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사람 얼. 함석헌. 94-99쪽
생각의 근본은 어디에 있나? 나에 있다. 사람은 내가 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의 문제는 나다. 나란 것은 무엇인가? 나는 왜 사나? 그런 것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심이 된다. 네 자신을 알아라 하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내가 뭔지 분명치 않으면 생각이 일정치 못하여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하고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이 인생 문제라는 것이다. 사람이 저를 참으로 알아 제 뿌리가 깊을수록 자신이 있는 법이다. 자신 없이는 못 산다.
그러나 사람은 저도 생각하지만 또 저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하여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우주의 근본은 뭐냐? 그 뜻은 뭐냐? 그 뜻이 분명해지기 전엔 우리는 안심할 수 없다. 우리는 제가 중심이기도 하지만 또 전체가 나와 아무 상관이 없고 나를 위협하는 때에 사람은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나와 세계 사이에 산 관련이 있는 것을 안 후에 즉 나와 세계가 하나인 것을 안 후에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다. 모든 위대한 창작은 거기서 나온다. 그것을 세계관, 인생관이라 한다.
이 세계, 이 인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으나 가장 위대한 것은 이것을 한개 산 생명체로 보는 사상이다. 그것이 종교요 도덕이다. 인간이 처음으로 자기와 세계에 대해 눈을 떴을 때 그들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놀람과 불안과 애탐에 사로잡혔다, 그래 생각하고 생각했다. 그런 결과 도달한 것이 이 우주는 한 뜻의 나타난 것이다 하는 생각이었다. 한번 그 생각이 들자 사람은 놀랄 만큼 발달했다. 옛날 문명의 근본은 동서양을 말할 것 없이 우주의 통일성을 꽉 믿은 점이다. 하나님이라, 부처라, 브라만이라, 진리라, 생명이라, 이름은 가지가지로 불려져도 사실은 하나다. 그 하나의 바탕을 공자는 ‘인(仁)’이라 했고 예수는 ‘사랑’이라 했고 힌두교에서는 ‘희생’이라 했고 불교에서는 ‘자비’라 했다. 인류는 몇 천 년 이 정신, 이 믿음 속에 자랐다. 그 생각이 아니었다면 세상은 말할 수 없이 참혹한 싸움의 계속이었을 것이요 벌써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인류 역사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만큼 올 수 있었던 것은 이 우주를 하나로 보는, 그 근본을 도덕적인 것으로 믿은 이 사상 때문이다.
그 종교, 그 도덕이 어떻게 값 있고 힘 있었더냐 하는 것은 요새 세계 형편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윈이 생물의 진화를 말하고, 그 원인이 생존경쟁에 있다는 소리를 한번 하자, 그것은 바야흐로 일어나려는 민족사상과 합하여 온 세계에 퍼져 사람들의 인생관을 일변시켜버렸다. 하나님도 우주의 뜻도 사랑도 다 없어지고 이 세계는 서로 살기를 다투는 경쟁판으로 변해버렸다. 통일도 생명도 다 없어지고, 이 우주는 마음대로 먹을 한개 물질의 무더기뿐이다. 그리하여 서로 힘과 재주를 다하여 경쟁하고, 심정이니 정신이니 하는 것을 도무지 생각하지 않고 오기를 한 백 년 한 결과는 오늘같이 됐다.
백 년 동안에도 이렇거든 이것이 더 오래 가면 어찌 될까? 그리하여 이제 와서야 거기 대해 심각히 생각하게 되었다. 슈바이처 박사 같은 분이 ‘생에 대한 존경’을 부르짖고 우리가 윤리적인 인생관에 돌아가지 않으면 망한다고 힘써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사상도 사상이지만 실천 없는 사상은 오래 가지 못한다. 윤리적인 세계관을 힘 있게 가지려면 일상생활에서 실천을 해야 한다. 그것이 불살생(不殺生), 즉 산 물건을 해치지 말자는 것이다. 의·식·주에 필요한 것은 부득이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될수록 피하는 것이 옳다. 한개 한개의 생명은 다 우주적 큰 생명의 나타난 것이다.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우리 몸의 한 부분이다. 작게 보니 너와 나지, 크게 보면 너와 나가 없다. 다 하나다. H.G. 웰스는 순전한 생물학적인 생각만 하면서도 ‘Men may die, man never die(사람은 죽지만 인간은 죽지 않는다)”라고 했다.
불교에서 진리를 깨닫는 데 먼저 피아관(彼我觀)을 버릴 것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대에 있던 사람 중에 가장 위대했던 이는 간디요, 현대사에 가장 위대한 일은 그가 지도했던 진리파지(사티아그라하) 운동이라 할 것인데 그가 절대 주장한 것은 ‘아힘사’, 즉 불살생이었다.
옛 사람은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했다. 자연주의적이고 과학적인 사상이 퍼지면서 그것은 미신으로 되어버렸다. 한편으로 하면 그것은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편견을 제해버려서 좋다. 그러나 과연 그것은 옳은 일일까? 과학적인 입장에서도 인간은 생명 진화의 최고봉이다. 전체의 뜻을 결정하는 것은 끝이다. 현대문명의 큰 결점은 책임감·의무감이 없어진 일이다. 그러므로 이 혼란이다. 이제라도 문명이 구원되려면 인간이 진화의 모든 책임은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윤리적인 입장에서 책임감을 느끼고 서는 일이다. 만물은 이용해먹기 위한 것만 아니다. 대접하고 생각하여 깨달아야 하는 하나님의 사자(使者)요 편지다. 그러므로 돌보고 보호한다는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그렇다면 얼마나 다른 문화가 나올까? 평화주의는 이제 긴급한 문제다. 남의 생명을 먹고야 사는 이 생명일 수 없다. 남 죽이지 않고 나 스스로 사는 것이 영이다. 하나님은, 즉 진화의 목표는 영이다. 영이 되기 위해 불살생을 연습해야 한다. 이 다음 그 지경에 가고야 말 것이다.
빚을 지지 말자
이 세상은 돈의 세상이다. “일만 악의 근본이 돈을 사랑하는 데 있다”라고 벌써 2천 년 전 사람이 말했다. 예수는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해서 하나님과 대립하여 인간을 그 지배하에 넣으려는 대적을 세울 때 ‘맘몬’ 곧 돈으로 했다. 돈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인류의 문명은 돈이 발명되면서부터 빨리 발달된 것은 사실이다. 세상을 바로잡을 생각을 할 때에 반드시 잊어서 아니 되는 것은 돈 문제다. 돈을 이겨야 사람이다. 이 다음 우리 세계는 돈이 아니고 사는 세상이어야 한다. 돈은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만 그 참 값이 나타나는 것이다. 내가 돈을 쓰는 것이 아니고 돈이 나를 지배하는 것 가지고는 참 문명이라 할 수 없다. 지금은 돈의 지배 아래 있는 문명이다. 아직 어리다. 그리고 돈의 지배를 면하려면 빚을 지지 않을 각오를 해야 한다. 굶어 죽어도 빚은 아니 진다 한 담에야 돈을 이겼다 할 수 있다. 돈을 이기면 나를 이긴 것이고, 나를 이기면 천하를 이길 수 있다. 하늘 나라가 어떤 곳이지 몰라도 적어도 한 가지만은 분명한 것이 돈 없는 나라인 것이다. 돈이 뭐냐? 물질적 향략의 약속이다. 예수, 석가는 돈을 몰랐다. 그러므로 진리의 왕, 세존(世尊), 조어장부, 구세주가 될 수 있었다.
시골을 지키자
옛 사람은 뜻을 찾았고, 지금 사람은 맛을 찾는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시골에 살았고, 지금은 도시문명이다. 그러나 몸도 마음도 사람이 너무 많이 모이는 곳은 건강에 반대된다. 살과 살이 닿으면 썩는다. 입과 입이 마주치면 시비가 난다. 도시가 죄악의 온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도시에서 보는 것은 인간의 지혜와 힘이고 시골서 보는 것은 자연의 힘과 지혜이다. 도시에서는 사람이 점점 교만해지고 시골에서는 점점 겸손해진다. 도시에서는 꾀가 있지만 시골에서는 슬기가 있다. 정치와 법은 도시에 있고 도덕과 종교는 시골에 있다. 시골이 뿌리요 도시는 꽃이다. 꽃이 너무 커지면 가지가 꺽이는 법이요 뿌리가 깊으면 온 나무가 다 무성하다. 도시가 발달한 것은 돈 때문이요 경쟁주의 때문이다. 바벨탑이 하늘에 닿을 듯하다가는 무너졌다.
도시문명은 필연적으로 멸망일 것이다. 평화사상·협조사상이 늘어갈수록 지방자치는 늘어갈 것이요, 그러면 시골이 문화의 중심이 될 것이다. 도시는 제국주의·자본주의·독재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배하는 자는 도시에 있다. 자유를 사랑하면 시골에 있어야 할 것이다. 거기는 산 조화가 있기 때문이다. 아름드리 나무와 작은 풀꽃과 얼크러지는 넝쿨이 한데 어우러져 하나를 이루어 각각 마음껏 사는 것이 시골이다. 인격의 목표가 개성의 독특한 발달에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이루자는 것이 문명이라면, 이후의 문명은 도시집중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시골에 돌아가 자연의 대조화에 살면 지금 인간을 시달리게 하는 모든 문제는 저절로 떨어질 것이다. 지금 시골이 발달 못하는 것은 도시의 착취 때문이다.
이 열두 가지는 반드시 어려운 것들이 아니요, 반드시 고상한 도덕 교휸이라 할 수도 없다. 이른바 좌우명도 아니다. 다만 날마다 할 수 있는 몇 가지를 세워 지켜 보자는 것이다. 비교하자면 길을 가는데 앞마을의 포플러나무를 목표로 하는 셈이요, 산에 올라가는데 그 어느 바위를 바라봄과 같다. 그것이 꼭 가야 하는 마지막 목적도 아니료, 그것만 하면 된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렇게 작정하고 지켜보지는 것뿐이요, 반드시 모두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