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 한알 속의 우주. 녹색평론사. p219
무위당 장일순의 이야기 모음
이 작은 책을 읽은 이들 모두가 글에서 말로, 말에서 침묵으로, 침묵에서 옹근 삶으로 선생님과 함께 행진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삶의 도량에서
세상에 태어난다는 사실은 대단한 사건 중에서도 대단한 경사입니다. 태어난 존재들이 살아간다는 것은 거룩하고도 거룩합니다. 이 사실만은 꼭 명심해야 할 우리의 진정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녁밥과 술자리에서 나누었던 좋은 이야기와 못마땅했던 이야기를 반추합니다. 이런 것 저런 것을 생각하다가 문득 걸어가는 발밑의 풀들을 접하게 되는 순간 나는 큰 희열을 맛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짓밟라서 풀잎에 구멍이 나고 흙이 묻어 있건만 그 풀은 의연하게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상처와 먼지에 찌들린 풀잎이 하늘의 달과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형편없는 나의 그날의 생활이 떠오릅니다.
“옛날에 아주 머리가 둔한 아이가 있었는데 천지현황을 삼년 동안 꾸준히 익혔었단다. 그래서 나중에 문장을 지었는데 ‘천지현황을 삼년독하니 언재오야는 하시독일고’라고 했단다. 너도 그러면 된다. 책 덮고 나가 놀아라.”
#생태학적 관점에서 본 예수 탄생
이제 인간은 자기집착에 빠져 자연이 인간과 한몸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자멸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현행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지구의 자원을 거의 고갈시키고 있으며, 환경과 생태계가 생존할 수 없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멸을 가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화합의 논리, 협동의 논리
달마가 벽을 향해서 9년을 수도했다 이 말이야. 9년을 수도를 했는데, 그 9년 수도는 뭐냐? ‘자기’의 벽을 없애는 거야. ‘나’라고 하는 것을 없애는 거라구. ‘나’라고 하는 것을 9년 동안 닦아서 완전히 없애는 거라.
천상천하가 바로 ‘자기’야. 천상천하가 바로 ‘자기’라고. 일체가 ‘자기’라고. 그런데 자기 몸이 ‘자기’는 아니냐. 자기 몸이 ‘자기’가 아닌 동시에 전체가 ‘나’란 말이야.
내가 왜 이런 말씀을 여러분과 나누느냐 하면,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지 둘이 아니다 이 말이야. 생명은 볼 수가 없어요. 볼 수가 없단 말이야. 볼 수가 없는데 하나다 이 말이야…생명이 둘이다 할 적에는 ‘너’와 ‘내’가 갈리지는 거예요…이 생명은 절대세계에 속하는 거지, ‘너’와 ‘나’라든가, 삼이라든가, 이거는 상대적인 세계에 있다 이 말이야…생명의 세계는, 절대의 세계는 영원한 것이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너.나’해서 자꾸 담을 쌓고 가게 되면 말이지 수없이 담을 쌓게 돼.
자기가 꼭 일등을 해야 되겠는데 하고 생각을 하게 되면 자네는 여기 않은 사람들이 전부 라이벌이 되지. 안 그래?
‘한살림’이란 이야기 그 자체가 뭐냐. 생명이란 얘기거든. 하나란 말이야. 나눌 수 없는 거다 이 말이야.
땅이 없인 살 수 없잖아요? 하늘이 없인 살 수 없지요. 전체가 없이는. 그런 관계로서 봤을 적에 저 지상에 있는 돌이라든가 풀이라든가 벌레라든가 모든 관계는, 이게 분리할 수가 있습니까? 분리할 수가 없어요. 하나지. 그렇기 때문에 일체의 존재는 우주에서 어떻게 분리할 수가 있겠어요. 우주는 분리할 수가 없잖아요.
그럼 우리가 앞으로 일상생활에서 뭘 제거하고 가야 되는 거냐. 사회적으로 대접받는, 출세하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말자 이 말이야. 또 손해를 본다, 잇속을 본다 그런 것 계산하지 말자 이 말이야. 이거 참 말은 쉬워요. 나도 못하는 얘기를, 그렇게 되어야겠단느 거예요.
..그거 끗수 가지고는 세상이 복잡해지지 수재 가지고는 세상을 평화롭게 하지는 못해. 우리는 바보 집단 가지고 버려진 놈들끼리 다시 끼고 가자고.
맨 시작의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보자…한마디로 주판을 다시 놓자는, 우리의 생활을 회개하고 잃어버린 ‘靈’으로 돌아가자는 그런 거지.
따지고 보면 내가 내가 아닌 거지. 그것을 알았을 적에 생명의 전체적인 함께하심이 어디에 있는 줄 알 것이고 우리가 연대관계 속에 유기적인 관계 속에 있으면서, 헤어질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으면서, 그러면서 투쟁의 논리가 아니라 화합의 논리요 서로 협동하는 논리라는 그런 시각으로 봤을 때에 비로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고 하는 새 시각 속에서 우리 한살림공동체 이야기도 될 수 있겠지.
#거룩한 밥상
그런데 죽어가는 거리를 자꾸 만들면서 한쪽에서는 살아야 되겠다, 자연보호해야겠다 이런 얘기한단 말씀이야…사는 꼬라지는 병 그대로 근원을 가지고 있으면서, 겉으로 뭐냐면 장생하려 들고 제대로 살려 들고 자꾸 이렇게 얘길 하는데, 매일의 생활의 모습은 병을 주면서 오래 살고 좋은 건 저만 뭐 어떻게 하겠다, 그런 요새 세상인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병이 나지 않게끔 되는 원 바탕이 뭐냐, 그런 얘기가 좀 돼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잠깐 했어요.
그런데 지금 이제 주부님들께서 이런 마당에 모이셨는데 엄청난 용기를 내고 나오시는 거란 말이에요. 다시 얘기해서 현실세계의 싸움에 있어서는, 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계산을 보지 말아야 한다 이거예요.
예수가 현명하지요, “느이 마음에서 간음한 적이 없으면, 자신 있으면 돌로 때려봐라”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그 얘기가 아주 기찬 말씀이에요. 그렇게 슬기롭다구요. 그런데 이제 그 얘긴 뭐냐. 매사가, 마음에서 작정을 해야 된다 이 말이에요.(일체유심조)
예를 들어서 농산품을 갖다가 무공해식품을 먹어야 하는데 “벌레도 안 먹고 싱싱하게 된 것만 가져와.” 이거 미치는 거지. 농사짓는 사람 별 수 있어요? 도리가 없는 거다 이 말이야.
#세상 일체가 하나의 관계
성실하고 진실한 삶의 모습, 우리 전통으로 내려오는 맥락 속에서 누가 봐도 옳다, 누가 봐도 드것은 거짓이 아니고 참다운 거다, 그런 걸 우리가 갖고 있느냐는 거지요. 없습니다. 그런 걸 가지고 있지도 이어받지도 않았어요. 그냥 무시해버리고. 그러니까 전세계 사람들을 맞아들여서 우리 전통적인 걸 보여준다고 하면서도 얼렁뚱땅 전부 형식으로만 맞춰 얼버무리고 넘어갑니다. 그것이 우리 생활의 내면에 깔려 있느냐, 없다 이 말이에요…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전통, 우리 사는 방식을 너무도 무시해왔어요.
한마디로 주판을 잘못 놓고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주판을 잘못 놓게 되면 완전히 털어버리고 다시 놓아야지요. 이것이 이제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과제입니다.
…지금 세계문명은 핵무기, 공해 같은 여러 문제를 안고 있어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사람의 욕심에서 온 거란 말이에요.
원인에 대한 방향전환을 하지 않고 계속 문제의 결과만 놓고 어떻게 땜질을 하려 드니까 그게 되나요? 되지를 않지요.
그러니까 이 한살림운동은 무농약 식품을 먹는다 안 먹는다 하는 차원이 아니라, 지금 이 문명을 가지고 우리가 지구상에서 계속 살 수 있을 것이냐 없을 것이냐, 그런 차원에 있다 이 말이에요.
뭘 지금서부터 계산해? 계산하면 욕심이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겁내지 말고 가거라. 겁내지 마라” 하신 거예요.
욕심이 없는 자는 두려움이 없는 거라. 계산이 없어요. 어차피 상대적인 세계는 선이다 악이다, 길다 짧다, 전부 반대가 있게 돼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악이 없으면 선이 없다 이 말이에요. 또 장점이 없으면 단점이 없어. 일등을 할래도 이등 해주는 놈이 있어야 일등을 하잖아요?(표피관계일뿐)
노자의 삼보(세 가지 보배)? 자애, 검약, 겸손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는 알뜰함만한 게 없다”
벌레 하나도 한울임이다…그러니까 자연을 무시하면서-그건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마찬가지예요-무한한 자원을 개발해서 제대로 분배만 하면 그게 복지고 민주주의인 줄 알았아요. 그런데 이게 지금 한계에 와 부딪히고 있잖아요. 이래가지고는 이제 인류가 살 수 없다는 거예요.
사람을 모시고 하늘을 섬기는 길은 알뜰함만한 게 없다는 거요. 알뜰해야 모시고 대접하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농부가 타작한 뒤에 마당에 콩 하나 팥 하나가 있을 때 그걸 집어서 모으잖아요. 그 작은 콩 하나 팥 하나 속에 우주 전체의 힘이 들어있는 거라. 만남이 거기 들어있고, 생명이 있는 거라. 알뜰하다는 게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민주주의는 상대에 대한 존경과 상대를 귀하게 여기는 데서 오는 거지. 상대가 좀 실수를 했어도 “앞으로는 더 잘 하여야죠. 지난번 그건 좀 좋지 않았어요. 더 잘 하셔야죠” 그래야 되잖아요. “지난번에 그 따위로 했으니까 넌 꺼져” 그렇게 해서 민주주의가 되겠어요?
잔뿌리 없이 큰 나무가 될 수 없어요. 그러니까 대(大)와 소(小)는 하느님 아버지의 차원에서 보면 같은 거라. 그게 바로 한살림의 차원이에요.
한살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어려운 일이에요. 속담에 “연자방아 돌리던 망아지는 밭에 가도 돌기만 한다”는 말이 있어요. 여태까지의 습관, 관행을 버리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지. 결국은 자신 스스로의 끊임없는 결단을 통해서 자애와 절약, 겸손을 바탕으로 전체를 보고 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시(侍)에 대하여
“밤똥은 닭이나 누지 사람도 누느냐”
한살림 속에서도 고(苦)와 낙(樂)이 함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공생관계는 각자를 긍정해주는 것이란 말이에요. 각자를 긍정해줘야 모시는 것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시장경제라고 하는 것은 돈을 모시는 경제지 생명을 모시는 경제가 아니다” 이 말씀이야. 그러니까 문제는 농민들이 스스로 오늘날의 공산품 틀속에 들어가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니까 본원적인 문제가 해결이 안되는 거라.
“쉬우면 쉽게 알 수 있고 간단하면 쉽게 따를 수 있고 쉽게 알 수 있으면 친할 수 있고 쉽게 따를 수 있으니 공을 이루리라-쉽고 간단한 속에 천하의 이치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명운동… 참 쉬우면서도 어려운 이야기지요. 더구나 이것을 정반대의 문명, 문화 속에서 처리를 해가자면 많은 어려움도 있을 거예요. 그래도 쉬운 가운데서 처리해 나갈 수 있는 그런 슬기를 가지고 모든 것에 고객를 숙이고 모시는 자리에 있게 되면 결국은 깃들지 않겠나,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애와 무위는 하나
무농약의 음식을 먹으면 건강하다고 또 장수한다고 하고, 다 좋지요. 다 좋은데 저만 오래 살려고 저만 오래 건강하려고 그렇게 되었을 때에는 바로 그 자체가 엄청난 공해를 가져온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나의 어른이 아니냐 누가 나의 스승이 아니야 비록 부인이나 어린아이의 이야기라도 배울 만하면 나의 선생이 되나니라. 이건 앞으로 우리 한살림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우리가 경천, 경인뿐만 아니라 敬物까지 해야 하는 판인데 부인이나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옳은 이야기면, 좋은 이야기면, 타당한 이야기면 받아들이고 선생으로 모셔야 된단 말이에요. 기것을 어떤 기득권과 명리를 위해서 모인 단체나 대권을 위해서 모인 정당이나 그런 데에서는 여간해서는 안되겠지요.
‘자애’와 ‘무위’는 삶에 있어서 하나의 표리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애라고 하는 것은 동체라고 하는, 나와 하나라고 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면 자애라고 이야기할 수 없고 사랑이라고 할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사랑의 관계에 있어서는 ‘너’와 ‘나’라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관계, 동체라고 하는 관계, ‘무아’의 관계지요.
그러면 무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그런 속에 있어서의 하나의 행위의 양식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어요. 무위는 계산법이 없으니까. 이렇게 하면 이로우니까의 관계가 아니라 그 말이지요.
#나락 한알 속에 우주가 있다
천지지간 만물 중에 사람이 제일 고약한 것 같아요. 고약한 것들끼리 모여가지고 맨날 싸움이야. 그러니까 이걸 극복하는 길은 뭐냐.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밖에 더 있겠어요? 자연이 사는 모습대로 따라가는 길밖에는 방법이 없다 이 말이에요.
글로 배우고 듣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러분들이 농사를 짓는 가운데서 “하늘과 땅과 생물이 바로 나다”하는 것을 빨리 체득하시라 이 말씀입니다.
자연은 소유하려는 게 없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그것을 보지 못하고 가게 되면은 농사를 지어도 헛농사를 짓게 되는 거와 마찬가지예요. 앞으로 우리가 공동체를 얘기한다고 할 적에도 그렇게 되면 헛공사가 된다 이 말이에요. 바로 보이지 않은 것은 보이지 않는 거다, 보이는 것은 보이는 거다 하고 따로 떼어놨을 때, 그러한 철학과 사상, 생각은 생명과 아주 거리가 먼 거예요.
죽으면 어디로 돌아가기? (흙으로요.) 흙은 또 어디로 돌아가지? (영생하겠지요.) 바로 그 얘기여, 죽지 않는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당당해야 될 거 아냐. 그런데 요샌 세상이 어떻게 되느냐, 늙어서 얼굴이 쪼그랑 바가지 돼도 그 몸뚱이만 백살 이백살 삼백살 살려고 하지? 그러니까 잘못 됐다는 거지. 뒈질 땐 뒈져야 되잖어? 그런데 뒈졌다고 해서 뒈지는 게 아니거든. 생이 없으면 사가 없고 사가 없으면 생이 없다 이 말이야. 공이 없는 색이 없고 색이 없는 공이 없어.
#왜 한살림인가
경쟁과 효율을 따지게 되었을 때에는 일체가 어떻게 되느냐. 적수가 돼. 그렇게 되지 않아요? 일체가 적수가 된다 이 말이야. 저 사람이 일등을 하면 안 될 텐데. 내가 일등을 해야지. 이렇게 되지 않느냐 말이야. 그러니까 만인이면 만인이 전부 갈가리 나눠지는 거란 말이야. 그러고 제가 제일이고. 이치가 그렇지 않아요?
이치는 뭐야? 생명은 하나라는 거예요. 둘이 아니야. 하나지. 그런데 이 생명은 볼 수가 없어. 보지를 못하지만 우리가 느끼고 알 수가 있단 말이야….
경쟁과 효율을 따지게 되면 일체가 이용의 대상이 되는데, 그렇게 해서는 살 수가 없게 된다 이 말이야. 생명이 존재하기가 어렵게 되므로, 생명이 무시된다 이 말이야.
우리가 지금 살면서 매일같이 엎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한쪽만 보기 떄문에 엎어진단 말이야. 우리가 여기 모두 소비자인데 농사짓는 사람이 없으면 우리가 이 일을 할 수가 있어요? 또 소비자가 없으면 농사꾼이 생산을 할 수 있어요? 바로 그런 관계다 이 말이야. 이게 없으면 저게 없고 이게 있으면 저게 있고 우주의 모든 질서는, 사회적인 조건은 그렇게 되어있다 이 말이야. 그러면 누그를 무시하고 누구를 홀대할 수 있느냐라는 말이지.
땅에 있는 모든 풀은 무시당할 풀이 하나도 없어
이제 시대는 공생의 시대예요. 자연과도 공생해야 되지만 제대로 사는 것을 모르는 사람하고도 공생해야 된다 이거예요. 그런데 그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가서 만나고 안아주고 그렇게 하고 그 사람들네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그렇게 하는 속에서 연대가 되는 거다 이 말이에요.
문제를 널리 보고 넓게 보고 깊이 보고 그렇게 해서 대처해 나가지 않으면 이 한살림운동은 그냥 “그 옛날 한살림운동이 있었어…그러더니 결국 그러더니 끝나더구먼.” 얘기가 그렇게 될 수도 있어요.
생명운동에 이기주의는 존재할 수 없어요. 사람의 능력은 때로 출중한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혼자 가지고는 안돼…
우리 마음은 생각은 됐는데 몸이 빨리 안되는 거 있잖아요. 이 자연도 이미 독으로 오염이 많이 되어 있어서 하루아침에 빨리 안돼요. 자정능력을 상실한 것을 하루아침에 빨리 어떻게 됩니까? 되어가게끔 해가면서 같이 끌고 가야지.
#내 안에 아버지 계시고
일등만 인정하고 이등 이하는 인정하지 않는 세상이 문제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전부 최면에 걸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살지 못하는 것이고 아버지를 모시고 있으면서도 모시고 있다고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사심없이 자기부정을 하고 가면
옛날에 부처님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그런 말씀을 했더란 말이야. 제가 어렸을 땐 “야, 이 양반 몹시 건방진 양반이로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세월이 가고 많은 것을 경험하고 어려운 고비와 죽을 고비를 여러번 겪고 보니까 세상에서 지극히 겸손한 말씀이더라 이 말이야. 그 얘기는 뭐냐. 자기부정을 사심없이, 욕심없이 철저히 하고 가면 진정한 나를 만나게 되는데 진정한 나를 만나게 되는 순간, 그것은 뭐냐, 아버지야. 아버지와의 대면이야. 그렇게 돼.
오늘날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전세계에 산업문명 이후에 상혼이 배태되어 모든 것을 잇속으로만 계산하려 들고, 모든 것을 경쟁 속에서만 해결하려 드는 데 있어요. 이제 그러한 시대는 날로 미로에 빠지게 되고 날로 쇠퇴해서 수십년이면 자취를 감추게 될 거예요.
#늘 깨어있는 사람
하는 일 없이 안하는 일 없으시고
달통하여 늘 한가하시며 엎드려 머리 숙여
밑으로 밑으로만 기시어 드디어는
한 포기 산속 난초가 되신 선생님
출옥한 뒤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비록 사람 자취 끊어진 헐벗은 산등성이
사철 그늘진 골짝에 엎드려 기며 살더라도
바위틈 사란 한 포기 품은 은은한 향기는
장바닥 뒷골목 시궁창 그려 하냥 설레노니
바람이 와 살랑거리거든 인색치 말고
먼 곳에라도 바람 따라 마저 그 향기 흩으라. -김지하[말씀]
온전한 자유인, 노자의 ‘물처럼 사는 삶’
“물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둥근 그릇에선 둥글고 모진 데선 모지다. 많이 모아도 물, 작게 갈라놓아도 물이다. 끓여 증발해고 물이요, 얼어도 물이다. 물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지만 끝내 자기를 잃지 않는다. 또한 물은 아래로 아래로 흘러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한방울의 물은 아무것도 아니나 바다의 성난 파도는 무섭다. 가장 유약한 것이 가장 강할 수 있다.”
“..그런데 1980년 제가 출옥한 후, 그동안 추진해오던 1970년대의 협동운동을 평가한 결과 신협운동을 제외하고는 모두 실패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이 이념적 토대가 취약했던 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생명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며 분열시키고 죽이는 삶의 질서에 대항하며 살아있는 생명으로서의 인간의 생명을 회복하는 광범위한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1977년에, “종래의 방향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해오던 노동운동,농민운동 등 여러 운동들의 문제점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늘 이길이려니 하고 갔다가 아니면 다시 시작하는” 끝없는 진리추구자이며 틀렸다고 느끼는 순간 범인들이 취하기 마련인 “관성의 법칙”을 과감히 결별해버리는 참으로 용기있는 스승인 것 같다
절대세계, 즉 하느님 나라에서의 계산법이 다릅니다. 포도밭 일꾼들에게 준 품삯을 보십시오.
심지어 그는 혁명조차 ‘보듬어 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삶, 새로운 생명에 대한 전제가 없다면 혁명이란 무의미한 것이니까. 그러므로 혁명하는 자의 자세도 사랑이어야, 포옹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햑명은 인간에 대한 애정, 그릇된 것에 대한 거룩한 해결이 아니면 안 된다고 그는 외치고 싶으리라.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이이지만…
#풀 한포기도 공경으로
앞으로는 머리가 아니라 몸의 한살림을 하자고
새로운 그릇이 필요하지요…한살림은 자기혁신을 과제로 하고 있습니다.
해월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자든 어린아이든 그 행동이나 말이 올바르면 나의 선생님이다”라고.
자신의 생활체험으로부터의 이야기, 실생활 위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훌륭한 이야기도 생명력이 없잖습니까?
#겨레의 가능성은 대중 속에
반독재운동을 계속하다 보니까 종전의 맑스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 가지고는 문제의 해결은 물론이고 악순환이 계속되겠더란 말입니다.
농약, 비료를 마구 뿌리고 도시산업화를 꾀하는 것을 보니 이 강토 전체가 황폐화되겠다라구요. 환경도 살고 우리도 살자는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겠더군요. 6.3사태 이후에 원주에서 농촌운동을 하려고 한 박재일씨와 77년부터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공동체 내지는 농토를 살리고 먹거리를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 되지 않겠는가’하고 얘기했어요. 김지하가 옥중에서 ‘선생님, 방향을 바꾸지 않으셨어요?’ 하더군요. 그래 어떻게 알았느냐 하니까 ‘아, 눈치보면 알지요. 들어오는 쪽지도 그렇고…’하는 겁니다. ‘그래, 바꿨다. 종전의 이데올로기 가지고는 안되겠다.’ ‘선생님, 저도 생명운동 아닙니까.’ ‘맞다. 그 방향으로 가야 된다.’ ‘그렇게 하면 대중들이 먹지 않을 텐데요.’ ‘안 먹어도 던져라. 너는 글재주가 있으니까…’ 그래서 [밥]이니 [南]이니, 모든 게 그떄부터 나가기 시작한 거지. 그런 것은 생명운동의 시작이었단 말입니다.
“…우리집 바로 앞에 천도교 포교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학을 알게 됐습니다. 46년에 수운 최제우와 해월을 알게 되었지요. 영원한 세계,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말씀들을 다 가지고 있더라구요. 그렇게 되니까 이 쑥배기가 함부로 갈지(之)자를 못하겠더군요.”
#새로운 문화와 공동체 운동
문명의 전환? “이 기계적인 문명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경쟁과 효율을 따지게 되니까, 결국에 가서는 자기까지고 소외시키지 않습니까? 그래서 서양문명은 산업문명이 극도에 달해 돈만 가지고 얘기하는 세상이 되었는데, 이제는 그 돈만 가지고 얘기하는 세상도 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생명이라는 것은 혼자가 아닙니다. 일체가 유기적인 상관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일체가 협동하고 공생하는 시대로 전환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 부엌에서부터, 농촌에서부터 일어나야 한다고 봤거든요. 사람은 먹지 않고는 못 살고 일용품을 쓰지 않으면 못 살잖아요. 농촌에서는 유기농 내지는 자연농이 되어야 하고, 또 그것만 가지고서는 안 되지요….생활의 변화 내지는 실천이 점차적으로 시도되지 않고는 방법이 없다고 봅니다.
“보듬어 안는 것을 혁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그런 혁명도 다 있느냐고 묻더군요. 혁명은 새로운 삶과 새로운 변화가 전제가 되어야죠. 새로운 삶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전심투구하는 노력 속에서 새로운 삶이 태어나는 것이잖아요. 새로운 삶은 ‘보듬어 안는’ 정성이 없이는 안되니까요.
“갚을 마음이 있어야 되는 거지, 갚을 마음이 없는 사람한테 가서 돈을 달래면 받지도 못하면서 사람을 잃고, 또 갚을 마음은 있는데 돈이 없어서 못 갚는 사람한테 가서 달래면 그 사람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워. 그러니 그런 슬기롭지 못한 짓은 하지 마라”하고 당신 자식을 그렇게 가르치시더군요.
#반체제에서 생명운동으로
#한살림운동과 공생의 논리_김종철
한살림운동? 이것은 흔히 보아왔던 경쟁적 권력투쟁과는 매우 거리가 먼 방식, 즉 각자의 비근한 일상적 삶 속에 자치와 협동의 공간을 가능한 한 확보하고 넓혀가려는 대안적 생활문화운동의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동학사상을 단지 잊혀졌던 지식의 복원이라는 수준이 아니라 그것을 오늘날 가장 필요한 삶의 실천적 원리로서 살려낼 수 있었다는 점에 장일순 선생의 커다란 공로가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얘기하는 생명운도의 핵은 전일성인데, 전(全)이라는 건 보이질 않아요. 그러나 우리가 생활속에서 겸험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같은 서투른 사람한테 ‘생명이 뭐냐’ 하면 ‘몰라’ 하는 게 정답이라구. 어떻게 말로 글로 얘기할 수 있어요. 배맛이 이렇다 저렇다 말로 얘기하는 것하고 같은 거지. 각자가 소화시켜 나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어요.
그리고 특히 내가 좋아하는 것은 ‘향아설위’라는 거 있잖소. 그것은 종래의 모든 종교에 대한 대혁명이죠. 늘 저쪽에다 목적을 설정해 놓고 대개 이렇게 해주시오 하고 바라면서 벽에다 신위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데, 그게 아니라 일체의 근원이 내 안에 있다, 즉 조상도 내 안에 있고 모든 시작이 내 안에 있으니까 제사는 내 안에 있는 영원한 한울님을 향해 올려야 한다는 말씀이지죠.
실은 어떤 지식을 쌓는 일보다도 근본적인 시각의 문제가 아닐까요. 시각이 안되어 있으면, 가령 ‘향아설위’라는 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죠. 요즘 지식인들의 습관으로는 ‘아(我)’를 잘못 읽기가 쉽상이겠죠. 그래서 이건 굉장히 오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天地는 父母요 父母는 天地니 天地父母는 一體也니라”

“나락 한알 속의 우주 | 한살림? 생명은 하나!”에 대한 2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