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 오쇼 라즈니쉬. p383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영원으로 통하는 틈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현재’이다.
#인생의 틈
마음 전체가 빛으로 가득할 때, 삶은 비로소 하나의 기적이 된다. 더 이상 평범한 삶이 아닌, 모든 일들이 비범해지는 특별한 삶으로 바뀐다.
하루살이 인생? 그대가 단 하루밖에 살 수 없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그대는 무엇을 하겠는가? 계속해서 불필요한 것들에 매달리겠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을 까마득하게 잊을 것이다. 24시간밖에 남지 않은 시간 동안 그대는 사랑하고 명상하는 데 전념을 다할 것이다. 참되고 본질적인 그것들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테니까.
안정된 것은 없다
세상 어디에도 안정이란 없다. 삶은 불안정하다. 그것을 지탱해 주는 토대가 없기 때문이다
안정을 지나치게 갈구함으로써 그대는 어려움에 처한다. 안정을 추구할수록 그대는 더욱 불안정해진다. 불안정인 삶의 근본 이치인 까닭이다. 그대가 안정을 추구하지 않을 때 비로소 불안정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
평탄함을 좇지 말라
가장 멋진 위험은 가장 높은 신의 경지에 닿는 것과 가장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 두 곳을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그대는 초월성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꼭대기도, 심연도, 정상도 밑바닥도 없음을 이해하게 되고, 자신이 주시자가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높고 낮음이 있고 천국과 지옥이 있지만, 그대는 거기서 한참 떨어진 곳에 서 있다. 그대는 언제나 그것들의 게임 전체를, 의식의 놀이 전체를 단지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자연의 편에 서라
사회와 자연이 충돌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든 항상 자연의 편에 서라. 언제나 승리할 것이다.
심오한 무지는 그대를 평안하게 한다
누군가 “물이 뭐죠?” 물으면, 그대는 “H2O”라고 대답한다…’H’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대는 수소라고 대답한다. 그런 식으로 그대는 차례대로 ‘분자’, ‘원자’, ‘전자’의 이름들만 나열하면서 어느 것 하나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고, 계속 뒤로 미루기만 할 뿐이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절대적인 무지만이 남는다.
처음에는 물이 무엇인지 몰랐고, 이제는 전자가 무엇인지 모른다. 결국 우리는 그 어떤 지식도 얻지 못했다. 그저 우리는 이름을 붙이고 구분하는 게임만 했을 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이렇듯 무지는 너무나 심오하고 궁극적인 것이어서 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대가 무지함을 이해하게 되면, 어느 순간 그 무지 자체에 대해 평안해질 것이다. 무지한 상태에 더 이르면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기 때문에 무지가 아름다움과 평안을 가져다 준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알아야 할 것도 없어진다. 무지는 광대하고 거대한 궁극 상태이다.
느긋한 마음으로 혼돈을 즐겨라
내일이 정해져 있다면, 그대의 불안이 사라질 수는 있으나 자유로울 수는 없다. 미리 정해져 있는 일들을 완수해야하는 로봇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안정을 추구하지 말라. 안정을 추구하면 그대는 항상 불안한 상태로 지낼 것이다. 불안정을 받아들일 때, 그대는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은 역설이 아니다. 비록 모순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단순하고도 절대적인 진리이다.
내일을 생각하지 말고 자유롭게 흘러라. 느긋한 마음으로 혼돈을 즐겨라-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되는 법이다. 그대가 변화를 받아들이면, 매순간 그대에게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삶이 찾아올 것이다. 그대는 매순간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머리는 이윤 가치가 없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기쁨을 주는 모든 것은 이윤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모든 기쁨은 단순히 즐거움만 줄 뿐, 아무 쓸모가 없다. 사랑은 놀이일 뿐, 아무 쓸모가 없다…가슴에 중요한 모든 것은 이성에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들이다…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성과 정반대인 곳으로 가야 한다.
혼란스럽지 않고 싶다면 고정관념을 버려라. 혼란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혼란으로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이 살아 있는 삶이다.
균형있게 일하라
가장 균형 있는 삶은 세상 속에서 일하되, 그 일 속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일하고 난 다음에는 일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려라.
나의 제안은 5~6시간 만 그대의 일에 투자하라는 것이다. 나머지 시간은 다른 일-잠을 자고, 음악을 듣고, 시를 쓰고, 명상을 하고, 사랑을 하고, 산책을 하는 등-에 사용되어야 한다.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지나치게 약삭빠른 사람은 사소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못한다. 매사 너무 심각하고 진지하여 삶을 놓쳐 버린다.
그대 가슴으로 살아라
단순해지는 것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동한다는 의미이다.
(머릿 속) 마음은 매우 교활하고 전혀 단순하지 않다. 가슴은 결코 교활하지 않고 언제나 단순하다. 단순해지는 것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동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머리로 산다. 우리의 삶이 점점 더 혼란스럽고 복잡해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리고 우리가 영리해지고자 노력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혼란에 빠진다. 그것이 우리 역사가 걸어온 길이었다.
우리는 점점 더 부도덕해지고 사악해졌다. 오늘날 지구 전체는 정신병원과도 같다. 인간성이 살아남기 위해 일대 변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드디어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동해야 할 때가 왔다. 어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자살의 길을 걷고 있는 지구 전체를 살릴 방도는 없다.
그 기적은 바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동이다. 이것은 우리 인생관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놀라운 혁명이 될 것이다. 우리는 가슴으로 살기 시작해야 한다. 그로 인해 마음의 모든 영역이 사라지고 우리는 다시 어린아이처럼 천진무구해질 것이다.
가슴으로 살아라. 더 많이 느끼고, 덜 생각하고, 더 예민하고, 덜 논리적인 인간이 되어라. 가슴으로 살아갈 때, 그대의 삶은 그 자체로 기쁨이 될 것이다.
직관을 믿어라
어떤 식으로든 합리화하지 말고 사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가져라. 이런 직관을 통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많은 사람들이 많은 문제들을 안고 살지만, 실상 그 문제들의 99퍼센트는 실제가 아닌 거짓이다. 따라서 그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곤란해 처하지만 해결된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진짜 문제가 아닌 까닭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가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또 다른 가짜 문제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간파하는 것이다. 거짓을 거짓으로 보는 것이 진리를 진리로 볼 수 있는 선행조건이다.
사람들이 저속력으로 살아간다면 거기에는 어떤 위험도 없다…그렇기 때문에 자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삶은 논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논리는 독단적이고 전제적인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단히 억압적이다. 일단 논리가 그대를 장악하게 되면, 그것이 많은 것들을 죽인다.
논리는 독재자와 같다. 독재자가 반대파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듯, 논리 또한 그것과 반대되는 감정, 사랑, 명상을 가만 두지 않는다.
종교 역시 이성의 반대이다. 따라서 이성은 이것들을 죽이고, 학살하고, 근절한다. 그러다 갑자기 그대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의미 있는 모든 것들은 비이성적인 것이다. 그러니 이성에 먼저 귀 기울여 듣는 것은 삶에 의미 있는 모든 것들을 죽이는 것이 된다. 모두 죽이고 나면 승리감에 젖겠지만 곧이어 공허감을 느낀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이라곤 논리밖에 없다. 그 논리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삶이란 단순하고 비이성적이다. 인간이 지닌 모든 문제는 추상적인 것들에 있다. 삶은 장미처럼 간단하다. 장미는 전혀 복잡하지 않다. 하지만 장미는 신비하다. 장미는 하나도 복잡하지 않지만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대는 장미를 사랑하고, 장미의 향을 맡고, 장미의 이파리를 만지고, 장미를 느낄 수 있고, 심지어 장미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대가 장미를 분해하고 분석하게 되면, 그대는 손에 죽은 시체만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인간이 항상 준수해야 하는 유일한 의무는 행복해지려는 것이다
행복을 그대의 종교로 삼아라. 만일 그대가 행복하지 않다면 필시 뭔가가 잘못된 것이고, 따라서 어떤 극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즉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속에 실제하라
그대가 스스로의 행동양식을 바꿀 때, 비로소 그대가 존재하는 세상도 바꿀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세상을 바꿀 수가 없다. 그대가 곧 그대의 세계이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대의 비전, 세계관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하면 어느 날 문득 그대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동시대인이 아니다. 과거 속에 사는 사람을 어찌 그대와 같은 시대에 산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는 그대 곁에 앉아 있지만 과거를 생각하고 있으니 결코 동시대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는 아직도 오지 않은 미래에 살고 있다며, 그 역시 그대와 동시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서로 살고 있는 시대가 다르다.
진정 깊은 관계를 원한다면 발가벗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는 그대가 갖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상대에게 보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아무도 내일을 모른다
존재에는 계획이라는 것이 없다. 계획되어 있지 않은 삶이야말로 무한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그 앞에는 항상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다.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은 세속적인 삶을 산다.
삶은 작은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바로 그 작은 일들에 기뻐할 수 있다면 삶 전체가 엄청난 축복이 될 것이다…세성에는 언제난 크고 놀라운 일만 기다리다가 정작 그것을 놓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작을 일들을 통해 일어난다. 아침을 먹고, 산책을 하고, 목욕을 하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가만히 홀로 앉아 하늘을 보거나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런 일들을 통해 일어난다. 이 작은 일들이 삶을 채우는 성분들이다. 그걸 왜 모르는가.
진정한 침묵을 터득하라
삶은 시끄럽고 세상은 너무나 북적거린다. 소음에 맞서 싸우는 것이 그것을 없애는 방법은 아니다. 소음을 없애는 방법은 그것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음과 싸우면 싸울수록 그대가 더 짜증스러워질 것이다. 그대가 소음에 맞서 싸울수록 소음은 점점 더 커진다. 그러니 마음을 열고 소음을 받아들여라. 소란함 역시 삶의 일부이다. 일단 그대가 소음, 그 자체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그대는 더 이상 소음으로 괴롭지 않을 것이다. 혼란은 소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소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서 나온느 까닭이다.
그대가 가는 곳 어디든 소음은 존재한다. 소음 속의 고요만이 참된 고요이다. 히말리야에서 느끼는 침묵은 그대의 침묵이 아니다. 그것은 히말리야가 주는 침묵이다. 하지만 시장 속에서 그대가 침묵을 느낀다면, 그 안에서 완전히 평한하고 느긋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대가 성취한 침묵이다. 그때 그대는 가슴속에 있는 히말리야를 얻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침묵이다.
두 눈을 믿어라
편견은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아주 쉽고 편안하다. 반면 진리는 많은 대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값비싸고 소중하다.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 인생 전체를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진리만이 그대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두려움 속으로 뛰어들어라
정말로 좋은 것은 무섭기도 하다…두려움이 생길 때마다 뒤로 물러서지 않도록 늘 명심하라. 뒤로 물러서는 것이 두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은 아니다.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라. 만일 어두운 밤이 무서우면 어두운 밤으로 나가라. 이것만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이다.
사람들은 행복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정말로 행복해지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자기 자신을 잃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자신의 에고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행복과 에고는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대가 행복할수록 그대는 점점 없어진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온전히 행복만이 있는 순간에 이르게 되면, 그대는 그대가 아닌 존재가 된다.
나무는 동요하지 않는다
독립적인 사람들에게 있어 정치나 외부 세계의 어떤 변화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가난하든 부자이든, 거지든 왕이든 그들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그들의 내면의 온도는 일정하다.
어떤 일이들 일어나는 그대로 허용하고 언제나 행복해한다. 그대의 의지를 버려라. 그러면 그대는 갈망하던 일들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모든 일들이 술술 풀리고 척척 맞아떨어질 것이다.
그대가 스스로를 포기하기 시작할 때, 그대는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제야 그대는 싸움을 멈추고 즐기기 시작한다.
세상만사가 부질없다
세상만사가 헛되고, 삶에는 진보도 증진도 없다. 삶은 그 자체로 영원하기 때문이다. 삶은 그 자체로 영원하기 때문이다. 삶은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꿈꾸는가
위대한 사상이나 이념 앞에 서면 사람들은 비참함과 더불어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런 관념들은 터무니없고 실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욕망이 없을 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
욕망이 없고, 실현되어야 할 이상이 없는 그때, 비로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
그대가 듣고 있는 것에 대해 해석하지 말라. 그대가 판단하는 순간, 그대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이 않게 될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그대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면 그것은 아무 의미 없다. 그대가 자신의 삶을 결코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와 두려움 없는 용기가 주는 기쁨을 맛본 사람들은 지식이 결여된 삶을 결코 아쉬워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지식이라는 아편에 의존해 살아왔을을 깨달았기 때문이고, 열정적인 삶이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헛된 질문을 버리고 참된 질문 하나만 쥐어라
진정한 질문은 매우 조용하고 아주 작은 목소리를 갖고 있는 반면, 쓸데없는 99가지 질문들은 대단히 현자인척 아주 시끄럽다. 그리고 참된 한 가지 질문을 하지 못함으로써 그대는 참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해답은 참된 질문 안에 있다. 질문의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이 해답이다.
진리는 항상 그대 곁에 있다.
진리를 알고자 한다면, 진리에 대한 모든 관념을 잊어야만 한다.
두려움은 받아들이는 순간 사라진다.
무지함을 자각할 때 지혜가 찾아온다
갈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이미 갈구하는 모든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절대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현자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점이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만사가 무익하다는 것은 언젠가 반드시 깨닫는다.
항상 아마추어가 되라
욕망은 많지만 필요는 적다. 필요는 충족될 수 있지만, 욕망은 충족될 수 없다. 욕망은 채울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아이들 하나하나를 하나의 기적으로 생각하라. 그들을 존경하고 경외하라. 그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라.
사랑이란 조건을 없애는 탈조건화의 과정이다.
판단하지 말라
판단은 그대의 평화를 방해하는 병이다. 현재는 바로 지금 일어나는 것이다. 내일 그것이 변하며, 변한 대로 받아들여라.
판단이 개입되면 그대는 결코 현재 속에 있을 수 없다. 언제난 앞으로, 옆으로, 뒤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결코 그대는 지금 이 순간에 있을 수가 없다.
#존재의 틈
일어나는 모든 것을 깊이 받아들이면 그것은 축복이 된다.
진리는 언제나 그자리에 있다
철학자들은 진리를 발명한다.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소위 ‘진리’라는 것은 그들의 지적인 발명품에 불과하다.
진리는 이미 이곳에 존재한다. 인간은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 그것을 발명해서는 안 된다. 그대가 발명하는 것은 무엇이든 허위일 가능성이 높다.
구하면 잃을 것이요, 구하지 않을 때 찾을 것이다.
추구한다는 것은 그 출발부터가 잘못이다(인위)…“찾는 것을 멈추고 가만히 있으라” 그냥 있어라. 그러면 놀랍게도 찾을 것이다.
그대가 행복해야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
집착은 진짜 소중한 것을 놓치게 한다
그대가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그대의 마음은 점점 수축한다…무지한 사람은 유식한 사람보다 마음이 더 크다. 무지한 사람은 마음에 담겨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유식한 사람의 마음은 지식으로 가득하여 공간이 없다.
명상은 머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머리로는 일어날 수가 없다. 명상이 머리로 이루어지면, 그것은 명상을 흉내낸 것일 뿐이다. 참된 명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참된 명상은 언제나 가슴에서 일어난다. 그러니 명심하라. 참된 깨달음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