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의 가치관이 모조리 뒤짚어지는 현대문명이 대한 통렬한 전복, (거꾸로 세상보기, 미래에 저당잡힌 현재를 되찾자)
#간디스토마 아기 코만도 이야기
자연 다큐멘터리 ‘파브르 곤충기’, 개미의 뇌를 장악한 간디스토마 기생충 이야기
간디스토마의 유충은 뇌를 놔주기라도 하지만 현대문명의 유충은 결코 그런 자비조차 베풀지 않기 때문에, 현대인은 이 개미보다 더 비참하다고 할 수 있다(현대문명 속의 코만도 유충의 정체를 파헤치고 벗어나기 위한 탐색을 위한 책)
당신의 가장 큰 욕망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인정받기 위해서 경쟁하는 것‘이다. 만약 전자라면 아기 코만도를 문제 삼을 까닭이 없다. 그렇게 명확한 욕망은 아기 코만도의 먹잇감이 될 수 없다(끝없는 욕망의 쳇바퀴)
진보의 개념 자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자본주의가 인정의 욕구를 통해 조작해낸 속임수에 불과하다!
당신의 뇌를 조작하는 ‘인정의 체계’? 당신이 아기 코만도의 조정에서 벗어나려면, 빙산의 일각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당신의 인식범위를 훨씬 넘어선 이 ‘인정의 체계’를 인정하지 않는 자그마한 시작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여기서 당신은 아웃사이더가 되는 게 두렵겠지만, 용기를 내어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시작하면 삶에 새로운 활력이 생긴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경쟁에서 초연할 수 있다(기쁨의 철학)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축제를 본 소감_예비체이Yei Bi Chai와 파우와우powwow
애니미즘은 다 알다시피 정령과 같은 초자연적인 힘이 만물에 깃들어 있다고 믿는 원시신앙이다.
‘미개한 야만인종’의 삶, 진화의 말단에 위치한 유치하고 미신으로 가득한 종교? 원주민의 애니미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는 한 백인의 기록물!
우리 문명은 실패작이다. 논리적으로 결론을 어떻게 내리든지 그 문명은 한 사람의 백만장자와 백만명의 가지를 만든다. 그 문명의 재앙 아래 완전한 민족은 없다…우리는 백인들에게 인디언의 메시지, 즉 인간됨의 교리를 내어놓는다.
애니미즘은 제국주의가 전 지구촌에서 강탈한,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인류 대다수가 살아온 실제 삶이다.
#산조정신과 애니미즘 미학
산조는 형성의 미학, 문자 그대로 흩어져 있는(산) 소리를 한대 모아 어울리게(조) 만든 음악, ‘허튼 가락’, 선비나 양반이 하는 ‘장악-바른 음악’이라 했으니, 민중의 음악을 허튼 음악이라 한 것은 당연하다
현대화? 대체로 크로스오버나 퓨전, 사양음악과의 교배가 핵심!
산조정신의 예술가, 예술가는 제도권을 기웃거려서는 안 된다. 제도권은 민중의 활력을 죽이는 곳이다. 예술가는 광대여야 한다. 광대는 본디 천한 출생이다. 그는 민중의 사랑과 비웃음을 동시에 받는다. 그래서 광대는 익살을 부리고 분노한다.
민중의 활력은 광대와 함께 요동친다. 예술가가 천한 광대이지 않으면 민중 속에 흩어진 가락들을 모을 수 있는 열정과 힘이 나오지 않는다.
#소비시대의 미학
현대는 자아 속에 잠든 나를 깨우는 타자가 없는 세계다
#유언비어의 사회학
언론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은 군사독재가 아니라 ‘합리성의 메커니즘’이라고 하면 어안이 벙벙할 것이다. 그러나 내친 김에 더 이야기하면, 민주주의 이상으로 언론을 잘 통제할 수 있는 사상과 제도는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다? 독재정권의 통제는 공포의 대상으로서 공적으로 인식되지만, 통제가 내면화하면 모든 이에게 그것을 자발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에 더욱 무섭다. 그런 점에서 외부의 통제보다는 자기검열이라는 통제의 내면화가 자유로운 생각을 방해하는 주역이다.
냉전체제가 무너진 뒤로 세계는 자가면역질환의 위기에 맞닥뜨렸다. 적이 없어진 자본주의가 자신을 공격해 자멸하는 것이다.
말을 통제하는 것은 곧 생각을 통제하는 것. 보도나 거래,계약,토론 등 언어생활의 공적인 부분은 ‘생각’이 아닌 ‘팩트’, 곧 ‘사실’을 요구한다. 팩트는 증명체계에서 근거로 작용한다…팩트와 증명에 의지하는 것은 ‘현재’를 살지 않겠다는 결과를 초래한다. 최근 예로 천안함 사태, 근거 있는 사실을 말해야 하므로 지금 당장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지 않고 증명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생각을 통제당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합리성의 메커니즘’이 요구하는 증명작업은 언제나 뒷북을 치기 마련이다.
전문가의 말 앞에 주눅드는 세상, 자기 생각을 활기차게 표현하지 못한 말은 이미 죽은 말이다. 그래서 현대인의 말에는 생명이 없다.(펜이 칼보다 강하다! 말을 지배하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된다)
현대인은 자기 생각을 말하는 능력이 거의 폐인 수준에 가깝다. 팩트를 말하도록 길들여진 데다가, 팩트를 말하느냐 아니면 그러지 못하고 자기 생각을 떠드느냐가 사회적 우열을 가르는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합리성의 메커니즘에 길들여진 ‘증명을 기다리는 어투’? “~인 것 같다” “~해 보인다” “~일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논리적으로 하는 말은 대체로 자기의 말이 아니다. 지식에 종속된 ‘죽은 시인의 사회(말)’라고 할 수 있다. 사상가 존 로크는 언어의 가장 엄격한 사용을 추구했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저작은 ‘자연 언어’로 읽을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구당 김남수 선생의 책,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 보도 기피한다 언론! 기자들 스스로 기득권층이 되면서 합리성을 실현한다는 사명감이 더 크게 작용한 결과다
장기놀이는 오직 장기 말을 가진 언론만이 노는 놀이다. 언론의 장기놀이는 이미 소시민의 놀이가 아니게 되었다
보도와 유언비어의 차이를 사실과 일치 여부로는 구별할 수 없다. 그 둘을 지식으로 구별한다 것은 불가능하고 오직 신앙으로만 가능하다? 그 이유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 때문이다! [유언비어의 사회학]
사람들은 보도의 형식을 믿기 때문에 신뢰하는 것이지, 내용에 대한 지식 때문에 신뢰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이다!
유언비어는 반드시 ‘지금’ 그리고 ‘바로 여기서’ 자신을 억압하는 것에 대해 발언하다.
유언비어의 특징은 햔재성이다. 미래로 이월시키면 유언비어는 힘을 잃고 만다. ‘합리성의 메커니즘’이 증명체계를 동원하여 사태에 관한 발언을 자꾸만 미래로 이월시키는 것과는 정반대다!
말의 현재성은 숙명적으로 권력과 부딪칠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살아 있는 소시민(민중)의 언론으로서 유언비어를 열린 자세로 대할 필요가 있다.(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이유는 유언비어를 유포한 죄 때문이었다!)
헛소리 속에 진실이 있다?!
사건의 현재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현재성을 사멸시키는 것이 ‘합리성의 메커니즘’인 반면, 현재성을 생명으로 하는 것이 ‘유언비어’다. 유언비어는 즉각적으로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한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진실이 힘을 잃어버려서 결국 진실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현자는 유언비어다.
#용산참극과 파우스트
“우리 모두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계하자.”
괴테의 원작에서 파우스트는 용산참극과 똑같은 사건을 저지른다, ‘나봇의 포도원’
분노는 커녕 미화된 파우스트! 이것이 고급문학계의 현실이자 현대문명의 자화상이다.
‘진보’라는 근대의 이념 안에 갇혀 있는 것, 여기에는 좌와 우가 없다. 만인을 위한 복지낙원을 위한 당연한 희생? 이것은 근대적 인간의 전형이 추구하는 지고의 가치관이다
신자유주의 음모, 합리적 거래를 앞세워 용산 참극을 빚은 배후에 이데올로기가 있다. 사실 뉴타운 청사진은 파우스트가 그의 개간지에 부여한 의의로 가득 차 있다! 가해자들은 희생자들이 돈을 더 받아내려고 떼를 쓰다가 사고가 터졌다고 가증스러운 주장을 편다. 그런데 문제는 가해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뉴타운 사업을 파우스트의 복지낙원에 버금가는 선행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란 생각과 믿음이 다 이데얼로기인데도 가해자들은 희생자들을 도우려는 정의구현사제단이나 시민단체, 정당들이 이데올로기로 사회분란을 조장한다고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몰아붙인다.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_그들은 언어 조작술로 성공하였다
‘언어에 대한 인간의 오해’에 기반한 ‘언어를 통한 조작’이 가능했기 때문
빨갱이야말로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들이 자기 존립을 위해 만들어낸 환영 그 자체로만 이루어진 유령이다
#진보는 퇴보의 다른 이름
진보란? 더 나은, 다 많은, 더… (more교)
현대인은 진보를 ‘믿음’의 환영 위에서 ‘실천’하므로 자신이 ‘현재’를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현대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현재를 살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그런 삶을 결코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은 미래의 삶을 위해서, 즉 진보를 위해서 현재를 저당잡힌 사실은 돈의 메커니즘을 보면 잘 드러난다.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돈이 어떻게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가?
마법은 신용(미래의 약속)에서 일어난다. 돈은 신용을 약속한 종이쪼가리
재정파탄애 직면한 프랑스 루이15세를 구한 것은 금이 아닌 인쇄기였다(존 로의 지폐 아이디어)
[시대정신Zeitgeist] 다큐멘터리, 현대인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돈의 노예가 되었나
현대금융체계의 실체? 금본위제폐지, 돈은 빚(채무)에서 생겨났다(갚기로 약속하는 것, 이것이 돈이다!)
은행의 지불준비금제도는 사실 현대판 노예제도? 돈은 빚에서 나온다. 빚을 지면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빚을 갚기 의해 고용된다. 돈이 빚에서 생기는대 사회가 어떻게 빚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우리 통화체계에서 빚이 없으면 한 푼의 돈도 없다.”-연방준비제도 총재 머리너 애키스,1941년 9월30일
정부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빚은 갚을 수 있으면 단 1달러도 돌지 않게 된다?
‘빚의 자가 생산 시스템(현대통화체계)’-이 완벽한 시스템의 최종 생산물은 노예다. 모든 사람들이 재산을 잃지 않으려는 두려움 속에서 자발적으로 노예가 된다. 그래서 임금노예가 줄을 서게 만든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인류 전체가 쳇바퀴를 돈다. 이들은 피라미드 정상에 있는 엘리트에게만 이득이 되는 제국을 강화하기 위해 생존하고 있다.
현대금융은 바로 존 로의 구상에 기초한다. 그는 경제의 시간을 현재에서 미래로 옮겨놓았다
신용의 본질은 현재의 위기를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연기하는 데 있다(자본주의의 시간성은 기약없는 미래로 지불결제를 끊임없이 연기하는 것)
현재의 삶을 희생하는 현대인의 자화상? 노예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노예, 역사상 어느 노예가 이런 적이 있었던가!
현재를 거세한 ‘역사의 진보’, ‘역사 속의 유토피아’는 ‘빚의 자가 재생산 시스템’과 궤를 같이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생활이 화폐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화폐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삶을 아는 지름길이다
우리는 돈의 바깥에서 살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오직 신용의 붕괴를 통해서만 가능, 돈의 바깥은 신용의 바깥, 즉 ‘돈의 가치를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이다.
‘모세의 체계'(구약)을 파괴하기 위해 마구간/바깥에서 태어났으며, ‘가난한 자, 병신, 거지, 과부’/바깥을 쉽게 말해 혁명세력으로 여겼다. 그러나 체계를 지키려는 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다
오늘날 체계/세계자본주의의 바깥에서 예수가 태어난다면 어떤 활동을 할까? 가장 먼저 직선의 시간을 휘어서 원으로 만들 것이며, 그런 다음 손을 들어 ‘희망과 기쁨의 시간’을 가리킬 것이다. ‘희망과 기쁨의 시간’은 다름 아닌 미래 없는 현재다. ‘지금! 여기! 기쁨!’이 그의 슬로건이다.
직선의 시간이 가리키는 ‘미래의 희망’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지구를 파멸시키는 최고의 악덕이다. 그것은 진보라는 멋진 언어로 무지무지한 악덕의 은폐한 채 빛나는 상아에 들러싸여 있다.
“빚의 자가 재생산 시스템(현대통화체계)-이 시스템의 최종 생산물은 노예다….”
실제로 사람들은 돈을 더 벌고 스펙을 더 쌓고 교양을 더 넓히고 몸을 더 아름답게 가꾸고…더 잘하기 위해서 불철주야 여념이 없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더 잘한다는 것’을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덕’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무엇을 ‘잘’인가?”에서 ‘무엇’을 신적인 섭리와 확신이라는 형이상학에 넘겨버렸다.
“나보다 더 사랑해”? 그러나 “돈보다 더 사랑해”라고 말하는 사함을 본 적이 없다, 돈은 소용이 아니고 형이상학이다
더 잘 살기 위해 미래의 시간을 향해 깔린 진보의 레일
진보에 대한 비판은 ‘바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 ‘바깥’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바깥이며, 더 멀리 가면 문명의 바깥이다. 또한 인간이 바깥, 사회의 바깥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학문의 아웃사이더로서의 바깥이며, 나아가 내가 쓰고 있는 이 ‘문자’ 세계의 바깥이다.
‘인간의 동일성’에서 출발한 사회주의를 비판한 마르크스? 마르크스가 말하는 것은 ‘인간은 똑같다(평등하다)‘는 사고가 선험적인 진리가 아니라 ‘상품 형태가 노동생산물의 일반적인 형태인 사회‘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동질의 인간노동이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화폐경제의 확대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엘리트주의만 남은 진보
운동권 학생은 사회가 선망하는 엘리트, 엘리트는 이 땅에서 누구나 되고 싶어 하는 0순위다. 계급상승을 통해 돈과 명예를 함께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형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전문가가 여론을 지배하기 때문이 운동권의 발언은 설 자리가 없다. 관념적인 주장만 있고 구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들이 거주했던 ‘관념의 집’이 군사독재(천민자본주의)와의 투쟁에서는 성공했으나 대의민주주의(부르주아형 자본주의)에서는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이제는 전문가집단이 사회적 발언을 독점하고 사회의 진로를 주도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엘리트 진보주의자들에게 가장 불가능한 일? 스스로 자신의 토대로 허물도 다시 태어나는 죽음과 재생의 과정
이길 수 없는 영원한 전쟁? 테러와의 전쟁? 거기엔 실제로 적이 없다! “있지도 않은 테러범들을 동굴에서 찾는 걸 보게 될 거야”(아론 루소와 니콜라스 록펠러)
실제로 도덕은 기득권자의 무기이다. 도덕성 시비의 파멸을 피하고 엘리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자리가 증명체계의 바깥이자 학문과 지식의 바깥인 세속성이다
세속성이야말로 진정한 진보의 핵심이다.(현재가 살아있는 세속)
대의민주제, 대의성이 자신의 존립근거로서 요청하는 것이 전문성이다. 사람들의 뜻(민의)을 무엇이 대표한다고 했을 때 그것에 전문성이 없다면 대표성 자체에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세속성은 문자가 아닌 말의 세계다…세속화는 대의민주제가 아닌, 저잣거리 또는 광장의 정치인 직접민주제를 지향한다. 세속화는 쉽게 말해서 광대정신이다. 광대는 풍자와 익살과 해학을 통해 관중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풍자 등 광대의 행위는 기본질서와 가치에 대한 격하이고 그 결과는 민중의 읏음이다….그런데 대중은 모범생이나 도덕 교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파열로 가는 지름길이다!
오늘날, ‘학력/지식’으로 무장한 채 ‘증명의 의무’를 지고 자본주의와 싸우겠다는 것은 마치 자책골을 넣으려고 싸우려는 선수와 같다. 그럴수록 부르주아형 자본주의와 대의민주체는 풍성해진다.
#유토피아야말로 지옥이다
‘한 손에 총, 한 손에 성경’, 팍스로마나, 팍스브리태니커, 팍스아메리카나, 분란 없이 평화를 유지하는 식민지? 원래 그러하듯이 ‘평화 라는 단어도 어떤 목적으로 쓰이냐에 따라 이처럼 달라진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이쯤 되면 몇백 년 뒤를 내다본, 미국의 국가 건설 마스터플랜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지 않은가. 이 마스터플랜은 현재 미국의 대외정책일 뿐 아니라 과거 백인들의 인디언 침략사이기도 하다
‘미국 인디언 멸망사’ 부제가 붙은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라는 책을 보면 전율할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유토피아가 ‘이룰 수 없는 미래의 공상’이 아니라 ‘현재를 박탈하기 위해 현재에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힘’이라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돈과 같은 것이다. 돈(빚/신용)은 현재 돌고 있지만, 사람들이 빚을 갚기 위해 현재를 살 수 없게 한다.
전쟁은 언젠나 평화를 명분으로 한다…한편으로, 세계자본주의를 이끌어가는 힘도 유토피아다. 시민들은 유토피아의 형이상학이 아로새겨진 돈(빚/신용)의 위력 속에서 하루하루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다. 이처럼 유토피아는 거대담론의 대상이자 일상이 문제다.
이 같은 유토피아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유토피아에 박탈당한 현재를 되찾는 것이 가장 긴요하다. 유토피아는 미래의 천국을 빌미로 현재를 박탈하기 위해 현재에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힘이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 종교가 번성하는 토양이기도 하다.
모든 생물-무생물은 잘못된 개념이다. 만물은 다 생명이다-은 현재를 산다!!!
현대는 타자와의 소통이 불가능한 시대다? ‘아마존 정글 원주민과 식물(정령)의 소통 이야기, 합리적 지식’이 가로막고 있을 뿐, 그것은 ‘실재하는 세계’였다! 이 세계야말로 타자와 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지는 정상적인 세계다. 이 ‘실재하는 낙원’을 미신이라고 해서 퇴치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유토피아를 향해 스스로 노예가 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세상을 어찌 지옥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역사 속으로 동시에 역사 밖으로
언어를 이용한 상징조작이 인간이 부릴 수 있는 농간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 자본주의도 이 농간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현대사회에서 대중은 점점 이기심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게 내몰리고 있다. 이것은 극소수 지배자가 만들어낸 최고의 성과물이다. 대중의 이기심을 이용하지 않고는 대중을 이처럼 자발적인 노예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문명은 전방위로 대중의 이기심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현실 속에서 눈코 뜰 새 없이 열심히 살려고 할수록 소시민들은 자신들의 이기심 때문에 자유를 상실하고 노예화한다. ‘지금 그리고 여기서’ 이것을 막지 않으면 시대의 책임을 방기한 것이 된다. 나만 잘살면 된다는 이기심이 태어날 후손의 삶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하고 있다.
유토피아가 보여줄 미래의 모습? 전 세계의 인디언 보호구역화(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지구촌 감시체제(조지 오웰의 [1984년])/벌레의 삶을 살게 될 개인(카프카의 [변신])
지금이 유일한 마지막 기회? 극소수의 세계지배자들도 바로 지금 마지막 공정만을 남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마침내 유토피아가 도래한다. 그것이 곧 종말이다! (허울뿐인 미래)

“너희들의 유토피아 | 허울뿐인 미래”에 대한 1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