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명 평전. 이병철(그물코). p274
“나는 논문 한 줄을 쓰려고 나비 3만 마리를 만졌다.”
석주명은 우리 현대사 초창기의 몇 안 되는 별이다. 특히 자연과학 분야에서 세계에 떨친 그의 업적은 일제 암흑기를 빛낸 눈부신 것이었다. 그는, 평생 75만 마리가 넘는 나비를 채집하고 측정하여 생물분류학상 새로운 학설을 제창했고, 외국인들이 독점했던 한국산 나비의 계통 분류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시종일관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가 이룩한 숱한 업적보다는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지독한 그의 후천적 노력이었다…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여러 가지 특장과 미덕 중에 ‘노력’이라는 분야에서 이토록 온몸을 내던져 학문에 몰두한 학자가 이 땅에도 있었다는 새로운 발견에 독자들도 마음이 벅차리라 믿는다.
그러나 진실로 나를 분발케 한 힘은, 그가 허망한 최후를 맞은 지 40년이 가까운 오늘날, 생물학도들마저도 석주명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허다하다는 안타까움 바로 그것이었다.
세계적인 그의 유저 『한국산 접류 분포도』
#개정 신판에 부쳐
그러나 가장 큰 즐거움은 무어니무어니 해도 석주명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1985년 이전에 비해 이제는 웬만한 사람이라면 ‘석주명=나비학자’라고 아는 세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석주명은 한국 나비의 가짓수를 정하고 그 이름을 지은 나비 분류학자이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외국인들이 그보다 50년 앞서 한국 나비를 연구하면서 범함 오류를 바로잡은 일이다. 그는 외국인(특히 일본인)들이 같은 종인데도 형질이 조금 다르다고 해서 전혀 다른 종으로 분류한 동종이명 921개 가운데 844개를 말소했다. 그는 60만 마리가 넘는 나비의 형질을 일일이 측정하고 통계를 내어 ‘개체 변이에 따른 분포곡선’이론을 창안함으로써. 동종이명들을 말소하고 한국 나비를 250종으로 최종 분류했다.
석주명 평전 발간 사유? 그에 대해 간혹 잡지에 소개된 단편적인 글들은 모두가 ‘유명했다더라’ ‘최고의 나비 학자였다더라’는 말 외에 어떤 학문 업적과 이론이 그를 유명하게 했는지 밝힌 것이 없었다. 석주명이 전문학교를 나와 중학교 생물 교사를 했다는 점을 의식해, 논문이나 업적보다 학벌과 학연을 더 따진 우리 학계의 몹쓸 풍토 탓이다!
더 심하게 말한다면, 대학 강단에 서는 이들도 거의 석주명의 이론을 몰랐다. 석주명이 다룬 분류학이 오늘날로서는 특별이 연구할 일이 없는 기초적인 분야라는 이유도 있겠고, 전공 분야가 아니어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는 변명도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다른 부문에서처럼 이 역시 ‘우리 것’과 ‘우리 사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하찮게 취급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석주명은 너무나 큰 별이다? 일제 감정기, 1)우리보다 앞서 우리것을 연구한 일본인 학자들을 실력으로 눌렀고, 2) 우리것을 탐구함으로써 겨레의 자존심을 지켰으며, 3)그 방명 학문 연구에 디딤돌을 놓아 오늘날까지도 성과가 바래지 않고 있다.
국학이란 국가를 주체로 한 학문이니 국가를 가진 민족은 반드시 국학을 요구하는 것이다. 종래에 국학이라면 한문책이나 보고 읽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지마는, 국학이란 인문과학에 국한될 것이 아니고 자연과학에도 관련된 것으로, 더욱이 생물학 방면에서는 깊은 관련성을 발견할 수가 있다. 조선에 많은 까치나 맹꽁이는 미국에도 소련에도 없고,…이처럼 자연과학에서는 생물학처럼 향토색이 농후한 것이 없으니 ‘조선적 생물학’ 내지 ‘조선 생물학’이라는 학문도 성립될 수가 있다.-석주명,’국학과 생물학’에서
#오빠의 혼을 짊어지고
“이거이 내 생명이디요. 이거이 없어디문 난 둑은 목숨이나 마탄가디야요.”
사실 석주명의 말마따나 그 배낭 속에는 그의 ‘혼’이 들어 있었다. 1931년부터 20여 년 동안 연구를 총결산하는 『한국산 접류 분포도』의 원고인 지도 5백여 장이 들어있었던 것이다…어느 미국인은 이것을 보자마자 “당신이야말로 닥터(Dr.)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 지도를 가지고 미국으로 간다면 어느 대학에서나 박사학위를 드릴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나비 연구에 일생을 걸다
“이것 보게. 꼭 대학 교수만이 학자인가? 교수란 살아 있을 때뿐이지 진정한 학자의 명예는 그 사람이 남긴 학문 업적에서 나오는 걸세. 학벌이나 직함이 문제가 아니고 요는 업적이야. 그것은 노력만 하면 충분히 해낼 수 있어.”
“자네, 조선 나비를 한번 연구해 보게. 그 방면은 아직도 미개척 분야나 다름없으니 이제부터라도 머리 싸매고 노력한다면 자네의 학구 태도로 보아 충분히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 있을 걸세.”
“자네는 조선 사람 아닌가. 마땅히 남이 손대기 전에 자네 힘으로 조선 나비를 연구하는 것이 옳지 않겠나. 내가 장담하지만 십 년만 죽어라고 하면 틀림없이 자네는 조선 나비에 관한 한 세계적인 학자가 될 수 있을 걸세. 자, 그런데도 주저할텐가?”
’10년 공부’ 교훈? 광복 덕택에 나는 우연히 서른 안팎의 나이로 젊은 영문학 교수가 되었고 무엇인가 업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때 20년 전 석주명 선생이 하신 말씀(남이 하지 않는 일을 10년간 하면 꼭 성공한다. 세월 속에 씨를 뿌려라. 그 씨는 쭉정이가 되어서는 안 되고 정성껏 가꿔야만 한다)이 내 머리에 되살아났다.
그러나 남이 하지 않는 일, 즉 쭉정이가 아닌 씨를 고르기가 무척 어려웠다.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나는 헤밍웨이 연구에 착수했고, 그 뒤 그것을 발전시켜 20년이라는 세월을 바친 결과…
어느날 생물시간이었는데 선생님은 파브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해 주셨다.
파브르는 대학 교수도 아니고 아주 벽촌의 중학교 생물 선생이었는데 『파브르 곤충기』라는 업적으로 말미암아 학술원상을…그러나 파브르는 상을 타러 가지 않았다. 자기가 상을 타러 가면 그 동안 아이들을 가르칠 사람이 없겠기에 모든 명예를 포기하고서는 언제나처럼 아이들을 가르쳤다. 더욱이 그는 수상에 관한 얘기를 전혀 입 밖에 내지 않아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이를 한 당시의 프랑스 대통령 푸앵카레는 너무나 감격하여 몸소 그 상을 들고 가서 전했다는 이야기였다.
석주명은 사람들이 “나비는 잡아 무엇에 쓰시려우?”라고 물으면 그저 빙그레 웃었다.
그의 학문을 조금 이해하거나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물었을 때에야 비로소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남이 하디 않으니까 내가 하디요.”
“왜 다른 사람이 하지 않습니까?”
“돈이 생기디 않아서디요.”
“어째서 돈도 생기지 않는 일을 합니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마음 속으로만 한다.
#놀라운 발견, 변이곡선 이론
무턱대고 시작한 나비 연구, 많은 개체를 수집할수록 점점 더 많은 어려움에 부딪쳤다. 지도 선생은 물론 전문 서적이 없었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도 몰랐다…그가 보기에는 크기나 무늬에 약간의 차이기 있을 뿐 분명히 같은 종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나비가, 도감에는크기나 모양이 조금씩 다른 여로 종류의 나비로 분류되어 제각각 다른 이름을 달고 있었다. 곤충 연구의 출발점인 분류학, 그것도 어느 개체가 어떤 이름을 가진 것인지 알아보는 데서부터 꽉 막혀버린 것이다.
문헌도 없고 누구의 지도도 받음이 없이 출발한 수년간의 연구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과학적이었고 아주 훌륭한 방법이었다. 문헌이 없어 학술상의 명칭은 모른다 할지라도 각 종류의 상태, 특히 개체 변이에 대해서는 꽤 자세히 알게 되었다…일개 시골 중학 교사인 내가 당대 첫손 꼽는 곤충학자요, 농학박사이자 이학박사인 그의 저서를 정정한다는 것은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나의 풍부한 표본 자료가 가르쳐 주는 바로는 그 책뿐만 아니라 그 뒤 손에 넣은 다른 책들에서도 많은 오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워낙 개체를 많이 수집해 양 극단 사이의 중간치 개체도 많이 볼 수 있었던 석주명은 그것들이 모두 같은 종임을 알아보았다…이런 사실은 석주명처럼 수천 수만 표본을 채집해야만 발견할 수 있지, 몇십 마리 정도를 잡아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다!
엉터리 ‘신종 발견’ 행위를 당시의 일본 학자들이 많이 했다? 석주명은 그것이 같은 종류의 개체를 많이 수집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무지이고, 그 무지는 바로 ‘명명규약’의 결함에서 왔다고 알게 되었다.
동명이종. 석주명은 생애에 한국 나비의 동종이명을 844개나 말소했는데. 그 가운데 마쓰무라가 명명한 것이 150개로 제일 많았다.
그래서 나는 생물학에서는 분류학이 입구요, 이 분류학은 개체변이 연구를 토대로 하는 것이라야 된다고 깨달았다.
그리하여 엄청난 채집량에 의존하는 ‘석주명식’ 분류학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가 “논문 한 줄을 쓰기 위해 3만 마리가 넘는 나비를 만졌다”라고 말한 데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었다.
‘배추흰나비 앞날개의 변이곡선’ 이론은 분류학상으로나 생물 측정학상 너무도 유명한 이론이다? 도합 16만 7,847마리의 배추흰나비 사용!
이로써 이 논문은, 모든 분류학·측정학은 실험 개체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불확실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석주명의 주장을 뒷받침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분류지리학을 개척하다
지역을 통해 땅과 나비의 관계를 아는 것, 나비의 분포와 활약을 알아내는 것
정말로 산 공부를 하려면 시간을 아껴야 한다. 부스러기 시간, 토막 시간을 활용하지 못하면 공부는 하나마나다.
이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낭비하는 법이 없었다. 아주 가까운 친구가 찾아와도 10분 이상 시간을 낸 일이 별로 없었다.
이 이론은 오늘날에도 생물 분류학의 기초 이론으로 존경 받는 것으로서, 그가 1만 마리 이상의 개체를 실험하지 않았더라면 여태까지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는 이론이다.
#’제주도 박사’까지
『제주도 방언집』
#백두대간을 밝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조선 시대 김정호를 제외하고는 한국의 등산가 중에서 석주명만큼 우리나라의 산을 샅샅이 훑은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
#에스페란토의 별
248종에 달하는 나비에 제각각 알맞은 이름을 붙이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 작업은 우리말에 대한 애정은 물론 어학을 비롯한 다방면의 넓은 지식, 기지와 센스와 유머를 갖춘 풍부한 감성 등 삼박자를 갖추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다.
실제로 이 책에 적힌 나비 이름을 보면, 어떤 것은 학술적인 근거에 의해, 또 어떤 것은 유머러스하게, 또는 미적인 감각에 따라 적절히 이름이 지어져 우리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것이 많다. 굴뚝나비_굴뚝처럼 까만색이라서, 배추흰나비, 처녀나비,모시나비,표범나비,풀흰나비,줄흰나비,유리창나비,이른봄애호랑나비,산제비나비,범나비(호랑나비),지옥나비_지옥에 간 것처럼 몸이 오싹해지는 험준한 고산에 올라야 겨우 볼 수 있다,산지옥나비_고원지대에서 쉬노라면 나비 무리가 얼굴이나 손에 날아와 앉아 땀을 빨아먹는다,상제나비,시가도귤빛부전나비,씨-알붐나비,암고운부전나비,팔랑나비,부전나비
에스페란토를 배우면 한편으로 평화의 전사가 되어 세계 평등 운동에 공헌하게 됩니다. 민족 간에 언어의 평등이 없이는 세계 평화를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재도 국제 회의 때마다 용어 문제로 늘 두통을 앓고 있습니다. 결국 강대국어가 용어로 채택…채택된 용어를 사용하는 민족, 결국 강대 민족이 유리할 것은 물론입니다. 평등이 없는 곳에 평화 없습니다.
#꽃 모르는 나비학자
경제적으로 무능하고 가정을 돌볼 줄 모르는 무책임한 남편?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였는데, 아무래도 내 직업을 탐탁히 여기는 것 같지 않아서, 내가 어떤 직업을 갖기를 바라느냐고 물어봤지. 그랬더니 서슴없이 큰 도매상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주면 좋겠다고 하지 않겠어? 난 그때부터 그 사람에게 정을 느낄 수가 없었어. 그 사람은 늘 내게 돈도 못 벌어 오면서 공부만 한다고 트집을 잡으니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