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다. 히라카와 가쓰미. p202
일본의 실천적 지식인이 발견한 작은 경제 이야기
원제 『소상인의 권유』
소상인이란 반드시 장사나 쇼규모 비즈니스를 의미하지 않는다. 간단하게 말하면 우상향으로 계속 성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고정 고객을 중시하면서 꾸준히 사업을 지속시켜가는 방식이다. 레버리지 효과로 거대한 이익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아 만들고 작은 이익을 중시하는 방식이다.
소상인이야 말로 급격한 환경의 변화를 헤쳐 나갈 왕도임을 깨닫게 되었다.
더 이상 성장을 바랄 수 없는 성숙 단계. 그러나 일본 정부는 변함없이 경제성장 전략을 들먹이며 쇠약해진 노인에게 채찍을 가하듯, 성숙을 다한 일본 경제를 자극하여 끊임없이 버블의 꿈을 쫓고 있다.
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사회는 성숙형으로 향해 있음에도, 국가의 경제정책은 그것과 동떨어진 발전도상형의 경제성장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성장 전략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책의 사고방식이며, 그 생존전력으로 제창하고 있는 것이 바로 ‘소상인’이다.
주위가 아무리 급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의 중요성이며 비즈니스에서는 그 유대를 토대로 한 신용 창조다. 변화가 급격한 시대야말로, 비즈니스에서도 개인의 생활방식에서도 이익만을 추구할 게 아니라 신용을 바탕으로 어떻게 지속 가능성을 높여갈 것인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소상인은 파는 물건이 한정되어 있고 값비싼 물건도 없다. 그저 골목을 서성이다 찾아든 손님에게 직접 들여온 상품을 선반에서 꺼내어 먼지를 털고 정성껏 닦아 내놓는다. 그러고는 손님이 납득할 때까지 상품을 설명하고 손님이 만족해하면 돈을 받는다. 이 책은 그런 자세로 먼지를 털면서 정성껏 닦은 나의 사고를 엮은 책이다.
동일본대지진과 원전사고? 대재해는 ‘일어나느냐 않느냐’라는 확률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일어나느냐’라는 시간의 문제다!
문제의 답은 사람 수만큼, 회사 수만큼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회사든 개인이든 여러 가지 답 가운데 구체적인 하나의 답밖에 채택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한정적인 상황을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몸을 던져 떠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필요한 것은 다시 한 번 우리가 만들어 온 시대 속에서 의제를 끄집어내어 재점검하고, 끝내야 할 것은 확실하게 끝내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시대 속에 은폐되어온 잘 보이지 않던 의제를 드러내어 다른 생활방식, 다른 방법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경제에 잠식당한 사회
어째서 가난했던 쇼와 30년대 일본인의 생활이 밝고 온화함이 넘치는 것처럼 보이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소상인은 한마디로 말하면 ‘휴먼 스케일’의 부흥이다.
도쿄라는 거대한 도시의 공중에는 그물망처럼 고속도로가 이어져 있다. 이 도로는 인간이 걷기 위한 도로가 아니다. 자동차가 시속 80km 혹은 100km로 질주하기 위한 도로다. 인간이 신체를 아무리 단련해도 시속 100km로 달릴 수는 없다. 고속도로는 휴먼 스케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산업혁명 이후 문명의 진전은 이 휴먼 스케일을 뛰어넘으려는 기술 혁신의 역사였다.
경제 확대는 물건의 이동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였다. 동시에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가 ‘부의 축적’으로 향하게 하는 경향을 낳았다. 화폐가 인간 차별의 지표로 쓰이게 된 것이다.
문명의 진전을 뒷받침한 것은 결국 공간적, 시간적으로 토지나 공동체에 속박되어 있던 한정적인 생활방식을 초월하여 만능의 힘을 갖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이었다. 그 욕망이 다다른 곳이 바로 현대의 테크놀로지 사회이며 글로벌 자본주의 경제다.
글로벌리즘이라는 정치, 경제의 흐름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보다는 격차를 확대시켜 질서를 교란하는 요인을 낳았다. 격차가 너무 커져 민주주의가 만들어낸 중산층을 무너뜨렸고, 세계를 부유층과 빈곤층으로 이분화했다.
기술 혁신과 경제성장으로 이런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일단 멈춰 서서 우리가 무엇을 추구해왔는지 생각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멈춰서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누구나 더 성장하거나 더 의욕적이거나 더 활기차기를 부르짖는 시대에 멈춰 선다는 것은 대세에 반하는 뒤처지는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이야말로 멈춰 서서 생각해야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차분하게 과거와 미래를 헤아리는 시간을 갖는다는 뜻이다. 일본은 어른이 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사회의 성장이란?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사회의 성장이라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생활이 편리해지는 것을 사회의 성장이라 할 수 있을까?….그 성장의 결과로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상품에 둘러싸여 있는 세계의 한편에, 굶주림과 추위로 생사를 오가는 빈곤을 대량으로 낳는 것이 지금 시장경제의 모습이라면 사회의 성장은 잔혹한 것이다. 이것은 정말이지 어려운 문제다.
어떠한 국가적 개입도 배제한 채 자유로운 경쟁에 맡겨놓으면 시장원리가 최적의 상태로 조정된다는 경제정책은, 민주주의의 한 형태라기보다 강자의 욕망에 가담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마셜 살린스의 ‘선(禪)의 길’? 넘치는 풍요에 이르는 데는 또 한가지 선(禪)의 길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지나온 길과는 조금 다른 전제에서 출발한다. 즉 인간의 욕망은 한정적이고 미미하여 기술적 수단을 바꾸지 않고도 전체적으로 욕구를 충족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선의 전략을 취하면 지극히 낮은 생활 수준으로도 비할 데 없는 물질적 윤택을 누릴 수 있다.
가난했기에 풍요로움. 인간들이 만들어낸 사회는 어쩐지 일방통행처럼 발전만을 목표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발전은 경제의 확대를 의미하며, 경제의 확대란 돌이킬 수 없는 욕망의 팽창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이 욕망이야말로 경제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며 경제의 발전이야말로 사회의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진보의 차이’에서 ‘구조의 차이’로. 원시사회가 미성숙하거나 원시적이지 않으며 현대사회보다 열등하지 않다는 것은 마르셀 모스, 칼 폴라니,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같은 많은 인류학자가 다양한 논리로 풀어내고 있다.
애초에 원시적, 현대적이라는 이항대립 자체가 현대의 가치관에 바탕을 둔 견해이며, 그것이 객관적인 비교라는 근거도 없다.
사회의 구조가 다르면 행동양식도 가치관도 달라지는 게 당연하다. 원시사회에서는 반드시 진보를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진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현대사회와 원시사회를 문명이나 기술의 진보 같은 하나의 척도로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나는 진보도 불변도 인간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거기에는 우열이 아닌 두 가지 해석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사회를 구분하는 척도로 원시에서 문명으로의 시간적 추이를 근본으로 하는 ‘진보의 차이’가 아니라, 두 사회의 내부를 구성하는 ‘구조의 차이’를 발견해냈다…문명사회와 원시사회의 본질적인 차이는 그 사회를 특징짓는 구조의 차이일 뿐이라는 점을 관찰하여 기술했다.
이 책에서 거론하려는 것은…현시점에서 가장 가까운 더 작은 문제다. 문명사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작은 일상에도 중요한 문제가 가로놓여 있으며 오히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봉착하는 작은 문제에 어떤 위치를 취해야 할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길모퉁이 경제학
도쿄올림픽 이후 노화의 과정은 진보나 발전이라는 말로 은폐된다. 본래 있었던, 아니 지금까지 그곳에 있던 것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경제성장의 끝이라는 것을 마치 금기라도 되는 양 사고 밖으로 몰아내 버렸다. 만일 끝없이 계속 성장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난 병으로 여기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 생각은 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이 영원히 성장하는 꿈에 매달려 있다. 그 궁극의 모습이 바로 인간이 잘 다룰 수 없는 원자력이라는 것에 의존해 살아가려고 했던 것이다…원자력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그것이 휴먼 스케일에서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데 있다.
#작은 것의 의미
여가의 출현. 문명의 진전은 편리성 추구, 결국 시간 단축을 추구한 결과다. 그것은 그대로 비용이 절감되어 다른 분야로 에산을 넘기거나 남은 시간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공급자도 소비자도 계속해서 시간 단축을 추구했다. 문명의 진보란 정말이지 시간을 압축하는 역사였다. 시간 단축함으로써 효율화 추구, 소비자 또한 남는 시간을 여가로 충당했다.
여가의 출현은 사라들이 먹기 위해서 살아가는 시대에서 즐기기 위해 살아가는 시대로 방향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이 일을 하는 것이 단순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해서 번 돈으로 여가를 충실히 보내기 위함으로 바뀌었다. 유행하는 옷, 무언가를 배우고 취미 활동을 하기 위한 비용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관념이 보편화되었다. 생활의식이 노동 중심에서 소비 중심으로 이행해갔음을 의미한다.
소비는 욕망의 함수다. 처음에는 그저 생활에 필요한 것만을 소비하지만 그것이 채워진 후에도 계속 확대 재생산된다. 이것이야말로 경제 발전의 한 조건이다. 이 발전을 가동하는 것은 화폐의 현저한 유동성이라는 점은 논할 필요조차 없다.
만일 경제 발전이 지상의 명제라면, 소비와 욕망을 끝없이 확대재생산하는 것은 필수이며 일은 욕망을 채우고 돈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고방식이 정당화되어야 한다. 그 결과 돈을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극단적인 사고가 생겨나는 토양이 되었다.
효율화란 결국 시간 단축이다.
환상의 가치? 이 외관성의 가치를 경제학에서는 시장원리가 결정하는 교환가치라 부르며 사용가치와 구별한다.
본래의 바람직한 가치란 시장이 정하는 가격에만 있는 것도, 생산자의 생각 속에만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치란 그야말로 생산자와 소비자가 공동으로 만들어낸 것이며, 양측의 관계성 그 자체의 다른 이름이다.
생산자의 노고에 감사하는 개별적인 관계는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에는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대량생산의 시대에 생산자에게 소비자란 투입한 자본의 회수, 즉 이윤만이 부각되는 수이자 기호이다. 현재 생산자는 항상 이윤을 가져다 줄 소비자를 찾는다!
그러나 그것도 한 바퀴 돌고 나면 이제 지구상에는 새로운 개척지로서의 소비지는 남지 않는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가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사고에는 근본적으로 무리가 있다.
가난이 어른을 만들었다
어쨰서 쇼와는 밝았을까? 이런 전후 쇼와를 특징짓는 풍경의 배후에는 공통적으로 가난이 있었다!
“가난이 옳다!”
“가난해도 나는 힘이 있으므로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는 게 인간의 강점이기에 이것을 버린다면 인간으로서는 끝장이다….부란 그 강함의 결과가 초래한 것이다. 자신의 약함을 은폐하기 위해 부라는 무기를 사용하면 인간사회는 근본이 쇠약해져 멸망해버린다.

하시모토의 아주 재미있는 발상? 그는 진보와 발전이라는 관념은 가난한 상태에서만 존재한다고 보았다.
가난은 야생을 의미한다. 진보나 발전은 야생속에만 존재한다. 부라는 무기를 손에 넣는 순간 인간은 이미 젊음을 잃어버리고 진보나 발전과는 무관한 존재가 된다. 여기에 하시모토만의 역설이 잠재되어 있다.
쇼와 시대 초기의 어른이란 아직 부를 손에 넣지 못한 사람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야생과 젊음을 축적하고 있었다…그래서 계급 격차가 적은 아시아의 섬나라에서는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세키카와 나쓰오의 말처럼 누구나 똑같이 가난했기에 밝게 웃을 수 있었다…하지만 그들이 부를 손에 넣기 시작할 무렵, 즉 가구마다 TV,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자동차를 갖추고 아이들에게 자기 방이 생기고 주부들이 가사노동에서 해방된 그 무렵부터 일본인에게서 야생이 사라져 갔다.
#‘경제성장’에서 ‘축소 균형’의 시대로
국민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경제를 확대하느냐 축소하느냐가 아니라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만일 경제가 균형 있게 확대될 조건을 잃었다면 축소하여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방책을 고려해야 한다.
기존에 없던 물건을 소비자들이 하나씩 다 사게 되어 내구소비재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른 후에는 새로 사서 바꾸는 수요밖에 남지 않게 된다. 소비자가 소득이 증가해도 굳이 소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기업은 설비에 투자한 만큼의 이득을 내지 못하므로 총수요 예측을 축소해야 한다.
카드 사회의 ‘Play Now, Pay Later’라는 사상이 국가 차원에서 응집된 것이 원자력발전소 건설이었다. 위험 부담이라는 비용 지불을 말도 안 되는 미래에까지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소상인이야말로 야생의 지혜로 시대를 살아나온 삶의 한 형식이다.
이콘의 경제학과 MBA. 그들이 합리적인 비즈니스 이론을 배우면 배울수록 비합리적인 비즈니스 현장에 관해 자신들이 얼마만큼 무지한지를 알지 못하게 된다. 배우면 배울수록 바보가 되는 것이다.
비즈니스 서적이나 경제서는 읽을 가치가 없고 쓸데 없다? 그런 책 대부분이 문제를 단순화하여 너무 성급하게 문제의 소재를 한 가지 원인에만 전가해 해결하고 결과를 도출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단선적인 사고법이라고 해도 좋다.
인간은 원래 불합리한 존재이다.
누군가 가진의 권리를 최대로 추구한 결과, 이웃 간의 동질적인 유대가 희박해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핵가족화가 그 전형적인 예다.
인간사회는 바라는 것과는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는 ‘불합리한’ 논리. 이 논리를 상정해두지 않으면 인구 감소 같은 큰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는 불합리로 가득하다. 인간은 원래 불합리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반드시 자신의 의사와는 다른 것을 실현한다”
국민경제와 기업경제는 다른 원리로 움직인다.
안전 신화와 경제성장 신화 모두를 쓰고 싶어 하는 염원은, 마치 그것 이외의 선택지는 없으며 그것이야말로 옳은 인식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데서 생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성장하는 것,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것, 국제경쟁력에서 우위에 서는 것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경제 발전이 어느 단계부터 격차의 확대나 문화의 빈곤화로 향했다고 보는 쪽이 자연스럽다.
그 시대에 일본이 고도로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아직 젊고 가난했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부흥 정책? 다만 긴 시간 동안 농업이나 어업 같은 휴먼 스케일로 영위되어 왔던 생활과 휴먼 스케일로 꾸려온 생활밖에 뿌리내릴 게 없는 문화를 가진 이 지역을, 대규모 산업의 실험장으로 밑바닥부터 다시 만들겠다는 사고방식으로는 우리가 선조로부터 이어왔던 귀중한 재산을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우려가 있다.
#소상인의 권유
“경영 규모로는 오히려 작기를 바란다.” 소니 창업자 이부카 마사루가 쓴 설립취지서는 정말이지 소상인의 정신으로 관철된 소상인의 매니패스토다.
레비스트로스나 살린스 같은 문화인류학자는 원시사회를 상세히 관찰하여 그곳에는 서구의 근대적 패러다임과 전혀 다른 패러다임이 존재하고 그것은 근대적인 것과 비교하여 야만적이지도 뒤떨어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여기서 패러다임이란 역사관이나 가치관, 자연과 시간에 대한 감각을 가리킨다. 서구 근대사회가 문명 발전의 역사이자 경제 확대의 역사임에 비해 원시사회에서는 문명도 경제도 정상 상태이며 인간은 자연이 부여해준 증여로 살아가는 존재였다는 것이 그 차이다.

자본주의란 원래 경제성장을 전제로 한 시스템이다. 자본주의가 가장 성숙한 서구 선진국에서 총수요가 감소하고 더 이상 경제성장을 할 수 없는 상태가 계속되는 것은 자본주의가 한계에 이르렀음을 나타낸다. 이를 뒷받침한 것은 각국 정치인의 생각이나 대자본가과 기업의 끝없는 욕망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동시에 우리 자신이 자유와 쾌적한 생활을 추구해온 결과이기도 했다.
따라서 경제성장이 불가능해진 사회는 우리가 추구해온 것들의 결과임을 계산에 넣고 사고할 필요가 있다. 이는 막다른 곳에 이른 자본주의 경제의 해결책을 모색할 때 그것을 계산에 넣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잃은 것은 야생만이 아니다. 가족을 꾸리는 소중함, 친구와 소통하는 즐거움, 산과 들에서 자연과 하나 되는 기쁨, 서로 돕고 양보하는 상부상조의 미덕도 있다. 그야말로 인간적인 삶의 방식이라 생각했던 다양한 요소가 문명에 의해 희박해져 다른 것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상품경제다. 이 시스템은 일단 시동이 걸리면 인간의 생활 전반에 침투하여 모든 물건이나 행위, 자연까지 상품화해버린다. 문명화된 현대사회는 그 상품이 만들어낸 시스템이다. 최종적으로는 인간까지도 상품처럼 가격을 매겨 거래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인류학은 원시사회와 현대사회를 나누는 열쇠의 하나가 상품교환이라고 말한다.
증여, 답례라는 교환사회에서 상품 교환으로의 전환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비약이었다. 상품 교환이라는 시스템은 일단 생기고 나면 그 규모를 한계까지 팽창시켜 결국에는 지구 규모의 상품 교환사회가 출현할 때까지 계속된다. 이것이 바로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이다.
‘지금 여기’에 책임을 갖는 생활방식
소상인이란 무엇인가? 소상인이란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에게 책임을 지는 삶의 방식이다.
축소 균형의 시대. 상품경제에서 승수효과가 지속해서 일어나는 것을 확대 균형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 일본에서는 이 확대 균형에 반대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설비투자를 하면 할수록 재고가 쌓인다. 출판사는 예전보다 놀랄 만큼 많은 출판물을 유통하지만, 그것은 수요가 확대되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총수요는 감소되어 반품 더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 현재에도 많은 정치가와 경제인들이 확대 균형의 꿈을 좇고 있다. 신기하게도 축소 균형을 제창하는 경제학자나 비즈니스맨은 거의 없다. 그래도 나는 앞으로 일본이 위신을 갖고 살아남으려면 이 나라의 경제를 축소해 균형을 잡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확대 균형의 최종 단계에 들어선 서구 선진국은 소비자의 욕망을 세심하게 분석하는 것으로 연명해왔다. 수요가 항상 우상향으로 오르려면, 여럿이서 하나가 필요했던 상품을 한 사람당 하나가 필요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더는 욕망을 세분화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왔을 때 경제성장론자들은 전 세계를 둘러보고 아직 세분화할 여지가 있는 블루오션을 찾아내려 했다. 그러나 이미 이 지구 상에 그런 장소는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당연하다. 영원히 성장을 계속한다는 것은 헛된 욕망이 꾸는 꿈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슬슬 이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취해야 할 생활방식은 축소하면서 균형을 이루는 방식 이외에는 없다. 그래서 소상인인 것이다.
소상인은 확대보다 계속 존속하는 데 우선을 두는 장사다. 그러려면 금전지상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다른 가치 지표에 따른 생활방식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소상인적인 휴먼 스케일을 추구하는 경영자의 신념.
확대보다는 지속을, 단기전인 이익보다는 현장의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동의 의미나 기쁨을 음미할 수 있는 직장을 만드는 것, 그것이 삶의 긍지로 이어져 날마다 노동 현장에서 작은 혁명이 일어나는 회사말이다.
이부카 마사루의 ‘소상인 선언’
–부당한 이익 지상주의를 없애고, 어디까지나 내용에 충실하고 실질적인 활동에 중점을 두어 쓸데없이 규모를 좇지 않는다.
–경영 규모로는 오히려 작기를 바라고, 대기업이기 때문에 나아갈 수 없는 분야에서 기술의 진보와 경영 활동을 기대한다.
“시가총액 경영”. 예전에는 “쓸데업이 이익을 좇지 않고”라고 말했던 소니도 단기적인 이익 지상주의에서 빠져 시가총액을 최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기업이 되었다.
경세제민이 의미하는 것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창업 스타일도 사업의 규모도 아니다. 인간사회는 어디까지나 그곳에 살아가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며, 인간이 정말로 필요한 것 또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인간만이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그곳에 큰 이윤이 생길 리 없다. 하지만 소상인이기 때문에 그만큼 큰 이윤도 필요하지 않다. 무엇보다 파는 측과 사는 측의 관계가 오랫동안 계속 유지된다. 파는 측은 자신이 행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며 사회에 필요한 일임을 실감하는 것이 중요하다.
테크놀로지가 발전하고 있지만 인간은 어디까지나 지역적인 존재밖에 되지 않는다.
누구나 우연히 ‘지금 여기’에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왔다. 돈벌이를 찾아 자신이 태어난 땅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여기’에 태어난 우연이 필연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태어난 토지에서 벗어나 이윤을 획득하고자 경쟁한다면 그곳에서 통용되는 공통 언어는 화폐밖에 없다. 화폐가 갖는 무연성이 공통 언어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화폐만이 글로벌한 세계에서 상품 교환을 중개하는 언어가 된다.
경제란 부자의 것이 아니다.
경세제민.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지금 여기’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수단이다는 뜻이다.
이정표로서의 소상인.
하지만 그 당시 유지가 가능했던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가게를 지키고 있던 할머니의 생활비가 아주 적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계를 생활비를 벌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국가 차원? 그러나 국가라는 틀이 있어도 그것을 지탱하는 것은 지역 산업이며,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동이다. 그 축적이 국가를 지키는 것으로 이어진다.
소상인이란 다양한 외적 조건의 변화에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는, 웃으면서 곤경을 극복해가는 생할방식이며 기업 철학이다.
현재 대부분의 비즈니스 모델은 기본적으로 시간을 무시한 단기적인 모델이다. 시간 축을 길게 해보면 어떤 곤경도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주변의 인간적인 작은 문제를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곤경을 극복하는 첫걸음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휴먼 스케일이란, 인간은 결코 자연이라는 한계를 초월할 수 없는 존재이며 그 한계에 의미가 있다는 데서 도출한 말이다. 소상인은 이 휴면 스케일의 다른 말이다.

상주시. 한독앵글. 알아서 척척 부분조립과 남은 조립작업 설명까지 온라인 구매에선 제공받을 수 없는 친절한 무료(!) 고객서비스. 덕분에 선반조립을 간단히 마무리. 동네가게점포가 좋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