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다 잡초야. 황대권. p286
야생초 편지 두번째 이야기
야생초가 아닌 잡초? 처음에 풀에 대해 잘 몰랐을 때는 세상의 무시와 푸대접에 반발하여 잡초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피했지만 지금은 그런 몰이해의 역사마저 다 끌어 안고 좀 더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내 안에 잡초야 대한 어떤 부정적인 의식도 없는데 굳이 단어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단어 하나를 바꾸어 사람들의 의식을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지난 10년 동안 나는 의식의 변화가 아니라 유행의 변화를 목격했을 뿐이다.
나의 생태적 글쓰기와 성찰의 근본은 천지인天地人 사상이다.
내 안에 천지가 다 들어 있고, 하늘과 땅에도 사람이 다 들어 있다. 우리 선조들은 한 번도 사람을 천지와 구별하여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이를 분리한 뒤 인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모든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자연 속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아보면 천지인이 하나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하늘 天
새로운 문명, 새로운 생태주의 시대를 열어가는 사람이라면 의당 체제에 도전해야 한다. 시스템의 어딘가에는 반드시 틈이 있다. 그 틈에서 찬바람이 솔솔 불 텐데 그것을 막으려 하지 말고 재미삼아 한번 맞아보자. 점차 틈새에서 부는 바람에 익숙해지면 때때로 창문을 활짝 열고 찬 공기를 흠뻑 들이키자. 내 몸이 원래 자연산이었다는 사실을 깜짝 놀라며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물의 영장, 한 밤중 숲 속의 두려움의 이유?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대상화’하여 관찰하고 연구하고 개간하고 착취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무언가를 ‘했다’는 성취감은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늘 불안하고 두렵고 외로웠다. 나를 둘러싼 천지만물과 하나가 되지 못해 그렇다는 결론을 내렸다.
많은 자연 예찬자나 귀농인들이 자연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여러가지 즐거움을 얘기하지만 나는 그 가운데 ‘자연 속에 나체 되기’를 으뜸으로 친다. 흔히들 옷을 벗어던지면 공연히 쑥스럽고 위험하다고 상각하는데 그것은 옷을 입은 상태에서 가졌던 생각일 뿐이다. 옷을 벗고 한 시간만 돌아다녀 보면 그 모든 우려가 헛된 망상이라는 것을 바로 알게 된다….뱀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잘못된 정보 입력과 지속적인 반복 학습의 결과다…뱀뿐 아니라 대부분의 생물에 대한 인간의 관념은 정말 터무니없을 정도로 편견에 가득 차 있다. 그래 놓고 위험하니 어쩌니 하며 왈가왈부한다. 어떡하면 이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션찮은 반찬으로 맛있게 밥 먹기-플라즈마 식사법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찬이 아니라 밥 위주로 식사하는 것, 유기농 현미 잡곡밥
플라즈마 삭사법의 구성요소? 자연식품, 씹기, 침, 명상
‘음식은 몸의 양식이고 책은 마음이 양식’이라고 하지만 사실로 말하자면 음식은 ‘잘만 먹으면’ 몸과 마음의 양식이 된다.
#설거지 놀이
“일이 놀이가 되게 하라!”, 일이란 의미로 하는 것이지만 놀이는 쾌락을 위해 하는 것
만약 일과 놀이가 하나로 될 수 있다면 우리네 삶은 훨씬 풍요롭고 즐거운 것이다.
#모닥불 명상
젖은 장작을 가지고 아무리 애를 써봐야 연기만 나지 불은 잘 붙지 않는다. 사업이 잘 되지 않을 때는 먼저 자신이 젖은 장작이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제 안에 미해결책의 문제가 잔뜩 쌓여 있거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요인이 있다면 그것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이처럼 세상일이 잘 안 풀릴 때에 모닥불을 피우고 잘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의외의 지혜를 얻을 수도 있다.
『아나스타시아』 블라디미르 메그레-자연과 사랑에 빠진 한 여인의 놀라운 이야기
인간이 자랑하는 유구한 ‘문명’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 몸의 감각을 무디게 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도구를 만들어 손의 감각을 무디게, 옷을 만들어 피부의 감각을 무디게, 불을 만들어 음식을 익혀 먹음으로써 혀의 감각을 무디게, 집을 지어 살면서 몸 전체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오늘날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사는 인간의 감각은 거의 제로 수준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진실로 인간은 자연과 멀어진 이래 자연적 존재로서 원래 지니고 있었던 감각을 거의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자연에 가깝게 만들거나 자연 속에서 살아야 한다.
어떻게 보면 병이란 인간의 게으름을 일깨워주기 위해 자연이 선사한 고통 어린 선물이 아닌가 싶다.
#장작 패기 명상
찰나멸설, 우리 눈에 보이는 물질이 늘 그런 것이 아니다. 순간적으로 있다 없다를 반복하는데 우리 눈에는 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형광등 불빛.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존재의 ‘깜빡거림’ 수준까지 내려가면 생명의 실체와 맞닿게 되어 있다. 표현할 수 없는 일체감과 자유를 느끼게 된다.
#고속주행 명상
명상의 목적은 ‘작은 나’를 벗어나 ‘큰 나’와 하나 됨을 경험하는 것
전신호흡, 온몸의 주의를 기울여 최대한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되 더 이상 들이마실 수 없을 때까지 숨을 들이켜고 더 이상 폐에 공기가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숨을 내쉬는 것
#추위에 대하여
현재의 식량공급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 바로 인간을 사육하는 장본인이다. 그들은 다름 아닌 자본가. 과거에 인간을 사육했던 이들이 종교 지도자와 왕족이었다면 현대에는 자본가가 인간을 사육하고 있다. 그들이 깔아놓은 판매 네트워크에 한발 걸치고 사는 한 사육을 피할 도리가 없다.
#경물
경물의 생활화? 일상의 삶 속에서 물건이 가지고 있는 영적 차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 물건과 합일을 추구하는 것, 이를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경천애인’은 저절로 될 것이다.
#생태영성_그 자리 찾아가기
다른 모든 주제도 그렇지만 특히 생태와 영성은 참여자의 직접 체험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제삼자의 입장을 취하는 한 결코 본질에 다가설 수 없다.
사물은 본질은 의도하지 않을 때에 더 잘 드러난다. 의도한다는 것 차체에 이미 나의 주관과 기억에 의해 사물을 보려는 기제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성이란 개체 생명이 무한한 생명의 그물망에 접속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접속된 상태를 의미한다.
##땅 地
#한 그루의 나무
지난 10년간 공동체를 만들자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입으로 떠들고 글을 써왔지만 구경꾼은 많았어도 진실로 함께 동고동락하고자 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다들 자기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처지가 다르다 보니 쉽게 결정을 짓지 못한다.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찾아온 사람들도 이곳의 척박함과 공동체 만들기의 어려움을 한두 번 겪고 나면 미련없이 짐을 싸고 나간다.
#근심과 걱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농사는 하늘이 짓는 것이거늘
내가 한다는 착각 속에 여름부터 그렇게
근심과 걱정 속에서 살았네
애착 또는 집착을 공(功)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농사는 근본적으로 자연이 짓는 것이며 인간은 다만 그 과정에 이런 저런 방식으로 개입할 뿐이다. 자연의 공(空)으로 농사가 이루어지는데, 그 공(功)의 주체인 자연의 본질은 공(空)이다. 안타깝지만 인간은 공(空)으로서의 자연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나와 자연농법
대체로 자연농업의 선구자들은 한 사람의 농부라기보다 위대한 자연철학자였다. 후쿠오카 마사노부는 거의 선인의 경지에 이른 도가 철학자였고,신비한 밭에 서서』를 쓴 가와구치 요시카즈는 박학다식한 예술가이며, 자연농업으로 인류를 구원하겠다며 ‘세계구세교’를 창시한 모키치 오카다는 대단한 영성가였다. 이들이 깊은 영성과 철학을 겸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자연을 철저히 연구하고 실천한 결과였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이분들은 그렇다 할 스승도 없었다. 있다면 자연이 스승이었다.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짚 한오라기의 혁명』? 자연농업은 인간이 지금까지 이루어낸 문명을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혁명적인 사건
근원적인 혁명? 인류의 문명은 자연으로부터 비롯하여 인위의 극단으로 치달아왔다
역사는 반복된다? 자연 회귀는 인위 문명이 수명을 다하고 완전히 다른 문명이 시작됨을 뜻한다
자연농업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근본 화두인 ‘자연’과 ‘농업’의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주는 키워드다.
“자연농업은 단순한 농법이 아니다. 인류가 지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아 있는 유일무이한 길이다.”
#리듬에 맞춰
“야호~이랴~ 아루루루루루~”
협동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그것이 신명 어린 리듬 속에서 이루어져야 참으로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
리듬을 잃은 생명은 죽은 것이다. 아니 생명은 곧 리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심장의 박동이 리듬이고 그 심장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화음도 리듬이다…이 리듬을 잘 읽고 맞출 수 있다면 일이 곧 놀이가 되고 놀이가 곧 일이 된다.
‘게으른 농부’ 이영문의 태평농법? 내가 아는 한 세계가 어디에서건 기계를 써서 일이 줄어들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기계를 쓰면 절약된 시간 이상으로 다른 많은 일들이 생긴다. 대개는 기계 값을 보전하기 위해 경작면적을 더 늘리거나 다른 농가의 일을 대항하는 경우가 많다.
‘풍요의 병’? 현대인의 건강이 저하된 결정적 원인은 먹을거리에 있다
#원자력과 인류의 미래
지역민의 무관심과 관련하여 또 하나 이해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는 고창군의 조용함이다. 피해로 치면 더 심각할 수 있음에도 고창은 마치 남의 동네일처럼 반응이 없다. 물론 고창 쪽에도 예외없이 한수원의 돈이 흘러들어간다.
##사람 人
이 시대의 진정한 혁명은 귀농이고, 나약한 지식인에게 농촌과 흙은 온몸으로 감당해야 할 현장이다. 만약 도시에서라면 ‘관념’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지만 이곳은 ‘경험’이 없으면 앉아서 굶는 수밖에 없다. 이참에 귀농 희망자들에게 딱 어울리는 중국 속담을 하나 소개한다.
“말로 밥을 지을 수는 없다.”
#단순 반복 노동을 찬미하다
도시에 살다가 귀농을 결심한 이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이러한 바다는 반복 노동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다. 성과 위주의 삶에 익숙한 도시인이 시골에 내려와 물 쓰듯 시간을 쓰며 하는 단순 반복 노동에 절망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농촌 살림에 있어서 단순 반복 노동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풀지 않고는 다른 모든 문제도 풀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경험은 죄악이다
흙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서 흙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여행서 한 권을 읽고는 아프리카 다녀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트라우마
“상처가 치유되고 나서 새롭게 성장하는 게 아니라 상처를 안은 채 성장하는 것입니다.”
#전문가 타령
“아무래도 전문가를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시생활을 하다 산속으로 들어온 젊은이들에게 일을 부탁하면 으레 이런 식의 대답이 돌아온다. 내가 보기에 초심자라 할지라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부탁하는데도 반응은 늘 그런 식이다. 어째서? 물어볼 필요도 없다. 이 나라 교육 시스템이 원흉이다. 실사구시와는 거리가 먼 암기 위주, 입시 위주의 교육에 치중하다보니 손과 머리가 따로 노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초심자가 빠지기 쉬운 또 하나의 함정은 준비가 철저해야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이런 풍조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준비가 완전에 가깝게 되었다고 판단이 거기까지는 절대로 시골로 가지 않는다…준비를 오래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 머릿속에 있는 A B C D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실천에 옮기곤 하는데 사실 그 조건이라는 게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포장은 경우가 많다. 일의 세계에 단계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일이 진행되는 순간마다 새로운 조건과 새로운 깨우침이 생겨나기 때문에 이 모두를 미리 대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어떻게는 무슨 어떻게! “그냥 하면 된다.” 다짜고짜 물이 빠뜨리는 것이 수영을 배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경구가 귀농인에게도 꼭 필요하다.
사실 우리 조상님들은 전문학교 문턱도 밟아본 일이 없이 그 모든 일을 얼마나 잘해왔던가!
#달과 모닥불, 그리고 인생
“그대가 두려워하는 것은 실패 아닙니까?”
“그대가 실패를 예감하면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많고, 성공을 예감하면 성공할 확률이 더 높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공과 실패는 누구도 알 수가 없습니다. 먼저, 결정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는 믿을 게 못됩니다. 아무리 머리로 미래의 일을 예측하고 계산한다 하더라도 그대로 이루어질 확률은 1퍼센트도 안 됩니다. 그보다는 오랜 기도 후의 ‘느낌’으로 결정하는 것이 더 믿을 만합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찰리 채플린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조금 고생스럽겠지만 내가 해놓으면 누군가 혜택을 보겠지!
여럿이 함께 농사를 지어보니 이런 마음이 없으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흔히 농사를 지어 수확만 해놓으면 큰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확 이후가 더 힘든 법이다. 수확한 낟알을 고르고 건사하는 일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닌데, 예전에는 그 일이 대부분 여자들 몫이었다.
고르바초프가 패래스토로이카(개방, 개혁)을 결심한 계기? 감자를 줄줄 흘리고 가는 트럭 운전수, 자기 책임은 감자를 목적지까지 운반하는 것이지 흘린 감자를 주워 담는 게 아니라고 대답했다나!
사회주의나 공동체는 구성원의 책임 의식과 정신 수준이 높지 않으면 성공하기 힘든 체재다. 어쩌면 인류 역사에 사회주의가 너무 일찍 출현하여 그렇게 갑작스레 무너졌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무주상보시를 어렴풋이나마 깨우칠 정도가 되어야 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닐는지.
#작은 소리 큰 울림
대개 노래를 잘하려고 의지를 앞세우다 보면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듣는 사람의 공감을 끌어내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진실한 목소리는 암 리 작더라도 반드시 공명을 일으켜 그 파장이 널리 퍼져 나간다. ‘진실함’이 강한 이유는 상대를 무장해제시키기 때문이다. 무장해제시킬 뿐 아니라 상대의 자발적인 반응도 이끌어낸다.
#제임스 딘과 조우하다
식민지 근대성? 자기 것을 비하하고 멋져 보이는 남의 것을 추종하는 성향
‘근대성’은 그 땅에 지배국의 제도와 문물을 실현하고자 하는 일체의 시도를 말한다(남의 떡이 커 보인다)
식민지 근대성의 가장 큰 해악은 약한 처지에 있는 인간에 대한 근거 없는 멸시를 조장하고 이들의 토착적 발전의 길을 원천봉쇄한 점이다. 일단 제국의 질서를 받아들이면 저들이 깔아놓은 지배 구조 안에서 어떡하든 조금이라도 우월한 지위에 오르려고 경쟁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 그 안에서 경쟁이 심해질수록 지배 구조는 더욱 강고해진다. 모든 기업 시스템과 제도교육은 이 경쟁 구도를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다. 이 땅의 젊은이들의 피를 말리는 스펙 쌓기, 취업 준비, 일류학교 증후군 등은 겉으로는 ‘세계화’에 대한 대비이지만 실은 ‘식민지 근대성’의 심화일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니체의 철학 에세이 구절,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한, 언제나 네가 아직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게 아니라 타인의 길을 가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식민지 근대화의 길을 충실히 잘 가고 있거나, 아니면 현실의 패배자가 되어 쓸쓸히 회한 어린 자신의 삶을 반추하거나 반대로 세상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지와 더불어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공감 능력
많은 사람들이 기도나 명상을 열심히 함으로써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 그보다는 ‘경청’을 통해 ‘공감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 훨씬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된다.
‘말빨 센 운동권, 귀농자’? 모든 위대한 영성가들은 잘 듣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관계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아니 잘 듣기만 해도 이미 영성가라고 말할 수 있다.
공동체가 깨지는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가 공감대 형성 없이 각자의 일을 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행동이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간섭하면 서로 피곤해지니까 그냥 못 본 척하고 지내다 보면 결국 ‘너는 너, 나는 나’가 되어버린다.
이야기하고 들어주는 가운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공감대의 씨앗’이 자라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나 허공을 가득 채우고 ‘더불어 함께’라는 꽃을 피우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공감의 공 자는 ‘함께 공(共)’이 아니라 ‘빌 공(空)’이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을 비우지 않고서야 어찌 남의 이야기가 내 안에 들어올 수 있으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