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농 버리고 가는 진보는 십 리도 못 가 발병 난다. 천규석. p359
#잃어버린 낙원도 유토피아도 농촌공동체였다
콜럼버스 발견 이전의 아메리카도 낙원이었다
사람의 잔인성이 어디까지인지 그 한계를 실험하기 위한 경연장 같은 모습에 소름이 끼친다. 기독교 신자들인 식민자들이 심지어 12사도와 구세주 예수를 기리기 위해 13개의 올가미를 만들어 원주민의 목을 매달고 발밑에 불을 붙여 산 채로 태워 죽였다는 대목을 읽으면 기독교는 모순 자체이고 하느님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아메리카의 낙원과 원주민들을 이렇게 잔인하게 파괴하고 집단 학살한 그들이, 이제 다시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낙원의 땅 이라크를 불바다로 만드는 그들이 하느님을 믿는 하느님의 후예들이고 또 하느님이 이들의 편이라면, 하느님은 저주의 대상이거나 차라리 없는 쪽이 천만 배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릉도원은 국가를 거부한 피부역 농총자치공동체다
도연명의 『도화원기』. 도연명은 사상적으로도 자신의 노동으로 자기 삶을 스스로 꾸려가는 농업과 노동 중심의 도가 사상에 속하는 사람이다.
왜 실락원도 유토피아도 농촌공동체였는가?
과거에 잃어버린 낙원들은 모두 농촌공동체였다.
사실 인간은 손과 발에서 흙 떨어질 날 없는 농사일로부터 벗어나 손발을 깨끗이 씻고 흙을 떠나는 그 순간부터 생명 파괴적인 사기꾼이 되기 쉽다. 물론 화학비료와 농약과 기계로 땅을 수탈하고 그 생명을 파괴하며 그 땅에서 나온 반생명적인 농산물로 소비자를 속여야 먹고사는 지금 산업농 시대의 농민의 삶은 본질적으로 생명 파괴적인 도시의 삶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땅과 하늘의 섭리에 순응하여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살게 하는 근본적인 구도(求道)의 삶이 전통농업이었다.
농민·농사와 그 공동체 버리고 가는 진보는 가짜다
『서구의 몰락』을 쓴 슈펭글러는 많은 사람들이 말로는 농촌을 그리워하지만 한번 농촌을 떠난 사람은 설사 아스팔트 위에서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했다.
길게 잡아 3백 년 서구 역사 속의 지속불가능한 황폐화된 사회. 그러나 농경사회는 1만 년 이상의 생태적 지속과 자급자족이 가능한 사회였다.
‘농(農)’자만 붙었다고 그것이 다 미래의 대안이 되는 것도 아니다
요즘의 귀농자들이나 공동체 운동가들은 하나같이 생태농업을 주장한다. 그러나 아직은 이 지구상의 어디에도 명실상부한 생태농을 회복한 곳은 없는 것 같다. 유기농주의자들은 농약이나 비료를 안 쓰는 것만으로 생태농인 것으로 착각하거나 자위하고 있지만, 그것은 비료와 농약 대신 유기물을 썼기 때문에 유기농이라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석유에너지 등 부족자원에 크게 의존하는 대형기계와 비닐하우스 등의 시설에 의존하는 상업농은 결코 진정한 생태농이라 할 수 없다. 대규모 기계와 시설에 의존하는 상업적 산업농의 생산약식에 그대로 의존하는 오늘날의 유기농 상업주의야말로 생태계의 파멸을 오히려 앞당길 것이다.
#『노자(老子)』의 저자는 농민공동체 속의 노자(老者)들이다
『노자』에는 인명이든 지명이든 고유명사가 일절 나오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노자』의 필자가 의도적으로 특정 인명과 지명을 빼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노자에 담긴 사상이 어느 특정 지역의 어느 특정 개인이 특정 사안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긴 세월 동안 오랜 시차를 두고 여러 지역 공동체에 사는 여러 사람들의 삶에서 나온 공동체적 지혜와 사유를 종합한 기록이기 때문일 것이다.
노자사상은 농민 자신들의 생활사상이다
노자사상의 뿌리는 반국가 농촌공동체 사회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파발마가 똥밭 가는 농삿말이 되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군마가 들판(싸움터)에서 새끼를 낳게 된다. 만족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화는 없고, 욕심내어 얻고자 하는 것보다 더 큰 허물은 없다. 그러므로 족한 것을 아는 것에 만족하면 항상 만족한다.”
노자는 욕망의 억제와 비움의 사상이다
『노자』는 역시 고대 중국의 농촌공동체 사상이다
##국가·시장·분권을 넘어
#나라란 무엇인가-가야사를 읽으며
극복해야 할 발전·진보사관
현대나 미래사회의 가장 큰 과제가 지역 안에서의 자급자족과 자치를 통한 생태적 지속 가능성의 확보라고 할 때, 가야 소국들은 그런 면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소국들을 이루고 있다. 서른개의 전·후기 가야연맹국 또는 관련국들이 그려진 지도를 보면 누가 책상에 앉아 계획적으로 짜 맞추기라도 한 듯 낙동강변 전역과 남해안, 그리고 섬진강변의 산과 들의 생태계 단위에 따라 작은 나라들이 지역화되어 있다.
부국강병은 국가주의적 현실 정치세력에게는 영원불변의 진리이고 이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민에게 보편타당하고 본질적인 진리와 이상을 묻고 추구하는 사람에게라면 그것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하나의 과제요 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학교급식-시장의 논리를 넘어서
시장이 비료와 농약을 만들었고 대형농기계와 비닐을 만들어 판다. 이런 시장상품들이 농민들을 헤어날 수 없는 채무자로 만들고 농촌공동체를 몰락시겼다. 시장의 가격경쟁과 물량경쟁이 소농들을 농촌공동체로부터 추방시킨 뒤 대농과 다국적기업의 농축산물을 몰고 들어온 것이다. 시장세계화가 우리 소농공동체와 농사는 물론 우리의 전통 지역시장과 곡물시장까지 파국으로 내몬 것이다.
학교급식 개선도 학교-농촌 직거래가 대안이다
오늘날 우리 밥상이 오염화·저질화로 불신을 받고, 이토록 농총공동체가 처참하게 파괴된 원인이, 바로 농민에게는 부가가치가 전혀 없는 식품원료만 생산시키고 부가가치가 있는 가공은 가공식품업체가 유통은 시장의 상인과 유통업체가 모두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농사와 먹을거리에 관련한 모든 것은 이제 본래의 주인이었던 농민에게 돌려줄 때다.
자치민주주의의 기본인 소농두레도 학교-농촌직거래가 살린다
#들에서 보는 친환경농업정책
이에 견주어 김 장관은 재야 사회운동가 출신이라지만 서재 속의 학자로서가 아니면 과천 청사의 창문을 통하여 친환경농과 농업·농촌 문제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입장의 차이와 한계를 나는 다시금 실감한 것이다.
과연 ‘새로운 농정패러다임’인가
비가격경쟁도 또 다른 형태의 경쟁이다
WTO 완전 시장개방 체제 아래서 국제경쟁력 강화는 피할 수 없는 냉엄한 현실. 국가경쟁력에는 가격경쟁력과 비가격경쟁력이 있다. 우리의 역대 농정이 그랬듯이 아무리 대농이나 기업농을 지원 육성한다 해도 우리에게 태생적으로 주어진 부족한 부존자원과 물리적 하부구조로써는 품질, 안전성, 유통 여건, 환경생태계 영향 들을 고려한 차별화로 비가격경쟁력을 높이는 길뿐이다. 이 비가격경쟁력을 높이는 길로 선택된 것이 가족농 주체의 친환경농업정책이다.
무엇이 친환경농인가
이보다 더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이처럼 에너지 고투입과 집약에 의존하는 수출 지향 농업을 친환경이라고 하는 것이다. 토양 관리에 닭똥에너지를 독점적으로 쓰고, 씨앗을 파종하는 데도 최고로 에너지를 많이 쓰는 비행기를 이용하거나 파종기를 이용한다. 잡초 관리와 병충 방제에는 어마어마한 수자원을 이용하고, 수확하는 데는 보나마나 대형 수확기와 트랙터 등을 그 면적에 비례하는 대수만큼 굴릴 것이다.
이처럼 대형기계화에 따른 에너지의 대량 투입으로 부존자원의 고갈을 재촉하고 그것으로 공기와 물을 오여시키고 수자원을 남용하고 결국에는 땅까지 오염된 수자원과 대형기계로 질식시키는 이런 농업이 어째서 친환경농이 되는가?
소농두레 지역자치 없이 지속 가능한 미래 없다
농작물 재배에만 화학물질을 안 쓰거나 적정량을 쓴다고 친환경농이 되는 게 아니다. 진정한 환경농은 농사 과정에서 에너지 투입을 최소화함은 물론이고, 그것을 유통·소비하는 데도 에너지 투입을 최소화해 환경적·생태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노농공동체운동이 요구된다
#지역갈등의 원흉은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이다
#분권운동을 넘어 기권 자치로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
‘지구촌’이란 말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첨단기술시대에는 지구가 옛날의 촌마을과 같이 하나의 생활권이란 뜻 같은데, 그러나 이 말에는 결코 가볍게 스쳐 지나갈 수 없는 명암이 엇갈린다. 먼저 이 말에는 한 동네 마실 가듯이 온 지구를 싸다니며 무슨 짓을 해도 이의를 달지 말라는 세계시장제국주의의 냄새가 난다.
대형 할인매장과 쇼핑몰로 향하는 자동차 행진을 끝내고 동네 구멍가게로 발길을 돌리는 것으로부터 마을 회복은 시작된다. 코카콜라, 햄버거, 피자 등 식품제국주의에 점령된 우리 밥상을 우리 땅에서 나는 먹을거리로 차리는 것으로부터 마을의 재창조는 구체화된다.
서울 해체하면 서울대 자동 폐교된다
##농업의 포기, 민주주의의 포기
#농업의 위기, 생명의 위기
농업의 공업시장 예속과 생명농업의 위기
지금의 기업적 농업은 위의 삼재(천지인. 땅과 사람, 하늘의 태양과 바람과 공기) 대신 화학물질과 기계를 사용함은 물론 심지어 생명의 신비까지 조작해내는 반생명농업이 된 것이 사실이다.
소농공동체밖에 다른 대안 없다
한 시대가 위기인지 아닌지는 그 시대를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 즉 자기 삶의 철학적·도적적 태도와 가치관에 따라 결정된다. 종교적 종말론자나 도덕적 감수성이 남달리 예민한 사람들에게는 인류 역사의 매 순간과 전 과정이 위기와 위기의 연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의 이런 위기와는 달리 지금의 위기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평범한 사람도 모두 함께 공감하는 생태적 위기다. 환경과 자연에 대한 총공격과 총파괴의 결과물인 오늘날의 이 풍요가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하리라고 보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제도화된 조직 모두에다 아무렇게나 ‘공동체’란 말을 갖다 붙인다. 그래서 국가에도 그것을 갖다 붙여 ‘국가공동체’란 말도 어색하지 않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올바르고 본래적인 뜻에서 ‘공동체’란 강제적 국가권력이 출현하기 이전의 자치적 삶의 단위를 뜻했다.
우리 농산물을 급식재료로 쓰자고 명시한 학교급식조례들은 실지로 수입농산물을 국내 농산물과 차별하는 규정이나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는 WTO의 규정에 반하다는 이유로 2005년 9월 10일 우리 대법원이 무효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시대에 농촌공동체를 지키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바로 우리 코앞에 닥친 생명 위기와 자치 민주주의의 위기를 동시에 극복하기 위해서는 생태적인 농촌공동체 사회로의 창조적 복귀 말고 다른 선택은 없다. 쉽지 않은 길이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길도, 피할 수 있는 길도 아니다.
#우포늪지보다 더 중요한 습지는 논이다
유명 생태관광지(?)만 몇 군데 골라서 걷는 약식 국토 순례
이 단체가 낙동강 순례 목적으로 내세운 중심 화두는 물의 소중함, 낙동강의 역사, 자연 체험 등을 통한 자아성찰 등이다. 그 중 어느 것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지만 낙동강 순례의 화두 치고 너무 추상적이고 형식적이었다. 더구나 농사에 관한 화두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지금이 어느 땐가?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의 강행이 보여주듯이 이 나라의 농정은 이미 우리 농사의 대부분을 포기했고,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생명주권인 쌀을 놓고도 개방 협상 진행 중인 때다. 이대로 두면 곧바로 우리의 전농토가 억새와 갯버들, 개망초와 쑥대가 뒤엉키는, 그야말로 옛망국에서나 볼 수 있는 쑥대밭이 될 터인데 무슨 습지와 철새 걱정인가? 습지와 철새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1만 년이 넘게 이 땅의 인간 생명과 종족 번성을 뒷받침해온 우리 농사, 어떤 생태적인 유산보다 더 위대한 생태문화 자체인 우리 농사가 사라질 판이 아닌가? 우리의 논보다 더 가치 있는 생태적 습지가 또 어디 있는가?
#석유전쟁 다음엔 식량패권전쟁 온다
농림부, 차라리 해산하라
그 많던 농고가 언제부터인가 일거에 사라지고 거의 인문고등학교로 변신했다…또 언제부터인가 이 나라에는 농과대학이 없어졌다. 한때는 발길에 채는 것이 농과대학이었는데 시장개방으로 인한 우리 농업의 쇠퇴와 함께 농대는 깨끗이 사라졌다…무슨 ‘생명과학대학’이니 ‘자연자원대학’ 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서울대학교 농생대의 한 교수는 학생을 상대로 한 강의시간에 소농민 문제는 보건복지부에 맡길 것과 대학이 추구하는 농학의 대상은 경쟁력 있는 대농이나 기업농을 위한 기술농학임을 공언했다고 한다. 생명의 공생보다 경쟁력이 우선인 기술농학은 겉으로는 중립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강자에게 복무하는 이데올로기이지 이미 생명농업학은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대학에서 추구하는 농업 관련 연구와 강의는 생명이야 다치든 말든 경쟁력 있는 기술공학으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마침내 전락하고 만 것이다.
시장 만능 시대에 정부가 주도하는 농업정책을 시장에 넘기고 차라리 농림부를 해체하는 정부구조조정이라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예산 욕심을 부리면서 그를 대체하는 새로운 기능과 명칭의 부서로 계속 확대시켜 살아남겠다는 것은 아무래도 속 보이는 조직 이기주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약 10조 원에 가까운 현재의 농림부 예산만으로도 전 농민이 생산하는 연간 3천6백만 섬의 쌀 전량을 수매할 수 있다. 농림부의 ‘농업식품농촌부’로의 신장개업보다는 깨끗이 해산하고 그 돈으로 앞으로의 고유가시대의 식량전쟁에 대비하여 우리 쌀과 우리 농민농사를 지키는 것이 농림부와 그 관료들을 지키는 것보다 지역안보와 시민건강과 이 땅의 자치민주주의를 위해 훨씬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농지법 개악 행보 중단하라
토지 투기와 파괴를 합법화해줄 농지법 개악
이 정권의 땅과 바다의 파괴정책은 마침내 “국가는 농지에 관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고 규정한 헌법 제121조 1항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쪽으로 농지법의 근간까지 바꾸어 농업의 완전한 포기로 나가고 있다.
#지금도 남의 땅, 쌀농사까지 빼앗겼다
농촌공동체의 파괴를 가속화한 새마을운동
우리 마을 앞길 포장에 든 자부담 비용은 그때까지 있었던 마을 두레답을 판 돈으로 채웠다. 그때까지도 농촌 마을에 더러 남아 있던 마을 두레답은 거의 새마을운동 때 이런 용도로 사라져갔다.
재벌들의 슬레이트와 돌가루 장사를 시캬주려고 새마을운동을 한다? 모든 농가의 초가지붕을 바꾸는 데 들어간 슬레이트 양과 마을길 포장에 든 시멘트 양. 그것이 건축자재와 건설업 불황의 타개책이었다는 증거는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꾸는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그 집을 헐어버리고, 그 무렵부터 닦기 시작한 고속도로가 보이는 마을마다 그 고속도로를 향한 방향으로 시멘트 개량주택을 짓게 한 것에서도 드러났다.
이 무렵부터 농민소득 증대하는 구호 아래 비닐하우스와 비닐 피복 농법이 널리 도입되었다. 또 이 무렵 농민소득 증대와 주곡자급을 위해 도입되었다는 신품종 통일벼는 비료를 엄청나게 잡아먹는 다비성 품종으로 그와 비례하여 농약을 많이 치지 않으면 다수확이 되지 않는 품종이었다. 밥맛 없는 안남미 계열인 이 신품종 벼를 거부하고 재래품종을 심을 경우 관계 공무원이 못자리까지 짓밟은 일화로 유명했던 이 신품종 통일벼 재배 이후부터 비료와 그에 비례하여 농약 사용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화학·기계농의 시대로 접어든다. 그래서 새로 도입된 비닐하우스 등의 시설 재배와 신품종에 의한 이른바 녹색혁명의 열매는 화학비료, 농약, 비닐, 동력분무기, 양수기, 경운기, 트랙터, 콤바인 등을 생산하는 독과점 또는 다국적기업에게 돌아간다. 농업의 공업 예속, 자본 예속, 시장 예속은 돌이킬 수 없는 수렁에 빠진 것처럼 날이 갈수록 심화된다. 그리고 이것은 농촌공동체의 해체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했던 전통농업의 해체를 가져왔고, 농산물은 물론 땅과 물 등의 오염과 생태 파괴로 이어졌다.
#사람과 땅은 한 가족 한 생명이다
시애틀 추장의 유명한 연설문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농사꾼 천규석의 지역 자립공동체 철학
문제는 우리의 현실이 여전히 수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근대의 지평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는 서구 근대성이 초래한 병폐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으며, 그 속에서 현대인들은 행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는 근대적 삶의 양식과 지평을 넘어서는 것, 나아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를 포함하여 지금까지 인류 문명을 지배해왔던 왜곡된 가치와 논리를 드러내고 타파하여 문명의 대전환을 이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며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과제이다.
나는 천규석 선생이 주장하는 농업과 농촌공동체의 회복, 더 나아가 자립적인 도농공동체의 건설이야말로 바로 이러한 과제의 해결을 위한 올바른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