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107“왜 일을 안 하고 빈둥거리나?”
“나보고 왜 일을 하지 않느냐고들 묻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말하자면 세상이 그렇게 만드는 거지. 좀 더 나아가서 얘기하자면, 일본과 서양과의 잘못된 관계 때문에 일하지 않는 거야. 우선 일본만큼 빚에 치이고 가난에 찌들어가는 나라도 흔치 않을 걸세. 자네는 그 빚을 언제쯤이면 청산할 거라고 생각하나? 외채 정도야 갚으려고 노력한다면 얼마 걸리지 않겠지. 하지만 그것만이 빚이 아니야. 일본은 서양에 빚을 지지 않고는 나라를 꾸려나갈 수도 없으면서 스스로 선진국이라 말하고 있네. 어떻게든 선진국의 대열에 끼어보려고 모든 방면에 걸쳐서 깊이보다는 넓이를 확장해 선진국처럼 벌려놓은 거야. 그런 무리한 행보는 정말 비참한 거야. 소와 경쟁하는 개구리처럼 얼마 못 가 배가 터지고 말 걸세. 결국 그 영향은 우리 국민 개인에게 모두 돌아오겠지.
두고 보게나. 계속해서 서양의 압박을 받는 국민들은 정서적으로 안정을 취하지 못해, 제대로 된 일을 해낼 수 없지. 모두 빡빡한 틀에 갖힌 교육을 받고 그 후에는 눈 돌릴 틈도 없을 일을 찾아 매달리니까. 신경 쇠약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대단한 걸세. 그렇게 사는 사람들과 한번 이야기를 나눠 보게나. 깊이는 없고 모두 바보같은 소리만 지껄일 테니. 그들은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현재와 눈 앞에 닥친 상황을 해쳐나가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지. 하긴 그럴 틈도 없이 지칠대로 지친 상태이니 안타깝기는 해. 정신과 신체의 쇠약은 항상 붙어 다니니까.
게다가 도덕적으로도 타락하고 있어. 자네는 일본의 거리에서 밝게 빛나는 순수함을 본 적이 있나? 암흑천지지. 그 안에서 내가 어떤 목소리를 내거나 일을 한다 해도 소용이 없어. 그리고 나는 원래 게으른 편이야. 자네와 가깝게 지내던 때부터 나는 게을렀어. 그때는 겉으로라도 자신만만하게 보이려고 했으니 자네에게는 내가 재능 있고 유망한 사람으로 보였을 거야. 그야 물론 지금이라고 일본이 정신적, 도적적, 구조적으로 건전해진다면 나도 예전처럼 사회에서 일을 하며 미래를 계획할 수도 있지. 정말 그런 사회가 된다면 하고 싶은 일은 많아질 테니까. 태만한 내 성격을 자극할 만한 일은 얼마든지 생길거라고 확신하네. 하지만 이 상태로는 안 돼. 지금과 같다면 나는 계속 나 자신만을 위해 살 수밖에 없어. 그래서 아까 자네가 말한 대로 내가 있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지내는 것에 만족하고 있네. 내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꾸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109-111“자네는 생활고에 시달려보지 않아서 문제야. 돈이 궁하지 않으니까 일할 생각을 하지 않는 거지. 부잣집 도련님 티를 내면서 고상한 말이나 지껄이고…”
다이스케는 히라오카의 말이 마음에 걸려서 그의 말을 끊었다.
“일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만일 일을 한다면 단지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만 한다면 일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말이야. 신성한 일들은 인간의 목숨을 연명하는 빵과 무관한 법이지.”
히라오카는 불쾌한 표정으로 다이스케를 쳐다보며 물었다.
“왜?”
“왜냐니, 살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은 노동 자체를 위한 신성한 노동이 아니니까.”
“그런 어려운 논리는 알아들을 수가 없어. 좀 더 구체적으로 쉽게 설명을 해보게.”
“먹고살기 위한 직업에는 일 자체에 성실하게 임할 수 없다는 말이네.”
“내 생각은 전혀 달라. 먹고살아야 하니까 더 맹렬하게 일에 매달리지 않겠나?”
“맹렬하게 일할 수는 있지만 성실하기는 힘들지. 먹고살기 위해 일한다고 하면 결국 일을 하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물론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것이지.”
“그것 보게. 먹고사는 것이 목적이고 일하는 것이 수단이라면, 쉽게 일하고 돈을 받는 쪽으로 방향을 정하지 않겠나? 그러면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이 그저 먹을 빵을 얻을 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겠지. 노동의 내용이나 방향, 순서가 노동 자체를 제외한 다른 면의 영향을 받게 된다면 타락한 노동이라는 말일세.”
“지극히 이론적이군. 빵을 위해 일하는 것이 잘못됐나?”
“그럼 극히 고상한 예를 들어서 설명해주지. 진부한 이야기지만, 어떤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네. 오다 노부나가가 유명한 요리사를 고용했는데, 그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먹고 너무 맛이 없어서 심한 잔소리를 했다는군. 요리사는 최고의 요리를 만들었는데 혼이 나자, 그 다음부터는 적당히 급이 떨어지는 요리를 해주었지. 그랬더니 주인이 칭찬을 했다는군. 그 요리사의 경우, 생활을 위해서는 열심히 일한다고 할 수 있지만 자신의 일인 요리 자체를 위해서는 매우 불성실한, 타락한 요리사인 게지.”
“하지만 고용인의 입맛을 맞추지 않으면 해고당하게 되니 어쩔수 없지.”
“그렇지. 말하자면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이 취미로 하는 일이 아니고서야 진실하게 일할 수 없는 거지.”
“자네 말대로라면 자네와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이어야만 정말 노동만을 위한 신성한 노동을 할 수 있다는 얘기군. 그렇다면 자네야말로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있군. 그렇지, 미치요?”
“정말 그렇네요.”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왔군. 토론은 이래서 기운이 빠진다니까.”
다이스케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두 사람의 토론은 그제서야 끝이 났다.
148“선생님, 오늘은 종일 공부십니다. 어떻습니까? 산책이라고 좀 하시지 않겠습니까?…”
363 캠퍼스에 대학생들이 서 있었다. 서너 명이 무리지어 있고 한 명이 떨어져 서 있었다. 무리 속의 하나가 떨어져 있는 친구에게 말했다. “야, 너 거기서 소외감 느끼지 말고 이리 와!” 그러자 떨어져 있는 친구가 말했다. “아니, 난 소외감이 아니라 독립감 느껴!”
위 글는 역자가 대학 시절에 우연히 목격하고 지금껏 남은 기억의 한 장면이다. 이것은 현대인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대부분의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대중 속에서 유행을 따라 살아가지만 민감한 이들은 현대문명의 고립을 경험하는데, 고립을 이기지 못하는 개인은 심하면 소외자나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되고, 고립을 승화시키는 개인은 독립적인 주체의 현대인이 된다.
오로지 먹고살기 위한 노동은 소외감과 불만족 상태로 이어지고, 쉽사리 돈만 벌고자 하는 부정부패로 이어지기 십상, 자본주의는 부패하기 쉽다! 먹고사니즘을 넘어선 만족스런 일과 직업은 행복하고 건강한 사회로 가기 위한 필수요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