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사유의 기호. 승효상. p291
승효상이 만난 20세기 불멸의 건축들
“당신은 왜 시(詩)를 쓰는지 아는가”
혁명의 건축을 만나다? 아돌프 로스! 그 책에서 그는 그는 건축가라기보다는 혁명가였다. 도무지 내가 배우고 익혔던 것처럼 아름다운 건물을 상상하고 스케치하며 장인인 체하는 소위 예술가가 아니었으며, 시대를 마주하고 타성과 관습에 저항하며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나는 그의 건축을 구경하러 빈 시내를 다시 샅샅이 뒤지고 다니면서, 탄식을 거듭하며 그제서야 조우한 게으름을 탓하고 있었다. 그리고 건축은 기술이며 예술의 일부라는 그릇되고 헛된 가정이 내 머리에서 깨끗이 지워지고 있었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은 건축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는 일 아닌가.
건축, 우리 삶을 짓는 것!
“나는 건축이 우리의 삶을 바꾼다고 믿는 자이다. 부부가 같이 오래 살면 서로 닮는다는 것도 한 공간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까닭에 그들의 삶이 그 공간의 지배를 받아 같이 바뀐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We shape our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그 건축이 다시 우리를 만든다.”-처칠
좋은 건축은 좋은 삶을, 나쁜 건축은 나쁜 삶을 만들 수밖에 없다.
영조(營造), ‘지어서 만든다’? 집은 세우는 게 아니라 짓는 것이다! 밥을 짓고 농사를 짓고 시를 짓듯이 집은 지어서 만든 것이다.
어떤 재료를 가지고 생각과 뜻과 마음을 통하여 전혀 다른 결과로 변화시켜 나타내는 것이다. 단순한 물리적 운동의 결과와는 그 방법과 과정이 다르며 근본적으로 사상이 다르다…바로 삶의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즉 사는 방법을 만드는 것이 건축이라는 뜻이다.
건축가의 그림은 그의 사유에 대한 기록이 되어야 하며 그 그림이 보편적 언어로 나타난 것이 건축가의 도면이다. 따라서 건축가가 그림에 소질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단지 그는 그의 생각을 글로 쓰듯이 약속된 기호와 선으로 적어나가면 된다. 어떻게 보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문학적 소질이지 예술적 기예가 결단코 아닌 것이다.
생활을 더욱 윤택하게 하는 놀라운 현대주택? 우리는 더욱 행복한가? 이는 바로 기술의 진보가 우리의 삶을 그 비례대로 진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우리의 삶은 때때로 퇴보해버린 경우도 허다하며, 오늘날 기술의 발전이 몰고 온 가정과 사회의 분쟁과 갈등의 여러 병리현상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기술은 건축과 다른 것이며 다만 우리의 삶의 시스템을 때때로 편리하게 하고 굳건하게 하는 수단의 가치가 있는 하위의 개념이다.
건축은 시각적 상징과 기호로 취급, 일종의 조형예술로 착각하고 있다(건축은 사유의 기호!)
공과대학 혹은 예술대학 속 건축학과? 굳이 건축을 다른 학문의 분류에 넣으려 한다면 인문학에 가깝다. 문학적 상상력과 논리력, 역사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사물에 대한 사유의 힘이, 이웃의 삶에 대한 애정과 존경 속에 작업해야 하는 건축가에게는 필수불가결한 도구들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좋은 건축의 세 가지 기준? 합목적성/시대성(건축은 대단한 기억장치, 시대의 거울)/ 장소성(건축은 현실의 땅과 항상 불가분의 관계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생각하면 건축은 집을 짓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집은 하부 구조이며 그 집 속에 담기는 우리들의 삶이 그 집과 더불어 건축이 된다. 우리의 삶을 짓는다는 것이, 건축의 보다 분명한 뜻이라는 것이다.
불멸의 건축가들? 새로운 시대, 새로운 건축으로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했던 그들의 건축은 나에게 보물 같은 가르침이었으며 외로운 항해를 위로하는 동역(同役)의 기록이었다. 그들은 그야말로 밤하늘의 별만 의지하고 자기가 추구하는 로고스를 향해 험한 파도와 싸워나간 혁명가들이었다. 무엇이 그들을 항상 새롭게 만들었을까. 그들에게는 공통된 원칙이 있었다!
‘당신은 시를 어떻게 쓰는지 알지만 나는 시를 왜 쓰는지 안다.’
왜라는 본질에 관한 질문을 안아 철저히 자기를 부정하고 새로운 정신을 만들 수 있는 태도야말로 이 시대에 필요한 진정한 시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은 건축을 왜 하는지 아는가
바로 이 질문이 지난 시대 불멸의 건축가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화두였으며 그 힘이 혁명의 건축을 이루고 우리의 삶을 개혁시켜 새로운 시대를 이룬 것이었다. 그들의 기록은 역사 속에만 존재할 이유가 없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기록이며 특히 캄캄한 밤바다에 던져진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스승이 된 것이다.(질문의 힘!)
건축 기행문? 그러나 나는 그렇게 불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행문이라기보다는 20세기 불멸의 건축들을 통해 사유한 건축가의 기록이며, 어떻게 보면 내 건축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건축이 물신에 사로잡혀 유희의 도구가 되고 궤변에 의해 희화화되는 지금, 그 유혹을 뿌리치고 건축의 본질을 찾아서 빛나는 별을 돠표 삼아 오늘도 외로이 밤바다를 항해하는 건축의 선배들, 동료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미카엘 광장에 세운 시대정신_아돌프 로스와 로스 하우스
“..오늘날은 어떠한가. 모두들 죄다 소리지르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도시는 아우성 속에 신음하고 있다.”
결국 그토록 소란스럽던 빈의 거리는 로스에 의해 비로소 침묵의 아름다움을 배우게 되었고, 시민들은 그 속에서 오히려 돋보여진 삶의 방식에 결국 동의하였으며 그 집을 로스하우스라 부르면서 이 선각자의 혜안과 의지를 경외하게 되었다.
“아돌프 로스는 미카엘 광장에 건축을 세운 것이 아니라 철학을 세웠다.”
이미 한 세기 전의 일이며, 그것도 우리와 뿌리부터 다른 먼 나라의 역사가 작금에 와서 끊임없이 상기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왜 잘살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잘살아보자고 질주해 온 우리의 오늘, 천민자본이 득세하여 도시는 이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그러진 건축물들로 어지럽고 그 속의 문화에는 퇴폐와 저질이 만연해 있으며, 사회는 온통 부정과 부패의 가십으로 가득차 있다. 포스트모던, 해체주의의 불연속적 정황과 찌꺼기가 우리의 삶터를 마구 유린하고 국적불명, 정체불명의 난잡한 몰취미와 우매함, 말초적 유희에의 탐닉 등이 이 도시의 건축을 파편화시키고 결국 우리의 삶을 일그러뜨리는 이 시점이, 한 세기 전 그들의 세기말적 상황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미궁의 시대를 꿰뚫을새로운 시대정신을 구할 수 있어야 한다. 로스의 건축이 다시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가.
#이상주의자가 빚은 기념비_주세페 테라니와 코모 파시스트의 집
진정성을 움겨쥔 그들은 때때로 혁명가였으며 수시로 구도자적 삶을 살았고 기본적으로 이상주의자들이었다.
#슈투트가르트에서 일어난 혁명_바이센호프 주거단지
요즘 내가 목격하는 주거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도가 지나쳐도 한참을 지나쳐 있다. 주거라는 존재가 우리의 삶의 문제에서 벗어나 부동산의 처지로 전락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이제는 재산 증식의 차원을 넘어 로또 같은 투전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경축 재건축 플랭카드? 가풍이고 뭐고 없다. 그냥 적당히 살다가 비싼 값에 되팔고 또 다른 투기 현장 속으로 찾아가서 삶을 맡기면 그뿐이다. 이른바 도시의 유목민처럼 우리의 삶은 부유하고 방황하니, 가벼울 대로 가볍기 그지없다.
지속되지 못하는 우리의 삶에 문화가 생겨날 리 없고 건강한 공동체가 형성될 리 만무하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점점 소모적이고 투쟁적이 되어가는 것일 게다.
집은 이제 신분의 상징이 아니라 삶의 도구였다
“우리가 여기에 설계한 것은 집이 아닙니다. 바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삶을 설계하였습니다.”-미스 반 데오 로에
건축이란? ‘우리의 삶을 조직하는 것’, 집의 모양은 결과일뿐. 건축은 ‘공간’에서 본질적인 힘을 얻는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를 지속시키는 것은 공간의 힘이며 그 공간의 법칙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결국 우리를 변화시킨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주거는 우리의 삶 자체이며 우리의 존재다.
#아름다운 산책로, 서구주택의 완성_빌라 사보아
르 코르뷔지에? 탁월한 감수성을 가진 예술가였으며 엄청난 자기훈련을 통한 지식의 축적으로 이를 정제시킨 지성인이었고, 보다 나은 세계를 위해 부단히 주장하고 제안하고 이를 실현한 건축가였다.
정식으로 건축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엄청난 양의 독서와 여행을 통해 동서고금을 통찰하고,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질서를 향해 그의 건축을 전달하며 주옥같은 작품을 쏟아놓았다.
빌라 사보아는 내가 보는 한 우리와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갖는 전형적 서구주택이다.
현대건축의 명료한 교과서이며 서구주택의 아름다운 마침표? 이보다 더욱 아름다운 주택을 더 이상 서구건축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증좌이다.
#진실의 건축_르 토르네 수도원과 라 투레트 수도원
“빛과 그림자는 이 건축의 고요함과 강인함을 크게 외치고 있다. 어떤 것도 더해질 수 없다. 미숙한 콘크리트의 시대에 처한 우리의 삶 속에소, 이 엄청난 조우를 기뻐하고 축복하며 반기자.”-르 코르뷔지에
#태양의 도시_르 코르뷔지에의 찬디가르
‘한 장소에 고정되어 그 속에서 삶을 만드는 것’에 목적이 있는 ‘건축’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현장에 가서 진실을 마주하여 지니고 있던 환상을 깨는 일이 중요하다…장소를 떠난 건축은 한갓 조형물일 뿐이다. 바로 이 ‘장소성’이 건축을 이해하는 핵심적 요소라는 명분으로 나는 여행을 즐긴다.
오랜 역사와 전통에 묶여 있는 인도에 근대산업도시를 세우기 희망했던 네루와, 기계미학에 대한 믿음이 굳건한 르 코르뷔지에의 마음이 합친 결과였다
#마음의 풍경_한스 샤로운의 베를린 필하모니 홀
바로 이 건축 속에 ‘공동성’이라는 가치로 굳게 확립되어 갈라져 있던 우리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소니와 벤츠의 합작 대규모 건물? 아! 이념도 굴복했던 이 문화의 도시를 굶주린 자본이 다시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이념보다 교묘한 자본의 장벽이 더욱 견고하게 다시 선 듯 느꼈다면 이는 나의 염세적 습관 때문일까.
바라건대 문화로 세운 도시는 결단코 쉽제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 도시는 우리의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 속에 있기 때문이다. 잘못 쓰인 자본은 마약과 같다.
#시적 진실로 이룩한 20세기 건축의 대혁명_베를린 국립미술관 신관
창조적 건축? 건축의 원형의 감동? 그것은 그 원형을 만든 건축가의 싱싱한 생명이 그 건축 속에 무서운 에너지를 내뿜으며 고스란히 살아남아 있기 때문이다.
두 수평면 사이에 창조된 투명한 공간? 유니버설 스페이스? 지붕을 띄울 수 있는 기술에 대한 통찰력을 지녔던 미스에게 벽은 완전히 자유로운 장치물이었을 뿐이다
#침묵의 메시지_루이스 칸과 루이스 바라간의 건축정신
건축이 지식과 경험의 축적에 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구와 역사적 배경이 다른 우리는 그 지식의 역사와 경험의 과정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저네들이 만든 결과를 가지고 우리의 건축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라는 것도 그 껍데기의 파편만을 건축의 중심 사조인 양 애지중지하기도 한다.
한국적 건축? 곡학아세하는 건축가와 건축학자들을 동원하여 ‘한국적건축’이라는 괴물들을 이 땅의 중요한 곳마다 만들어놓는 바람에 올바른 ‘우리의 건축’을 이 땅에서 찾는 일이 더욱 요원해졌고 급기야 우리의 현대 건축은 미궁에 빠지게 된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도시에 대현 건축물을 설계하기 위해 치열한 로비를 벌이는 외국 건축가들에게도 우리의 건축 현장은 단지 비즈니스이고 돈 버는 현장이지, 새로운 건축이념을 세우는 무대가 아니라는 것이 심각한 현실이다.
“건축가는 지적 감수성을 통하여 보편적 세계를 보는 자이다”
건축의 사유의 결과물이지 물질의 소산이 결단코 아닌 것이다
#뱅갈의 빛과 침묵_루이스 칸과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침묵과 빛’. 이는 그의 건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다.
비교적 늦은 깨달음이었으나 이후 투철한 사색을 통해 그의 건축은 끊임없이 성숙하게 된다
#’큰 기술’이 만든 ‘반(反)건축’_파리 퐁피두 센터의 시대적 성취
콘크리트는 이미 2,000년 전 로마인들이 만들었다는 것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건축은 중력과의 싸움? 내부 공간을 만들기 위해 벽을 쌓고 올리는 일은 다름 아닌 중력에 대한 저항인 것이다
고딕 건축을 하이 테크놀로지라 부르는 이유? 바로 건축이 중력에서 해방된 것!
#세계를 향해 열린 창_요한 오토 폰 스프렉켈슨의 라 그랑 아르세
건축의 문제는 삶 자체의 문제에서 그 이해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건축은 삶을 담는 그릇)
비우기보다는 채우기를 워하고, 잇기보다는 끊기를 더욱 즐기며, 쓰임보다는 가짐에 더욱 가치를 두어온 서양인들 통상의 의식 가운데가 뻥 뚤린 커다란 건물? 구조가 맞닥뜨린 이 건축이 내뿜는 메시지는 놀라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우리가 애초에 사랑하던 비움과 여백의 아름다움이 왜 우리의 도시에 더 이상 남아 있지 못하고 저렇게 먼 이방의 지역에 가 있을까. 우리의 도시는 언제까지 경제적 수치의 환상에 매달려 서양인이 가져다준 물질의 논리로 무장한 채, 오로지 채움의 번잡함에 시달려야 하나. 우리의 도시에 ‘미래에의 전망’은 과연 있는가. 왜 자꾸만 도시는 얼룩덜룩한 벽체로 닫히고, 그 속에 우리의 아름다운 삶은 가두어지는가.
비움으로써 미래를 채운 이 본질적 공간의 건축을 보면서, 우리는 이 시대 이 땅에 서 있는 우리의 도시와 건축이 가져야 하는 고마운 교훈을 얻는다.
#건축과 기억_프랑크푸르트 뢰머 광장과 쉬른 미술관
개발과 보전은 반대의 개념이 아니다. 얼마든지 보존적 개발이 있을 수 있으며 무조건적 보존 논리가 초래하는 방치는 오히려 환경을 파괴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바른 진보란 백지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앞선 시대의 업적을 흡수하여 이루어지는 누적적인 일이다!
‘경축, 재개발 확정’? 아무리 건축이 문화가 아니라 부동산으로 전락한 지 오래 되었다고 하더라도 과거의 상실을 축하하기까지 하는 우리들의 정체는 혹 유목민인가.
건축은 강력한 기억장치이며 우리의 정체성은 총체적 문화인 건축을 통하여 확인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건축을 시대의 거울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대의 건축 거울을 통해 비쳐지는 서울은 도무지 600년 역사를 가진 고도(古都)라고 믿기 힘든 급조된 풍경이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짓고 너무도 쉽게 허무는 것 아닌가.
#지식의 도시_프랑스 국립도서관
건축가는 주로 혼자서 작업하는 다른 예술가와는 달리 건축주가 있어야 하며 협업하는 이가 있어야 하고 시공하는 이들이 있어야 비로소 그의 작업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예술가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르 코르뷔지에라는 위대한 건축가는 프랑스라는 사회의 산물이라는 말이다
#귀엘 공원의 재발견_안토니오 가우디의 이상도시
‘건축적 조경’? 외부 공간에 단순히 나무나 꽃을 심어 채우는 게 아니라 땅을 건축처럼 다시 만드는 것이며, 그 땅에 세워지는 건축이 그 땅의 형국을 닮게 만드는 것이다. 건축과 조경 혹은 건축과 장소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건축적 조경’이라는 단어는 현재 서구 건축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화두이다. 이 화두의 실천적 방법들을 바르셀로나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땅 자체가 건축이며 조경과 건축의 구분이 불가능하다
건축은 반드시 자연과 함께 있어야 하며 또한 전통과 함께 있어야 한다
#성서적 풍경_시구르트 레베렌츠와 우드랜드 공동묘지
[고전주의의 딜레마]를 읽으면서 아스플룬드의 장제장이 그토록 감동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건축 자체보다는 공동묘지의 조경 때뭄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조경을 만든 이가 바로 레베렌츠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레베렌츠는 비록 한 줄의 문장도 남기지 않았고 누구에게 가르치지도 않았지만, 그의 침묵의 건축을 통하여 그가 옳다고 믿었던 모든 것을 우리는 배울 수 있으며 그것은 어떤 글보다도 더욱 설득력있는 명문이었다.

“건축, 사유의 기호 | 사유의 기록”에 대한 2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