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로의 야생화 일기

소로는 오랜 기간 고향 콩코드의 숲과 초원, 늪을 누비며 동물과 식물, 날씨, 그리고 이웃을 관찰하여 일기에 기록했다…“나는 여기서 40여 년 동안 들판의 언어를 배웠고 이 언어로 나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일기>1857년 11월 20일.”
사나운 겨울 끝에 찾아온 우아한 봄의 속삭임…1854년 3월 4일. 지난주에는 눈이 아주 빨리 녹았다…미국금방망이의 잎을 짓이기면 그 향기가 시간을 뛰어넘어 나를 경이로운 계절로 데려간다. 한겨울, 채 녹지 않은 눈과 얼음 속에서도 초록 이파리를 몇 개만 뜯으면 6월 초원을 물들이는 노란 꽃과 같은 향기를 뿜는다는 것을 누가 믿겠느가? 지금 내게 이만큼 여름을 실감나게 하는 존재는 없다.
1854년 3월 7일. 식물이 계절에 충실한 모습은 참으로 놀랍다…동물이나 식물이 살아가는 영역을 인간의 손으로 파헤치려 하지도 말아야 한다. 겨우 껍데기밖에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
여름이 눈 속에서 서로 손을 꼭 붙잡는다.
1885년 3월 14일. 잡초 속에서 블루컬을 발견했다…그 안에 씨앗이 약간 남아 있는 듯했다. 눈밭 위에서 방울새를 위한 곡물창고를 매달고 있는 셈이니, 아직도 시든 줄기가 서 있을 이유는 충분하다.
이 풀들은 생장에 필요한 단 하루, 한순간도 낭비하지 않는다…상록관목을 발견했다…아주 중요한 발견이다. 이런 식으로 그해 겨울에 백산차와 주목을 발견했고, 메이플라워가 자라는 곳도 새로 알아냈다.
녀석들을 꽃으로 이끄는 본능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1853년 3월 27일. 개암나무 꽃이 만개했다. 너무 작아서 자연을 관찰하는 이들이나 일부러 찾아보는 이들만 알아보겠지만 어떤 면에서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흥미로운 꽃이다…이렇게 춥고, 이파리나 꽃을 찾아보기 힘든 계절에,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조그만 꽃에 이토록 선명한 색이라니! 숲에 생명의 징후도 거의 없을 때 봄은 이렇게 멋진 인사를 한다.
왜 꽃가루는 대부분 노란색일까?
어디에서 가장 먼저 꽃이 피는지 알아내려면 반평생은 걸릴 듯하다.
시든 참나무 잎이 일부 꽃봉오리를 덮어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첫 꽃을 발견하려면 상당히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농부가 1년 동안 주변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 얼마나 시간을 쓰는지 생각해보자. 자연의 아름다움은 유사 이래 끊임없이 시인에게 영감을 주었다.
민들레 한 포기에 꽃이 피었다. 내일 꽃가루를 뿌릴 것이다.
이렇게 따뜻한 오후에 버드나무 꽃과 벌의 노랫소리를 즐기노라면 여기야말로 가장 여름에 가까운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쓰느라 바빠서 겨울이 오는 줄도 몰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연과 관련해서는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 내 삶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다. 스스로 공장의 굴대가 된 것처럼 거칠고 성급하며 하찮은 삶이다. 그 반대의 삶은 꽃처럼 여유롭고 영광으로 가득하다.
보이는 것들을 기념 삼아 그렸던 하찮은 그림들은 놀랄 만큼 함축적이다…어떤 경험을 하고난 뒤 최대한 자세하게 묘사해두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성우가 많지만 이 엉성한 그림을 보면 틀림없이 그 시간과 그 장소로 되돌아간다. 똑같은 것을 다시 보는 듯하다. 내키면 그 장면을 다시 묘사할 수도 있다.
“강의 때문에 올겨울 외국에 나갈 일을 생각하면, 여태껏 누려온 무명과 가난이 얼마나 이로운지 깨닫게 된다” #무명과가난이이롭다
풀꽃과 놀다. 이태주.

누구든 풀꽃을 바라보며 풀꽃의 이름을 외우며 살아가는 사람의 세상은 가난하지만 아름답고 가득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풀꽃들을 보고 있을 때 우리는 한없이 겸허한 사람이 된다. 충분히 낮아지고 부드러워지는 마음의 소유자가 된다. 꽤나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 긍정적인 사람이 된다. 풀꽃은 그렇게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화평을 준다. 이 얼마나 고맙고 고귀한 존재인가.
가끔은 우리 자신이 풀꽃이 될 필요도 있다. 풀꽃의 친구가 될 필요가 있다. 그대 부디 지금, 인생한테 휴가를 얻어 들판에서 즐겁게 풀꽃과 놀고 있는 중이라고 한번 생각해 보시라. 마음이 편한해질 것이다…
풀꽃한테 물어 보아라. 처음 풀꽃 그림을 그릴 때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풀꽃을 그리려고 한다. 그것은 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이미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풀꽃의 형상을 버려야 한다…모든 풀꽃은 완전히 유일하고 별개인 개체로만 존재한다. 그 어떤 것도 같은 것은 없다. 다만 비슷한 것이 있을 뿐이다. 이런 데서도 우리는 하나의 생명에 대한 교훈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가난한 마음이란 어떤 마음인가? 사소한 것, 초라한 것, 낡은 것, 옛 것, 가까운 것, 잊혀진 것들을 함부로 하지 않는 마음이다.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또한 그것은 순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순정한 마음이란 또 어떤 마음인가? 순수하면서도 다정함을 잃지 않는 마음이다. 그가 겸허한 마음의 사람일 때 더욱 그런 세계는 쉽게 허락되기도 한다.
풀꽃과 사귀는 데 있어서 알아야 할 하나의 원칙이 있다. 그것은 모든 일을 다음 순간으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언제든 생각나면 바로 그 순간에 찾아가 풀꽃을 보아야 하고 언제든 만났을 때 제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다음에 다시 와 보면 되겠지, 내일에도 이 자리에 이대로 있겠지, 이런 생각은 금물이다.
사람들의 상상력이란 대단하다는 것을 이런 꽃이름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광대나물
그렇다. 풀꽃의 세계는 자기 발밑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새로운 세상의 비밀 세계이다. 지금까지 먼 하늘을 보았고 뜬구름을 보았다면 그로부터 발밑을 바라보는 새로운 생애가 나에게 열렸다.
토종 민들레는 대략 봄철 한철만 살고 물러나는데, 서양 민들레는 1년 내내 꽃을 피우며 번식을 멈추지 않는다. 참 여러가지로 서양 것들은 억지가 있고 힘이 세다는 느낌이다.
민들레는 꽃이 오래가지 않는다. 아침나절에 꽃이 새롭게 피기 시작하면 오후쯤이면 벌써 꽃이 시들어 버리고 그 자리에 깃털 씨앗이 생긴다. 참 놀라운 일이다.
나의 어린 시절은 너나없이 가난하고 춥고 배고프던 시절이었다. 놀잇감도 많지 않았고 군입정감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은 고작 양지바른 담장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햇빛을 쪼이면서 놀았다. 그걸 ‘양지사냥’이라고 불렀던 기억이다.
자세히 본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오래 두고 본다는 것은 더욱 좋은 일이다. 너무나 성의 없이 대충대충 보고 넘김으로 얼마나 많은 귀중한 것들을 우리는 놓쳐 버리는가? 오래 묵은 술이 향기롭듯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 더욱 정답고 사랑스럽다. 젊은 시절엔 차마 알지 못했던 일. 그것도 하나의 지혜라면 지혜고 인생의 보물이라면 보물이겠다.
풀꽃들의 생애는 아주 짧다. 소리 없이 왔다가 자취 없이 떠나간다. 봄이나 여름, 가을 한철을 그렇게 그 자리에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는 풀꽃들. 그래도 그들은 하나도 억울해 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는다. 불평도 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우리네 인생도 풀꽃의 일생처럼 짧고 덧없다. 모든 게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간다. 어찌할 것인가!
야생화 산책. 나영학.

야생에서 피는 꽃들은 예뻐지려고 안달하지 않고 생긴 대로 피었다 말없이 진다. ‘멋 없는 멋, 바로 그게 멋이건만…’ 온전한 자연 그대로, 무심한 곳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것…“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김춘수 님의 시처럼. 모든 식물은 관심이 있어야 보이고 보여야 알게 된다는 아름다움의 의미가 존재한다…”식물 이름 100가지만 알면 잘 사는 인생이다.“라고 늘 생각해 왔다. 산과 들에 가면 식물 이름을 알아야지만 대화가 가능하다. 이름을 모르면 영원한 익명의 관계로 남지만 이름을 알고 불러주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로 발전한다. 식물도 생각을 하고 감정이 있으며, 사람의 마음까지 읽을 수 있다.
만들어진 신. 리처드 도킨스.

“그래도 되는 줄 몰랐어요.”
그래도 되는 줄 몰랐다!
종교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가장 명석한 사람들, 지혜와 덕을 겸비한 사람들 중에 종교적 회의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된다면 세상은 경악할 것이다.”…하지만 정치 로비에 뛰어난 유대인과는 달리, 그리고 그보다 더 막강한 정치권력을 휘두르는 복음주의 기독교인과는 달리,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는 조직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영향력이 거의 전무하다. 사실 무신론자들을 조직화하는 일은 고양이 떼를 모으는 일에 비유되어왔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이 책이 내가 의도한 효과를 발휘한다면, 책을 펼칠 때 종교를 가졌던 독자들은 책을 덮을 깨며유무신론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내가 2006년 1월 영국의 텔레비전 방송에서 2회에 걸쳐 진행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모든 악의 근원은?>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모든악의근원은
나는 인격신을 상상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신은 우리의 불충분한 감각으로 세계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경외심을 품게 하는 정도면 충분하다.-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가독교계는 쓸데없는 것을 따지고 들다가 분열된 것이다. 하긴 지금까지 신학은 으레 그래 왔으니까….또 하나 언급할 것은 종교인들이 어떤 증거도 없을 뿐더러 증거가 있을 수 없는 아주 세세한 것까지 지나치게 확신을 갖고 단언한다는 것이다. 아마 삼위일체라는 분야가 그렇듯이, 그저 조금 다를 뿐인 견해들에 유독 심한 적대감을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신학적 견해들을 지지하는 증거가 전혀 없어서일 것이다. #삼위일체 #다신교 #일신교 #믿음을믿는다
나는 어디에선가 날조되었거나 언젠가 날조될 초자연적인 모든 것, 모든 신들을 공격한다.
우리 문화의 중심에는 일신교라는 감히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거대한 악이 자리하고 있다. <구약성서>라는 야만적인 청동기 시대의 문헌에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라는 세 가지의 반인간적인 종교가 나왔다. #일신교 #구약성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아브라함종교
오늘날 종교적 광신주의라는 요정이 미국에서 날뛰는 모습을 미국의 국부들이 보았다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종교적광신주의
“기독교는 여태껏 인간이 갈고 닦은 가장 비뚤어진 체제다“ #제퍼슨
”나는 무신론자들을 시민으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들을 애국자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이곳은 신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아버지부시
과학은 ‘어떻게’라는 질문들에만 관심이 있고, ‘왜’라는 질문들에 대답할 자격이 있는 것은 신학뿐이라는 말은 지겨울 정도로 진부하다. #왜 #어떻게 #과학과신학의차이
나는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갖게 되는 가장 강력한 이유는 이른바 ‘기적’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그리고 정의에 따라서 기적은 과학 원리들에 위반되는 것이다…기적도 없고 기도자에게 응답도 하지 않는 신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기도하다’라는 동사에 대한 앰브로즈 비어스의 재치 만점의 정의를 떠올려보자. “지극히 부당하게 한 명의 청원자를 위해서 우주의 법칙들을 무효화하라고 요구하는 거.”…자신을 편애해 달라고 신에게 떼를 쓰는 것으로 비칠 것이다.
기도의 힘? 연구 결과는 명쾌했다. 기도를 받은 환자들과 그렇지 않은 환자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기도를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는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 차이는 예상을 완전히 깨는 것이었다. 자신이 기도의 혜택을 받았다는 것을 안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심한 합병증에 시달렸다.
상대방은 그에게 ‘직감(gut feeling)’이 있을 것, 아니냐고 대답을 강요했다. 그러나 칼 세이건은 영원히 남을 만한 명답을 했다. “나는 창자(gut)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사실 증거가 나올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좋지요.” #칼세이건 #외계생명체질문 #gutfeeling #만들어진신 #리처드도킨스
모르타라의 유괴? 사제들이 유괴를 한 이유는 언제나 같았다..아무리 비공식적이고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해도 일단 세례를 받으면 그 아이는 기독교인이 되고 그 사실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 로마카톨릭 신앙의 핵심 부분이었다. ’기독교도인 아이‘가 유대인 부모 밑에서 자란다는 것은 그들의 정신세계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일…왜 교황령에 사는 유대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서 카톨릭 하인들을 고용한 것일까? 왜 그들은 예방 차원에서 유대인 하인을 고용하지 않았을까? 답은 판단력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전적으로 종교와 관계가 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일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 종교를 지닌 하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종교적맹신 #종교문명의야만사 #모르타라납치사건 #세례 #안식일
벌레가 지키는 세계.
당시 나는 해충을 통제할 방법을 연구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우리가 통제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다.
로봇 벌? 벌이 하는 일을 돈으로 환산하면, 수조 원이 넘는다…깨끗하게 살균 처리한 공정에서 흙 없이 재배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최근 들어서야 우리는 원생동물, 바이러스, 박테리아, 균류, 벌레와 같이 흙 속에 사는 복잡한 미생물 무리가 인간의 장내 건강에 필요한 영양소를 제공하는 데 얼마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지를 깨닫기 시작했다…이러한 영양소 순환을 책임지는 것이 바로 식물과 미생물의 복합적인 관계다. 이처럼 수많은 연결고리로 다이나믹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관계망을 실험실에서 재창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벌레가 꼭 필요하다.
유죄 판결을 받고 쫓겨난 작물 해충? 놀랍게도 1320년 프랑스 아비뇽에서는 왕풍뎅이 종이 심각한 작물 피해를 일으킨 주범으로 지목되어 실제로 재판이 진행됐다.
식습관을 리버깅하라…식품의 생산 ’방식‘에서 시선을 돌려서, 생산되는 식품의 ’종류‘에 대해 생각해보자…현재 식품산업은 균일한 수확물을 많이, 저렴하게, 최대한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단일재배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그러나 소비자인 우리는 마트에 가서 온갖 종류의 식품이 휘황찬란하게 진열된 모습만 보니, 우리가 먹는 음식의 상당수가 몇 안 되는 식물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쉽게 인지하기 어렵다. #단일재배#다양성#유전자변형#옥수수#식품산업
똥과 함께 산다_인분지리학. 유자와 노리코.
보물로서의 똥…결국 사람들이 똥을 ‘생명’을 기르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똥•흙•음식•생명•인간•새•짐승•물고기 모두가 ‘농업’이라는 행위 속에서 하나의 ‘고리’로 그려지고 있다…양분 적은 논을 바꾸어 좋은 논으로 만들고 황폐한 땅을 비옥한 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똥이 있어야만 한다.
흙을 통해 똥과 인간이 풍요로운 관계를 맺어온 역사와 그 상실 과정을 밝히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로의 전환을 논하는 ‘사회 경제사’이고 식량 증산을 실현하기 위한 ‘농업기술사’이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구조적으로 변화하는 ‘환경사’이고 순환 세계와 인간의 위치를 묻는 ‘사상사’이기도 했다. 배설과 똥이라는 가장 친근한 사건은 참으로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는 연구 플랫폼이라 할 수 있다…환경에 관한 문제도 삶이라는 주제도 가까운 사건과 연결 때 비로소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먹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있어도 ‘똥 싸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아침마다 화장실에서 한 번도 눈에 띄지 않고 물에 씻겨 내려간다면 그것은 ‘가까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것’이라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릴 정도로 먼 존재가 될 수도 있다…시대가 흐르면서 똥은 점차 그 ‘친근함’을 잃어갔고 그로 인해 ‘낮섦’이 커지면서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보고 싶지 않은 것’, ‘보이지 않는 것’, ‘낯선 세계의 것’이라는 불확실성을 가지게 되었다. 거의 매일 마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결과 이제 그것은 ‘자신’이라기보다는 ‘타자’이고 만지고 싶지 않은 ‘오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고 ‘오물’로 명명되는 순간 우리는 똥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을 멈춰버린 것은 아닐까?
인간이라는 존재는 건축학적으로 말하자면 부엌과 변소를 연결하는 일종의 관과 같은 존재로 우리는 이 관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매일 열심히 일하고 있는 셈이다.
‘똥’과 ‘화장실’을 바라보면 어떤 세상이 보일까요?
충분한 물이 없고 위생적인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이 전 세계에 24억 명(약 3~4명 중 1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플라잉 화장실? ‘하늘을 나는 화장실’? 실제로는 비닐봉지에 담긴 똥이 하늘을 나는 것이다. 왜 하늘을 나는가 하면 창문을 통해 실외로 똥을 버리기 때문이다.
편리한 생활에 익숙해진 우리는 똥을 외면하게 되었고 똥이 어디로 가는지 지켜보고 상상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나는 필경 문명인이었던 것이다. 주변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야만인들에 비하면 나는 지금 당장은 열등한 존재였다…문명이 조금씩 내게서 멀어져 갔다. 단순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이웃에 대한 혐오감도 거의 없어졌다. 나는 자유롭고 동물적이고 인간적인 삶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오늘과 똑같이 자유롭고 아름다운 내일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평화가 내 마음속에 내려온다. #고갱 #타히티 #노아노아 #문명과야만
책 읽는 사람들. 알베르토 망구엘.
독서는 창조적인 활동 중에서 가장 인간적 활동이다. #알베르토망구엘
십대 후반에 ‘피그말리온’이라는 서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만났고, 4년 동안 그에게 책 읽어주는 일을 하면서 큰 영향을 받았다.
“우리는 한 권의 책을 두번 똑같이 읽지는 않는다” #헤라클레이토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글을 읽는 즐거움, 책을 손에 쥐고 있다는 즐거움이다.
“죽어도 죽어도 있을 수가 없을 거요!”
“그래도 당신은 잊을걸요, 기록을 해두지 않으면 말이에요.”
이상적인 도서관이라? 한 사람만을 위한 도서관이다. 독자라면 누구나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상적인도서관 #한사람만을위한
전자 텍스트와 인쇄된 책은 교환이 불가능하다.
물론 이런 다양한 <돈키호테>는 어떤 도서관에서도 찾을 수 없다. 점점 줄어드는 기억이 간신히 유지하는 내 도서관에만 존재할 뿐이다…나만의 <돈키호테>들, 즉 내가 지금까지 읽고 또 읽으면서 창작해낸 <돈키호테>들, 결국 내 기억이 꾸며내고 내 망각이 편집한 <돈키호테>들은 오로지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정신의 도서관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완전한 의미에서의 독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소수의 특권이다…독서는 텍스트에 들어가, 개인적인 역량을 총동원해서 텍스트를 탐구하고 재창조해 다시 회수하는 능력이다…독서는 사색과 의문으로 이어질 수 있고, 사색과 의문의 제기는 반발과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어떤 사회에서나 이런 변화 과정은 위험하게 여겨진다.
오늘날 사서들이 자주 부딪히는 당혹스러운 문제는….젊은이들 책을 올바로 읽는 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전자 텍스트를 찾아내서 읽고, 인터넷을 활용해서 여러 출처에서 몇 단락씩 잘라내어 하나의 글로 재조합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인쇄된 페이지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고 비판하며 설명하고 기억하지는 못하는 듯하다. 전자텍스트는 접근성이 뛰어나, 사용자에게 학습의 어려움을 수반하지 않고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따라서 독서의 본질적인 목적이 상실되고,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정보의 수집이라는 역할만이 남는다…독서는 독자에게 단어의 미로로 들어가 자기만의 길을 개척해서 페이지의 여백 너머에 자기만의 지도를 그리라고 요구한다…사회가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선택한 도구, 즉 불확실하고 다의적인 단어들로 이루어진 언어의 힘은 모호함에 있음을 독자들이 깨닫게 되었다. 달리 말하면, 어떤 대상을 단어로 규정하지 않고도 이름을 붙이는 놀라운 능력에 언어의 힘이 있다는 것이다…저자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것이 텍스트에 담겨 있다…하나의 텍스트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 즉 큰소리로 읽힌 하나의 텍스트에서 파생된 무수한 책들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언제나 종이책의 도서관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신의 도서관은 점점 커져간다. #독서란#언어의힘#모호함#하나의텍스트#다양한해석#독서의종말
대체 ‘이름’이란 무엇일까?…창세기…그곳은 아담의 단어가 없는 세계였다…단어, 즉 사물의 이름은 경험에 형상을 주는 수단이다.
이름을 붙이는 역할은 독자의 몫이다. 글을 읽지 않는 사람도 자신의 경험에 어떻게든 이름을 붙여야 한다…스테판 말라르메는 “공동체가 사용하는 단어들의 의미를 순화하는 것”이 독자의 의무라고 말했다. #말 #단어 #이름 #책읽는사람들 #알베르토망구엘
어린아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경험의 세계는 앨리스의 숲처럼 이름이 없다. #이름이란무엇일까 #거울나라의앨리스 #책읽는사람들 #알베르토망구엘
“당신은 그가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을 알아내서, 똑같은 언어로 완벽하게 대답하기를 바란다”
독자는 그런 완벽한 대답을 책에서 찾아내기도 한다….종이 위에서 번쩍거리는 단어들을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둠 속까지 파고들기 위해서 독서하는 것이다…얼마 전, 나는 호텔방에 앉아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우연이었던지, 잠깐씩 화면에 잡힌 장면들은 하나같이 살인과 구타 장면이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 자동차와 건물이 폭파되는 장면이 텔레비전 화면에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그 장면들 중 하나는 드라마가 아니라 발칸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에 관련된 소식이었다. 폭력의 공포성을 희석하는 무수한 장면들에 영향을 받은 탓인지 나는 총알에 맞아 정말로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무덤덤하게 지켜보았다…내가 그날 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이미지들은 껍데기에 불과했다…사색의 공간이나 시간이 전혀 필요 없는 덧없는 이미지들이었다. #이름이란무엇인가 #사색 #관습적인언어 #사색의언어 #거울나라숲 #앨리스 #책읽는사람들 #알베르토망구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