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도. 방현석.
“이틀 치요”
“그거면 충분해. 자자.”
묘향약수에 닿기 전에 나는 이틀 치 식량이면 충분한 이유를 알았다. 낭림산맥의 지산들마다 꾼과 쟁이들이 깃들어 있었다. 사냥꾼, 약초꾼, 벌목꾼, 나무꾼, 벌꾼. 숯쟁이와 도기쟁이까지…묘향산에 들어설 때까지 바랑의 양식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넌 맹수보다 더 무서운 짐승이 무엇일 것 같으냐?”
“이 사람들은 다 인간보다 더 무서운 짐승이 없다는 걸 겪어봤을거야.”
“도적떼보다 더한 도적들 때문에 살 수가 없으니까 세상을 등졌을 테고.” #도적떼보다더한도적들#탐관오리
“당신의 꿈은 무엇입네까?”
총알 백 발보다 무서운 것이 글자 한 자고, 총 열 자루보다 무서운 것이 책 한 권이란 말입네다.
그들이 아는 것은 활자의 모양이지 글자의 음과 뜻이 아니었다. 글을 모르는 자가 만든 책을 글을 아는 자가 읽었다. 책을 찍고 매는 것은 인쇄공과 제본공인데 책을 읽는 것은 양반이었다. 족보 없는 자들이 만든 족보로 족보 있는 자들이 행세를 했다. #조판공
“동학은 믿는게 아니야, 하는 거지.” #동학#기독교와차이
나는 상대의 눈을 보지 않고 손과 발을 먼저 살피면서 살아왔다. 행하지 않는 것을 믿지 않았다.
“뭐, 우리나라 일에 왜 청국놈과 왜국놈을 끌여들여?”
“그러니까, 그것들이 미친 거지. 백성들 생각은 눈꼽만큼도 않고 왕 노릇 할 생각만 하다가 조선을 왜놈과 청국놈의 전쟁터로 만든 거지.” #동학혁명#민비
나는 자기 부인을 살해한 왜구에게 복수하겠다고 일어선 의병을 진압하라고 관군을 보낸 고종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임금이기 이전에 한 여자의 사내로서 어찌 그럴 수가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민비시해#고종#의병
“열세 살요.”
….
“의병은 자기가 원해서 나오는 건데 안 나오면 그만이지, 네가 와 나와?”
“우리집에서 아무도 안 나오면 소작을 다 떼이는데, 그럼 식구들이 다 거지 되잖아요.”
“누가 소작을 떼?”
“지주 어른이죠.”
“그 집에는 아들이 없어?”
“넷이 있죠.”
“그 집 아들들은 어디 있어?”
“집에 있죠.” #의병
“제가 집으로 돌아가면 소작 떼이고, 식구들은 거지가 될 거예요. 그러느니 제가 여기서 죽는 게 나아요.“ #의병
참담한 패배였다…이들은 호좌의진의 거룩한 깃발을 지키려고 끝까지 남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유인석을 믿고 최후까지 싸운 것도 아니었다. 나를 믿고, 내 명령에 따라 항전하다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 주검을 바로 누이며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의병
“전설로 만들려고요.”
“전설?”
“제가 오래 살지는 않았어도 겪고 본 건 좀 됩니다….그 모든 시작과 끝에 있는 것이 말과 글, 선전이었어요. 모든 변란과 전쟁은 다 말과 글로 시작해서 말과 글로 남았고, 거기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의 값어치를 매기는 것도 말과 글이었어요.” #전설#말과글
나라는 망했는데 왕은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전국에서 집결시킨 일만의 병력을 두고 총대장이 아버지 장례를 치르러 가겠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거기다 삼년상이라니 참으로 대단한 양반이었다. #양반
“우리 할일연합포연대가 여느 의병대와 다른 게 뭔 줄 알아?”
“가장 많이 싸우고, 가장 크게 이겼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장 적게 지고, 가장 적게 죽었다.”
“사람이 하는 행동이란 마치 날아가는 탄환과 같은 것일세. 탄환이 가던 방향을 바꾸어 날아가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사람의 행동도 그런 것이네. 지금까지 그가 해온 행동이 그가 앞으로 할 행동이네.“
”분명한 건 당신에게 지켜야 할 조선의 강토는 있는지 모르지만, 당신이 되찾아야 할 조선이란 나라는 이미 없습네다. 나라를 지키려면, 백성들이 지키고 싶어하는 그런 나라부터 만들어야 하는데 이 조선에서는 불가능하단 말입니다.“
“일본군 소대장인 아들 하나가 조선의 정승, 판서 열보다 낫다고?”
“아니다….올해 천석꾼이 되었다고?” #친일파
“우리는 칠백육십사 명의 동지들을 이 태백준령에 묻었소…우리 동지들의 피와 눈물이 스민 골짜기를 건너지 않고, 우리 동지들의 뼈가 묻힌 언덕을 밟지 않고서 넘어갈 수 있는 산마루는 이제 단 하나도 남지 않았소.”
우리 대원들이 뿌린 피로 이 가을의 단풍은 더욱 짙게 물들 것이고, 오는 봄의 진달래는 더욱 붉게 피어날 것이었다. #항일연합포연대
“제가 적의 수괴 한 두를 잡는다고 해서, 장군님께서 일본군 수백, 수천 두를 잡는다고 해서 물러날 일본이 아니겠지요. 그걸 몰라서 우리가 지금까지 싸운 건 아니지 않습니까? 싸우면 어떻게 되는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아무도 싸우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아니까 싸우는 것이지요.” #안중근
“한 나리를 지탱하는 것은 인의예지신이오. 어질지 않은 정치는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고, 의로움이 없는 정치는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며, 도리를 모르는 정치는 나라를 기울게 만드는 법이오. 지혜와 능력마저 잃어버린 무능한 정치는 나라를 넘어뜨리오. 하여, 인의예지가 무너진 지금의 조선은 장군의 말대로 이미 넘어졌소이다. 허나, 아직 조선에는 마지막 하나, 신이 남아 있소. 신은 백성들이 서로를 지켜 더불어 다시 일어서려는 믿음의 힘인바, 이 가물거리는 믿음의 마지막 불씨를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든 지켜나가야 하오…” #유인석#인의예지신#바르지못한정치
더구나 군왕이 제 백성에게 지켜야 할 마지막 신의마저 저버리면 군왕이라 할 수가 없소…이것으로 이십칠 대에 걸친 조선왕조 오백십구 년은 완전하게 끝이 났소. #인의예지신#고종
우리나라는 망했습니다. 폐하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저는 적을 토벌할 수도, 적에게 복수할 수도 없는 이 상황 앞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자결 이외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목숨을 끊습니다. #리범진#유서#고종
지금까지 연설을 하러 온 애국지사들은 많았지만 갱도에 들어와서 우리와 함께 일한 애국지사는 장군님이 처음입니다…우리 금광에 와서 독립 성금 내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애국지사도 장군님이 처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얼마씩이라도 십시일반을 내게 만든 것도 장군님이 처음입니다.
사람들의 문제는 어디서나 지식과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 지식과 능력을 자기를 위해서만 쓰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니 지식과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많은 조직일수록 분란은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의문제#사리사욕#당리당략
스스로 싸우지 않는 자에게 차례질 권리는 없단 말입니다. 스스로 지키지 않는 자의 권리를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나는 총을 든 자였고, 내기 할 수 있어 일은 내 앞에 있는 표적를 저격하고 격파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총을 든 자의 운명이었고 소명이었다. 아닌 것을 부술 뿐.
“엄은 어쩌다 변절자로도 모자라 밀정이 된 걸까요?“
”세상을 바꾸려 덤벼들었으나 세상이 어디 그리 호락호락 바뀝니까. 세상보다 훨씬 바꾸기 쉬운 자기를 바꿔 적이게 빌붙는 자가 변절자고, 변절자 중에서 제 능력으로는 차지할 수 없는 것을 차지하려고 동지를 파는 자가 밀정이지요. 단순한 변절자는 저를 팔아 원하는 것을 얻지만, 밀정은 남을 팔아 제 것이 아닌 것을 차지하려 들지요. 저 하나만 팔아먹는 놈은 몰라도, 저 하나로 모자라 팔지 말아야 할 동지를 팔아넘긴 배반자는 처단해야지요.“
“장군님은 독립이 되면 뭘 하고 싶으십니까?”
말문이 막혔다. 나는 한 번도 이 전쟁에서 살아남아 독립을 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에게는 살아서 머무를 집이 없고 죽어서 묻힐 무덤이 없다.
에필로그. 극장 수위. 그의 마지막 직업은 극장 수위였다….“내 이야기 말고 그들의 이야기를 무대에 오려주시오.”
쓰지 못한 이야기. 그들. 최재형과 그의 가족…일본군은 그의 시신을 없앴고, 러시아는 그의 가족들을 일본 간첩으로 몰아 살해했고, 대한민국 정부는 묻힐 시신조차 남기지 못한 채 외로운 영혼으로 돌아올 허묘마저 없애버렸다.

작가의 말. 나는 이 이야기를 혼자 쓰지 않았다. 나는 어떤 소설도 나 혼자 쓴 일이 없다. 나와 함께 이 소설을 쓴 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수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이 소설의 한 장면 한 장면을썼다.
『범도』는 13년 전부터 준비해온 이야기다. 자료를 뒤지고, 주인공의 발자취를 따라 만주와 중앙아시아, 러시아 답사를 다녔다. 오로지 이 소설의 집필에 매달린 지 꼬박 세 해가 지났다. 매주 50매의 원고를 꼬박꼬박 썼다…더러 지치기도 했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이 작품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홍범도와 그의 사람들이 지닌 도저한 매혹 때문이었다.
『범도』는 내가 등장인물들과 함께 매일 울고 웃으며 총을 들고 싸운 기록이다. 신포수와 백무현, 백무아, 남창일,..지청천에 이르기까지…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가야 할 길을 선택하고, 함께 행동했다. 소설가란 직업에 부여된 고단한 의무이자 매력이고, 소설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들 모두를 심장이 뜨거운 인간으로 되살리고 싶었다. 독자들이 만난 인물 누구 하나라도 심장이 미지근했다면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다….동작동 현충원에 들렀다…하지만 나는 대전 현충원에서 그랬듯 동작동 현충원에서도 절을 올릴 수 없었다.
무명용사위령탑과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의 묘지 바로 윗자리를 차지한 장군은 이응준과 신태영이었ㄹ다. 지청천 장군의 일본 육군사관학교 26기 동기로 요코야마 맹약을 함께 했던 이응준은 일본이 패망하는 마지막 날까지 일본군 대좌로 충성을 다 바쳤다.
’13년 동안 준비한, 등장인물들과 함께 매일 울고 웃으며 총을 들고 싸운 기록’이란 작가의 말이 고스란히 담긴 살아 있는 역사 이야기. 지난 역사 속 이야기가 여전히 오늘에도 유효한, 아직도 친일청산의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 아픈 상처를 담고 있는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의 역사 이야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