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이반의 산 이야기. 최성현. p311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짚 한 오라기의 혁명』이란 책을 읽고 크게 감동, 두세 시간 깊은 고요 속에서 세상을 달리 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체험으로 하루 만에 다른 사람이 된 그는 바로 직장을 그만 두고, 그 당시 집 한 채를 임대하여 공동 생활을 하던 유학생 시오다 교오꼬와 함께 후쿠오카의 다른 책 『자연농법』을 『생명의 농업』 이란 이름으로 번역 소개함과 동시에 1988년 3월에 전기와 전화가 없고, 이웃집도 없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만 5년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원시 생활에 가까운 삶을 산다. 이 기간동안 그는 “미숙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모임이었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자연학교’를 만들고 참여하는 한편,
“근세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한국 생명운동의 대부”로 알려진 무위당 장일순을 만난다. 그에게 장일순은 “자주 찾아가 뵙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럴싸해 보이지만 요즈음과 달리 아무도 자연환경의 중요성을 모르던 시절 그의 귀농은 누가 봐도 바보나 하는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산속에서 나무에 안겨 산다. 철 따라 옷을 갈아입는 나무 덕분에 주변 풍경은 늘 새롭다.
#내 친구, 최성현_이철수(판화가)
깊은 산 속 그의 외딴집에는 울도 없고 담도 없습니다. 대문도 없지요. 그 흔한 문패도 없어서, “여기가 최성현이 사는 데로구나!” 할 수도 없게 생겼습니다.
이곳은 땅을 갈지 않고, 풀과 나무도 될 수 있는 대로 그대로 두고 씨앗을 뿌리는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 곳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그냥 내버려 둔 땅 같지만 곳곳에 여러 가지 씨앗을 뿌리고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자연에 손을 적게 대는 게 이 농장의 방식입니다. 재배를 최소로 줄이고 절로 나는 것으로 먹을거리를 해결해 가려고 하는 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이 농장의 이러한 시도가 지켜지도록 여기서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손대지 말아 주셔요.
-바보 이반 농장
긴 헛간이 곁에 있는데, 소박한 연장들이 걸려 있습니다. 눈 씻고 보아도 농기계는 없습니다. 무경운, 무제초의 자연농법으로 텃밭을 가꾸는 그에게 농기구도 그리 큰 소용은 없는 터입니다.
작은 새 한 마리가 공명이 큰 울음소리를 내서 솔깃하게 하던 것을 들었습니다. 그 새의 이름을 저는 모르고 그는 압니다. 산골짝에 번저나듯 울리는 그 새 소리처럼 산골 최성현의 이야기가 멀리 크게 울려나게 되면 반갑고 기쁠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소리 마다할 사람이 있나요.
#산으로 가는 길
사람의 길과 산의 길. 산에는 풀, 나무, 곤충, 새, 야생동물, 민물 생물들이 열쇠와 돈과 책과 무기를 만들지 않고 살고 있다. 그런 것을 가진 인간과 그들 중 과연 어느 쪽이 바보일까?
매직 아이? 초점을 바꿔야 마술처럼 보이는 신기한 입체 그림들
산을 볼 때도 ‘매직 아이’와 같은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산에 가 보았더니 나무밖에 없더라.’는 식이 된다.
지구상에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종류의 생물이 살고 있지만, 삶의 방식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인류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 그 나머지 생물들의 삶이다. 앞의 것은 많은 것을 바꾸고 새로 건설한다는 특징, 요컨대 흔적을 남기는 반면 뒤의 것은 남기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문명? 지구는 인간이 남긴 흔적으로 가득하다
하등생물? 그들은 학교와 사원을 짓지도 않고 남을 소중히 여길 줄 알고, 침묵할 줄 알며, 가만히 지켜볼 줄 알고, 변함없이 사물을 대할 줄 안다. 경전을 만들지 않고도 무소유를 실천하며 살아간다. 병원 없이도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인간은 그들을 깔보며 거뜰떠보려고도 않는다. 그들의 도움으로 살아가면서도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마워할 줄도 모른다.
식물과 영혼으로 대화를 하는 돈후앙이란 인디언이 있다. 그는 식물 공부를 위해 자신을 찾아온 한 백인 식물학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식물을 채취해야 하는 사람은 먼저 식물에게 그 까닭을 말하고 사과해야 하며, 또 언젠가는 자신의 몸뚱이가 그들의 양식으로 주어질 것임을 깊이 믿도록 신뢰를 주어야 한다.”
자연의 신비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이 세상에서 가장 잘난 것은 인간이라는 자만심을 버리고, 만물을 존중할 줄 아는 마음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돈후앙은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나만의 장소? 왠지 끌리는 곳. 그곳에 앉거나 누워 보라. 그렇게 해 보면 같은 곳인데 모든 게 다르게 보인고, 다르게 들린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신기한 일이다. 보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인데 같은 사물이 다르게 보이는 것도 재미있다. 정지 상태에서는 움직일 때는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욕심을 버려라, 성내지 말라, 이미 충분할 줄 알아라, 남 탓을 하지 말라, 감사하며 살라, 남과 비교하지 말라, 이웃을 섬겨라….이런 말을 우리는 삶의 원칙으로 읽고 듣는데, 실은 나무와 풀과 바위가 말없이 그렇게 살고 있다.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
겨우내 나무에 붙어 있던 낙엽이 지는 소리, 마른 나뭇가지가 떨어지는 소리, 들쥐가 움직이는 소리 같은 것들이 잊을 만하면 난다. 여백이 훨씬 더 많은 이 봄날의 연주는 뛰어난 명상 음악이다.
이렇게 산속의 목숨붙이들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 순간 문득 시력이나 청각의 한계를 넘어선 체험이 우리를 찾아온다.
자연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악한 자가 될 수 없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이용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 속에서 세상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배워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대지 전체가 어머니의 품이고, 학교이며 교회라고 믿는다. 대지 위의 모든 것이 책이며 스승이고 서로를 선한 세계로 인도하는 성직자들이다.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장일순의 사형수와 쥐 이야기? 이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자연 만물이 단순한 관찰 대상이 아니라 그것과 하나가 돼서 어울리며 경험할 수 있는 세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는 ‘나’를 넘어서야 하는 것인데, 그게 잘 아시다시피 무진장 어렵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그것 아닌가. 돈으로도 안 되고 권력으로도 얻을 수 없다.
가끔 손등이나 어깨에 앉는 나비와 잠자리. 그때는 참 기쁘다. 그들이 가까이 곁을 허락해 주었다는 게 참으로 고맙게 느껴진다.
#밥 그리고 집-풀과 나무
가만히 바라보아야 하는 까닭
산은 빈집이 아니다? 많은 생물이 살고 있다. 남의 집이나 마을, 혹은 다른 나라에 갈 때처럼 산에 갈 때도 나름의 예절을 갖춰야 한다.
자연 환경의 파괴와 오염에 대한 해법? “자유와 평등의 폭을 이제는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에까지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내쉬,『자연의 권리』
다른 길을 걷는 형제, 밭과 산
인체에 비유해 보면 흙은 지구의 속살이다. 그 아래 바위는 뼈고 그 안의 마그마는 혈액이다. 산이나 들을 잘 살펴보면 지구의 속살이 드러나지 않도록 풀과 나무가 잠시도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켜보는 이가 없건만 잠시도 한눈을 팔지 않는다.
사람은 풀과 나무를 잘라내고 그곳에 집과 도로와 광장과 학교와 병원과 운동장과 절을 짓는다. 논밭을 만든다. 마을을 건설한다. 그 밖의 동물, 곤충이나 새나 야생동물들은 숲을 그대로 마을로 삼고 살아간다. 자연이 만들어 주는 마을에 손을 대지 않고 그냥 산다. 그래서 사람의 삶은 늘 바쁘고 복잡한 반면 산속 동물들은 단순하고 한가하다.
나무에게 절하다
산은 훌륭한 농부다.
화학비료를 안 쓸 뿐 아니라 땅을 갈지도 않는다. 농기계 또한 필요 없다. 호미 한 자루 필요 없다. 김매기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땅은 점점 비옥해지고, 숲은 무성해진다(자연농법의 원리)
산에서 나물을 뜯다 보면 재배를 모르고 수렵과 채취로 살았던 원시인들이 더욱 산을, 자연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원시인들은 산이 있어, 자연이 있어 비로소 생존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인류는 산이나 자연이 없어도 사람이 만든 논이나 밭, 과수원, 목초지를 통해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는 반면 원시인들에게는 그런 인공적인 공간이 없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산이나 자연에서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원시인들은 산이나 자연에 감사하며, 그것을 소중히 지키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잎, 하늘이 차리는 밥상?
나뭇잎! 언제 보아도 좋다. 늘 푸른색 한 빛깔이건만 질리지 않는다. 늘 편안함을 준다. 위대한 일을 하면서도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는다.
나무와 풀은 푸른 잎으로 지구 위 모든 벌레와 초식동물과 새 따위를 기르고, 낙엽으로 땅 속에 사는 모든 생물을 먹이고 있다. 나무와 풀은 하늘이 차리는 엄청난 크기의 밥상인 것이다.
풀 이름 익히기
잘 아는 사람에게 배우는 방법. 만약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당신을 복이 많은 사람이다.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나뭇잎 접시
파란색 나무잎이나 풀잎 접시에 따 담은 빨간 산딸기나 검붉은 산오디는 사람의 마음을 사기에 좋다
나무 친구
나무에는 동물이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새들에게는 가지를 내어 주고, 벌레들에게는 잎을 먹이로 준다. 그렇게 하면서도 일체 말이 없다. 사람들은 드런 나무를 보고 위안을 받고 용기를 얻는다.
인류를 위한 보다 좋은 치료법을 찾기 위해 병원을 그만두고 숲과 들로 나섰던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바크는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지혜란 인간의 지성을 통해 얻어지는 게 아니라 생명과 자연의 단순한 진리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풀밭에 조용히 앉아 있어 보라. 그러면 곧 식물들이 어떻게 행성들의 움직임에 조응하는지, 즉 어떻게 달이나 태양의 움직임, 심지어는 더 멀리 있는 별들에게까지 반응하여 꽃을 피우는지 알 수 있다.-『식물의 정신 생활』
지구의 웃음? 꽃은 지구의 웃음이다. 꽃이 없는 지구는 너무 근엄하다.
채집의 삶? 바보 이반 농장? 자연에 손을 적게 대는 게 이 농장의 방식입니다. 재배를 최소로 줄이고 절로 나는 것으로 먹을거리를 해결해 가려고 하는 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숲의 오작교-곤충
곤충채집? 이 책에서는 잡지 않는 방법을 권한다. 잡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는 방법을 권한다.
“사람만이 하늘이 아니라 곡식 하나도 한울님이다 이 말이야.돌 하나도, 벌레 하나도 한울님이다 이 말이에요.”-장일순,『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산에는 해충이 없다
익충이니 해충이니 하는 것보다 정작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숲은 곤충이 만든다는 사실이다. 곤충은 모든 생물의 집이며 밥인 숲을 지키고 청소하고 번창시키는 일을 한다.
‘밥이 곧 하늘‘?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무엇인가를 먹어야만 생명을 지켜갈 수 있다.
산은 누가 청소하는가? 늘 깨끗하다. 물론 깨끗하지 않은 산이 있지만 그런 산은 열이면 열 모두 사람이 원인이다.
#숲 지킴이-산새
어딘가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 있으라. 새들이 보고 “저거, 죽은 거 아냐?” 라고 하면 최고다. 하여튼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에 따라 보이는 세계가 바뀐다.
새는 사람들에게 곁을 잘 주지 않는다. 시력이나 감지 능력이 사람보다 월등하게 뛰어나다.
나무를 심는 일은 집 밖에 오디오 시스템을 설치하는 것과 같다? 나무를 심으면 새가 날아와 깃든다. 와서 우리에게 싫증나지 않는 자연의 노래를 불러준다.
벌레가 늘 신선한 풀잎을 먹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새들이 곤충의 과잉번식을 막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는 새 없는 세상의 벌레처럼 살고 있다. 믿어지지 않지만 매일 150종류의 생물이 멸종되고 있다고 한다.
누가 새를 깨우는가? 놀랍게도 그것은 나무라 한다.
해가 뜨기 시작하는 것을 가장 먼저 아는 것은 나무다. 그리고 기쁨으로 가볍게 몸을 떤다. 해를 향한 나무의 그 떨림이 새를 깨운다고 한다…나무의 기쁜 마음이 전해졌는지 새들의 노래 또한 더없이 밝다.
새들이 끊임없이 지저귀는 이유? 산 속의 시골 아낙네들처럼 소리를 내어 서로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소리로 의사를 주고받고 있는 게 틀림없다.
시체 포즈? 땅 바닥에 눕기
언제부터인가 땅은 더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사람들의 머리를 지배하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땅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꺼린다. 그들은 깔개를 깔지 않은 맨땅에는 앉지 못한다…그만큼 인류의 삶은 원래의 자연으로부터 멀리 벗어난 형태로 진행돼 왔다. 건강하게 살아 있는 땅이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를 위험하고 더럽게 오염된 흙이 차지하게 된 것도 원인의 한몫을 하고 있다.
의자에 앉기를 거부하는 인디언? 야만스럽고 무지한 행동이라고 비난하는 백인들. 이유는 생명을 주는 땅으로부터 그만큼 멀어지기 때문이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해마다 사라졌다 나타나는 철새에 대한 생각? 딱새가 울새로 둔갑했다. 이 황당설은 여러 세기 동안 지식인들에게 의심없이 받아들여졌다.
철새들은 해와 별자리를 나침판으로 삼고 있다. 낮에 이동하는 새들은 해를, 밤에 이동하는 새들은 별자리를 이정표로 삼는다. 놀라운 일이다. 별자리를 보고 수천 킬로미터나 여행을 하다니!
별자리 해독법 같은 이런 놀라운 능력은 갓 태어난 새끼 때부터 지붕 없는 둥지에서 하늘과 별을 보며 자라는 데서 얻어지리라.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지붕으로 하늘을 가리고 사는 사람은 어림도 없는 능력이다.
산은 무료 종합병원이다. 교통사고, 살아남은 게 다행인 환자. 퇴원 후 네팔행, 히말리야 능선을 석 달에 걸쳐서 천천히 걸은 것뿐. 완전히 건강을 되찾았다
“나는 남들처럼 그냥 산이 좋아 가는 일이 없고, 늘 뭔가를 얻으러 가지만 나처럼 산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마 없을 거예요. 산에 가면 그렇게 좋울 수가 없어요. 마음도 편안해지고, 몸도 건강해지고 늘 뭔가를 얻어 올 수 있고…고마운 산이지요.”
이상구 박사의 건강한 생활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8가지?
건강식/적당한 운동/ 맑은 물/햇빛/맑은 공기/휴식/신뢰
그 모든 것을 산에서 얻을 수 있다
#야생의 삶-야생동물들
사람은 나무를 꺾고 땅을 깍아 길을 내지만 야생동물들은 나무나 풀, 바위 사이로 난 작은 틈을 이용하여 다닌다. 자신을 위해 남을 기르거나 헐지 않는다. 그것이 사람의 길과 동물의 길의 차이다.
어떤 사람이 매일 반나절을 사랑하는 마음에 가득 차서 숲 속을 산책한다면 게으름뱅이로 낙인 찍히리라. 그러나 하루 종일 투기꾼으로 시간을 보내며 숲을 베어 내고 땅을 평평하게 밀어 버린다면 그는 근면하고 진취적인 시민으로 평가받으리라. 마치 도시가 숲 자체에는 흥미가 없고 그보다는 숲을 베어 내려고만 하고 있듯이!- 헨리 D.소로우 『소로우의 노래』
도마뱀은 발가락이 앞뒤 다 다섯. 도룡뇽은 뒤만 다섯 앞발가락은 넷이다
야생동물은 모두 자연식을 하고 있다. 최상의 자연식을 하고 있다. 냉장고가 없기 때문에 제철음식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의 음식을 먹고 있다…농사를 짓는 농부도 이처럼은 못 먹는다.
통째로 먹는다. 그들은 음식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다
모든 것을 날것으로 먹는다
원주민들의 식생활은 자연식의 방식에 가까웠다. 제철에 그 지방에 난 것을 알뜰하게 먹었다. 수렵 채취의 삶은 낭비를 허락하지 않는다.
삶에 필요한 지혜와 깨우침을 얻는 장소
“우리는 어떤 문제가 있으면 산에 옵니다. 산에 와서 뭘 하냐 하면, 아무 말 없이 산을 오르고 내려올 뿐입니다. 그런데 그러다보면 문제의 해답이 얻어지더군요. 절로 풀어진다고나 할까…”
#또 하나의 세계-민물의 생물들
물속 생물을 자세히 보고 싶을 때. 준비? 조용히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산길을 버리고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는 방법
산길에서보다 훨씬 다양한 종류의 생물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물을 좋아하는 식물이나 곤충을 볼 수 있다.
어린시절 시골살이. 맨손으로 물고기 잡기 추억, 돌이켜보면 그때의 근심걱정 하나 없던 그 시간이 더욱 좋았다…자유나 행복은 아는 것과 가진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그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정신이 번쩍 나는 그런 책 좀 없을까요?”
“나는 답답하면 책보다는 밭에 가서 흙을 만집니다. 그러면 어느 사이 마음이 평안해지고는 합니다. 그 맛을 버릴 수 없어 시골 교회에서 아내의 구박을 받아 가며 칠 년이나 지내고 있습니다.”
사라진 가재가 가르쳐주는 것? 인간의 삶이 통째로 맑은 물을 더럽히는 쪽으로 발전돼 왔다. 그것을 사라진 가재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문화? 산의 형제들은 사람과 달리 자연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자취랄 게 없다. 동물의 수에 비하면 놀라운 삶이다.
한편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살다 간 곳에는 황무지가 남는다. 그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다 떠난 곳에는 사막이 남는다. 4대 문명의 발상지를 보라. 사람은 흔적 남기기를 좋아한다.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일부터 큰 사원, 거대한 성, 어마어마한 궁전, 넓고 곧은 길, 그리고 보다 큰 도시….이런 것을 사람들은 위대하다 여긴다.
남기는 쪽과 남기지 않는 쪽, 자연을 변형시키며 사는 쪽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쪽, 과연 어느 쪽이 현명한 것일까? 어느 쪽이 위대한 것일까? 어느 쪽을 ‘영장’이라고 해야 할까?
알래스카의 인간의 흔적이 없는 지역…19세기의 인간이라면 “뭐야, 이 사람들은 알맹이가 하나도 없잖아.”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하면 1만 년이나 거기서 복잡하고 풍부한 지적, 정신적, 영적 문화를 영위하면서도 조금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위업이다….우리들도 미래를 위해 손을 대지 않는 자연을 남기는 것을 이 문명의 기념비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게리 스나이더, 호시가와 준의 『환태평양 인너넷트 기행』
캐나다 북서부에서 살았던 유콘과 같은 민족은 피라미드나 스톤헨지에서 볼 수 있는 대규모의 기념비는 만들지 않았지만 그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중요한 것을 남겼다. 그것은 어쩌면 인류가 성취한 것으로서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유산이란 몇천 년 동안 인간 생활을 지키고 존속해 오면서도 기본적으로 변함없이 지켜 온 광대한 대지 그 자체다. 유콘 족과 그들의 조상은 자연에 대한 엄한 행동 규범에 따라 땅 지킴이 노릇을 다해 왔다. 그들의 훌륭한 삶이 있어 비로소 그처럼 위대한 토지 유산이 헐벗지 않고 풍요롭게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리차드 넬슨
우리가 우리의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것은 어떤 큰 건물보다 오염되지 않은 건강한 땅과 물과 공기와 숲이다. 인간이 지구에서 오래도록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구의 나이를 365일로 환산한 ‘코즈믹 캘린더’. 이 달력에 따르면 인류가 지구 위에 나타난 것은 일 년의 마직말 날인 12월31일, 그 날 중에서도 오후 10시 30분이다.
기후의 변화?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산이다. 기후에 변화에 따라 눈에 띄는 생물이 바로 바뀐다. 마치 공기 속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듯이!
볼 게 뭐 있다고 산에 가? 산에 가 봐야 나무밖에 더 있어? 흔히 그렇게 생각하지만 산에 사는 형제들을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 힘만 세다고 제일인가. 가진 것이 많다고 일등인가. 인간이 최고라는 생각은 큰 착각이다. 그런 교만한 마음에서 벗어나 보면 산에 사는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가 우주의 진리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지구에서 지금 인간이 어떤 모양으로 살고 있는지, 그 모습을 인간이라는 동굴 바깥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