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를 요구한다. 예란 테르보른. p441
The World: A Beginner’s Guide
#’세계교양’으로의 초대
‘세계학’이라는 인문·사회과학적 통합학문이 생긴다면 아마 예란 테르보른 교수가 이를 선도적으로 이끄는 핵심 인물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인류와 그들의 세계
인류의 사회와 인류의 역사는 오로지 모순들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20세기는 살인의 세기였으며, 유럽의 아메리카 정복이 있었던 지난 16세기 이후로 최악의 시대였다. 그러면서도 인구의 순증가율이 최고에 달한 시기이기도 했다. 인류역사상 가장 흉포한 대량학살의 인종주의가 지난 세기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한 가지 유산을 남겼다. 우리가 공유하는 유한한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인류는 하나라는 자각이다.
#현대 세계의 사회문화 지질학_우리는 왜 현재의 우리가 되었는가
인도의 고전들은 2,500년에서 3,000년 전 사이에 편찬된 것으로. 그러나 연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중국권이나 유럽과 달리 인도권 문명은 사학사(史學史)적 기록이 거의 없다! 다만 방대한 고전 문헌들만이 쌓여 있을 뿐이다.
기독교. 유럽에서 형성되어 훗날 북미 제국주의 세력으로 나타난 이 믿음은 정복전쟁의 무서운 무기이자 세력 확장의 강력한 엔진으로 작용해왔다. 보편구제라는 소명의식은 더 최근에는 ‘항구적 자유’ 또는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유럽-아메리카의 세속적 십자군전쟁을 지지하는 명분이 되고 있다.
아프리카는 우리 모두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 식민주의(16~17세기 초)
말 그대로 전세계적이고 전 지구적인 첫 조류가 이것이었다…아메리카는 아프리카와 유럽인의 식탁에 풍성한 재료를 공급했다…막대한 양의 은 매장량을 필두로, 국제 통화, 그리고 노예노동을 이용한 설탕, 담배, 면 등의 농장을 확보했던 것이다. 이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이익 축적의 기반이었다.
근대성의 경로
역사적으로 볼 때 오늘날의 우리 모두는 ‘근대화’된 사람들이다…’근대’의 어원이 중세 라틴어 ‘modernus’와 ‘modernitas’는 ‘현재’라는 뜻의 형용사나 명사. 당시 이 말은 ‘옛’ 또는 ‘고대’, 즉 유럽 문명의 고전기인 그리스-로마시대에 대비되는 의미로 쓰였다. 이는 상대적인 평가를 목적으로 한 미학적 범주로서 만들어진 개념이었다. 어느 쪽이 더 나은다, 고대인가 근대인가.
사회적 담론에서 사용하는 ‘근대성(modernity)’이란 말은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이 대두되기 전까지는 거의 쓰이지 않던 개념이었다.
근대적 인식의 발전은 고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신세계의 발견으로 한층 활력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이 결정적이었다는 주장은 부당한 아메리카중심주의로 보인다. 도약은 물리학과 그에 관련된 철학에 있었지, 인류학과 식물학은 아니었다.
신에 대한 믿음은 항상 유럽보다는 미국이 더 강하다. 미국이 아일랜드보다 강하며, 영국과는 비교할 바도 아니다.
동아시아의 반은은 근대화에서 종교가 위협을 받았던 적은 없었다. 지역마다 신앙심이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해졌다…다만 한국의 프로테스탄트와 베트남의 가톨릭은 큰 성공을 거둔 케이스이다.
#인류의 진화와 그 동력_세계의 역학
인류 진화의 동력은 다섯 가지 장(場)에서 주로 나온다. 세계양식, 인구 생태, 존중과 인정, 집단권력의 정치, 문화가 그것들이다.
자본주의의 위세가 클수록 직장분쟁이 지속될 가능서이 더 높다. 어쩌면 그것들이 더 큰 사회적 격변으로 번질지도 모른다. 오늘날 사회주의는 지평선 너머로 저문 듯이 보이지만, 볼리비라의 사실상 수도인 라파스와 쿠바의 아바나에서는 아직 빛을 깜빡이고 있다.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자본주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껏해야 인류의 40퍼센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복지국가와 발전국가의 두 번째 공통점은, 세계시장에서 밀려오는 파도에 국내시장을 활짝 개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모델 다 나름의 경쟁력과 새로움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국내시장 보호 체제를 수립하고 유지해오고 있다.
‘아랍의 봄’. 이집트 SNS 혁명? 이 같은 사이버정치가 오늘알 정치의 새로운 차원이다. 그러나 실제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지역적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그것 역시 역사적으로 물려 내려오는 지정학의 범주 내에 머무르고 있다고 하겠다.
문제는 정보통신의 발달이 세계와 사람들의 삶을 어느 정도나 바꾸어놓았느냐이다. 과연 그 변화가 19세기 말의 전신의 등장, 또는 1920~30년대 라디오의 출현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을까? 아직까지 거기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예전과 최근의 통신혁명을 두고 상대적인 질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최근의 것이 진폭이 훨씬 크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무엇보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시골의 오지에 사는 사람들도 멀리 이주한 친척과 단절되지 않고, 도시지역에 사는 지인들과도 접촉이 가능해졌다는 점일 것이다. 특히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사람들이 그런 혜택을 보고 있다.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사회적 효과? 강자(자본과 부유층)을 더 강하게, 약자(노동자와 빈곤층)를 더 약하게 하는 것이었다. 공공지출과 공공고용을 삭감되어야만 했고, 공공부문의 노동자 권리들은 ‘유연화’되었다. 빈곤층은 공공교육과 보건에 자신들이 돈을 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의 식료품에는 더 이상 보조금이 지급되지 않았다. 이러한 조치들은 그 나라들을 심각한 위기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취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 때문에 IMF차관을 간청했던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IMF는 그 나라의 정부가 모든 일을 망쳐놓은 다음에만 호출을 받고 있다. 그 나라의 사회적 재앙이 순전히 위기로 인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IMF의 정책 때문이었을까? 정밀한 계량적 분석은 IMF 개입으로 인한 체계적인 반평등주의의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현재의 세계무대
나는 항상 세계의 모든 지역들이 제각각 매우 뚜렷한 자주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따라서 이 세계를 설명하는 데에 결코 어느 한 지역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아직 깊이 연구되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 거의 확실한 사실은 하나의 세계무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배우들이 그 위에서 어떤 배역을 행하고 전세계적인 너비를 갖는 무대이다. 여기서의 배우들이란 국가를 비롯한 국가적 동맹들, 기업들, 개별 정치가들, 그리고 축구선수나 팝 가수들까지 대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행위자들을 말한다.
세계의 공간. 평야와 강은 연결자, 산맥과 사막은 분리자였다.
현대 경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가 세계적으로 운영되는 자본주의 기업들이다…공히 미국 기업들이 세계를 석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 개인의 생애는 아무리 최상의 조건을 부여한다 해도 훨씬 짧다. 그러나 우리 개인들 역시 각자의 삶 안에 세계의 역사와 지질학을 담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것들에 의해 정해진 위치에서 태어났다. 그것들이 우리 삶의 기회들을 대부분 결정하며, 우리 모두가 받는 교육은 그것들을 선택적으로 조합한 조각들이다.
#생애과정_지구에서의 우리시대
우리는 여기서 개개인 인생의 여정들을 낱낱이 따라갈 수는 없다. 하지만 21세기 초의 이 세계에서 그들 앞에 놓인 경로들을 지도로 그려볼 수는 있다. 교육과 노동, 성습관과 결혼, 노동과 빈부 및 여가, 은퇴와 연금,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출생은 자연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성차별이 일어난다. 남아가 생물학적으로 더 약하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인류 인구가 여아 100명 당 남아 105~106명을 낳는 것이 자연스럽다.
21세기의 이상적인 생애과정
먼저 안전하게 태어나서 북서유럽의 비권위적 부모로부터 양육을 받는다. 그리고 학업성취도가 세계 최고이면서, 부모의 재산과는 무관하고, 주입식 교육이 전혀 없는 핀란드식 국립학교에 다닌다. 이어서 세계 각지를 여행할 능력을 갖춘 북서유럽의 자유로운 청년으로 활동한다. 옥스브리지(옥스퍼드와 캠브리지)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나와는 다른 문화에서 온 훌륭한 파트너를 만나, 아시아의 어느 곳에서 잊을 수 없는 결혼식으로 멋지게 청년기를 마감한다. 그다음에는 동아시아(또는 인도)의 대도시에서 흥미진진하게 열심히 일하며 높은 보수를 받는 성년기를 보낸다. 그러고 나면 고요한 은퇴가 찾아온다. 그때는 제네바나 밴쿠버같이 조용하고 아름답고 아름답고 네트워크가 잘 짜인 곳에서 산다. 마지막으로 노인요양을 잘 받으려면 스칸디나비아로 가는 게 좋을 것이다.
우리가 지구상을 떠난 뒤에 공경을 받고자 한다면, 최선의 선택을 중국과 베트남이다. 거기서는 가족의 조상들에게 바치는 가정의 제단들이 놀라운 속도로 다시 세워지고 있다. 우리의 생일은 계속애서 잔치처럼 치러질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왔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상이 조심스러운 학자가 미래에 대해 감히 이야기해 본 내용이다. 하지만 인간사회의 세계에 내재한 우발성과 불확실성은 다른 전망도 선험적으로 배제해서는 안 됨을 의미한다. 가치관과 행동의지에 더 큰 비중을 둔 전망을 통계적 확률이 결여되었다고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른 세계는-가능하다(Another world is-possible)’이라는 세계사회포럼의 선동적 곡조에 귀 기울이고 거기에 맞춰 춤을 추었던 급진적인 청년들은 잘못된 것도 순진한 것고 아니었다.
그들이야말로 새로운 세기의 희망이다. 다른 세계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