 고민까지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우리 시대의 고민은 알아야 한다.
직업십계명이 삶과 일에서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라면, 그것을 실천하는 원천이 되는 에너지가 사랑이다.
치열하게 노력하여 만들어가는 사랑, 그 사랑은 남의 아픔을 바라볼 줄 아는 마음이다. 그리고 그 아픔을 섬기는 마음이다. 섬기는 과정에서 내가 다소 힘들 수도 있고 내 이익을 챙기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은 길로, 그 좁은 문으로 기꺼이 걸어가는 선택을 하는 것, 그것이 직업십계명이 가리키는 방향이다.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어요
유행은 순간이다? ’20년 후 유망직종 베스트’. 과연 예견대로 20년 후 그 직종이 유망할지는 의문이다.
거창고의 진로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을까? “No 프로그램”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도록 자꾸 권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진로교육.
“절대 부모가 하라는 거 하지 마. 인생 네가 사는 건데.”
아이들에게 결정을 맡기면 시간은 더 걸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돌고 돌아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자기가 제일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는 게 가장 행복한 선택이라는 것. 아무리 힘들고 돈을 못 벌더라도 자기가 좋아서 선택한 일이면 감당할 기운이 생기는 법이니까. 부모는 헬퍼가 되어줘야 한다. 리더가 아니다.
경험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면 많은 학부모가 단순히 여행이나 각종 체험활동을 떠올린다. 그러나 관심을 찾기 위한 다양한 경험은 조금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학교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체득하는 경험이다. 이런 경험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이다. 학교 프로그램을 통해 관심 영역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거창고에는 예술제와 운동회가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은 거창고에만 있는 프로그램이 아니다…다만 차이점은 참여하고 운영하는 방식이다…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참여하며 어떤 종목에 참가할지 스스로 결정하는 축제이자 운동회라는 점이 다르다. 잘하는 아이들만 뽑아서 하는 경우도 없다…잘하는 학생이든 못하는 학생이든 누구나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참여한다…직접 진행하고 집행하고 문제가 생겨도 스스로 해결하고 심판도 보면서 얻게 되는 교육적 효과는 단지 협동심에 그치지 않는다.
부모 조종형 아이일수록 진로 찾기가 늦다…부모가 최대한 간섭하지 않는 게 가장 효과적인 진로교육일지도 모르겠다.
#생의 방향을 바꾸는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우리들의 중요한 타인, 전영창 선생
아무리 좋은 철학이라도 머리로만 알아듣고 가슴으로 믿지 못하면 삶에 아무런 변화를 줄 수 없다.
사람은 지식으로는 변화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내가 조금이나마 변할 수 있었던 것은 직업십계명을 삶으로 보여준 분들을 알아가면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부터다.
모든 이야기들의 시작에 전영창 선생이 있었다.
심리학자들은 한 사람의 자아 개념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친 인물을 ‘중요한 타인’이라고 부른다. 전영창 선생은 제자들에게 중요한 타인이었다.
“우리 생의 방향을 바꾸어주신 당신께 인간이 드릴 수 있는 최대의 감사를 드립니다”
‘생의 방향을 바꾸어 주신’이란 말이 어쩌면 직업십계명의 핵심인지도 모르겠다.
직업십계명은 인류가 걸어왔던 주류문화, 경제력과 군사력과 정치력을 힘이라고 생각하는 질서에 대해 가치관을 거꾸로 생각하는 삶의 방향을 가리킨다. 공부 열심히 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자꾸만 더 가지려하고 더 밟고 올라서려 하지 말고, 너희는 좁은 길로 가 섬김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전영창 선생은 몸소 보여주셨다.
거창고 졸업생 너희만은 제발 힘의 논리에서 강자가 되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의 힘이 모이는 곳에 가서 그 힘을 모으는 일에 너희가 기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직업을 가지고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간곡한 가르침이다.
#거창고등학교의 교육
자율이 보여주는 기적? “예전에1970년대 우리나라 농촌에는 젊은이들이 다 빠져나가고 없었지. 그런 주로 누가 남느냐면 그 집안의 맏아들이 남아. 땅을 지켜야 하니까….저도 나가고 싶은데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어 만날 술을 마시는 거지…그렇게 한참을 힘들어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마음을 잡거든. 농사꾼이 마음을 잡으면 뭘 하겠어? 그때부터는 열심히 농사를 짓는 거지. 마찬가지야. 학생들도 철이 들면 뭘 하겠어? 공부하는 거지. 스스로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 그런 학생을 당할 수가 없거든.”
가치는 잠재적으로 전해진다? 가치는 지식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만 전해진다. “아,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하고 자발적으로 느껴지는 순간 교육이 될 수 있다.
불의와 타협하지 말라…학교가 문을 닫을 지경에 처했을 때도 지켜야할 가치는 기꺼이 지켜냈고, 학생들은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가르침이 유효할 수 있었다.
거창고의 직업십계명은 과거형이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나는 그것을 선생님들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더 높은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하지만, 끝내 거창으로 내려와 모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선생님. 더 좋은 조건에서 일할 기회를 마다하고 다시 시골 구석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을 부모들이 기를 쓰고 말렸지만, 기꺼이 모교로 돌아와 후배들을 가르치는 선생님, 학교는 그럴듯한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으로 직업십계명을 가르친 적이 없지만, 어떤 진로 프로그램보다 더 강력한 직업십계명의 가르침이 여전히 교육되고 있는 배경에는 바로 이런 선생님들이 있기 때문이다.
#거고정신
직업십계명, 현실에서도 유효할까
무엇을 포기하며 살아왔는지 돌아보면 그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직업십계명은 열 가지 형태로 존재하지만, 실은 그 열 가지가 각각 다른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똑같이 한 방향을 가리킨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의 기준과 다른 방향에서 성공을 조명하는 삶이다.
“저희가 3년 동안 거창고에서 배운 것은 위대한 사람이 되어라, 세상을 바꿀 정치인이 되어라, 기독교 정신을 전파할 선교사가 되어라, 훌륭한 기업인이 되어라 같은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어떤 일을 하든지 ‘참’을 이루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랑과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고, 이 땅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저는 직업십계명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전혀 실천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하지만 우리 모두에세서 가장 중요한 어떤 ‘선택의 순간’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순간에 내가 가진 것을 모두 걸고 남들이 절대로 하지 않을 결정을 내리는 것. 인생이라는 도박판에서 가장 확률이 낮은 패에 내가 가진 전 재산을 기꺼이 걸 수 있는 믿음. 직업십계명이 우리에게 말하는 게 이런 것이 아닐까요?”
#아무것도 아니어도 좋아
성공하지 않아도 좋아. 역시 생의 변화는 머리로 무언가를 아는 것에서 오지 않는다.
변화는 한 걸음을 떼는 것에서 시작된다.
사람의 자각은 굉장히 사소한 삐걱거림에서 일어난다. 나에게는 아이의 공부 문제가 그랬다. 만약 아이의 학교 성적이 잘 나왔다면 나는 내 인생이 아무 문제없이 굴러가고 있다고 계속 착각하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게 잘되고 있다고 생각해 중요한 걸 계속 놓쳤을지 모른다. 그 사소한 삐걱거림 덕분에 문제점을 인식하게 되었고 변화를 꿈꾸기 시작했으니, 고민과 갈등의 대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은 어쩌면 아이들의 리그에 어른들이 끼어들고 난 다음부터인지 모르겠다. 꿈도 없고 이상도 없고 편의만 생각하는, 이 세상이 요구하는 가치관에 딱 맞춰진 기성세대의 계산이 끼어든 것이다.
“엄마가 살아보니 이 길로 가야 유리하거든. 네가 아직 뭘 몰라서 그래. 쓸데없이 고생스런 길로 가지 말고 이쪽으로 가.”
기성세대의 요구에 아이들의 꿈을 끼워 맞춘다. 그래서 세상은 점점 균형을 잃어간다. 아이가 좋아하는 일보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 지위가 높아지는 일, 유명해지는 일을 권하는 엄마의 계산이 개입하는 한, 세상은 다양성을 잃어갈 수밖에 없다.
가정에서 이것만은 끊임없이 가르치는 부모이고 싶다. 적어도 너희는 그렇게 살지 말라고, 소유을 힘으로 보는 세상의 가치와 주류 문화에 이바지하는 삶을 살지 말라고 가르칠 것이다.
그러려면 내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 가치는 절대로 말로 전해지는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내 삶의 행위들을 보고 자신들의 가슴에 새겨야만 변화가 시작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가치관만 제대로 정립한다면 그 다음에는 설령 부딪치고 깨지면서 자기 길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내 아이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편안하고 안락하게 세상을 사는 요령이 아니라 힘들더라도 꼭 지키면서 살아야 할 가치관이다…남이 나를 어떤 시선으로 볼까에 목적을 두지 말자. 남의 시선에 내 삶을 고정한다면 나는 영영 행복에 가까워질 수 없을지 모른다.
부조리한 현실? 단지 성적이 나쁘다는 이유로 학생들이 비인격적 대우를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현실
조건에 이끌려 가는 살아갈 것인가. 목적과 수단이 바뀌는 상황이 벌어진다. 수단에 이끌려 자유를 빼앗기는 삶 속에서 우리는 절대 행복할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니어도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부요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행복을 얻은 사람이다.
##직업선택의 십계, 그 속으로 들어간 제자들
‘무슨 일이든 문제는 극복함으로써만 이길 수 있다. 극복하지 못하면 그 자체로 지는 것. 그 일을 함으로써 이겨나가야 한다. 반대가 심하다고 중지하면 나는 그곳에 있을 수 없게 된다’
부모로서 어떤 선택이 바른 선택인지 몰라서 그 길을 못 가는 게 아니었다. 잘못된 선택인 걸 알면서도 세상의 서열에 밀리지 않으려 머뭇거렸고, 결국은 잘못된 선택을 포기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세상의 서열, 그 경쟁에서 밀려날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나에게는 단두대였다.
시장의 논리대로 정해지는 가격에 휘둘리는 농가들은 수입농산물 문제라든가 국내 소비에 따라 제값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때로는 단순하게 한발을 먼저 내딛는 걸음이 필요할 때도 있다.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만 많아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것보다 일단 먼저 내딛고 보는 한 걸음이 더 소중할 때도 있다. 한 걸음을 시작해야 두 걸음., 세 걸음도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다.
공부가 주로 가족 간 분쟁의 뇌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엄마는 자녀에게 좀 더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 것을 책망하고, 자녀는 그런 엄마에게 반항심을 표출한다. 이 대목에서 남편은 애 교육을 어떻게 시켰기에 이모양이냐는 핀잔으로 불을 지핀다. 서로가 서로를 할퀴고 상처받는다.
“자식 잘 키우려고 하지 마라. 너나 잘 살아라. 아이들을 망치고 싶은가? 부부 싸움을 해라. 아이들을 더 망치고 싶은가? 그렇다면 서로를 비하하라. 무조건 아이에 대해서는 욕심을 버려라. 부모는 그저 이 아이를 열심히 도와주라고 위탁받은 존재에 불과하다.”
고흐가 그의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종종 나 자신이 엄청난 부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단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나만의 일을 찾았기 때문이야. 내 마음과 영혼을 바칠 수 있고 삶에 의미와 영감을 주는 그런 일말이다…”
내 삶에 의미와 영감을 주는 일을 찾고 싶다면 우리는 길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절대로 늦은 시작은 없다. 새 일을 배우는 것도 기뻤지만, 스스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자신을 발견했다고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조건이 충족되면 될수록 오히려 근본적인 행복에서 더 멀어질 수 있다. 조건이 갖춰질수록 우리는 훨씬 더 세상이 떠미는 대로 밀려날 수 있는 존재들이다.
행복이 성공이다. 성공해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고 실패해도 행복할 수 있다…누구든지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일, 만족을 주는 일을 만날 수 있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다면, 비록 그 일이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의 조건과 다른 방향에 있다해도 내면의 요구를 받아들일 용기만 있다면, 언제든 그 일을 만날 수 있다. 남과 비교하거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게 바로 내 빛깔을 내는 비결이다.
“내가 이 일에 만족한다면, 그리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있을 때 행복하다면 그게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머힐학교의 교육철학은 ‘성공이 아닌 행복’이다
##내 삶에 들어온 직업십계의 선택
엄마로서의 나는 왜 그렇게 조급했을까. 바른길과 빠른 길 사이에서 바른길을 선택하지 못한 적이 많다. 길을 몰라 고민한 게 아니라 가야 할 길과 가고 싶은 길 사이에서 갈등해왔다. 인생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 성공과 명예와 부에 가치를 두는 한 어쩌면 영영 속도를 늦출 용기를 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휴대폰 압수하던 날. 불안증에 교육이 무너진 날.
“그건 제일 나쁜 방법인데?”
전성은 선생의 대답은 역시 예상했던 대로다.
강요와 규제가 없어도 스스로 옳은 선택을 하는 것. 그것이 자율의 힘이다.
아이들의 결정권. 만에 하나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총동원해 걱정거리를 늘어놓자면 자전거 통학은 한마디로 언 될 일이다.
허용하는 부모와 제한하는 부모의 차이.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상황을 미리 당겨서 걱정하고 더 큰 불행을 상상하면서 지금의 행위를 제한한다. 더 큰 불행은 무엇인가. 지금 내가 가진 것을 잃는 것.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을 빼앗기는 것. 좀 더 가질 기회를 놓치는 것? 결국은 욕심이다!
4살 때 고가의 방문 수업. 나중에 다 도움이 된다? 11년이 지난 지금 과연 어디에 도움이 되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지나고 보니 모두 무의미한 집착이었어” 하고 말하게 되는 순간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목적 없이 끝까지 믿어주기. 아빠느님(하느님 같은 아빠). 자녀를 믿어줌은 인간 속에 내재하는 신적 성품을 믿는다는 뜻이다.
아이를 이길 수 없어 결정권을 내어주는 게 아니라, 그 아이 안에 내재하는 신의 형상을 믿고 결정권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부모는 아이 속에 신의 형상이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에 부모는 늘 불안하다…아이들은 스스로 무언가를 하면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자율이 있는 곳에 성숙도 따라온다.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기. 선행학습처럼 미리하는 교육 고민
돈이 지배하고 정보가 권력이 된 교육정책과 입시제도가 아이들은 물론 부모 세대까지 철저히 이기적인 바보로 만들고 있다.
모두를 바보로 만들려는 누군가의 음모가 아니라면, 교육이 왜 이 지경까지 온 것일까. 그래도 한때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피 터지게 고민했던 우리 세대가 어쩌면 이렇게 아이의 성적에만 매달려 침묵하게 되었는지 나는 울고 싶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이렇게 엄마에서 엄마로 또 친구의 입을 통해 우리는 걱정을 퍼뜨리며 산다. 두려움의 원인은 무엇일까….
내가 변해야 한다. 용기를 내야 한다. 그러려면 성공의 기준에 매달리지 말자. 남의 시선으로부터 서서히 자유로워지는 선택을 하자. 그래야만 용기를 낼 수 있고 내 아이는 행복해질 수 있다…지금껏 전성은 선생한테 배운 것들을 그냥 믿어볼 생각이다. 내 아이의 내면에 들어 있는 신의 형상을 믿어보고 싶다. 간섭하고 싶고 뜯어 말리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들겠지만 이번에는 꾹 참아보려 한다. 더 늦기 전에 나는 그 믿음을 가져보려 한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할 의무만 있다
이미 빛과 소금으로 태어난 아이들을 그 존재만으로도 귀하게 소중하게 섬기는 것. 그것이 부모로서 나의 첫 번째 의무다.
#나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보여줌이 교육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는 엄마인가. 그런 모습들이 내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교육이다. 이다음에 우리 아이들은 나와 함께했던 어떤 장면을 기억할까.
“선생님, 거창고 학생들은 참 좋겠어요. 눈앞에 펼쳐진 길고 긴 인생길 초입에 이렇게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어서 말이에요. 저는 왜 이제야 알았을까요? 선생님, 저도 거창고에 입학하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