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프리즘.고병권 외. p237
스승에서 벗으로!
#리영희를 다시 불러내는 이유_홍세화
이 책은 리영희 선생의 팔순(2009년 12월)을 기념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소박한 뜻이 담겨 있지만 리영희에게 바치는 책은 아니다. 리영희에게 바치는 책은 그 누구보다도 리영희가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것을 모른다면 그를 ‘사상의 스승’이라고 부를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인데, 어떻게 헌사 따위가 바쳐지는 자리에 스스로 서겠는가.
나에게도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은 삶의 전환에 있어서 중요한 변곡점의 하나였다. 간단치 않은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는데 저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티 없는 마음으로 한마디 남기도 싶다. 정작 선생께선 달가워하지 않으시겠지만.
고맙습니다, 선생님.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_고병권
사상의 은사
그를 사상의 은사로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사상의 은사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 싶다. 생각을 낳아 준 고마운 스승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스승’이란 어떤 존재인가. 여기서 일어나는 ‘배움’이란 또 무엇인가. 나는 그 물음에 대한 답들을 리영희에게서 찾아볼 생각이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라고 부른 이들, 리영희와 더불어서 비로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들이 말하는 ‘머릿속에서 일어난 지진’의 체험은 그런 자동 반응과는 정반대의 것을 의미한다…지진을 겪고 나면 모든 것은 달리 보이고 달리 생각된다. ‘생각한다’는 말, ‘사유한다’는 말을 우리에게 일어난 지진으로서, 하나의 ‘사건’으로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 말이 단순한 관념이나 견해와 동일시 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오히려 기존 관념이나 견해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건의 체험을 우리는 ‘생각한다’는 말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말로 나타내어야 할 것이다.
‘빨갱이’라는 말 한마디면 그 어떤 해명도 불필요하다고 불가능하다. 여기서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가 빨갱이였다니 그는 정말 나쁜 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빨갱이’에 대한 생각은 ‘생각’이라기보다 일종의 ‘반응’이고, 리영희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건반사’일 뿐이다.
우리는 바닥까지, 아니 바닥 아래까지 나아가야 한다. 스승은 그것을 유도한다…사람들은 자신의 바닥 그 아래 까지 나아갔을 때에야 비로소 자기 존재의 변화를 체험한다. 그때 의식화가 일어난다. 그런데 의식화가 일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스승은 더 이상 스승이기를 멈춘다. 그는 함께 깨어 있을 뿐이다. 스승과 제자가 구별되는 것은 한쪽이 ‘깨어 있고’ 다른 쪽이 ‘잠들어 있을 때’만이다. 나머지 한쪽이 깨어나는 순간 그들은 사유의 동료, 해방의 동료가 되는 것이다. 결국 가르친다는 것, 더 정확히 말해서 ‘배우게 한다는 것’은 ‘깨어 있는’ 동료를 늘리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명나라 사상가 이탁오의 말이 생각난다.
“스승이 아닌 자는 친구가 될 수 없고, 친구가 아닌 자는 스승이 될 수 없다.”
합리주의나 과학주의를 넘어선 이성
정말이지 이성은 지성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은 우상의 냄새를 맡는 예민한 후각을 필요로 하며, ‘감히 알려 하고 감히 말하려 하는’ 용기와 각오도 필요로 한다. 이성은 언뜻 이성적이지 않은 것을 담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성을 근대적 합리성이라고 부르는 ‘계산 가능성’에 국한한다면, 우상에 대한 리영희의 이성적 비판은 오히려 불합리하고 몰지각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의식화의 은사, 의식화의 원흉
그는 지식을 전달한 사람이라기보다는 각성을 전달한 사람이었다. 각성이란 누군가를 배울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나는 리영희를 통해 보건대, 스승이란 ‘가르치는 사람’이기보다는 ‘배우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사람들의 선입견을 깨뜨렸고, 사람들의 잠을 깨웠다. 한마디로 그는 일깨우는 사람이었다.
민주주의, 그 영원한 의식화를 위하여
많은 이들이 리영희의 사유를 ‘인간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 누구보다 리영희 자신이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이 ‘인간주의’라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의미가 아주 달라질 것이다. 리영희의 인간주의, 그것은 인간을 중심에 두고 인간을 모든 존재에 우선한다고 믿는 ‘인간중심주의’와는 거리라 멀어 보인다.
그에게 ‘인간’의 반대말은 동물도, 식물도, 무생물도 아니다. 그는 인간의 부정을 ‘노예’라고 불렀다. 그리고 자유야말로 인간 존재의 전부라고 했다.
따라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노예로부터 벗어나 자유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고정지, 조건반사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 집단적 각성이 일어나는 것, 노예로부터 자유인으로 변화하는 것, 나는 이 집단적 과정을 민주화라고 부른다. 나는 리영희의 인간주의에 대한 물음이 사실상 민주주의에 대한 물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물음은 결코 끝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책 읽기와 청년, 그리고 자유_천정환
리영희라는 필독서
우리가 학생에서 ‘직업인’이 되고, ‘교양’에서 ‘전문’으로 넘어갈 때, 혹은 청년에서 장년으로 넘어갈 때, 우리의 앎과 독서는 길을 잃고 위기에 처하기 십상이다. 어떤 이는 아예 책을 완전히 손에서 내려 놓기도 한다. 주로는 생계 활동의 고달픔 때문인데, 많은 한국인들이 한 달에 책 한 권도 못본다. 어찌 보면 이는 인생 자체의 행로가 위험에지는 것과 다르지 않은 과정일지 모른다. 우리는 이때 젊은이로서의 열정과 ‘꿈’을 잃고, 밥벌이와 기성 질서의 노예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리영희의 말은 그러할 때 책읽기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그것은 자기 생과 앎을 소명을 지닌 프로젝트로 만드는 것, 또한 그것을 또렷이 스스로 의식하고, 스스로 설정한 지적 과제를 충일하게 채워 나가는 책 읽기다. 그럴 수 있다면 ‘공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평생의 ‘내 공부’가 되는 것이다. 물론 저와 같은 발상을 해내는 것이 무엇보다 어렵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도 어렵다.
오늘날의 책 읽기·청년·자유
오늘날의 청년·대학생들은 ‘책’과 ‘자유’(정치)를 그들의 삶에서 부차화 시키고 있다. 또는 반대로 그들이 ‘책과 자유’(정치)로부터 점점 소외되고 있다. 인터넷·휴대폰 같은 새로운 미디어의 시대이자 신자유주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기성의 질서는 그들에게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정치로부터의 자유’를, 그리고 ‘경쟁의 자유’라는 가짜 자유를 무한정 선사했다. 이 가짜 자유는 그 자체로 속박이자, 모든 개인적 불안의 근원이다. 기성의 질서가 허용하고 시혜하는 그 자유는 받아먹을수록 황폐해지고 속박이 강해지는 마약 같은 것이다.
물론 지금 시대의 청년·학생들도 진정한 자유를 꿈꾼다. 그리고 책을 읽는다. 이유는 다양하다. 그러나 자유의 근본적 조건에 대한 사유나 그것을 위한 실행과 동반되지 않는 책 읽기는 불완전한 것이다.
경쟁에서 패바할 가능성이 높은 대다수는 스스로 자기 정신의 키를 낮추고 자본의 도구가 되는 종속을 택한다. 그것이 당장 안전해 보이기 때문이지만, 이는 결국 ‘자유로부터 도피’하여 ‘루저’로서의 삶을 완성하는 것이다. 반대로 ‘위너’의 자리에 갈 가능성이 있는 소소의 인간들은 자본의 운동 원리에 자기 삶을 합체시킨다. 그럼으로서 그들은 스스로에게 하수인이 되고 비인간非人間으로서 행동한다. 그러나 그들도 스스로에게 부과되는 불안을 결코 극복할 수 없다…신자유주의적 세속 윤리의 틀, 즉 ‘루저’ 대 ‘위너’의 이분법과 그 명명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모두가 패배한다. 필요한 일은 ‘경쟁’ 바깥으로 탈주하는 것이다.
오늘날 자유의 사회적 의미 맥락은 바뀌고 있지만, 내 삶의 주인이 ‘돈’이나 정치권력이 아니어야 한다는 원리는 바뀐 바가 없다. 우리는 내 삶의 주인으로서 자서전 저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무슨 책을, 어떻게 읽었던가’ 하는 것은 온전히 리영희 그 자신의 자서전 속에서 하나로 녹아 있었다. 우리도 나중에 나의 생을, 내 공부와 깨달음의 역사와 함께 술회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지금 당장에도, ‘왜 그 책을 읽는가’에 대해 좀 더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나의 책 읽기는 내 ‘자유’일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의 세기_김동춘
전쟁이라는 최고의 현실
헤라클레이토스는 “전쟁의 모든 것의 왕이고 노예와 자유로운 사람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전쟁은 본디 ‘제국’의 프로젝트이며, 제국의 가장 중요한 정책이다. 그래서 강대국이 주도해 온 세계가는 전쟁사를 뺴고서는 한 페이지도 쓸 수 없으며, 20세기 세계사와 그 와중에 버텨 온 한국 현대사 역시 이들 한반도 주변 강대국의 전쟁 프로젝트의 귀결이었다. 비록 근대 이후 한국인들이 외세를 침략하여 전쟁을 벌인 적은 없지만, 한반도 주변에서 벌어진 전쟁의 역사를 모르면 오늘의 국제정치의 연원, 한반도 분단과 남북 관계의 연원을 알 수가 없다. 또 스스로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휩쓸려 간 한국의 현대사와 한국전쟁을 변수로 포함시키지 않는 사회과학, 한국전쟁의 정치학을 중요한 설명 변수로 고려하지 않는 국제정치학, 한국전쟁과 베트난전쟁을 동시에 살펴보지 않는 동아시아 역사 서술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20세기에서 21세기를 걸쳐 살아오면서 한반도 주변에서 일어난 전쟁, 그리고 미국이 개입했던 동아시아 전쟁들이 오늘날의 각국 현실을 어떻게 가져왔는지 물음을 제기하지 않는 지식인은 문제의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
전쟁은 언제나 단순한 군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권력 현상이며, 정치적인 사건이다.
전쟁은 장교나 병사 모두에게 죽음의 가능성을 극도로 높이지만, 철통같은 경비를 받는 CP 깊숙이 근무하는 대대장급 이상의 지휘관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은 매일 몇 시간씩 순찰해야 하는 말단 병사들이 죽을 확률의 1%에도 미치지 않는다. 그래서 ‘시장’이 돈 많은 사람과 돈 없는 사람 간의 계급적 차별의 원칙이 적나라하게 작동하는 현장이듯이, ‘전장’도 이러한 계급 원칙이 매우 적나라하게 관철되는 현장이다.
인간 세상에서 전시만큼 불평등한 세상, 권력과 민중의 격차가 극대화되는 시기도 찾기 어렵다.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전쟁으로 사람이 죽고 다치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만이 아니라, 전쟁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타락시키고 부패를 극대화하고 사회의 안전된 질서와 규범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리영희가 체험한 한국전쟁, 그리고 기자로서 취재하고 분석했던 1960년대의 베트남전쟁도 가장 정치적인 전쟁이었다. 한국과 베트남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전쟁의 주역도 아니었다. ‘전쟁 만들기’의 주연인 제국주의는 ‘문명’으로 대량의 살상을 포장하지만, 어떠한 가치로도 인도되지 않는 군대는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당화의 기제를 갖고 있지 않다….결국 그가 본 한국전쟁은 그의 국가관, 전쟁관, 미국관, 한국 정치관, 사회관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다 주었다. 경험보다 더 좋은 교사는 없는 법이다.
시장과 전쟁
열전이든 냉전이든 전쟁은 탐욕이 활개를 치는 공간이다. 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 문명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시장 확보와 원료 약탈의 탐욕, 절대 권력을 누리려는 군주나 총통의 권력욕, 자신과 종교와 핏줄이 다른 인간에 대한 적대와 증오가 여과 없이 표출되는 것이 전쟁이다.
확실히 시장과 전쟁은 형제지간이다. 전시에 민간인 희생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언제는 ‘군사적 필요’의 급박성이다…군사적 급박성은 시장이라는 전쟁터에서 생사의 기로에 놓인 기업의 논리와 동일하다…전쟁터와 마찬가지로 경쟁의 논리, 약육강식의 원리, 탐욕의 원리가 작동하는 신자유주의하의 무한 경쟁 시장에서도 법과 규범은 사치가 된다.
반공, 전쟁, 국가주의의 우상
한반도에서 ‘사실상의 전쟁’은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으며, 그만큼 비정상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이 너무도 오래 정상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을 압도해 왔다.
#무신론적인, 그러나 유신론적인_이찬수
강남대 교수를 지내다 불상에 절을 했다는 이유로 해직되었다
우상숭배 금지의 본뜻
신은 특정 형상 안에 갇히지 않는 초월자이시니 그러한 구체적인 형상을 신으로 경배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국의 종교에는 혁명이 필요한 것 같다. 정말로 예수님과 부처님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종교 혁명이 그것이다.”-리영희, 『스핑크스의 코』
#영어라는 우상_오길영
500단어의 유창한 영어 실력과 어느 아랍 외교관의 차이,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박찬길
원어민을 따라 하는 발음의 유창함이 “알맹이 있는 대화”를 대신할 수는 없다.
어느 프랑수 주재 아랍 외교관의 경우다. 짐작대로 그의 발음이나 문법은 서투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라면 세계에서 제일 잘하는 영국의 유명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이 그를 단 한번도 제대로 이겨 내지 못했다. 필자가 보기에 그의 ‘영어 실력’의 요체는 풍부한 어휘력, 그리고 적절한 표현으로 조직해 내는 사고력이었다. 필자는 그 사람을 보고 나서 외국인의 영어 학습에 관해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인상적이었던 지젝의 초청 강연? 그의 영어 발음은 유창한 미국식 영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그 어색한 영어 발음으로 좌중을 압도하며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열정적으로 두 시간에 걸쳐 쏟아 냈다…내가 느끼기에 당시 강연장을 가득 메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원어민’들도 그의 발음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지젝의 어색한 영어 발음이 아니라 강연에서 그가 주장했던 독창적인 사유의 내용이었다. 원어민 발음과는 거리가 먼 영어를 구사하는 지젝은 원어민을 능가한느 유려한 글쓰기 능력으로 자신의 저서를 거의 대부분 직접 영어로 쓴다. 그런 능력은 500단어의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지식인의 책무를 묻다_이대근
야만의 시대와 지식인
한국 지식인의 자화상
한국에서는 일단 권력의 중심이 형성되면 지식인들이 구름같이 한곳으로 쏠리다가 그 권력의 중심이 해체되면 흩어지고, 새로운 권력이 형성되면 다시 그 주위로 몰려드는 강력한 군집성을 띠고 있다. 마치 지식인들이 새로운 권력이라는 시장에서 자기 지식을 거래하는 상인이 된 듯하다.
선거철이 되면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캠프에는 지식인이 구름처럼 몰린다. 그러나 패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캠프는 한산하다. 승자 캠프에서는 권력 참여란느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반면, 패자의 캠프에서는 그런 보상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명박 대통령 후보 캠프에는 수많은 교수들이 참여했다. 특히 유례없이 많은 대학 총장들이 이명박 후부에게 줄을 섰다.
지식인은 경제권력과의 친화성도 높다. 일반적으로 지식인은 삼성을 비판하지 않는다. 현재는 물로 미래를 위해서도 삼성과 같은 경제권력과 나쁜 관계를 맺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 쓰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스스로 소수오 고립되어 있기를 원치 않는다. 다수의 일부로 남기를 원하며, 시민 전체를 대표하는 자격을 유지하기를 바란다.
이런 삶과 앎의 불일치는 한국 지식 사화의 고질병이다.
리영희는 말했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대화』
#진짜 기자의 멸종_안수찬
#사회과학의 고민_은수미
#냉소주의 시대의 우상과 이성_한윤형 | 리영희와 청년세대
무엇이 우상이고 무엇이 이성인가
청년 문화가 상실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대중문화가 확장되고 대중사회가 도래하면서 역설적으로 청년 세대와 대학생들의 문화가 전위 역할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요즘의 대중문화는 오히려 10대와 30대를 타깃으로 삼고 있다는 식의 개탄을 20대들에게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20대의 영향력의 상실을 간단하게 얘기할 수 있는 조류는 최근의 ‘걸그룹’ 열품이다. ‘걸구룹’이 대중문화의 대세가 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세기말에 내가 서태지를 좋아할 때 할아버지는 나를 마뜩잖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오늘날 아버지와 내가 2NE1이 더 매력적인지 카라가 더 매력적인지를 논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걸그룹 열품은 파이가 작아진 가요 시장에 대한 자본의 대응책으로, 세대를 초월한 남성 소비자들의 연대를 의미한다. 20대 남성과 30대 남성이 거리낌없이 품평할 수 있는 그런 소비상품을 대중문화는 이제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문화 영역은 소위 ‘오타쿠’라고 불리는 이들이 향유하는 서브컬쳐의 영역이다. 이 영역은 논리 필연적인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젊은이들의 코드가 된 ‘잉여 정서’와 관련이 있다. 잉여라는 말은 이 시대 젊은이들이 자조적으로 자신을 칭한느 말이 되었는데, 의미심장하다. 이전 시대의 루저 정서는 주로 학벌 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이들의, 혹은 반발하는 이들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잉여 정서는 학벌 사회에 순응한 이들의 것이다. 부모님들이 시키는 대로 꿈도 갖지 않고 하루하루 성적을 올리는 것을 목표로 살았고, 그 결과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했지만 어느 곳에도 취업할 전망이 없는 이들의 정서인 것이다. 오늘날의 세대는 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느 세대가 되었다. 그런 이들이 공유하는 ‘잉여 정서’는 자기 학대와 정치적 각성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문화적 감수성이다.
오늘날의 대학생들이 바라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편입’이다.
자본주의로부터의 자유, 노동할 의무로부터의 자유를 꿈꾸지 못하고 자본주의 사회로 편입하기를, 정규직으로 편입하기를, 그러기 위해서 좋은 대학으로 편입하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우리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울 때, 우상은 어떤 독립적인 것으로 존재하고 이성은 그것을 타파하기 위한 무기일 수가 있다. 하지만 하루하루 편입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선, 우상은 바로 우리의 삶 그 자체다. 이성은 그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참단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우상을 전적으로 거부해 버려서는 살 수가 없다.
#가혹하게 정직하고, 칼날처럼 순결하게_김현진 | 리영희 인터뷰
고독한 일인자
“나는 사실 평생을 두고 독불장군으로, 외로운 늑대처럼 소리 지르는 처지였어요. 북한에서 내려온 소학교 친구고 없고, 동향 사람도 없고, 중학교하는 것이 일제 말기 친구들과는 내가 가는 길이 전적으로 다르니까 어떤 교류가 없었어요. 해양대학의 동창들은 다 바다로 나가 있는데 나는 육지에서 6.25 전쟁 7년 동안 향로봉 등에 있었으니까, 아니면 형무소 감방에 있거나 지하실 감방에 있거나, 그런 의미에서 난 참 외롭게 살아왔어요.”-『대화』
바로 이런 것이 고독이었다. 그렇게, 선생님은 고독에 있어서는 대한민국 일인자였다. 고독할 바에야 아주 끝장을 보듯 고독한 것, 그 역시 ‘리영희 스타일’이다.
“변혁은 반드시 옵니다. 반드시 와요….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이제는 미국식 자본주의가 영원히 갈 것이다, 이런 이야기이고 사람들이 다 그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20년 전에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때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에서 공산주의가 패배하고 미국식 자본주의가 영원할 것이다, 하고 한국 사람들도 믿었어요. 그리고 미국식 자본주의를 거의 맹신했던 것이에요. 나는 그때 동구권이 무너진 것처럼 다음에는 미국이 그렇게 될 날이 분명히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우리나라가 해방된 이후에 미국에 가서 교육을 받고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잘못 배워 가지고 온 것이죠. 자신들이 받은 혜택만 생각하고 미국적인 사회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라는 몰이해를 가지고, 거의 지상 낙원인 것처럼 생각한 것이죠. 마치 숭배와도 같이 미국을 따라 하려 했지만, 사회 안전망이 마련되지 않고 개인의 행복이나 복지가 모조리 개인의 책임이 되는 사회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미국식 자본주의였던 거예요.”
아무리 세계 1위의 경제적 대국이라 하여도 어떤 복지든 개인의 돈과 개인의 승부로 사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즉 돈 없으면 죽으라, 하는 것인데 이런 비정하고 불행한 사회는 또 없습니다.
혁명은 온다
하지만 그것이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피를 뿌려야 한다. 그런 변혁이, 혁명이 쉽게 올 리 없다?
“변혁을 어럽게 생각해서는 안 돼요. 자신의 생활 방식을 개선하는 것이 바로 사회를 바꾸는 것입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어떤 사상이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처음의 소수가 필요해요. 그러므로 당연히 서서히 변화될 수밖에 없지요. 그 소수가 바로 인텔리겐치아입니다. 대중은 처음에는 귀찮아해요. 뭔가를 바꾸는 것이 귀찮으니까, 다 그런 거지 하면서 느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소수의 전위부대, 스스로 깨우치는 젊은 세대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어떠한 상태에 있구나, 하는 인식을 해야 해요. 잘 알아야 해요. 그런 인식과 자각을 가지고 처음에는 한 명 두 명씩 싸워 나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남을 걷어차는 법이지요. 생존의 동물화, 약육강식의 방법이란 말입니다. ‘약자를 보호하자’가 아니라 심지어 강자가 ‘어떻게 약자를 더 잘 먹을 수 있을까’를 가르치는 상황인데, 이런 것을 용기 있게 거절해야 합니다.”
“..한 명의 천재가 1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것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가치판단이죠. 지배자들에게 가치판당을 맡길 때 길들여진 인간이 만들어져 버리는 겁니다. 비인간화, 소외된 인간, 인간 소외 현상이 일어나는 거지요. 그런데 요즘에는 사람들이 그 무감각, 무의식을 자처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어요. 편하게 살기 위해 자발적 동조, 굴종을 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것이 돼지가 인간에 의해 길들여지는 것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먹이 한 주먹만 주면 돼지가 생존할 수 있고, 그러니까 사람이 쥐어 주는 것에 복종하지만 인간은 동물이 아니에요. 저차원적이고 동물적인 자본주의는 지양해야 합니다.”
가만히 보니까 선생님에게 말씀하는 버릇이 하나 있다. ‘결코’, ‘절대’ 등의 단어를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다. 무엇이 무조건 옳가, 그르다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책 속에만 있을 것 같은 단어도, 근사하지만 뜬구름 잡는 말씀도 없다. 진짜 ‘실용주의’란 게 바로 이런 거지 싶다.
“어떤한 주장이나 입장에서도 시가 있고 비가 있으며 반발감과 공감이 있는 법이에요. 아무 반발도 없는 주장은 없고, 모두가 공감하는 견해란 없어요.”-『대화』
피로 쓴다
생활은 간소히, 생각은 높게 Simple life, high thinking
“네가 실업자인 건 자유의 대가니까 혜택이야. 야생마 같은 아이잖니?”
“자기 생활의 주인이 되어야지. 물질은 중요하지 않아…정신의 혁명이 필요해. 자기의식의 전환을 이루어야지. 물질을 최우선으로 하는 약육강식의 자본주의는 착취와 강압과 사치와 타락이라는 부작용을 낳게 되는데, 이 타락이 중대한 병이야. 이 타락을 스스로 거부하는 만큼 인간적·윤리적으로 성장하고 정신적 기품이 높아지게 되지. 악덕한 제도, 정치, 사상에 굴종하지 않는다는 저항적 인간을 목표로 해야겠지. 풍요 속에 매몰되지 말고, 시시한 물건 따위에 만족하지 말고 스스로의 사상과 행동과 결정의 주인이 되는 거야. 자기를 상실하고 의식 없이 생활하면 물질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말지. 물론 자발적으로 이런 노예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 자본주의에서는 그저 소비에서 낙을 찾으려고 하는 풍습이 많으니까.”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나의 인생은 그저 낙오자일 수밖에. 계속 낙오자의 길로만 걸어왔고.”
선생님, 그럼 저도 낙오자 할게요, 하고 손을 들자 또 웃으신다. 낙오자로, 실업 자유 야생마로, 더 용감하게 살아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