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을 멈춰라! 이반 일리히(이한). p191
자율적 공생을 위한 도구
앞으로 몇 년 동안 나는 산업시대의 종막을 쓰려고 한다. 일괄 포장되고 학교화된 현 시대에 발생하는 언어, 사회, 의례, 법상의 변화를 추적하고 싶다. 산업생산양식에서 독점의 쇠퇴와, 산업이 창출하여 산업생산방식에 봉사했던 직업의 소멸을 묘사하고자 한다.
학교화된 사회? 모르는 사이에 근본적인 가치를 파괴한다!
운송체계 역사 어떤 속도를 넘어서게 되면 강제적인 것이 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어떤 서비스 기관이건 산업화되면 파괴적인 부작용을 만들어 낸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상품의 과잉 생산은, 누구도 원치 않은, 잘 알려진 부작용을 발생시킨다. 우리는 모든 사회의 서비스 부문 성장에 공산품의 산업생산이 본질적으로 부딪히는 한계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여기서 나는 인간 삶의 다차원적인 균형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자 한다.(인간이 도구와 맺는 관계를 평가하는 틀)
공생적(convivial) 사회? 기술의 관리자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상호 연결된 개인에게 현대기술이 봉사하는 사회
토마스 아퀴나스의 검소함? 모든 쾌락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인간관계로부터 멀어지게 하거나 관계를 파괴하는 쾌락만을 거부하는 미덕!
***도구 발전의 역사상 커다란 두 분수령?
첫번째 분수령은 근대적이고 간단한 도구가 인류의 복지에 널리 기여할 수 있게 되는 시대로 진입하는 시점
두번째 분수령은 도구가 과잉발전하여, 도구가 인간을 지배하고, 삶의 목표를 도구가 설정하는 시대로 진입하는 시점
역설적이게도, 도구가 간단하면 간단할수록, 의료전문가들은 그 도구를 자신들만 독점적으로 사용해야 된다고 주장했고, 그 가장 간단한 도구를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의료 전문가가 되기 전에 소요되는 훈련기간은 더욱 길어져만 갔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급기야는 모든 사람들이 의사를 더 의존하게 되었다.
의사들에 의해 생긴 질병 중에서 가장 심각한 질병은 바로, 의사들이 환자에게 더 나은 건강을 안겨주는 척하는 허풍이었다.
잘못된 관리에 대한 치료법은 더 많은 관리? 오염된 강을 치료하는 방법이 더 값비싼 청정합성세제? 궁극적으로 가속화를 통해 위기를 해결하려는 시도다(거꾸로, 전복적 발상이 필요!)
공생적 재건? 위기의 해결이 그 시도의 실패를 깨달음으로써 시작될 수 있다!
현존하는 어떠한 정부도 공생적으로 사회를 재건할 수 없다? 그렇게 사회를 전복하는 일은, 현존하는 제도를 관리하는 자들의 권능을 넘어선다!
도구와 목적의 공공연한 전도를 깨닫게 해주는 방법론은, 화폐가치로 무엇이 좋은지를 측정하는 데에 익숙해진 일부 사람들의 저항을 받는다.
여기서 내가 의미하는 바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바로 교육의 발명이다. 우리는 종종 교육이 요즘과 같은 의미를 획득한 것이 최근의 일일 뿐이라는 점을 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존하는 구조 안에서 자기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 자신들의 기반을 잃기 꺼려한다.
#다중 균형
인간의 균형은 열려 있다. 균형은 유동적이지만 한정된 범위 내에서 이동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현재의 산업체제는 역동적으로 불안하다. 산업체제의 무한정한 팽창은, 그 결과로 끊임없이 창출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필수품이 되어버리는 새로운 필요를 위해 조직되어 있다.
*생물학적 타락? 환경위기에 너무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도구에 위협당하는 균형 중 한 가지에만 토론의 초점이 집중되었다. 일차원적인 논쟁은 무익하다.
*근본적인 독점? 하나의 브랜드가 아니라 한 가지 유형의 생산물이 지배하는 상태. 그러므로 차는 수송을 독점한다!
*과잉계획? 배움이 교육으로 변해버리면 사람들의 시적 능력이 마비된다(창조적 사고 억압)
***사람들은 한계 내에서 살기 위해선 배워야 한다. 그러나 이는 가르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생존은 사람들이 얼마나 빨리, 무엇을 할 수 없는가를 배우는 데에 달려 있다. 그들은 무제한의 출산, 소비, 자원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는 점을 배워야 한다. 사람들을 교육시켜 자발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게 하거나, 스스로를 통제하도록 조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 많은 생산을 위해, 비용이 감소하고 있다는 환상을 위해 조직된 세계에서 즐거운 포기를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배우기를 가장 원하는 것들은, 가르치거나 교육할 수 없는 것들이다.
*양극화? 대규모 도구를 지닌 사회는, 다수가 값비싼 특권 꾸러미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못하게 하는 여러 가지 장치에 의존해야만 한다.
*노후화
*좌절? 잘못된 기술은, 환경을 살아갈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근본적 독점은 일할 능력을 마비시키는 지점까지 풍요에 대한 요구를 강제한다. 과잉계획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사회화시키며, 표준화하고, 시험을 치르게 하며, 재형성하는 틀 속에서 다루는 세계를 만든다.
제도가 생산한 가치가 중앙집중화되고 꾸러미로 묶이게 되면, 전복 불가능한 구조적 전제주의 상태로 사회를 양극화시킨다.
#회복
과학의 탈신화/ 언어의 재발견/ 법적 절차의 회복
#정치적 전복
우리에겐 아직, 다가오는 위기의 원인을 이해하고 위기에 대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한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닫힌 계에서 엔트로피는 증가할 수밖에 없다.
***일리히의 남다른 통찰력? ‘외부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산과 소비를 줄여야 한다고 말하는 상당수 생태주의자들의 논의, 여기에는 인간의 자율성과 창조성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반면에 일리히는 ‘스스로 목적을 설정하고, 창조적인 행위를 할 평등한 자유를 가지며, 자기 삶을 자율적으로 관리할‘ 권리를 중심으로 논의한다!!!
산업사회의 생산과 소비는 ‘좋은 것이지만 환경의 한계 때문에’ 줄여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는 생산과 소비 과정에 사용되는 도구가 ‘인간을 지배하고 수단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인간성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그 도구의 성장에 한계를 부과해야 한다는 논리를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다.
KTX는 일리히의 통찰이 옳다는 것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 더 빠르고, 비싼 차량이 도입되어, 이전의 수송수단을 몰아낸다. 소수의 돈 있고 거점역이 목적지인 대도시 사람만 혜택을 보고, 나머지 대다수는 이전에 널리 공유했던 이동성을 잃어버린다. KTX보다 무궁화호를 여전히 이용해야 할 사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KTX가 철도운영의 중심이 되어버렸다(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철도청의 목적은 ‘국민 대다수의 여행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 아니라 ‘빠른 기차’ 한 종을 운행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사람이 아니라 도구 자체가 목적이 돼버린 것이다.
선거철 성장 공약? 과연 정치의 본질이 ‘경제 성장을 촉진시키고 관리하는 일’인가? 그렇다면 아예 기업가에게 정치를 맡겨 버리면 되지 않는가?
중요한 것들은 측정될 수 없다. 행복감 같은 것은 측정되어 국제적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공생의 사회 건설? 일리히의 기본적인 성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하지만 그의 제안과 지침은 우리 사회의 현실적인 실천, 위기를 기다리지 않은 적극적인 실천에 알맞게 다시 재해석되고, 비판적으로 음미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