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p405
21세기 기술문명에 대한 철학적 성찰
21세기의 인간이 겪게 될 실존의 위기는 이제까지의 그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지구는 바로 인간조건의 핵심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전체주의적 믿음은 이제까지 모든 것이 파괴될 수 있으며, 인간의 본질마저도 파괴할 수 있다는 것만을
증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시도를 통해 총체적 지배는-본래 원한 바는 아니지만-근본악이 실제로 존재하며, 이 악은 인간들이 벌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다는 데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이제 처벌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는 근본악이 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근대적 근본악? 전체주의!
“어떻게 근본악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가?”
악의 평범성? 아이히만이 유태인 말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결코 그의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의 결여’ 때문이라는 것이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사유, 의지, 판단의 정신적 활동들
전체주의적 지배의 본질은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완전히 박탈하고 또 인간의 무용성을 증명함으로써 인간을 완전히 배제하고자 하는 태도에 있다.
전체주의적 과정? 그것은 인간이 필요없는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목표 아래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쓸모없게 만드는 모던적 태도를 의미한다.
근대와 근대적 인간? 코페르니쿠스 적 혁명이라는 기호를 달고 탄생하였다. 그것은 세계의 중심이 인간과 지구로 옮겨졌음을 뜻한다.
가능한 것은 만들고, 가능하지 않은 것은 가능하게 만들어라.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전체주의적 믿음을 가지고 근대인은 자신과 이 지구를 하나의 실험장으로, 즉 작위성의 실험장으로 만들었다.
***주목해야 할 기술적 전체주의의 경향!!!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고자 온갖 노력을 다하는 기술시대에 우리가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근본악은 어떤 것인가?
가장 기초적인 인간조건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지구’이다!
과학과 기술은 가능한 한 인간을 자연적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인간에 의해 완전히 통제될 수 있는 인공세계를 구축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기술시대에 내재하고 있는 전체주의적 경향이라고 말한다.
***기술시대의 근본악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조건의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기에 도대체 근본악이-우리가 원치 않는데도 불구하고-실존할 수 있는 것인가?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기술행위는 인간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반의도적’ 효과를 이미 산출하기 시작하였다!
인간실존의 세 조건? 생명, 세계성, 다원성!
인간의 조건? 노동, 작업, 행위!
전체주의는 인간의 탄생성과 사멸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영구화하고자 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수단만을 영구화할 뿐이다.
***목적이 없으면 시작이 있을 수 없다!!!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전체주의는 근본적으로 정신적 차원에서의 ‘사유하지 않음’과 실천적 차원에서의 ‘정치적 행위능력의 상실’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진단한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근대의 유토피아적 이상이라 할 수 있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그것이 실현되면 결국 인간에게서 모든 행위의 가능성들, 즉 활동적 삶 자체를 박탈할 것이다.
노동의 포기는 곧 생명의 포기를 의미한다
오늘날 기술문명은 이제 자연에 예속되어 있는 인간의 실존조건을 무력화시킬 정도로 자연을 지배하고 있다.
근대의 과정은 세계소외의 과정이다.
인간의 유일무이한 거처인 지구!
사적인 영역과 공론 영역의 경계선이 사라졌다. 이 경계선의 소멸과 더불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의미 역시 변질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소유? 본래 ‘장소의 가짐’에서 동산의 성격으로 변질!
현대사회가 잠재적으로 부유할지는 모르지만 본질적으로 ‘소유가 없는 사회’다?!!
노동이 절대화되고 소유가 사유로 변질되면서, 우리는 말과 행위를 통해 공유할 수 있는 거주 공간을 상실하였다.
“세계소외가 근대사회의 방향과 발전을 규정했다면, 지구소외는 근대과학의 기호가 된 것이다.”
나치정권이 전체주의의 정치적 실험이었다면, 과학적 전체주의는 이제 ‘전세계와 지구를 도구화’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고유한 실존에 대한 반란?!
“우리가 과학과 기술의 새로운 지식을 이런 목적을 위해 사용하기를 과연 원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 문제는 과학적 수단으로 결정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우선적인 정치적 문제이기 때문에, 그 결정을 전문과학자나 직업정치인에게 결코 맡길 수 없다.” 그것은 인간 자체의 실존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의 책무이다.
(기술의 자동적 과정에 내맡기지 말고) 이제라도 인간조건과 행위의 가능성에 관해 진지하게 사유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적 전체주의가 생각 없는 모든 사람들의 산물이었듯이, 생각하지 않고 행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구와 인간의 멸망을 가져올지도 모르는 기술적 전체주의에 동조할 것이기 때문이다!(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우리거 이해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는 ‘근본악’은 바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에서 기인하다는 사실은 지구와 인간조건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미래의 인간에 대한 경고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세계는 원자폭탄이 처음 폭발했을 때 시작되었다.
다원성은 인간 행위의 조건!
인간조건과 인간본성은 다르다
임금을 받는다는 것은 곧 노예신분임을 나타내는 표시이다!
예술가! 노동하는 사회에 남겨진 유일한 ‘작업인’이다! (노동, 작업, 행위)
말과 행위의 기본조건인 인간의 다원성은 동등성과 차이성이라는 이중의 성격을 갖는다!
인간의 어떤 다른 능력도 사유만큼 약하지는 않다. 전제정치에서는 사유하는 것보다 행위라는 것이 훨씬 쉽다.
결론? 사유가 모든 활동들을 능가한다!
사유의 경험을 헤 본 사람이라면…
“사람은 그가 아무것도 행하지 않을 때 보다 활동적인 적이 없으며, 그가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외롭지 않은 적이 없다.”-카토Cato

“인간의 조건 | 기술문명의 미래”에 대한 2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