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역습 The Way of Ignorance. 웬델 베리. p247
오만한 지식 사용이 초래하는 재앙에 대한 경고?
우리는 모든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다!
#인간이 더 나은 행동을 할 수 있다는 희망
우리 모두가 전문 용어와 아리송한 정치적 언어로 뒤덮인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 책에 수록된 글은 그다지 새롭지 않은 다음의 견해들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처럼 무지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적 속성이므로 우리에게는 적절한 방법론이 필요하다. 무지의 방법론, 즉 무지의 길은 이웃 사이의 사랑과 친절, 염려와 관심, 적당한 규모, 검약, 올바른 노동과 생활이다.
나의 글쓰기 역시 전문적 작업이 아니다. 그저 글을 통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을 따름이다. 아마추어로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기쁨은 어디에도 비길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에세이 형식의 글을 열심히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이 다른 인간과 세계를 상대로 저지르는 폭력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인간이 더 나은 행동을 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이런 우려와 희망이 근거 없는 것이었다면 나의 에세이는 수가 훨씬 적고 내용도 크게 달랐을 것이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하여#
무지, 오만, 편협함, 불완전한 지식은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된다. 이런 지식이 거대한 권력과 결함하면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이미 회복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이 파괴되었다. 이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파괴를 멈추는 것이 가능한가?…이렇게 말하면 놀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는 다시금 지식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과거에도 인류가 자연을 파괴하는 일이 종종 있긴 했지만 지금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파괴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무지하며 지식을 오만하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의 경고가 정확히 실현된 셈이다.
#괜찮은 개인주의와 위험한 개인주의
소로의 시민불복종 운동
과격한 개인주의가 추한 꼴로 나타나면 신도, 합법적 정부도, 공동체와 이웃도, 후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개개인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권리’라고 가정하게 된다. 가장 흔한 예가 바로 자신의 재산은 자기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발상이다. 이 공식대로라면 한 개인의 재산은 순전히 그 사람만의 것이다.
이런 식의 과격한 개인주의 때문에 우리는 표토 유실, 삼림 파괴, 독성물질 증가, 그리고 종의 소멸이라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재산권을 절대적 권리로 인정하면 반드시 유해한 결과가 따른다. 법적인 소유의 일시적 이익을 위해 영구적인 가치가 있는 것들을 남용하는데 재산권 논리가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이 ‘법인’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의 지위를 획득할 때 문제는 한층 심각해진다. 대기업 역시 과격한 개인주의자가 되어 자기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법인’들은 부와 영향력을 넘치도록 가지고 있으므로. ‘미국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라고 선출된 대표들이 실제로는 기업을 대표하고 옹호하게 된다.
이런 식의 개인주의가 개개인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암시한 적은 한 번도 없으며, 오히려 사나운 아귀다툼을 부추겼다는 사실이 이제는 명확해졌다. 그 속에서 ‘사람들’의 권리는 탐욕스럽고 힘센 극소수 ‘법인들’의 손에 점점 더 많이 넘어가고 있다.
우리가 지속가능한 사회를 원한다면 돌봄, 믿음, 친절, 이웃, 평화의 언어로 이야기해야 한다. 좋은 언어 역시 ‘사유화’가 불가능한 사회의 귀중한 자산이다.
#무지의 길을 가라
_알지 못하는 곳에 도달하려면 무지의 길로 가야 합니다
오만한 무지의 징표는 큰 규모로 일을 벌이려하다 지나친 위험을 초래하는 것이다. 오만한 무지는 나쁜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다. 모든 행동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만한 무지는 투자된 자본에 눈이 멀어 나쁜 결과를 예측하려 들지도 않는다.
우리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도 대부분 잊고 살아간다. 가장 중요한 사람과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거나 가장 소중한 증거물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잊어버렸는지도 알지 못한다
무지의 종류? 박식한 무지(잘못된 자심감), 공포의 무지, 이익추구형 무지(광고의 제한된 지식), 권력추구형 무지(정부의 비밀주의)
박식한 무지는 자기 자신을 모르는 독선의 무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잘못된 자신감의 반대편에는 공포의 무지가 있다. 사람들은 특이한 것, 낯선 것,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 반박에 부딪힐 것이 두렵거나, 어떤 사실을 알게 되어 불쾌해지거나 불행해질까봐 두렵거나, 의심과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 두렵거나, 공포 그 자체가 두렵기 때문이다.
광고처럼 제한된 지식만 알리는 방법으로 유지되는 이익추구형 무지와 정부의 비밀주의와 대중을 상대로 한 거짓말을 통해 유지되는 권력추구형 무지가 있다
문화가 형성되려면 장기간에 걸쳐 똑같은 사람들이 거의 똑같은 장소에서 살아야 한다. 전통적 지식은 장구한 세원 동안 기억과 기록, 전승, 숙고, 수정, 실천, 정제의 과정을 거쳐 형성된다
기업의 정신은 복합적이고 추상적이며 물질주의적이고 훤원주의적이며 탐욕스럽고 극도로 실용적이다. 경험이나 전통, 양심 같은 내면적 지식이라면 어떤 것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온갖 종류의 무지에 굴복하기 쉽고 자연히 가짜 지식을 선호하게 된다.
물론 실험실 안의 과학은 얼마든지 통제가 가능하다. 오존층에 구멍을 내고, 저산소 지대를 만들며, 산성비를 내리게 하고,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보팔의 유독가스 방출 참사, 러브캐널 사건을 일으킨 것은 실험실의 과학자가 아니다.
우리가 지식을 무지하게 사용하면, 권력이 규모의 문제를 무시하는 사태를 허용하게 된다. 무지는 지역 생태계의 완전성을 존중하지 않는데, 이런 존중이 없으면 인간 활동의 규모를 적절히 규제할 수 없다.(한계 없는 성장?)
우리가 빠져들지 말아야 할 가장 큰 유혹은 혁명을 외치는 것이다. 파괴적인 힘이 우리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 힘을 파괴하기에 충분한 힘을 키우겠다는 발상은 전적으로 무익하다
나는 여러분에게 1인 혁명을 명령합니다. 그것은 실현가능한 유일한 혁명입니다.-로버트 프로스트
만약 우리가 오만한 무지의 결과를 깨닫고 겸손해진다면, 우리에게 하나의 희망이 생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다.
자기 자신을 단련시키기 위해 우선 자신의 마음을 정화했다.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우선 어지러운 생각을 명확한 언어로 정리했다. 생각을 명확한 언어로 정리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의 지식을 최고의 경지에 이르게 했다.-에즈라 파운드의 『대학』 번역
무지의 길은 믿음의 길이기도 하다. ‘겸손의 지혜’를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형식에 합당한 경의를 표하며, 매 순간 “우리의 존재 전체에 대한 새롭고 충격적인 평가”를 수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지금과 같은 ‘기업의 정신’은 위태로워질 것이다. 나아가 그 구성원들이 동의하지 않고 외면하게 된다면 ‘기업의 정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삶과 노동의 목표는 무엇인가
현대의 제약 회사는 우리에게 오래 사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산업 기술은 적절한 규모와 응용의 타당성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거나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행동의 기준은 장소와 생물의 개별적 특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술의 용량에 의해 결정된다.
산업기술은 자기 자신을 생명체에 적응시키는 대신 생명을 단순한 기계적 과정이나 화학적 과정으로 취급하면서 생명을 자기 자신에 적을시키려 한다. 산업 기술은 사랑, 상상력, 친근감, 연민, 두려움, 공포와 같은 감정의 작용을 억제한다. 일상에 대한 책임감은 줄어들고 노동의 ‘과정’은 단축된다.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대상에 대한 지식을 잃게 된다.
양에 대한 무제한 욕망에 굴복하는 행위는 귀중한 것을 모조리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삶을 전체에 포함시킬 때만 누릴 수 있는 형태적 완전성과 품위와 아름다움에 대한 희망을 모두 포기해야 하며, 영원히 미완성이고 불완전하며 탐욕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풍성의 삶의 의미
능력에 한계가 있다
#더 나은 경제가 필요하다#
오늘날 모든 서식지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환경은 산업 경제다. 산업 경제는 모든 서식지에 해를 입히고 있다. 우리가 지구를 파괴하는 경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웃 사이의 친절이나 자비, 평화, 환경보호 의식 등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보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미 시작했다
켄터키 주. 결론적으로 이런 지형에는 다양한 작물을 소규모로 재배하는 농업방식이 가장 적합하다
농민시장. 지역기반 농업, 타 지역 소비자들과의 직거래, 작물 다양화, 지속가능한 농법, 슬로푸드 운동 등에 대한 관심이 고조. 농업에 관해 풍부한 정보를 교환하는 활기찬 대화가 탄탄한 기초 위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 지역의 농업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을 벌이는’ 방법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다른 지역의 농업도 마찬가지다. 우리 농민의 생존을 위해서는 의식 있고 농촌을 사랑하는 도시 소비자가 지원하는 튼튼한 지역사회 기반 경제를 활성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우리는 이미 그 일을 시작했다.
#작은 곳이 중요하다
바다의 건강은 강의 건강에 의존하고, 강의 건강은 작은 하천의 건강에 의존하며, 작은 하천의 건강은 분수계의 건강에 의존한다. 따라서 물의 건강은 토지의 건강과 전적으로 동일한 개념이다. 작은 장소들의 건강은 큰 장소의 건강과 전적으로 동일한 개념이다. 알다시피 질병을 어떤 장소에 가둬놓기는 극히 어렵다. 자연의 법칙은 어디에나 적용되고 세균은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공정한 대우를 받는 경제 원칙
말을 이용한 숲 속 경제활동의 세번째 장점은 짐말을 부리는 일꾼들이 지역사회 내에서 돈을 벌고 쓴다는 것이다
“저는 10년, 20년 후에 내 아들이 베어낼 나무가 있기를 바랍니다.”
#조화로운 공동체를 향하여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고하며 ‘그때가 더 좋았다’고 말하는 노인이 나만 있지는 않을 것이며, 이런 식의 생각이 위험하다는 점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실로 엄청난 파괴를 목격했고, 이렇게 파괴된 것들은 우리가 ‘진보’라고 명명하는 그 어떤 이익으로도 보상될 수 없다. 아마도 최종 손익계산서에는 순손실로 나타나지 않을까 싶다.
역사 속에는 조화로운 공동체의 예가 심심찮게 나오지만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과거의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출발해야 한다.
공동체가 조화를 목표로 한다면 구성원을 잃는다거나 구성원들이 실직당하는 일을 결제 발전의 당연한 대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생태적이면서도 경제적인#
물과 토양의 건강도 경제적 자산으로 간주해야 하지 않을까? 더 넓은 범위의 건강이야말로 장기적으로 농장의 생산성을 유지하고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를 낳지 않을까?
우리가 벌이는 자연과의 전쟁이 물과 토양의 건강을 해치고 결국에는 농업의 건강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건강까지 해친다면, 그래서 우리의 경제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트랙터가 몰아낸 것들
하지만 트랙터에 높이 올라앉아 그 노새들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노새들의 느린 동작에 화가 치밀었고, 노새들이 ‘내 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그때 나는 도시의 도로에서 느릿느릿 차를 모는 노인 뒤에 있는 속도광과 같은 유치한 우월감을 느끼며 격분했다…이 일화를 꺼내는 것은 농업의 산업화가 나에게도 익숙한 경험이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할아버지는 82세로 숨을 거두기까지 전통적인 농사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평생 노새를 데리고 일했던 할아버지는 노새에 관해서라면 척척박사였고 좋은 노새들을 각별히 아꼈다…그런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4년이 지났을 때 그의 손자가 갑자기 ‘느린’ 노새를 싫어하게 되었으니 그 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짐작할 만하다.
트랙터를 남겨두고 노새들을 처분했다…닭고기나 달걀을 팔던 지역 시장은 사라지고 없었고, 지역 특산물이었던 어린 양고기도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았다. 트랙터를 비롯한 농기계가 농부의 노동력과 이미 떠나 버린 노동자의 일감을 줄여주었지만, 이곳에 남은 사람들은 장시간 노동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들게 살고 있었다…그래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가? 무엇이 땅, 공동체, 자연 세계, 그리고 농업 기술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산업화의 영향은 농산업 회사에 매우 유리한 반면, 다른 모든 이들에게는 너무나 불리했다. 1960~70년대에 나와 몇몇 친구들을 괴롭혔던 질문은 이제 곳곳에서 나온다.
우리가 가장 중요한 경제활동을 잘못된 규칙들에 의거해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우리는 무제한성의 시대라는 환상의 시대로 들어왔다…노동력을 절감하는 기계와 값싼 화석연료가 무제한 공급되는 세계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다년간의 독서와 사색과 경험을 하고 나서야 이 세계에서 한계란 불가피하며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우리가 기계를 가지고 일하면 온 세계가 기계로 보일 것이고, 동물을 데리고 일하면 온 세계가 생명체로 보일 것이다. 기계식 농업은 땅과 생명체에 관해 기계적 사고를 부추긴다. 나아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기계적인 사고를 하는 경향이 생긴다. 피로를 모르는 트랙터의 성질은 인간의 경험을 한층 더 피로하게 만들고, 건강과 가족의 생활을 희생시켜 아직 계산도 끝나지 않은 비용을 치르게 한다.
산업화는 최초로, 그리고 가장 극단적으로 자급자족 경제에서 농사를 분리해 냈다…하지만 산업화 프로그램은 농장의 가족이 먹을거리를 직접 생산하는 일이 ‘비경제적’이라고 말하면서 그런 노력과 토지를 상업적 목적의 생산에 사용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로 인류는 매우 생소한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농장의 가족이 모든 먹을거리를 상점에서 구매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경제활동과 자연 세계의 조화
토지연구소 과학자들의 비판이 급진적인 것은 단 하나의 결정적인 선택 때문인데, 그것은 산업사회의 허구적이고 위험한 기준인 효율성이나 생산성이 아니라 자연 생태계의 건강을 성공적인 농업의 첫째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이런 단 하나의 차이가 역사와 문화는 물론 과학의 영역에서도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정말 정보 기반 경제로 진화했을까
주변에 대한 중심의 무지? 중심의 매력이 커질수록 중심은 주변을 무시하게 된다
시골의 토지와 시골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안다면 그들을 보살펴야하는데도, 미국은 반세기 동안 그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별로 없다
농장과 숲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얕잡아 보는 도시 사람들은 시골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국토를 잘 활용할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우선 과학과 농업 사이에는 너무나 큰 간극이 있다.
하지만 현재 농촌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가진 지식과 경험이야말로 지금처럼 빠른 속도로 도시화가 진행되는 세상에 반드시 필요하다. 중심이 주변에 관심을 가지고 주변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하는 이유는 순전히 생존을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눈썰미 좋은 지역 주민은 외지에서 온 어떤 과학자보다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항상 그렇다. 예외는 없다.
농부는 똑같은 노동을 물리도록 반복해서 하는 직업이기에 농사일은 책으로 배울 수 없다. 다른 누군가에게 농사짓는 법을 ‘말’로 가르쳐 줄 수도 없다. 내가 알고 지내는 나이 든 농부들은 이런 말을 많이 한다.
“내가 자네한테 가르쳐줄 수는 없지만, 배울 수 있는 곳에 데려다줄 수는 있네.”
#토지 건강 운동을 촉구하며
자연을 읽는 능력.
가장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토지 문맹’이라는 것이다.(생태맹)
우리는 외국어를 공부하듯이 자연을 ‘읽는’ 능력을 익혀야 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1년생 식물과 다년생 식물을 구별하지 못하고, 물의 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징표가 무엇인지 모르며, 감입곡류 하천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눈으로 보고도 목초지가 건강한지 아닌지를 모른다.
“결국 모든 것은 토양의 문제로 귀결된다. 토양이 안정적이면 미래는 희망적이다. 토양이 불안정하면 생태계가 파괴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희망을 주는 정치#
국내 경제에서든 세계 경제에서든 부당한 경쟁에 의해 영세한 사업체들이 몰락하면 궁극적으로 식품, 직물 등의 필수 물자를 생산하는 지역과 국가의 능력이 소실된다. 그러므로 정부가 대기업에 무정부적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생활에 필수적인 상품을 생산하는 사람들의 몰락을 방치하는 일은 절대로 정당화할 수 없거니와 이해조차 불가능하다. 정부가 자연 파괴와 토지의 생산성 저하를 용인하고 심지어 보조금까지 지급하는 일도 이해가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국가안보는 국민의 권리 보호에서 시작되었다
미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초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전쟁 중’에 있다고 말한다.
#소수가 소유한 나라로 만들지 않기 위하여
선거운동 관계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하면 미국인의 정치적 견해 차이를 심화하지 않으면서 부시를 반대할 수 있을까?’가 될 것이다.
정부는 진실을 말할 때만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고, 국민은 진실을 알아야 시민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다. 정부가 비밀을 만들고 거짓말을 한다면 설사 좋은 의도라 해도 국민을 전제정치로 몰아가는 셈이다.
토지의 건강을 위해서는 대규모 기업의 부가 아닌 소규모 자영농의 경제적 번영을 목표로 삼는 농업정책이 필요하다
자살도 마다 하지 않는 테러리스트들의 공격? 핵무기를 이용한 방어 정책도 본질상 자살과 다를 바 없다
#정부는 경제적 침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라
현재 진행되는 파괴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순응을 통해 그것을 꼭 필요한 일로 만들지 않는다면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물탱크에 오줌을 누는 일을 허용하고 보상까지 안겨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보상을 너무나 잘 해준 탓에 우리 물탱크에 오줌을 누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부유하게 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순응하고 있는가? 급진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이 곧 순응이다.
미국정부는 보존주의자들과 정반대의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땅을 보호하지 않고도 사람들을 충분히 보호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산맥과 분수계를 통째로 파괴하는 일까지 허용하고 있다. 과거의 어떤 전쟁도 이처럼 광범위하고 영구적인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다.
생명체의 생존에 꼭 필요한 연약한 표토를 조금이라도 소중히 여긴다면, 어떻게 표토를 파괴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 경제는 발전이나 보존이 아니라 착취를 목표로 한다.
파괴가 자행되는 진짜 이유는 우리가 경제학의 두 가지 거짓말을 믿고 그에 맞춰 살아가기 때문이다? 1)시장에서 가격이 매겨지지 않은 것은 가치가 없다 2)우리 지역의 경제를 대기업에 넘겨주어도 괜찮다
정부는 국민에 대한 보호를 경찰과 군대의 임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정부는 통치권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거나 형편없이 활용한다…경제적 폭력은 전쟁의 폭력만큼 빠르거니 피비린내 나지 않지만 전쟁과 마찬가지로 참혹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자유 시장’과 ‘자유로운기업 활동’…‘자유’는 탐욕을 경제학의 주요 덕목으로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공동체와 삶을 파괴한다. 말하자면 경제의 대량살상무기인 셈이다.
개인이나 공동체가 이런 경제적 침략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기 때문에 주 정부와 연방 정부가 우리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부유한 경쟁자들이 값싼 물건을 판매할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영세 상인들이 몰락을 감수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타협하지 말아야 할, 아니 타협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타협하는 습관에 젖어 있다…우리에게 자연을 파괴하는 경제를 자유와 이윤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하는 정치인들도 있다.
현실적인 문제, 현실적인 방안?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는 장소를 존중자(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껏 썻던 계산법을 바꾸어여 한다)/‘산업을 유치해서’ 경제문제를 해결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자(지역공동체의 경제를 활성화해야 한다/규모의 경제에 정직하게 대처하자(큰 규모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토지 구석구석을 보호하는 일에 절대적인 우선순위를 부여하자(대체할 수 없는 어떤 것이 파괴될 때는 절대 타협하지 말자)
“타협은 곧 죽음이다!”
#진실을 말하는 정당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선언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우리에게는 지혜로운 말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작가로서 농사짓고 농부로서 글을 쓰다
나는 평생 내가 잘 아는 장소에서만 살아왔다.
나는 농민주의agrarian인 부모님 밑에서 자랐고, 농업주의라는 말로만 설명되는 견해와 가치관을 충실히 교육받았다. 그러나 켄터키 대학 2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농민주의라는 말을 읽거나 들은 적이 없었다…또 켄터기 대학 시절에 나는 어릴 때부터 몸에 익히 농민주의를 강화하는 지식을 많이 접하지 못했다…1964년 켄터키 주로 돌아온 후에야 비로소 나는 고향에서 소년시절에 배운 것들을 되찾기 시작했다. 고향에 돌아오니 그 전까지 이해되지 않던 농민주의 교육의 목표와 내용이 명확해졌다. 나는 목적의식적이고 열성적인 농민주의자가 되었다. 게다가 나는 이곳에 정착했기 때문에 책상물림이 아니라 실천적 농민주의자라는 자부심을 느꼈다.
농사를 잘 짓고 싶은 사람은 사고와 생활 방식을 자기가 농사짓는 땅에 맞게 바꾸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평생 배워도 끝이 없는데다 십중팔구 실수가 따른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자기 자신의 얕은 지식만 가지고 혼자 해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주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므로 희망을 가져도 좋다.
지난 50년 동안 나는 상상 속의 장소를 통해 내 고향의 자연과 마을을 세상에서 둘도 없는 장소로, 신의 창조물로, 인간의 어떤 가치 평가도 무색하게 만드는 고유의 신성함을 지닌 장소로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