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쉬 공동체. 브래드 이고우(생태마을 연구회). p485
The Amish in their own words그들 자신이 말하는 아미쉬
아미쉬의 목소리로 듣는 그 치열한 삶의 기록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기독교 공동체
#살아 있는 생태공동체, 아미쉬
“미국이라는 산업사회의 한복판에서 지배적인 산업문화와는 정반대의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다. 이 사회에서는 개인주의보자 공동체 정신이, 경쟁보다 협동이, 물질적 소유보다 영성이, 능률적인 노동보다도 건강한 일이 더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는 농업중심생활과 적정기술의 이용에 대한 도덕적인 헌신이 있고, 그와 함께 도시적 생활양식과 공장기술에 대한 도덕적 거부가 있다.
전통적인 검은 옷을 입고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그림 같은 모습으로 달리는 아미쉬 사람들은 흔히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산업사회의 문제 대부분을 피해왔으며, 장래에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대안적인 존재방식을 제시하고 있다.”-미국의 사회학자, 토마스 포스터, 『귀농통문』 1997년 여름호
“아미쉬들은 여하한 종류의 정부농업보조금이나 복지금도 받기를 거부한다. 아마도 대표들을 의회에 보내어 사회보장제도에서 자기들을 제외해 달라는 청원이 받아들여진 것은 미국에서 그들이 유일한 집단일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보살피는 것이 옳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노인들이나 신체장애자들은 양로원이나 공공기관으로 보내어지지 않고 아마쉬의 대가족 구성원들에 의하여 집에서 보살펴지는 것이 관습화되어 있다. 아마쉬들은 교육이나 직업에서 편협한 전문화를 피하는 까닭에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다양한 과업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 거의 모든 성인 남자는 농사일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공동체 모임을 이끌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사실상 모든 아미쉬 여성들은 텃밭 가꾸기, 식품저장, 양재, 조각이불 만들기를 할 수 있고 말 몰기나 그밖의 일을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아미쉬 공동체의 자치, 자급자족, 적정기술의 이용, 화석연료에 대한 비의존, 인구분산, 소비지향 교육으로부터의 자유로움, 그리고 구조적 실업으로부터의 자유로움과 같은 특성들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전혀 모르던 사실을 새로 알게 됐을 때의 기쁨이나 흥분은 대단하지요! 아마쉬들은 참 행복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느리게, 단순하게, 소박하게,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몸을 움직여 땀흘려 일하며 서로 도우면서 함께 모여 즐겁게 살아간다면 이보다 더한 행복이 없겠지요. 요즘 많이들 애기하는 생태마을이나 생태공동체가 다른 게 아니고 바로 이런 것일 텐데요. 삶에 대한 두려움도 우리보다는 덜할 것 같고 치열한 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 같은 것도 없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신을 섬기며 살아간다
…그들이 특별한 포교활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자고 일어나고 일하며 살아가는 일상자체를 종교적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집이 교회고, 밭이 교회고, 쟁기질하고 소치는 일이 기도인 셈입니다. 그들에겐 특정한 교회건물도 없고 직업적인 성직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읽는 유일한 성경이라고 들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하느님의 말씀에 반하는 바를 읽지 않도록 좀더 노력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편지글은 그들의 종교가 어떤 것인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말과 마차를 본 건 난생 처음이야!”라고 말하는 호주에서 온 한 방문객을 보았다.
그들은 세인들의 관심을 끌 생각이 전혀 없음에도 세상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아마쉬를 동시대를 살고 있는 다양한 많은 사람들처럼 보통의 이웃으로, 즉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이다….많은 방문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아미쉬에 대해 좀더 정확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나는 사람들이 아미쉬를 획일적인 어떤 단일한 집단으로 보지 않기를 바랐다. 단지 나는 그들을 미국과 캐나다 등 여러 정착지에서 살고 있는 다양한 공동체나 가족, 평범한 개인으로서 보아주기를 바랐다. 그러려면 아미쉬에 대한 새로운 책이 필요하다는 것, 또는 아미쉬는 아니지만 아미쉬로 인해서 삶의 태도나 방향을 바꾼 누군가의 개인적인 저작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아미쉬 발행 간행물…하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무엇보다 『패밀리라이프』였다. 나는 『패밀리라이프』를 통해, 매일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복잡하기 그지없는 현대 산업사회 속에서 자신들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며, 때때로 구체적인 실현 방법을 놓고 서로 의견이 상충하기도 하는, 있는 그대로의 아미쉬를 볼 수 있었다. 나는 『패밀리라이프』를 읽으면서 그들의 뛰어난 유머를 좋아했고, 때로는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눈물을 쏟기도 했다.
‘아미쉬 자신이’ 아미쉬에 대해 말하는 책, 수백 년 전으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21세기에 있는 현재의 생생한 목소리
#패밀리라이프는 무엇인가?
가정은 교회의 심장입니다. 국가도 기초엔 가정이 있으니까요. 가정이 튼튼하고 건강하면 교회도 그럴 것이고, 공동체도 그럴 것이고, 국가 또한 그럴 것입니다. 가정이 허물어지면 모든 것이 고통스럽게 변하겠지요.
가정생활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하루하루의 일상 속에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우리는 우리가 매일매일 하고 있는 일이야말로, 신이 당신을 섬길 수 있도록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기회라는 것을 충분히 깨닫고 있는가? 매일매일 받고 있는 축복을 충분히 향유하고 있는가? 모든 일들에 충분히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이것이 『패밀리라이프』가 생겨난 이유입니다. 사유와 관념을 새롭게 해석하게끔 하는 하나의 도구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시시콜콜한 부분에서는 허구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문제가 되는 부분에서는 허구가 아니었습니다. 그 얘기 속에 묘사된 태도, 문제점, 실패, 습관, 이 모든 것이 진실이었습니다. 어쩌면 진실 이상의 이야기였을지도 모릅니다.
#아미쉬, 간략한 역사
아미쉬는 마틴 루터의 역사적인 종교개혁 후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했다.
『순교자들의 거울』 1660년 간행, 대부분이 비폭력주의와 박해에 대한 이 이야기는 증오와 폭력 속에서 사랑과 평화를 실천하며 잔혹한 대가를 치른 신앙고백에 관한 것들이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아미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도전의 양상은 변화하고 있지만, 몇 세대에 걸쳐 그들에게 닥쳐오는 새로운 도전을 극복해왔으며 이에 따라 그들의 신안은 더욱더 깊어만 갔다.
우리는 순교자의 후예인가?
만일 우리가 편리, 쾌락, 사치, 여가 등을 추구하는 세속의 정신을 즐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세속 통치자의 후손일 뿐이다. 만일 그러고도 순교자들을 우리 조상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기만하는 짓과 다름없는 길이다. 진실은 매우 단순하다. 우리가 그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들의 후손일 수 없다.(“관점과 가치”, E. 슈톨, 87-8/9)
아미쉬의 믿음과 원칙
1. 163년 도르트레히트 신앙고백 18개 항목의 고수
2. 세속의 유행으로부터 교단을 지키기 위한 의복과 생활양식의 제한. 그외 필요한 부가적인 기준
3.교단의 운영뿐 아니라 일상에서의 변화에 대한 거부. 교회는 변하지 않아야 한다. 다만 그 변화가 명백하게 필요하며 방향이 올바른 경우에만 동의할 수 있다.
4.공동체를 보장할 수 있는 기반. 특정인이나 몇몇 사람들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만약 주교나 성직자들이 내일 부름을 받아 죽게 된다 해도 우리는 다른 이들이 그 빈자리를 채우고 교회는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주하는 이유가 절대로 이기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그 모험은 실패할 것이다.
공동체, 한 지역에 평균 150명의 성인과 아이들이 살고 있다(150? 던바넘버)
#현대를 살아가기
전통? 규율을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전통을 내팽개친다면, 그것은 우리로서는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우리에게 대체 이보다 더 큰 위험이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교단의 규범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의 바탕이 되는 성서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아미쉬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텔레비전을 없애버리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은 몇 분이나 되십니까?” 다시 쉰두 개의 손이 올라갔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텔레비전을 치워버리실 분은 몇 분이나 되는지 궁금하군요.” 손은 하나도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아마쉬가 의미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만일 어떤 것이 우리이 영혼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거나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우리 자신을 단련시킵니다.
세속의 사람들은 소유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릅니다.
우리 주위에는 쾌락과 부, 안락을 마치 삶의 유일한 목표인 양 추구하는 사람으로 가득합니다…”나는 이처럼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바깥 세계의 사람들은 누구도 이곳에 와서 이런 방식으로 오랫동안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소비적인 삶에 너무나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과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해 마지않는 우상을 포기해버리고 계속해서 소박한 삶을 살아나가는 것 말고 달리 그 어떤 방법으로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다른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이유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전통은 많은 사람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것입니다.
세상는 변하고 있다…그들은 달리고 달리며 쾌락을 좇는다. 자동차가 그걸 가능하게 해주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선교사업에서 답을 찾으려 하기도 한다. 그들은 외국에 나가서 사람들을 돕는다. 극러나 그들은 일을 잠깐 멈추고 집에 머물며 이웃의 본보기가 되는 것 또한 중요한 선교사업이란 생각을 할 시작조차 갖지 못한다…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의 가장 우선적인 책임은 바로 우리 가정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웃의 증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세속 사람들이 교회에 바라는 것은 자신들의 양심을 달래주는 것뿐, 그들 자신은 계속해서 욕망을 추구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독선에 의한 오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기도. 선행을 자랑삼아 떠드는 것이 또 하나
독선이란 일종의 교활한 죄악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매일매일 돌아볼 필요가 있으며, 칭찬을 받을 때마다 조금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방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매우 겸손하다는 사실보다 자만심을 갖는 것이 더 쉬우니까.
잘못을 합리화하는 방법? 잘못을 일깨워준 데 대해 잘못된 반응을 하고 있다
삶의 방식이 표리부동하지 않은가? 세속의 교회를 잠깐만 살펴보면 기독교인들이 모순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그들은 곧 행동으로 하느님을 부정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의 잘못을 피하기 위해, 그만큼 잘못된 일이나 그보다 더 잘못된 일로 그것을 대체한다면, 우리의 영혼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일관성을 잃게 된다.
자동차와 트랙터, ‘마력’의 위험
우리는 세상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 단순히 우리가 입는 옷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가 생계를 꾸려나가는 방식도 그렇다….우리는 작고 진실하며 겸손하게 일하는 방식에 머물도록 하자. 결코 우리는 자신을 위해 군마를 많이 가지려고 하지 말자.
기계, 가정, 공동체
교회가 현대적인 기계-우리가 결코 가고자 하지 않는,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무조건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될 길로 우리를 이끄는-로부터 뒷걸음질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가족농장. 더 많은 가족 구성원이 농장에서 함께 일할 수 있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인가?
우리 삶의 방식에 새로운 도구가 실용적인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매우 조심스럽게, 그리고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돈 문제에 비해 훨씬 더 중요하게 인식해야 하는 것들이다. 물질적인 풍요함이라는 것은 덧없고 교묘한 것이어서, 그것을 좇아가다가는 결국 우리가 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 이르고 말 것이다.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
차 타고 10분이면 갈 거리를 마차를 타고 한 시간 걸려서 간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주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마차를 자동차로 바꾸어보면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전보다 더 늘어난다는 사실을 금방 알라차리게 될 것이다. 시내에 나가기가 훨씬 쉽기 때문에 더 자주 나다니게 되고, 아주 사소한 일로도 시내에 나가게 된다…그래서 결국에는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길 위에서 허비해버리게 된다.
마차, 안전한 여행? 우리는 아주 느린 속도로 이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심각한 사고일 가능성은 줄어든다.
“…내 생각에는 그 사람들이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가 있긴 있어요.”
“그게 뭐죠?”
“그 사람들 역시 꼭 필요한 이상으로 전화를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따진다면 전화말고도 훨씬 간편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이 엄청나게 많지요. 내가 우려하는 것은, 그렇게 간편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물건들의 위험을 그 마을 아이들이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에요.”
“당신 말대로라면 어떻게 해도 좋지 않을 것 같군요.”
왜 나는 게임이나 스포츠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가?
어떤 공동체 마을에서는 놀이는 아이들이 하는 것, 스포츠는 세속의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못박고 있다.
무저항주의자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위해 폭력을 쓰게 하거나 폭력적인 행위를 도와서는 안 됩니다. 만약 도둑이 잡힌다면, 신고한 사람은 도둑질한 사람을 처벌하는 일을 도와준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 아니란다. 왜냐하면 우리를 알고 있는 모든 친구들은, 크리스마스에는 물론이고 그들이 1년 내내 잘 지내길 우리가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엄마는 또 하나의 걱정이 생겼다. 발렌타인 데이에는 또 무슨 일이 생길까?
사진, 특별한 행사를 영원히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생각으로 행사를 마치고 사진관으로 향하는 것은 그릇된 가치와 비기독교적인 장식에 대한 욕망을 증가시킬 뿐이다. 우리는 사람의 욕망을 자극할 행위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마음속에 충분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아주 단호하게, 개인의 자존심과 허영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도록 유혹하는 세속의 방식에 젖지 않기 위해 아주 단호하게 우리 자신을 지키자.….그 대신 우리들이 살았던 삶과 우리가 남겨놓은 전통으로 기억되도록 하자.
망가진 세대? 우리는 매우 쉽게 그러한 것들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들은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고, 큰 불편 없이 그다지 부지런하지도 않고, 조금은 버릇도 없이 성장한다. 우리는 고통을 견뎌내는 방법을 잊었고, 약간의 불편도 참아내지 못하게끔 되었으며 모든 것들이 손쉬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동차? 한 세대에게는 사치품이었던 것들이 다음 세대에게는 필수품이 되어버린다.
한 세대가 그처럼 편리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게 바로 다음 세대에게는 아주 불편한 것이 되어버린다…이 세대의 사람들은 다음 세대가 물을 뜨러 우물에 나가는 일을 꺼리게 되리라고는 아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게 되었다. 집안에서 쓰는 모든 물을 우물까지 가서 떠온다! 내게는 상상도 안 되는 일이다. 파이프를 이용한 설비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아, 굉장한 사치다!
지금까지 이토록 많은 것을 소유하고 이토록 감사할 줄 모르는 세대는 없었다.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누가복음 12:15)
해결방법은 무엇인가? 세속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단순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신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제시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옛날에는 생활이 더 단순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옛날 것이 모두 다 좋지는 않다.
50여 년 동안 세속에 끌려온 지금의 자리는 결코 우리가 원했던 곳이 아니다.
조금만 유의해서 들여다보면 가령 트랙터를 이용해서 농사를 짓는다거나 길을 가는 데 자동차를 이용하는 따위의 일들이 결국에는, 형제애와 단순한 삶, 가족간의 나눔, 그리고 의미 있는 공동체의 유대라고 하는 가치를 부식시키는 아주 치명적인 것들이라는 충분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편리함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만큼 더 많은 확신이 필요하다. 사치와 개인적인 소유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 이 세상에서, 소유하지 않고도 만족을 찾는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소유를 통해서만 찾는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가정과 결혼
대개의 여성들이 살이 찌는 저변의 이유는 애정과 이해의 부족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들이 남편에게서 받고자 하는 애정을 부족함 없이 받을 수 있다면, 마음의 공허함을 음식으로 채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남편이 애정을 쏟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냥 살찌는 것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오래된 이혼? “오늘 금슬이 좋던 부부가 내일 헤어지는 경우란 없는 법이야. 사랑과 애정이 존재하는 한 그런 일은 불가능해. 딕과 팸은 아마 오랫동안 이혼 생활을 해왔을 거야. 겉으로 보기엔, 그리고 법적으로는 아니었겠지만 이미 마음속으로는 오랫동안 이혼한 거나 다름없었겠지. 마음의 이혼이 먼저 오는 법이라고.”
나는 아이들에게 엄마보다 아빠가 더 좋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아빠가 그들에게 해준 어떤 것보다 함께 놀아준 시간들을 소중히 여겼던 것이다.
가족은 함께 놀아야 한다
아이들은 상상력을 가지고 태어난다…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동작하는 완구’를 사준다. 그것은 호기심과 상상력까지 필요로 하는 아이들과의 놀이에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손쉬우니까 그렇게 한다…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상상력을 망치지 않도록 부모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잔디깍기 기계, 잔디 깍는 흉내…”잔디는 잘 깍이니?” ”예? 우린 잔디를 깍는 게 아니라 밭을 갈고 있는 거예요.” 나는 노는 아이들을 거들기보다 그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음을 깨달으며 얼른 물러나야 했다.
어머니의 묵상
청소나 설거니는 내일까지 미룰 수 있지만,
슬프게도 아이들은 훌쩍 자라버린다.
그러니까 거미줄, 먼지 같은 것들을 잊어버리고
지금은 아기를 재우며 행복한 시간을 갖도록 하자.
그런 즐거운 시간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므로.
#일-농장 대 공장
우리는 왜 농사를 짓는가?
종이를 펼치고, 연필을 잡고, 계산기를 두드려봤어요.
먼저 값비싼 땅값을 계산에 넣어야겠지요.
도색료도 넣고 수리비도 넣고 세금도 물론 넣고요.
꼬박꼬박 부담해야 하는 터무니없이 비싼 이자도 빼먹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하는 많은 시간을 급료로 환산해서 넣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농사는 분명 그 이상입니다!
…..
농사는 봄에 쟁기질한 흙의 향기입니다.
….
하루하루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
나만의 실수를 저지르며 사는 것입니다.
간절한 기다림 끝에 유유히 부드럽게 쏟아지는 비를 맞이하고,
하루도 변함 없이 떠오르는 해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점심밥 먹고 모자를 얼굴 위에 올려놓으면
나무 그늘 아래로 시원한 바람 불어오고,
땅을 움터 나오는 첫 옥수수의 싹을 바라보며,
신의 약속이 진실임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직업으로서의 농사
우리는 직업이 가정과 공동체를 중심에 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직업은 네 가지를 만족해야 한다
1)뭔가 쓸모 있을 일이나 물품을 생산한다/ 2)아이들에게 부모와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3)아버지가 대부분의 시간을 가정에서 보낼 수 있어야 한다/ 4)수입을 제공한다
잠시만 진지하게 생각해봐도,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교단을 바르게 세우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의할 것이다.
1)담배 피우고 욕하고, 더러운 이야기들을 하는 세속적인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한다/ 3)아버지들이 집에서 멀리 나와 있어야 한다. 그것도 너무 일찍 나와야 하기 때문에 가족들과 함께 기도할 수 없게 된다/ 4)너무 많은 돈을 벌게 된다. 많은 이들이 농장르 꾸릴 수 있을 만큼 돈을 벌기 위해 멀리 가서 일하려 한다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농부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농장은 가족들을 보살피는 데 가장 합리적이고 적당한 곳이다? 농장에서는 항상 해야 할 일이 있다. 아이들은 “비켜라, 방해가 되잖니” 하는 말을 듣는 대신에 늘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존재다. 또한 아이들은 농장에서 많은 일을 능숙하게 할 수 있도록 자라난다.
농장이야말로 우리 아이들이 커가는 데 가장 좋은 환경이라는 데에 깊이 동의한다. 아이들이 할 일을 갖고 또 자신들이 골칫거리가 아니라 늘 필요하고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달걀을 한 바구니에 모두 담아두지 마라”? 닭 조금, 돼지 조금, 소 몇 마리 등 이것저것을 함께 길러야 한다는 말이었다.
변화는 계속해서 자신의 삶도 바꾸어갈 것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모든 농부들에게 중요한 점은 그들의 눈을 잘못된 목표에 두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농부가 필요 없는 사회?
“과연 농사를 지어 먹고 살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쏠려 있지만 그보다는 “농사를 짓지 않고도 우리의 신념을 지키며 살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에 좀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현대기계
기계는 지금 건초용 풀을 베어 쭈그러뜨리고 있다.
말리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다음날에는 던지는 장비를 갖춘 건초꾸러미 만드는 기계가 온다.
건초꾸러미를 선반에 던져넣는다.
동력 승강기가 실어 나른다.
아, 이것이 바로 현대적인 건초 만드는 방법이다.
이 큰 기계는 사람들이
가능한 한 많은 땅을 사서 경작하게 만든다.
기계에는 눈부신 전등을 달아놓아
농부들이 한밤중까지 일하게 한다.
사람들은 풀밭에서 일하느라 너무나 바쁘다.
신께 드릴 시간은 조금도 없다.
신을 위한 시간이 없다면, 친구들이여,
이 삶이 맞이할 종국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여전히 땅을 갈며 신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다.
매일 삶 속에 신을 위한 시간을 갖는 이들이 있다.
공동체 내부의 몇몇 사람은 물론이고 외부사람들이 보기에도 역시, 우리가 세운 일련의 기준은 확실히 실용적이지 않은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오르드눙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필요에 따라 형성되어 온 것이다.
올드 오더 상점들. 농장 가격이 너무 비싸진 결과 많은 수의 작은 가게가 우리 공공체에 속속 생겨나고 있다
첫 번째 문제는 흔히 쉽게 벌고, 쉽게 쓰는 소비성향이다. 이는 결국 집과 옷, 그리고 점점 더 현대적이고 사치스러운 생활 등에 많은 돈을 쓰게 만든다.
값을 따질 수 없는 우리의 전통? 우리들의 사명은 가정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하는 것이다. 선교를 위해 머나먼 외국 땅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아이들에게 값으로는 셈할 수 없는 소중한 전통을 물려주는 것이다. 부와 재산, 농장과 집을 물려주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이 전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또 다음세대로 전하기 위해 땀흘려 노력할 것이다.
#젊은 세대-축복, 그리고 여러 가지 문제
어느 사회에서나 젊은이들은 그 사회의 미래다. 가정과 학교는 ‘성공적인 시민’을 길러내기 위해 함께 협력한다.
아이들은 보배다. “아이들은 우리가 천국으로 갈 때 지상에서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보배다.”
우리가 세운 학교가 올바로 가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공공의 학교는 이미 올바름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그들은 우리 인간의 근원에 대해 완전히 그릇된 것을 가르치고 있다. 뿐만아니라 그곳에서 아이들은 모든 종류의 부도덕과 죄악에 노출된다.
재능의 낭비? 그런게 만일 베니가 자신의 영혼을 잃는다면 어떤가? 그것이 모든 낭비 중에서도 가장 큰 낭비가 아니겠는가?
우리에게는 한 가지 모토가 있다? “가족이 늘 함께 기도를 올리면, 늘 함께 할 수 있다.” 이것은 단 몇 마디 말로 아주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아주 충분하지는 않다. 함께 노동하고, 함께 친구를 방문하고, 함께 읽고, 함께 계획을 세우고, 함께 먹고, 기쁨과 슬픔, 희망과 낙담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
어떻게 친구가 되고, 친구를 만드는가? 답은 너무도 단순해서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친구를 갖고 싶은 사람은 그 자신이 먼저 우정을 보여야 한다.” 자신이 먼저 친구가 되어야 한다.
허세? 다른 사람에게 인상적인 어떤 행위를 해야만 지속적이고, 깊고, 오래 우정읗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천박하고 얄팍한 사고다.
하지만 기억해라.자동차는 너를 집에서 점점 더 멀리 떨어뜨릴 거야…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다면 어떻겠니?
좀더 역설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알콜과 마약, 폭력과 부도덕한 범죄를 쉽게 노출해 보여주는 텔레비전의 안 좋은 영향으로부터 우리 아이들의 시청권을 또한 빼앗았다. 습관성 쾌락추구, 스포츠와 오락 광신자가 되길 원하는 아이들의 권리 또한 빼앗았다.
이 세상에서 수많은 쾌락의 권리를 빼앗긴다는 것은 영성적으로 축복받는 일이다. 우리 아이들은 빼앗길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보일 뿐이다.
#사람들의 공동체, 아미쉬 교회-내면 들여다보기
유럽의 아미쉬 선조들은 박해를 피해, 동굴이나 집에서 숨어지내며 신앙을 지켰다. 아미쉬들에게 교회는 여전히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기도하기 위해 모이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가 된다.
비용이 많이 드는 교회? 우리 아미쉬들은 다른 사람처럼, 교회에 돈을 댈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해야 한다.
“당신들은 예배 동안 오르간이나 피아노를 사용합니까?”
“아니오. 우리는 교회에 어떤 악기도 두지 않아요.”
“아, 그래요. 그냥 손뼉치기와 발구르기만 하는군요.”
“아뇨. 우린 그런 것 없이 노래합니다.”
“4중주는요?”
“안 합니다. 우리는 제창으로 찬송해요.”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2,3세기 전 박해받아 투옥되었다가 신앙을 위해 순교했던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그것을 자손대대로 전해오며 느린 곡조에 맞춰 부르지요.”
악기에 대하여
오랫동안 악기 사용. 이들 교회는 악기가 영적 체험을 촉진하는 데 유용하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신약성서는 악기사용에 관한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 오히려 성경에 따르면 음악은 사악한 것이며, 영적이기보다는 본성적인 효과를 갖는 것으로 묘사한다. 음악이 실체를 가리는 그림자로 사용된다고 말하고 있다…악기는 타고난 아름다움으로 악기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므로, 노래하고 있는 가사의 의미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배우자. 행복한 부부관계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값비싼 보물이며, 성직에 입문하는 남자들에게는 소중한 자산이다. 이것 없이 일해야 하는 가엾은 영혼을 불쌍히 여겨라.
사제의 보수. 유급 성직을 기피하는 소박한 교회? 바울은 “보수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응당 받을 수 있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고9:18)라고 했다
어제는 당신에게 몇마디 말을 했고 당신과 함께 눈물을 훔쳤지요. 그러나 우리의 말은 너무도 제한되어 있고 우리의 어휘 역시 너무 불완전해서 마음속 소망을 모두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우리는 말없이 그저 당신과 함께 앉아 시간을 보냈지요.
#징계와 따돌리기-아미쉬의 관점에서
아미쉬 공동체의 생활에 관한 것들 중 징계나 제명, 따돌리기와 같은 규율에 관한 것만큼 오해받고 있는 것도 드물다.
교회 분열의 원인 다섯 가지?
1)가르침의 부족 2)겸양의 부족: 패기만만한 지도자와 교인들이 너무 많다 3)소통의 부족: 오해, 마음의 상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활발한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4)규율의 결여 5)인간적 평온함의 부족: 소박한 교회에서 속세사람에게 세례를 주고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면 교회에서 평화가 지속될 것이라 장담할 수 없다.
금이 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아홉가지 원칙
1)주님께 고백하라 2)먼저 변해라 3)빨리 행하라 4)사람을 만나 얼굴을 마주하라 5)진실한 사랑의 자세를 취하라 6)평화와 화해의 마음을 보여라 7)고백하고,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라 8)이것으로 문제를 종결지어라 9)당신의 형제들을 용서하고, 또 용서하라.
잘못을 저지른 교인에게 돌아오기를 억지로 강요한다면 그런 식으로는 누구도 도와줄 수 없을 것이다. 흠만 잡는다면 그것은 서로의 간극을 넓힐 뿐이다. 그들은 자신이나 교회의 가치에 대해 확신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스스로 돌아오는 것이다.
결코 충족되지 않는 마음
“만약 제초기와 잔디깍는 기계를 가지고 있다면 훨씬 일이 쉽게 끝날텐데. 나쁠 것 없잖아요.”
“아니다. 소유하기를 바라는 것이 실제 소유하는 것보다도 더 나쁠지 모른단다.”
“무슨 뜻인가요?”
“소유하는 것이 허락된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자기통제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탐하게 되면 불평을 중얼거리게 되고 우리의 마음에서 평화와 행복을 잃어버릴 수가 있는 거야…”
“메리야, 마음에서 불평과 불복종을 없애버려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복되고 만족스런 삶을 살 수 있어.”
“행복은 세속의 물건들을 더 많이 가지는 데 있지 않아. 사탄은 너희들을 계속 불행하고 불만스럽게 만들기 위해, 너희들 앞에 항상 좀 더 매력적인 것들을 아슬아슬하게 닿지 못하는 곳에 자랑삼아 놓아두고 보여줄 거야. 이런 유혹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더 이상 바라지 않는 거야.”
#신앙인의 옷차림
만약 당신이 아미쉬라면, 세상 모두가 그것을 눈치챌 수 있다. 독특하고 소박한 옷차림 때문이다. 현대 세계와의 분리, 그리고 세속적 패션에 대한 무관심을 나타내기 위한 이러한 노력은 어떤 면에서는 아미쉬를 사방에서 빤히 보이는 어항에 넣는 경우가 되기도 한다…아미쉬가 그렇게 옷을 입는 이유에 대한 얘기들은 무성하지만, 많은 것들이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다.
모순적으로 세상에서 가끔씩 아미쉬 차림의 단순함이 유행하기도 한다…대부분의 아미쉬들도 자신들 옷차림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
헛된 과시욕이나 자만심을 나타내는 어떤 옷도 걸치지 않는다.
치장만 금할 뿐 실용적인 머리땋기는 괜찮다.
그러나 진정한 논란거리는 단순히 의복에 관한 문제 이상의 것, 즉 그 근본이 되는 자세와 정신에 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유행은 흔히 작게 시작되지만, 주의하지 않는 사이 결국은 예전 것들을 모두 파괴한다.
모든 것은 한 번에 한 걸음씩 변하는 것이다…순식간에 변하여 없어지는 유일한 영역이 의복이다…거의 알아차리지도 못하게 우리의 소박한 복장 속으로 스며들어온 터협의 징조들을 깨끗하게 쓸어버리자.
주의해라! 차림새는 당신의 징표다
일면적으로는 아미쉬와 히피족은 서로 비슷하다…그러나 이들 사이에 더 이상의 유사성은 없다. 아미쉬의 행동은 종교적인 신념에 근거하고 있다…히피의 징표가 불신을 의미하는 것과 달리, 우리의 징표는 신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마음과 행동
“마음가짐만 바르다면, 어떤 옷을 입든 상관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당신의 행동이 잘못됐다면 당신의 마음도 바를 수 없습니다”
옷차림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다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를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는 데려다준다.
#바깥 세상-도전과 변화
아미쉬들은 3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방식으로 생활한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비록 그들의 옷차림, 그리고 말을 이용하는 그들의 문화가 마치 특정 시간에 고착된 듯 보이지만, 아미쉬들 또한 많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그런데도 아미쉬들은 그들 밖의 세상에 비해 그다지 자주 또는 대규모로 변화하진 않는다. 그들은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변화를 내버려두기보다는 그것을 통제하고 제한하기를 원한다. 참 어려운 일이지만, 많은 방면에서 그들은 성공해왔다.
텔레비전 없이 어떻게 사느냐는 질문에 말을 더듬을 필요 없이, 그들이 어떻게 텔레비전과 함께 살 수 있냐고 묻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들은 자녀들이 폭력물을 보면 어떻게 대처하는가? 어떻게 아이들에게 소중한 가치를 교육받도록 기대하는가?
자유를 위한 전쟁?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닌가? 키신저는 정말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는 중국, 러시아, 아랍국가들, 이스라엘, 그리고 베트남에까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는 자신의 아내와는 원만히 지내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분주했을지는 몰라도, 정작 자신의 문제는 풀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반목을 그만두라고 설득하는 동안, 자신의 가정에서 벌어지는 반목을 종식하지는 못했다. 그가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일하는 동안,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충실하리라고 맹세했던 자신의 아내와는 평화가 없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마8:36)
입으로 보여주는가? 생활오 보여주는가?
“뭐…예전에 이런 말을 자주하던 집사가 있었더랬지요. 빈 수레는 요란하지만 꽉 찬 수레는 그렇지 않다고…”
#노년과 질병, 그리고 죽음
모든 사회와 종교는 노년과 질병, 그리고 죽음에 대해 대처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우리는 그 문화의 ‘관점과 가치’를 엿볼 수 있다…아미쉬는 이 모든 것들을 가족과 공동체, 그리고 다가올 영생에 대한 믿음 안에서 대처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남의 결점을 찾아내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이다.
시부모들을 험담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몇 년 후에 그녀도 결혼한 아들을 둘 것이고, 시부모가 될 텐데…인간의 심성이 세대를 거치면서 나아지는 것이 아닌 이상, 그리고 그녀가 자신 안의 큰 문제를 깨닫지 못하는 이상 그녀가 미래의 며느리가 아닌 그 누구와도 화목하게 지낼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논쟁거리들
모든 아미쉬들은 모든 일에 대해서 의견을 일치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은 이글을 읽는 독자들도 익히 짐작하는 바이리라 생각한다. 사실, 미국 아미쉬의 생활방식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함과 편차, 그리고 성경의 해석에 대한 차이는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다…그래서 당연하게도 『패밀리라이프』의 내용에는, 비록 모두 합의점을 찾진 못했을지라도, 다양한 관점과 의견, 그리고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다.
우리 선조들에게는 하느님의 보호 외에 보험이란 없었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길에 나가는 것이 안전하지 않기 때문에” 보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대가 변한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과연 우리 선조들의 시대에 살기를 원하는가, 현 세대에 살기를 원하는가?
사람들은 모든 일을 인간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한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구원자가 되길 자청하는 것이다. 또는 자신이 쌓아온 선행에 의지하려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신에 대한 신앙이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의존이다.
지금 시대에 보험에 든다는 것은 삶의 필수적인 방편으로 인식되고 있다. 신앙이 없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세대에게 이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우리가 마차를 쓰고 있는 이유는, 차량의 소유와 그것의 무분별한 사용이 빚어내는 유혹은 너무도 강력하고 광범위한 것이라 사람들의 영성에 해악을 끼치기 때문이다.
현 시대에 아미쉬에게 가장 큰 위험은 무엇인가?
1979년 ‘패밀리라이프’지에서 던졌던 질문이다.
우리는 약 50여 통이 넘는 답변을 받았다. 이 답변으로 판단해볼 때, 가장 큰 위험은 ‘물질적 풍요’다. 지나치게 많고, 지나치게 쉽게 번 돈이다.(풍요속의 빈곤)
#비폭력주의자로 산다는 것
책의 서두에 밝힌 것처럼, 초기 재세례파 사람들은 신앙으로 인한 고문과 죽음으로 고통받았지만, 조용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물리적 힘이 아니라 언어, 말로써 저항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바를 실현했고, 이것이 본보기가 되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그들은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는 전통은 계속되고 있고, 20세기에는 아미쉬 한 사람 한 사람이 매우 힘든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독립전쟁, 남북전쟁, 세계대전, 베트남전,…양심적 병역거부자들
병역의 의무를 피하기 위해 아미쉬가 된다?
우리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종교적인 자유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덕분에 진실한 전쟁 반대자들이 동료 인간을 살해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아미쉬의 유머 감각
#생활 속의 깨달음-일상에서 얻는 교훈
세상의 성경. 나는 기독교인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읽는 유일한 성경이라고 들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하느님의 말씀에 반하는 바를 ‘읽지’ 않도록 좀더 노력했으면 좋겠다.
시간이 없다는 변명. 우리는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며, 그 일을 할 시간을 낸다. 흔히 “정말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변명일 뿐이다.
모든 사람들은 똑같은 만큼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누구에게나 하루는 스물네 시간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시간을 다 써버렸다는 것이 시간이 없어서 못했다는 말의 진짜 의미다.
아미쉬는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남을 심판하지 말라”(마7:1)는 말을 자주 인용하곤 한다. 우리는 우리 생각과 다른 것들을 억지로 동의하지 않고 억지로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그것들을 우리 것처럼 이해할 수도 있고 때로는 존경할 수도 있다.
우리와는 다른 사고방식과 문화를 배우다 보면, 거꾸로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배울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조금은 우리와는 다른 측면들을 좋아할 수도 있고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사람들은 제각기 여러 측면들의 복잡한 경험들을 겪게 되지만, 그것이 결국에는 현재로 존재하는 지금의 단순한 나를 만들어내게 마련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무언가 인정해야 할 어떤 진리이다.
아미쉬 세계에서 그것은 개인이 아니라 그룹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아미쉬든 우리의 세계든 완벽한 것은 없다. 인간이 하는 일이 어찌 완벽이란 게 있을 수 있겠는가…우리는 단지, 그들은 이끌어주는 하느님과 그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인정하면 그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