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 한승원
그림자. 그림은 그림자를 그리는 것?!
그림자를 잘 그리면 실체가 드러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림자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그 그림자는 실체를 찾아간다는 월명의 말은 무엇인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곡두(허깨비)를 그리는 것일 뿐이라는 것인가. 그림 그리는 일은 무의미한 일인가? 그것은 곡두 저 너머의 진성을 찾자는 것 아닌가. p148
“농사꾼의 고통을 모르는 자는 쌀밥 이밥만 찾고, 차잎 따는 자의 고통스러움을 모르는 자는 차향 차맛 차 색깔만 따지고 가리는 법이다.”
“차를 마시되 차를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 차 마시는 사람이 차를 고마워하는 마음은 차맛이나 차 향기를 뛰어넘는 진짜 사람의 맛, 사람의 향기이니라.”
세상의 이치가 어렴풋이 보이고 있었다…가마에 탄 저 여자는 가마를 메는 사람들의 아픔을 모른다. 그것을 안다면 마음 편하게 타고 갈 수 없을 것이다. 마음 편하게 타고 갈 수 없는 사람은 걸어서 가려 할 것이다. 나는 앞으로 절대로 사람이 메는 가마를 타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기왕 자기 속에 들어 있는 그것을 찾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깥의 엉뚱한 곳에 그런 것이 있지 않을까 하고 쫓아다니다가 자기를 지지리 못나고 초라한 땔감으로 만들고 마는 사람이 있다…그림자나 허깨비 같은 사람은 바깥에서 알맹이를 찾으려 한다. 그런 사람은 어레미로 바람을 잡으러 다니듯이 자기의 알맹이를 찾아다닌다. 그렇지만 알맹이가 그런 사람한테 잡혀줄 리가 없지.
시의 묘미는 엉뚱한 데에 있는 법이다…초의는 할아버지 몰래 읽은 노자와 장자에서 엉뚱하다는 말의 해답을 얻어냈다. 잘 가는 사람은 자국을 남기지 않고, 잘 묶는 자는 밧줄 없이도 놓여나지 못하게 묶고, 잘 잠그는 자는 빗장 없이도 잘 잠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힘, 세상을 올곧게 나아가게 하는 그윽한 힘이다. 말하자면 도라는 것이다. 엉뚱한 표현이라는 것은 그윽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번뇌가 없으면 세상도 없다. 번뇌를 비틀면 빛이 된다. 빛은 텅 빈 곳을 나아다니는 새다.
대승기신론이 모든 경전을 다 덮어버린다. #원효 #대승기신론
사람이 글을 읽는 것, 글씨를 쓰는 것, 시를 짓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나귀를 타고 길을 가는 것하고 같습니다. 길을 가는 목적은 나귀를 타고 흔들거리며 가는 데에 있지 않고 지나쳐 가는 풍광을 음미하고 목적지에 이르는 데에 있습니다. 글 읽고 글씨 쓰고 시 짓고 그림 그리는 그것들의 등뒤 쪽에 사람이 만들어지는 법입니다. 향기로운 사람, 모나지 않고 동그라미같이 원만한 사람… #초의 #정약용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일정한 법이 있다. 그 법 때문에 단아하게 되고, 단아하므로 현묘한 정취를 자아내게 하고, 현묘함으로 말미암아 신비스러운 분위기로써 보는 사람을 취하게 한다. 세상의 모든 좋은 시와 글씨와 그림은 사람을 취하게 한다. 취한다는 것은 진여의 세계 속으로 들어서게 한다는 것이다. 나도 이런 것쯤 알 수 있고 할 수 있다고 잘난 체하는 일에 길들여진 천박한 속물들로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이런 그림을 그리려면 그림에만 미쳐야 한다. 그림은 말 없는 시이고 소리 없는 음악이고 몸짓 없는 선이다. #그림
“…사람에게서 문장이 나오는 것은 풀이나 나무에 꽃이 피는 것과 같습니다…문장은 밖으로부터 가져오지 못합니다.”
눈은 산 아래 마을과의 소통을 막아버렸다. 세상의 이치는 막혀 멀어지면 오히려 더 가까워지게한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게 했다. 눈에 갇히면 그리운 사람들을 불러 만나곤 했다.
정약용은 고독한 산이다. 고독으로 허물어질 것 같은 몸을 저술하는 일로 근근히 버팅기며 살아가고 있다.
어차피 길은 혼자서 가는 것이었다…길은 사색을 하게 하고, 사색은 사람의 삶을 웅숭깊게 하고 기름지게 한다.
“예로부터, ‘너는 제법 중놈 같구나’ 하고 여겨지는 중을 결국에 죽이는 것은 임금이나 호랑이가 아니고 허명이었소. 허명은 중을 오만하게 만들어 버리오. 공부 많이 했다, 한소식을 했다, 도술을 한다, 십년 동안 장좌불와를 한 생불이다…말이란 것은 실없이 얼마든지 무성해질 수 있제라우.”
“너 화두가 무언지 아느냐?”
“여기 호랑이굴이 있다고 하자. 다람쥐 토끼 고라니 노루 사슴 여우 멧돼지 한 마리 한 마리가 그 굴로 들어간다면 어찌 되겠느냐. 들어가기는 들어가는데 나오지 않을 것 아니냐. 왜 그러겄냐?”
“다 잡아먹기 때문일 테지라우.”
“맞다, 화두는 잡생각을 다 잡아먹어 버리는 금강 같은 큰 진리이다. 금강이란 것은 뇌성번개 같은 것이다. 번개 칠 때 어쩌더냐?…”
부처님의 제자가 남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가슴이 두근거려짐은 지옥으로 가는 가마를 마련해 놓는 일이라는 생각을 다시 했다.
논리는 논리를 낳고 그 논리는 다시 다른 논리를 낳는다. 결국 논리의 숲이 이루어진다. 울창한 논리의 숲은 진리를 보이지 않게 가린다. 그 숲 앞에 선 자들은 진리를 찾기 위해 길을 따지고 가리지 않을 수 없다. 따지고 가리는 일은 다툼을 만들고, 다툼은 자기 논에 물대기식으로 논리를 이끌어 간다.
선은 그러한 논리를 깨부수는 금강(번개와 벼락)…색깔은 모두 태양빛에서 나왔으므로 둘이 아니고, 그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이다.
초의는 큰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세상에 역풍이란 것은 없다. 역풍을 교묘하게 이용하면 나를 그 역풍 쪽으로 나아가게 하는 순풍이 되게 할 수 있다. #세일링
“초의당, 세상에는 두 가지 병이 있소. 하나는 나귀를 타고서 나귀를 찾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나귀를 타면 선뜻 내려오지 않으려 함이 그것이요. 나귀를 타고 있는 줄 알고 있으면서도 내리려 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병인 것이오.”
사람의 죄가 따로 있는 것 아니다. 차를 마시되 찻잎 딴 손을 알지 못하는 죄, 가마를 타되 가마 멘 사람의 땀이나 가쁜 숨결을 알지 못하는 죄가 제일로 큰 죄다. (권력자들을 향한 일침! 고마워할 줄 모르는 죄!)

초의 스님, 그는 누구인가.
초의 스님을 한 편의 소설로 쓰고도 다시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사실과 허구 사이의 간극을 조율하자는 것이고, 그리고 초의 스님을 폄하하려 하는 시각들을 교정해 주고자 함이다.
소설이란? 사실과 허구의 간극을 조율한 이야기? 옛사람의 참모습을 살려내는 이야기?! 초의 선사의 삶이 눈앞에서 생생히 펼쳐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