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달력 제철밥상. 장영란. p245
어제 감자를 거두었다. 줄기를 뽑아내면 그 자리에 감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흙을 헤쳐 감자를 찾아내니 감자가 나오고 또 나온다. 두어 번 김매준 것밖에 한 일이 없는데 잘되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나. 땅이 살아나고, 하늘이 도와주셨나 보다. 감자 실컷 먹고 그 기운을 받아야겠다. 이렇게 곡식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듯, 이 책도 내가 흙에 뿌리 내리면 살아온 이야기다.
도시에서는 죽겠다던 남편이 힘이 넘쳐 일을 하고, 아이들이 들판에서 뛰어놀며 자라는 재미, 손수 농사해서 싱싱할 때 먹는 맛.(조화로운 농부의 밥상)
막막해고 걷어불이고 일을 해나가다 보니 하나하나 길이 보였다. 일하는 게 공부였다! 어릴 때 배우면 절로 몸에 익을 텐데 나이 들어 배우려니 시행착오를 거듭한다.
몸 움직여 일하는 재미, 틈나면 산에 다니는 재미, 이런저런 재미에, 여기에 조금씩 뿌리 내리기 시작했나 보다. 나이 먹은 나무도 조금씩 뿌리를 내리는 데 어린 나무야. 내가 걸음마를 하니 아이들은 달려간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식구 모두 집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하루를 보내면서 우리 삶이 좀더 충실해진다. 아이들도 잘 먹고 잘 자고, 하루를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아간다. 어디 가서 이렇게 살아보겠나. 곡식과 아이들이 자라는 기운에 나도 힘이 난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니 우리 식구와 이웃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마당에 도라지꽃이 환하게 피고, 호박넝쿨이 뻗어가고, 토마토가 붉어진다. 온 들판에 생명이 그득하다. 그 기운을 담아, 자연에서 자신을 펼치고자 하는 이들에게 작은 영감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2월
『산림경제』에 과일나무는 “정월이 가장 좋은 때고, 2월이 그 다음이고…보름 전에 심으면 열매가 많이 달리고 보름 후에 심으면 열매가 적게 달린다”고 한다. 과일나무는 위로 뻗어가는 기운을 담고 있다. 그러니 달이 차오를 때 심으면 좋다.
조류독감, 광우병 등은 고기글 먹기 위해 사람이 한 짓이 사람에게 되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루 종일 먹고 노는 대보름놀이
일이란 뭔가! ‘일’이란 몸과 마음이 하는 되는 거란다. 마음만 앞서 몸이 따라가느라 고생을 해도 안 되고, 몸음 움직이는데 마음은 딴 데 있어도 힘들다.
‘자유롭게 살고자’하는 시골살이? 곡식을 심어도 적당히 거리를 띄워 심어야 잘 자란다. 사람도 드렇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야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우리 마을은 담을 이웃해서 살아가지 않고 드문드문 떨어져 살아간다.
봄기운이 ‘일어서는’ 입춘. 24절기의 첫 번째 절기
영농기술이 발달해 손쉽고 편리한 농사기술이 나오지만 우리는 자연의 흐름에 가까이 가는 길을 찾으려 한다. 많이 또 편리하게 얻는 게 아니라 자연의 생명력을 듬뿍 담은 곡식을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을 해나가려 한다…할 수 있는 만큼. 그만큼 씨를 뿌리려 한다.
김을 매다 보면 뽑아낸 풀이 바로 나물이다. 김매고 웃거름 주니 뒷간 청소, 닭장 청소가 저절로 된다.
봄농사에서 중요한 것은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이다. 씨앗을 보면 얼른얼른 다 심고 싶다. 하지만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다. 5월초까지 서리가 오는 곳이니 서리에 약한 곡식은 빨리 심어봐야 헛일이니까. 곡식마다 때가 있어 제때 심어야 잘 자란다. 헌데도 자꾸 얼른 하고 싶어 서두르니, 봄에는 늘 기다리는 마음이 필요하다.
농사가 목숨을 살리는 일이라면 살림살이는 식구들을 살리는 일이다. 도시에서 돈 주고 사서 먹을 때와 달리, 시골에서 농사를 하니 살림살이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겠다.
도시 아파트에서 살림이 소비라면 시골 살림은 생산이다.
먹을거리는 단지 일용한 양식을 넘어 나를 살린다.
아이들이 차례차례 학교를 그만 다니고 집에서 함께. 아이들과 함께하니, 들에서 일하고 밥상을 차리고 공부하는 하루 생활이 온전히 하나가 되기 시작했다. 온 식구가 자기 목숨을 스스로 가꿀 수 있게 된 것이다.
2월 하면 떠오르는 음식? 봄나물 샤브샤브다. 이른 봄밭에 나는 풀은 모두 먹을 수 있는데, 이 풀을 먹을거리로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이제는 풀과 친해져 이름도 맛도 알아 즐겨 먹지만, 가끔 도시 손님이 오시면 한 번 해 먹어본다.
#3월
겨울에도 김을 맨다
처음에는 우연히 시작했다. 마늘밭에 솔가리(소나무 낙엽)가 덮여 있었다. ‘아, 저렇게 하면 좋겠구나’…이듬해 봄, 검불이 두텁게 덮여 있으니 마늘을 뽑을 때까지 풀 잡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늘을 캐고, 손으로 김을 매고, 그러니까 밭을 갈지 않고 그대로 팥을 심었다. 실험은 계속 되었다. 풀로 풀을 잡는다고 틈나는 대로 풀을 베어 덮어주었다. 가을에 다시 마늘을 심소 솔가리 덮어주다 보니 밭흙이 바뀌었다. 흙이 비단처럼 매끄럽고, 지렁이가 있고, 사람이 밟으면 푹푹 들어간다. 지렁이 흙이 된 거다.
자연농법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농사할 수 있나?’ 생각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밭을 풀에게 내어주고 우리는 사다 먹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이 힘든 건 괜찮다. 이렇게 해서 농사를 망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더 힘들었다. 하늘이 도와주었는지, 팥이 금새 자라 풀을 이기기 시작했다….‘되겠구나!’ 싶었다. 다음해에는 넓은 밭들도 모두 갈지 않고 농사할 자신이 생겼다.
지렁이가 생기면 두더지가, 두더지가 생기면 뱀이 나타난다
곡식이 어릴 때 풀에 치이면 자랄 수 없다. 그러니 되도록 곡식 곁에 풀을 잡느다. 그러다 웬만큼 자라, 땅 속을 곡식 뿌리가 차지하면 풀을 이겨낸다. 새 풀이 자라도 그다지 맥을 못 추는 거다.
가을에 곡식을 거두고 나서도 한 차례 헛김을 매고, 이른봄에도 땅이 녹으면 두어 번 헛김을 맨다. 아니, 일년 내내 풀을 맨다고 봐야겠지.
땅에서 나는 생명은 되도록 그 땅으로 돌려준다? 풀을 뽑아도 그 자리에 놔두고, 고구마을 캔다면 먹을 고구마만 가져오고 나머지는 모두 그 자리에 둔다…일년 내내 산에서 검불, 물가에서 갈대, 밭둑에 풀, 뭐든 부지런히 덮어준다.
기계로 갈아엎지 않고 늘 검불로 덮여 있는 것. 이는 지렁이와 땅속 벌레들이 살아가기 좋은 조건이 된다.
지렁이가 생기면 두더지가 판을 치고, 두더지가 생기면 어느새 알았는지 뱀이 나타난다. 그런 자연의 흐름에서 보고 배우며 마음을 느긋하게 갖는 공부를 한다.
밭을 갈지 않고 농사를 하면, 곡식이 어릴 때는 밭이 어설퍼 보인다. 기계로 밭을 곱게 갈고 나서 두둑을 새로 한 밭과는 다르다…그러다 곡식이 자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포기나누기를 하며 제 힘껏 자라난다. 양팔을 쭉쭉 뻗으며 자라나, 곡식 숲을 이룬다.
땅힘이 살아난 땅은 너무나 부드러워, 아이가 맨손으로 땅을 헤쳐 고구마를 뽑아낼 수 있다. 호미 하나 들고 밭에 가면, 내 하고픈 만큼 시나브로 일을 하며 제철 나물을 한바구니 할 수 있다. 농사를 한다기보다 자연에 얻어먹는 그런 기분이다. 농사가 자연에게 다가가는 징검다리이긴 하지만, 실제로 자연에서 한참 벗어나 있기도 하다. 그런데 갈지 않고 농사를 하니, 자연에 좀더 다가간 기분이다. 한마디로 평화롭다.
실험농사. 생각지도 않게 일이 풀려나갔다? 무경운할 논에 넣어준 어미 오리와 새끼 오리들. 작은 새끼가 어미를 따라 논을 헤엄치고 돌아다닌다. 그러면서 먹이를 찾아 논바닥을 부리로 후빈다. 또 풀씨도 먹고, 어린 뚝새풀도 먹고…이렇게 오리가 사십 일쯤 놀고 나니, 갈지 않고도 모를 낼 수 있었다. 새로운 농법이 이렇게 태어나는구나.
이맘때는 무슨 풀이 뻗어가고, 싹 틔우고, 사그라질까. 들을 다니며 풀만 봐도 심심하지 않다.
무경운 논은 땅이 말랐을 때 김을 맨다. 그래야 매기도 쉽고, 뽑아놓은 뚝새풀이 말라죽는다.
두엄은 발효식품이다. 김장김치, 고추장처럼. 땅이 좋아하는 걸 고루 섞어 띄운다.
3월 밥상. 우리 입맛을, 우리 혀를 자연스럽게 바꾸면 봄에는 온 세상이 먹을거리로 가득하다. 그래, 마음 한구석에 농사보다 채취해서 먹고 살아볼까 하는 낭만 어린 소리가 들린다. 철 모르는 재료에 온갖 양념으로 뒤섞인 도시 요리가 아닌, 이름 모를 들나물에 입맛 다시는 야성을 이 봄에 가져봄이 어떨지.
#4월
누군가가 농사는 ‘타이밍의 예술’이라 했다. 정말 그렇다. 비 오시기에 한 발 앞서 김매고 씨 뿌리면 농작물이 저 알아서 쑥쑥 자란다. 비소식에 부지런히 씨 심고 난 밤, 처마 끝에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여면 얼마나 푸근한지. 사람이 씨 심고 하늘이 비를 주시니 자연과 하나 되는 기분이다. 이럴 때 농사일은 자연이 알아서 해주시는 거고, 사람은 자기 몫을 다할 뿐이다 싶다.
반대로 잠깐 딴 일을 보느라 제때를 놓치면 일도 몇 배 힘들고 곡식도 고생을 한다.
돈 주고 사오는 건 모두 쓰레기를 남기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돈 주고 사오는 건 모두 쓰레기를 남긴다. 자연에서 내가 몸을 움직여 얻은 것에는 쓰레기가 없다. 논밭에서 나는 것 중 사람이 먹지 못하는 것은 짐승먹이가 되거나 거름이 된다. 나무, 흙, 돌로 만든 물건은 다시 돌려놓으면 된다. 한데 밖에서 들어오는건 하다못해 포장지라도 남긴다.
쓰레기를 보면 내가 살아가는 꼴이 낱낱이 보인다. 과자봉지, 술병, 형광등, 욕심으로 챙겼다가 입지도 않고 버리는 옷가지까지…
씨 심으라고 하늘이 주시는 비 곡우(穀雨)? 곡식 싹 틔우는 비
4월밥상.시골에 살면서 새롭게 먹을 줄 안 것이 꽃이다.
#5월
봄에 산나물 하러 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내 안에 내 할머니 그 할머니….그 할머니 때부터 쌓은 지혜가 다 들어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떤 걸 보면 왠지 움추러들고, 어떤 걸 보면 나도 모르게 한 입 넣고 싶어지고. 그게 무언지 몰라도 왠지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 이걸 보면 내 안에 다 들어 있는 데 그 길을 여는 방법을 혹여 잊은 건 아닐까?
학교에 다니며 가르쳐준 대로 배우고 익혔다. 어른이 되어서도 무얼 알고자 하면 책에서 정보를 찾고, 전문가한테 배웠다. 과연 그런가? 이러느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인류의 지혜를 묻고 살아온 건 아닐까? 그런 내가, 자연에서 혼자 일하면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소만(小滿)? 작물이 자라서 약간의 곡식이 여무는 때
5월밥상. 자연스레 살고 철 따라 먹고
#6월
모든 생명이 자리는 까닭은 좋은 씨가 되소파서겠다. 나도 이들을 닮아 우리 아이들을 좋을 씨로 기르고 싶다.
씨는 한 번 내손에 들어오면 내가 이어나가야 한다. 농사하는 마음이 달라진다. 전에는 거둘 욕심에 많이 달렸으면 했지만, 이제는 무얼 심을 때 ‘잘 자라 좋은 씨가 되어라’하는 마음으로 심고 가꾼다. 곡식들을 자연의 흐름에 맞춰 가꿔서 씨를 받고, 그렇게 하는 품값으로 내가 얻어먹는다 생각한다.
‘뭘 먹고 사나?’ 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귀농’하면 어찌 살까, 돈 걱정부터 하곤 한다.
시골에서 돈 벌어 도시 수준으로 쓰려면 가랑이 찢어진다…시골과 도시는 아예 화폐가치가 한자리쯤 다른 세계다. 그렇지만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면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맑은 공기, 맑은 물, 따사로운 햇살, 여기서 만끽하는 이 세 가지를 도시에서 누리려면 얼마나 들까요? 그만큼 벌고 있습니다.”
큰 병원에 안 가고 아이들 학비 크게 안 들면 소소한 생활비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그 얼마 안 되는 돈 마련이 쉽지 않은 것도 농촌 현실이다.
우리가 먹는다는 건 무얼까? 음식 먹는 것도 습관이다. 참깨는 볶아서 먹는 줄 알았다. 이건 습관일 뿐이다. 날참깨를 그냥 먹어본다. 날콩도 먹는다. 토끼도 잡아먹어 보고, 토끼를 잡아먹는 살쾡이도 잡아먹는다…농사를 해보니 먹는다는 건 목숨의 기운을 먹는다고 생각한다…지금은 음식을 보면, 재료 하나하나 그 본디 모습이 떠오른다.
어떤 목숨이건 그 목숨을 소중히 생각하고 우리가 얻는다면 어떻게 먹어야 할까? 되도록 싱싱하게, 되도록 단순하게 먹어야 되겠다.
#7월
자연은 늘 새롭다
내가 기르는 작물은 곧 내 삶의 거울이다. 작물이 건강하면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 거고, 작물에 병이 나면 내 생활부터 돌아보아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나락이 궁금해야 진짜 농부가 될 텐데…
농사도 자식 낳아 기르는 일과 같다. 낳아 기르는 재미, 그 재미로 길러야지, 나중에 나를 책임져 주기 바라서야 되겠나. 농사도 날마다 가꾸고 돌보는 재미를 소득으로 삼아야겠다…이것 심어 얼마를 거두어야지 하는 욕심으로 심으면 돌보기는 오늘내일 미루기 십상이다. 그러면 제대로 자라지 못할 것은 뻔한 이치. 아침에 일어나면 나락이 궁금하고, 콩꽃 구경 가는 재미가 좋아져야 진짜 농부가 될 텐데…
7월밥상. 뚝 따서 그대로 먹는 맛
#8월
이층짜리 뒷간? 아래칸 문을 열고 똥장군을 꺼낸다. 열흘 남짓 식구들 똥오줌을 모은 거니 커다란 요강인 셈. 거름통 바닥에 숯가루를 깔고 똥오줌을 눌 때 톱밥을 얹곤 하여 보기에 흉측하지는 않다.
집짓기? 그 첫 시작이 바로 뒷간이다!
벼꽃을 본 적이 있나? 논농사한 지 육 년. 벼꽃을 제대로 못 보았다는 걸 알았다!
#9월
자연에 가까이 살아가려는 새로운 흐름
1977년 IMF가 터졌을 때 사람들은 ‘귀농’이라는 말을 자연스레 입에 담았다. 도시에서 못 사니 시골로 내려가는 흐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시골로 내려온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는 먹고살기 위해서 시골로 내려왔다 한다. 요즘 들어 시골로 내려오는 젊은이는 그때와는 다른 듯하다.
이제 젊은이들은 귀농을 ‘어려운 결단’이 아닌 ‘행복을 위한 선택’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곡식도 밤이 어두워야 잘 자란다
전깃불에 익숙해져 보름이 뭔지 그믐이 뭔지 모르고 살아왔다…자연에서 살아가니 비로소 달이 보인다. 달이 차오르고 기우는 데 따라 보름에 환한 달빛을, 그믐에 어둠을 그대로 맞이할 기회가 있다. 달이 보이니, 어두울 때 어둡고 환할 때 환해야 자연에서 자라는 곡식도, 사람도 제대로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9월밥상. 산에서 가을걷이
산에 가면 온통 자연이 먹을거리를 차려놓고 기다린다.
농사를 하다보면 자연을 자꾸 잊곤 한다.
논밭에 가도 목숨을 보지 못하고 할 일만 눈에 보인다…그러다 산에 가면 어린애같이 자유로어진다. 그래서 산으로 간다…산한테 얻어먹는다. 그 순간 나는 자연이 먹여살리는 아이가 된다.
#10월
기계에서 벗어나 몸으로-콤바인에서 홀태로
농사란 본디 똑같은 해가 있을 수 없다
콤바인. 지난해 몸 편하자고 했지만 마음고생이 얼마나 컸나.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어찌 타작을 하나. 남편은 발로 돌려서 하는 탈곡기를 구해보자고 한다…발탈곡기로 타작을 하려면 먼저 낫으로 벼를 베어 볏단으로 묶어 세우고 며칠을 말린 뒤 털어야 한다..산 너머 산.나락을 바람에 날려 잡것을 없애고 몽글렸다…
생각을 바꾸면, 그래서 고개를 돌리면 거기에 길이 있다.
이따금 홀태로 타작을 하는 사람을 만난다. 기계가 들어가기 힘든 논을 가진 할머니는 혼자서 하루에 몇 마지기를 한다 하고, 우리 이웃도 홀태에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시나브로 하면, 누구 손길을 빌리지 않아도 자기 먹을거리는 거둘 수 있다. 처녀 농군은 논 가운데 홀로 앉아 시나브로 털고, 어린아이도 위험할 게 없으니 이웃집 아이들이 놀러오면 논에서 함께 일하며 논다. 일하다 논둑에 앉아 먹는 새참은 또 얼마나 맛난가. 물론 콤바인이 들어오면 몇 시간이면 끝낼 일을 한 달 넘게 한다. 일의 흐름이 이러니 논마다 벼를 골고루 심는다. 가장 일찍 익는 올벼부터 늦게 익는 늦벼까지. 일이 밀리거나 겹치지 않도록.
콤바인은 기계 사정에 맞춰야 하고, 빠르고 몸은 편하지만 가을걷이하는 느낌이 전혀 없다. 발탈곡기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있지만 가을걷이가 일이 되어버린다. 벼를 벨 때는 몇 날이고 베야 한다. 기계를 돌릴 때는 긴장해야 하고 한번에 일을 해치우게 된다. 거기에 견주면 홀태는 논 가운데 혼자 앉아 벼를 두어 단 베어다가 털고, 다시 베어다가 털고, 누가 오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일하고, 평화가 있다. 우리에게 지금 이 시간은 소중하다.
10월밥상. 가을 갈무리와 씨 받기
#11월
처마 밑에 매주, 우리 일년 작품이 매달린다
11월밥상. 겨울 갈무리
#12월
추위 이겨내기
산골에 처음 오면 더욱 춥게 느껴진다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지피면 굳었던 몸이 불 앞에서 마술처럼 풀린다
겨울 산은 참 편안하다. 낫질도 좋긴 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다. 겨울 산에 오르는 일이다. 바람이 몰아쳐도 숲에 들어가면 안온하다. 참 신비하다.
늦게 일어나고 일찍 자는 동지
식구 모두 잠자리에 들어 불을 끄면 그렇게 고요할 수가 없다
시골에 살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돈도 아니고, 일이 힘들어서도 아니다. 조금 전까지 만족하며 살다가 하루아침에 여기를 떠나고 싶어지는 마음 변화, 그건 바로 인간관계에서 온다.
12월밥상. 하루 한 가지씩 묵나물
#1월
남편은 머슴, 아내는 마님
시골로 내려와 농사를 하면 부부가 하루 종일 붙어살게 된다…사람을 사귀어도 함께, 일을 해도 함께애야 하고, 그러니 참 많이 부딪혔다…계획은 아내가 아고 그에 따라 일은 남편이 한다. 마님과 머슴이 따로 있나! 바로 여기 있다. 그런데 현대판 머슴은 마님 말을 잘 들을 리가 없다!
시골에 와서 가장 좋은 것을 들라면,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이다. 일을 해도 혼자 하니, 남의 눈에 마음 쓰지 않고 내 좋을 대로 해도 괜찮다.
자연에서 살다보니 분장이 지워지고 나를 돌아볼 시간이 많다(남을 위한 꾸밈에서 나를 위한 가꿈으로)
남편은 아이가 아프면 왜 아픈지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아이 나름대로 치료방법을 찾도록 도와주곤 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 스스로 추스르고 다시 아프지 않겠고, 만약 부모가 치료해주면 의지하고 만다 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아이들 같아서는 병원이나 약국은 망하게 생겼다(몸은 스스로 낫는다!)
자연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젊은 생명들. 이들에게서 우리의 앞날을 본다.
모든 게 얼고 눈 쌓이는 소한 추위
사람 사회는 1월 1일부터 새해를 시작하나 농사는 땅이 풀려야 시작이니, 아직 농사를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있다. 그동안 미루었던 여러 일들을 시나브로 처리할 때다
1월밥상. 떡과 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