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하는 삶. 한병철. 11-13쪽.
우리는 오로지 노동과 성과를 통해 삶을 지각하므로 무위를 결함으로, 가능한 빨리 제거해야 할 결함으로 여긴다. 활동이 인간의 실존을 남김없이 흡수한다. 그리항 인간의 실존은 착취가능하게 된다. 우리는 무위를 느끼는 감각을 상실해간다. 무위는 무능도, 거부도, 한낱 활동의 부재도 아니라 독자적인 능력이다. 무위는 고유한 논리, 고유한 언어, 고유한 시간성, 고유한 구조, 고유한 찬란함, 고유한 마법까지 지녔다. 무위는 약점이나 결함이 아니라 집약성이다. 그러나 우리의 활동 및 성과사회에서 그 집약성은 지각되지도, 인정받지도 못한다. 우리는 무위의 나라와 무위의 넉넉함에 접근할 수 없다. 무위는 인간 실존의 찬란한 형태다. 오늘나 무위는 활동의 공백 형태로 퇴색했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안에서 무위는 포섭된 바깥으로서 다시 등장한다. 우리는 무위를 ‘여가’라고 부른다. 여가는 노동 후의 회복에 기여하므로 노동의 논리에 구속된 채로 머문다. 노동의 파생물로서 여가는 생산 내부의 한 기능 요소를 이룬다. 이로써 노동과 생산의 질서에 속하지 않은 자유로운 시간은 사라진다. 우리는 신성함 쉼, 축제의 쉼을, “삶의 강렬함과 관조를 통합하는 쉼, 심지어 삶의 강렬함이 분방함으로 심화하더라도 삶의 강렬함과 관조를 통합할 수 있는 쉼”을 더는 알지 못한다.
‘여가’에는 삶의 강렬함도 없고 관조도 없다. 여가는 따분함이 고개 드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가 떄려죽이는 시간이다. 여가는 자유롭게 생동하는 시간이 아니라 죽은 시간이다. 강렬한 삶은 오늘날 무엇보다도 먼저 더 많은 성과 혹은 소비를 의미한다. 바로 무위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무위가 삶의 강렬한 형태이자 찬란한 형태임을 우리는 잊어버렸다. 노동 및 성과 강제에 무위의 정치를 맞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 정치는 진짜로 자유로운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
무위가 인간적인 것을 이룬다. 활동에서 무위가 차지라는 몫만큼 활동은 진정으로 인간적이다. 망설임이나 멈춤의 순간이 없으면, 행위는 맹목적인 능동과 반응으로 전락한다. 쉼이 없으면 새로운 야만이 발생한다. 침묵은 말을 심화한다. 고요가 없으면 음악은 없고 단지 소음과 잡음만 있다. 놀이는 아름다움의 정수다. 자극과 반응의 패턴, 욕구와 충족의 패턴, 문제와 해답의 패턴, 목표와 행위의 패턴만이 지배할 경우, 삶은 생존으로, 발가벗은 동물적 삶으로 쪼그라든다. 삶은 무위에서 비로소 찬란함을 획득한다. 능력으로서의 무위가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그저 작동하기만 해야 하는 기계와 다를 바 없다.
생존을 위한 염려가 끝나는 순간에, 단지 삶일 뿐인 삶의 고난이 끝나는 순간에, 참된 삶이 시작된다.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적은 무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