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강신주. p423
철학은 산을 오르는 과정과 같다? 좋은 전망을 얻기 위해, 그리고 그 전망을 마음껏 즐기는 사치를 누리기 위새선 다소 험준하고 높은 곳에 오르는 수고를 마다해서는 안 됩니다. 인문학의 장르 중 가장 험하고 고도감이 높아 사람들이 쉽게 오를 수 없는 분야가 바로 시와 철학일 겁니다. 시와 철학은, 오르기만 하면 그래서 그 고도감에 적응하기만 하면, 시인과 철학자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거의 모든 것을 조망할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하는 빼어난 산과도 같습니다.
철학은 삶을 낯설게 하는 학문? 삶을 낯설게 할 수 있는 조망을 얻으려는 것은 삶을 관조하기 위해서 혹은 지적인 쾌감을 얻기 위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삶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긴 여정의 하나일 뿐입니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이성복 시인
우리의 고통은 그저 우리 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철저히 자각할 때만, 시인의 표현처럼 나의 고통은 오직 나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애써 인정할 때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한계 너머의 타자와도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일상적 삶은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전’으로의 끊임없는 이행이다. 예술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며, 예술은 일상적인 삶과는 반대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다. 즉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전에서 위험으로.
시집과 철학책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것은 시인과 철학자가 친숙한 세계가 아닌 원초적으로 낯선 세계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낯선 세계도 낯선 표현 방식을 통해 더욱 잘 드러날 수 있습니다.
난해한 시와 철학?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비트겐슈타인
시는 기존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새로운 말을 만들어 말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아이러니를 발생시킵니다. 이 때문에 시가 어려운 겁니다. 새로운 말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새로운 말을 강제했던 시인의 낯선 감각도 공감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니 말이지요. 하지만 시인이 생경한 표현에 충분히 적응하면 놀라운 변화가 찾아옵니다. 과거와 다른 느낌으로 세계를 보고, 그에 따라 삶을 새롭게 영위하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새로운 느낌을 기존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지만 그것을 억지로 표현하려고 시도할 때, 더듬거리는 말처럼 우리가 입속말로 웅얼거리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철학은 개념을 창조하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엮음으로써 새로운 사유 문법을 만드는 학문입니다. (새로운 그물을 만드는 작업)
시인이 물속으로 직접 들어가 온갖 물고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존재라면, 철학자는 그물로 끌어놀린 물고기를 다시 확인하고 만져보는 사람입니다.
주관적인 것 같지만 보편적인 시? 물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누구나 시인이 느꼈던 낯선 물고기들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
보편적인 것 같지만 주관적인 철학? 철학자가 만든 특정한 그물을 물속에 던지면 그것에 딱 어울리는 특정한 물고기만 잡힐 수 있다
시와 철학은 인문학이 양극단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와 철학은 모두 이성복의 말처럼 “진정한 삶의 복원하기 위해” 친숙한 세계를 낯설게 하는 인문학의 본령에 충실한 것들입니다.
인간의 뇌구조? 오랜된 뇌(본능), 중간 뇌(감성), 새로운 뇌(이성). 시는 정서와, 철학은 사유와 밀접
진정한 시인과 철학자 독자들에게 정서와 사유에 충격 혹은 자극을 준다? 새로운 실천, 새로운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유와 새로운 정서가 불가피한 법이기 때문이다
슬픈 자화상? 20세기 이후 철학을 공부했던 우리나라 대부분의 학자들은 ‘수입상’의 신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신과 이웃의 삶을 포착할 수 있는 그물을 스스로 만들기보다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그물들을 매번 수입해서 판매했던 것이지요.
그렇지만 21명의 우리 시인과 한 명의 철학자는 달랐습니다! 온몸으로 우리 삶을 느끼려고 했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우리말로 표현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연대_네그리와 박노해
인다라의 구슬
인다라의 하늘에는 구슬로 된 그물이 걸려 있는데 구슬 하나하나는 다른 구슬 모두를 비추고 있어
어떤 구슬 하나라도 소리를 내면 그물에 달린 다른 구슬 모두에 그 울림이 연달아 퍼진다 한다-화엄경
지금의 ‘개인의 시대’라고 합니다
우주 기운으로 태어나 우주만큼 소중한 한 생명,
한 인간이 먼저, 내가 먼저입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내 한 몸 바치는 것을 미덕으로 교육받아온
‘개인 없는 우리’에서
자유롭게 독립하여 주체적인 개인들의 연대-
‘개인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노동 해방에서 화엄의 세계로
[노동의 새벽] 박노해? 노동해방
“인생이 참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세상이 참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한때는 씩씩했는데, 자만했는데, 내가 이리 작아져 보잘 것 없습니다. 아닙니다. 내가 작은 게 아니라 큰 세상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관계 그물이 이다지도 복잡 미묘하고 광대한 것을 안 것입니다. 세상도 나도 생동하는 그물에 이어진 작으나 큰 존재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다라의 구슬처럼 지구마을의 큰 울림을 만들어가는 주체입니다.”
인다라의 그물 비유는 예전부터 화엄 불교의 유명한 테제, ‘일즉다 다즉일’, “개별자는 전체이고 전체는 곧 개별자다”라는 논리를 설명하는 데 자주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마르크시즘에 따르면 자본가와 노동자는 대립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박노해가 전하는 화엄 세계는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궁극적인 조화의 논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이제 갈증의 변증법적 논리에서 울림과 전체라는 화엄의 논리로 건너가 버린 셈이지요.
연대? 다양한 소통 매체들을 통해 이제 사람들은 농사를 짓건, 공장에서 일하건, 강단에서 정신노동을 하건 별로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을 자각? 무엇인가 일을 하고 있고 그 대가로 돈을 받고 살아가는 생활인으로서 삶이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다중Multitude의 출현? 촛불집회? 네그리가 말한 것처럼 ‘공통되기becomming common’를 경험하기 시작,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과 힘을 주면서 참가자들은 지금까지 자본주의가 분리시키고 단절시켰던 간극을 극복하고 공통적인 연대의 가능성을 처음 맛보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사랑과 기쁨의 연대, 다중? 우리에겐 사랑에 대한 더 넑고 자유로운 사고가 필요하다…사랑은 바로 우리의 확장된 만남들과 부단한 협동들이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의 뼈_비트겐슈타인과 기형도
소리의 뼈_기형도
김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묵살되었다/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어느 시인의 고독한 죽음? 중앙일보 기자 한 명의 죽음에서 요절한 젊은 시인으로.
내가 규칙을 따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소리의 뼈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 다양한 규칙들.
언어의 규칙이란 마치 척추동물에게 몸의 뼈와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유의 의미_아렌트와 김남주
어떤 관료_김남주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근면이 미덕일 수 있을까?
사실 ‘근면’이 이렇게 지고한 덕목으로 자리한 것은 박정희 독재 정권을 상징하는 새마을운동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자본가 계층이 성장하려면 그들이 잉여가치를 계속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이 값싼 노동력의 지속적인 공급이었지요. 사실 이런 이유에서 농촌을 근대화하려는 정책이 추진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농지를 정리하고 기계화함으로써 농촌에서 남아 도는 인력을 양산해 내야 했던 것이지요.
경제 발전으로 발생한 잉여가치는 자본가에게만 집중되었고, 시골에서 올라온 대부분의 가난한 도시 빈민층 노동자들에게는 이 화려한 잔치의 몫이 돌아갈 여지가 없었던 것이지요.
정치범 김남주? 종이가 귀한 정치범. 감옥이 그를 시인으로 만든 일등 공신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요?
어떤 관료? “근면, 정직, 성실, 공정, 충성, 봉사”의 덕목을 두루 갖춘 위인. 그러나 김남주는 그를 “개”라고 부릅니다! 그 관료는 주인이 누구인지를 전혀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지요. 일본제국주의자들이든, 미군정이든, 박정희 정권이든, 아니면 전두환 정권이든 그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웃집 아저씨처럼 너무나 평범했던 아이히만? 근면성 자체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철저한 무사유’였다!
사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이 아니라 의무이다!
아렌트가 생각하기에 사유란 ‘타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무사유란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지요.
불행히도 아이히만은 반드시 사유해야만 했을 것을 전혀 ‘사유’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든 일들이 너무나 전문화되고 분업화되어 있어 우리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도대체 어떤 일인지,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거의 반성할 틈이 없습니다. 그저 내게 주어진 서류를 정리하고 거기에 서명하고 있을 따름이지요. 그 서류에는 유대인의 검거와 수용소 수용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전체주의를 막을 방법? ‘사유’를 개인들 각자의 의무로 수행하는 것
어쩌면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의 후손이 곧 우리를 손가락질하게 될지도 모르지요.우리 아버지 혹은 어머니는 ‘사유’를 하지 않고 그저 ‘근면’하기만 한 ‘개’였을 뿐이라고 말이지요.
#미시정치학_푸코와 김수영
하…그림자가 없다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차 있다…
*민주주의 적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
자발적 복종, 자기 검열? 곧 대개 죄수들은 간수들이 감시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스스로 감시에 저촉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경제적이라는 사실을 직감할 것입니다
여러모로 이 같은 형태의 인간 주체 구성은 애완견을 훈련하고 길들이는 과정과도 흡사한 면이 있습니다
구성된 주체에서 구성하는 주체로
#대화의 재발견_가라타니 고진과 도종환
“타인을 수단만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칸트
#한국 사유의 논리_박동환과 김준태
길-밭에 가서 다시 일어서기1_김준태
사람 속에서 기을 찾다가
사람들이 저마다 달고 다니는 몸이
이윽고 길임을 알고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기쁨이여
오 그렇구나 그렇구나
도시 변두리 밭고랑 그 끝에
눈물 맺혀 반짝이는 눈동자여
흙과 서로의 몸 속에서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바로 길이었다
#에필로그
기쁨과 자유, 이것이야말로 철학과 시를 포함한 모든 인문학의 궁극적인 꿈이자 인문학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역사상 수많은 철학자나 시인들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기쁨을 박탈하려는 권력의 시도에 맞서 그렇게 단호했던 겁니다. 지금 자유와 기쁨에 대한 교활한 억압이 우리 사회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가족이나 민족 혹은 국가를 위해서 자신의 기쁨을 희생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발상, 문명의 발전은 경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자본주의 경쟁 논리, 혹은 권력을 대표에게 양도하는 것이 민주 시민의 자세라고 현혹시키는 국가의 감언이설이 바로 그것입니다.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 기쁨과 자유의 인문학”에 대한 2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