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로운 가난. 엠마뉘엘 수녀. p240
가난의 역설? 가난이 가져오는 행복!(풍요 속 빈곤)
1993년 프랑스로 돌아온 엠마뉘엘 수녀의 예기치 않은 충격?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곳에서는 삶의 기쁨이 넘쳐났는데,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부유한 나라는 오히려 불만에 가득 차 있음을 확인하고 놀랐다. 물질적 풍요의 파괴적인 면모, 가난이 가져다줄 수 있는 풍요로움, 바로 이 패러독스를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들려주는 책
#패러독스의 한가운데서
카이로의 빈민가에서 23년을 보내고 돌아온 유럽? 부유한 나라의 안락함 속으로 떨어진 나는 뜻밖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불만과 곳곳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들여오는 것이라곤 온통 불평밖에 없었다. 세금, 행정관리, 교통요금, 휘발유, 학교, 아이, 배우자, 월급, 일자리, 이 모든 것들이 이곳에서는 사회 계층 꼭대기에서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온통 불만과 파업을 야기시키고 있다.
한 가지 역설적인 질문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카이로의 넝마주이가 느끼는 만족감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이며, 유럽의 부자가 느끼는 불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그런데 도대체 행복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가난이 풍요로울 수 있으며, 부가 파괴적일 수 있단 말인가? 가난이 행복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합리적이지도 나아지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말이다…가난은 내가 이 지구상에서 몰아내기 위해 언제 어디서나 싸워온 추한 현실일 뿐이다.
청소년기의 영웅? 다이엥 신부님! 저주의 섬에 내던져진 문둥병 환자들에게 가해지는 불의에 분노한 그분은 그들과 함께 그곳에 살면서 그들의 삶을 변모시키고, 문둥병 환자가 되기까지 하면서 죽을 때까지 투쟁하셨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삶이었다!(분노하라)
가난이라는 불의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뿌리뽑고 싶을 만큼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이 악이 어떻게 풍요로움의 원천일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이것이 패러독스다.
세월이 흘러 그리스도와 나의 관계가 좀더 가까워지자 그분의 헐벗은 삶은 내게 한층 더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1 가난이라는 추한 현실
똑같은 현실? 동일한 원인이 있다? 지구 전체에 대한 비전과 보다 근원적인 항거가 생겨났던 것이다(불공평하다는 이유에서 모두 비슷하다)
울부짖기? 우리의 외침은 충분치 않다. 계속해서 울부짖어야만 한다.(사회적 소외? 피에르 신부가 말하는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운명)
한 세기 전부터 급격하게 발전해온 체제는 엄청난 경제적 부조화를 가져왔다(1820년 부유한 나라와 개도국간의 임금 격차가 3대 1, 1999년에는 727대 1)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은 것은 추상적인 문제들이 아니라 고통의 얼굴이요, 아이들과 남자들과 여자들의 전락한 육신들이다(눈에 보이는 추한 현실? 어떻게 침묵하겠는가?-분노하라)
타인들의 빈곤 앞에서 일부 사람들이 보이는 무관심,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의 죄악이다.
소외란? 사회와 노동의 세계와 가족 바깥에 처한다는 의미, 가난한 이들은 아무런 관계도 갖지 못한다
*모든 빈곤이 동일한 비극을 나타낸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제3세계의 사람들은 살아가는 기쁨을 아는 반면, 부유한 나라의 사람들에게 가난이란 견디기 힘든 무거운 짐이다. 아프리카에서는 분명 대부분의 사람들이 궁핍 속에서 근근이 생활하지만,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질투는 오히려 부유한 나라들에서 터져나온다.
사회적 동화? 제3세계의 가난한 이들은 멸시와 소외를 당하지 않는다..빈민촌에서 우리는 매일 잠두콩만 먹었지만, 모두가 다같이 먹으며 웃고 즐겼다. 그리고 누구도 배고프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시간은 관계다‘. 이곳에서는 함께 있다는 기쁨 안에서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다. 다른 한쪽에서는 ‘시간은 돈이다‘. 여기서는 순간적이고 비싼 쾌락의 원천인 돈을 좇느라 스트레스를 받는다.
제 3세계의 가난한 이들은 절망을 알지 못한다. 제3세계에서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이 절망에 빠지는 걸 막아주고 있다. 그 같은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아주 조그만 것에 만족한다. 주운 물건 하나도 보물이 되는 까닭이다.
결국 이 두 세계는 서로 몇 광년이나 떨어져 있다.
나의 존재는 보잘것없으며, 앞으로 그 누구에게도 결코 의미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할 것이다, 라는 생각이야말로 무엇보다 근본적인 빈곤인 것이다.
의문? 가난은 어디서 오는가? 전세계적으로 공평한 균형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다국적 기업들과 대기업들은 제3세계의 발전에 있어서 모터라기보다 제동기 구실을 한다(광고, 형편없는 원료 구입 가격,비인간적 노동)
영농후계자에게 낮은 가격에 땅 제공? 떠나는 젊은이들? 단지 이론적 지식만을 갖춘 젊은이들에게 혼자 힘으로 그들의 지식을 실천에 옮길 능력이 없다는 걸 예견하지 못했다? 양배추를 심어야 할 곳에 토마토를 심었다!
*무능력은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농부들에게는 아무런 연장도 없다. 대개 나무로 된 괭이 하나밖에 가진 게 없다. 이런 조건에서는 우기에만 경작이 가능하다.
#2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내가 겪은 실패와 성공들이 제시하는 해법? 타인과의 관계를 기본적인 축으로/선한 의도만으론 불충분, 필요에 맞는 구체적인 적용/공동의 행복 추구/개개인의 책임감과 참여
어느 대륙에서건 가난한 이의 가장 절박한 욕구,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존중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인간을 존종하기)
상대방은 내가 무언가를 원할 때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와 더불어‘ 하기를, 그리고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적절한 관계가 만들어지려면 머리와 가슴이 만나야 한다…끈기와 악착스러움을 요구한다.
천사주의의 꿈에 빠지지 말라? 우리가 ‘특별하게 타고난’ 존재들 일 수는 없단 사실을 고백하자
*인도주의 단체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위험? 우월 콤플렉스(말로 떠드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박혀있다)/관료적 탁상업무(탁상공론,현장이 답이다)
우리는 더 이상 식민지 개척자들이 아니다
원조에 반대하는 선구적 단체들? 단순히 필요한 것을 주기만 한다는 것은 그들을 걸인의 수준으로 깍아내리는 것임을 이 단체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물고기로 하룻동안의 허기를 달래기보다 낚시하는 법으로 평생의 허기를 달래게 한다)
자립을 목표로 삼고 원조를 삼가라
“한 가지 충고를 드리자면, 여러분들이 이 경험을 제대로 맛보고 싶으시다면 여러분의 기준에 따라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하지 마시고, 그 지역 동반자들을 존중하십시오.”
사실 제3세계에 가중되는 대부분의 불의의 발원지는 서양이다
카인아, 네가 아우를 어떻게 하였느냐?
타임워너사의 테드 터너, 마이크로소프트 기부금?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을 기반으로 해서 재산을 축적하는 자들이 바로 이 억만장자들이다.
그들이 이따금씩 내놓은 후한 기부금은 그들의 양심을 민적시켜줌과 동시에 좋은 광고가 되어줄 뿐이다
나눔은 적선이 아니라, 지구 전체에 걸친 부의 정당한 분배를 의미한다
결국 변화를 일으키는 자란 누구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일하며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우공이산)
정의로운 사회 실현의 열쇠? 우리 개개인!(나부터 혁명!)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개인적 책임은 우리가 빈곤과 직접 접할 때 발휘된다
과거 몽테스키외가 부르짖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사는 사람들? 소비의 노예가 된 우리는 항상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구에 사로잡혀 있다
성공은 협력에 달려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첫째 일은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공동의 행복을 거부하게 되면 점차 세상이 화산으로 변하게 된다. 공평성에 어긋나게 축적된 용암들이 언젠가는 폭발하리라는 걸 모르는가?
#3 가난의 풍요로움
악착같이 거머쥘 때 은밀한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잃어버리지 말아야지, 도둑맞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루소는 인간이 한 평의 땅뙈기에 울타리를 치고서 “이건 내 것이야!”리고 외치게 된 날부터 인간의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어째서 그것이 불행인가? 그것은 인간이 땅과 더불어 자신의 마음까지 울타리로 가두었기 때문이다. 그후로 인간은 타인을 경계하게 되었다. 타인에 대한 시선이 변하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 그의 눈에는 이웃이 잠재적인 위험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텐트속 베두인족, 그들은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 물질적 재산을 축적하게 되면 대부분의 경우, 주변과의 순박하고 진심어린 관계를 잃게 된다.
폐쇄된 생활과 단절? ‘저는 멋진 아파트 안에서 고독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솔깃한 광고, 너무도 많은 활동에 치여, 가족에게조차 관심을 쏟을 시간을 갖지 못한다
남반구는 보다 느슨한 리듬으로 생활하다. 그곳에서는 인간관계가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물질적 빈곤과 정신적 부유함, 물질적 부유함과 정신적 가난함이 맺어진 경우를 일상생활에서 자주 접하게 된다
가난은 지나친 무거움으로부터의 해방?
이상적인 것은, 우선 타인들과 비교하지 말고 우리가 가진 것과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을 참으로 향유할 줄 아는 것이다.
가난의 풍요로움? 소유당하지 않는 인간의 지혜
빈민가의 장님 할아버지 바바 무스타파, “부족한 게 하나도 없답니다”? 그는 자신의 땅도 마음도 울타리로 가두지 않았다.
존재의 빈곤을 드러내는 부유한 나라들, 충만함과 존재의 풍요로움이 있는 가난한 나라들
절대적인 물질적 가난 속에서 발견한 자유? 가짜 광채를 벗어버리고 ‘자연인’과의 참된 관계 속으로
따라서 행복의 길이 열리는 것은 ‘헐벗음’을 통해서이다(욕구불만의 끝없는 순환)
“행복에 불필요한 그 숱한 것들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라.”
가난은 궁핍과 다르다. 궁핍은 기본적인 욕구들의 박탈을 내포한다.
그에게 내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현재의 순간을 온전히 음미한다(now & here)
카이로의 넝마주이들처럼 요란한 장식과 유혹을 벗어버린 헐벗은 인간은 자연히 자기 동류들과 많은 관계를 맺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활력이 넘쳐나는 전체의 끈끈한 일원이라는 기쁨을 끊임없이 길어올린다.
공동체, 이곳에서는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넘치도록 사랑을 받는다(요람에서 무덤까지)
대부분의 가정에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을 맞이하는 사람이 없다
내게는 더 이상 ‘소유’는 없고 ‘존재’만 있을 뿐이었다.
‘내’가 중심이 된 세상? 타인과의 근본적인 관계를 끊을 때 인간은 궁핍해진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고 예수 그리스도는 가르치셨다.
타인과의 관계를 가장 큰 재산으로 여기는 인간이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도록, 버릴 줄 아는 자는 행복하다. 이 가난은 행복이다. 그것은 인간적 삶의 원초적 조건이다.
*행복의 사다리
궁핍으로 몰아가는 부의 축적
“수녀님들, 소유하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이건 내 빗자루, 저런 내 걸레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단 한 가지 사물도 우리가 집착하기에는 충분하다.
소유는 축소되고, 존재는 강화된다
“좀 덜 쓰고 자유로워지는 게 정말 불가능하니?”
때로는 한 권의 독서가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해주기도 한다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가난의 마력? 타인에 대한 관심/소유는 감소하고, 존재는 강화된다/인간을 뛰어넘은 인간
‘헐벗음’이 존재를 풍요롭게 한다
소유의 가난 속에서 존재의 부유함을 발견하는 것
#4 가난을 선택한다는 것
물질적 헐벗음을 통해 정신적 부와 존재의 행복을 실현하는 것
해방? 최상의 자아가 드러나지 못하도록 가로막아 온 모종의 예속상태에서 풀려났다는 느낌을 가져다
선택한 가난은 강요된 가난과는 전혀 다르다(자발적 가난,자발적 검소simple living)
가난을 소망한다? 소유욕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자 하는것, 물질에 대한 근심을 떨쳐버리는 것은 타인들에게 헌신할 수 있는 능력 또한 해방시켜준다
공동행복의 추구만이 인간에게 존재의 부유함을 가져다준다. 먼저 이 기쁨의 결핍, 이 공허, 이 평안의 상실을 청진하고 자각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그 덧없고 타산적이고 피상적인 광채의 추구와는 정반대되는 방향으로의 선회가 가능하다(거꾸로 희망이다)
오히려 자기의 가장 피상적인 부분을 ‘버리는’ 것이요, 자기의 깊은 마음을 솟아나게 하는 것이다. 그 마음은 받기보단 주는 데서 행복을 발견하는 마음이다.
일상의 작은 실천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에고의 가난은 곧 보다 나은 자아의 풍요로움이 된다.
이제 역설의 순간이 왔다. 사욕을 채우고 쾌락을 쌓는 일을 거부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바로 우리 영혼의 공허를 채우게 된다.(채움을 위한 비움)
[단순한 기쁨]-피에르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