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디스커넥트. 로버트 W. 맥체스니. p412
자본주의는 어떻게 인터넷을 민주주의의 적으로 만들고 있는가
#한국어판 서문
이 책은 자본주의 현실과 민주주의라는 문제에서 시작됩니다. 현존하는 자본주의는 심각한 경제 부진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계속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불평등은 빠르게 확산되고 있으며, 빈곤은 사실상 오늘날의 삶을 대표하는 모순 현상에 다름 아닙니다. 글로벌 환경은 치명적인 파괴 양상으로 치닫고 있고, 인류는 물로 지구의 모든 생명이 생존의 위험을 심각하게 받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는 시스템이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명백히 사실입니다만,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디에서나 자본주의 시스템은 몇몇 부자들의 지배 아래 있으며, 대다수 민중의 여론은 정부 정책에 거의 반영되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역사상 가장 대단하다고 떠드는 기술혁명 시기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사실, 대다수 사람들에게 디지털 혁명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어쩌면 앞서 이야기한 문제들을 해결할 잠재적인 경로가 겨우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기술혁명의 직접적이고 엄청난 결과가 이제 곧 닥쳐올 것입니다. 신기술이 심지어 저임금 노동까지도 대체하면서 모든 분야에서 심각한 고용 기회 축소의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또 하나의 산업혁명? 200년 전 증기기관이 가져온 엄청난 변화만큼이나 대단한 혁명일 겁니다.
이 혁명이 담고 있는 함의는 무엇보다 앞서 언급한 문제들을 더욱 위험스럽게 만든다는 게 있습니다.
우선 경제적인 측면에서, 불평등과 빈곤이 엄청나게 늘어날 수가 있습니다….단언컨데, 자본주의 경제는 더 이상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특권을 보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시스템 꼭대기의 극소수 특혜 받은 집단만을 예외로 하고서 말이지요. 일자리 창출이라는 명분 하에 장기적인 환경 보존 노력 같은 것은 단기적인 고용 효과 창출을 위해 뒷자리로 밀려납니다. 결국 기업들의 이익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지구의 종말은 더욱 앞당겨질 공산이 큽니다.
이렇듯 자본주의 정치경제가 크게 위축된 상태에서, 우리는 지금 파시즘으로 회귀하려는 징후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회에서 버젓이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파시즘은 현재의 사회관계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다른 선택지가 없을 경우 자동 채택하는 디폴트 옵션 같은 게 될 수 있습니다.
해결책은 어쩌면 간단하고도 명백합니다.
혁명적인 기술의 혜택을 모든 인민이 공유할 수 있고, 환경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과적으로 응용할 수 있게 하며, 민주주의의 재활성화나 확장에 연결시킬 수 있게끔 할 새로운 경제로 바꾸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포스트자본주의적 민주주의‘라 이름 붙입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에 갈등이 더욱 고조된 상황에서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합니다. 인류의 앞날을 고려할 때, 나는 자본주의가 이 갈등을 패배자가 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야 민주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방의 기술’? 디지털이 지금처럼 인류를 감금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고, 거꾸로 ‘해방의 기술’이 되지 못할 이유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전 세계 곳곳에서 기술과 경제 문제를 새롭게 사유하려는 흥미로운 노력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노력들이 대개는 지역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정부 정책의 강력한 관여 없이는 그 효과가 제한된 범위 안에 머물 수밖에 없는 지역 이니셔티브들입니다. 그렇기에 핵심 문제 하나가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바로 정부의 운영 시스템을 바꿔내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국가의 통치 시스템을 소수 부유층의 손아귀에서 빼내 대다수 대중 주권자들에게 되돌려주는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 위기의 심화만큼이나 중요한 혁명적 변화의 시간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새로운 기회이기도 합니다.(위기는 위험한 기회!)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 유년시절, 나는 또래 세대들 상당수가 그랬던 것처럼 정치적으로 좌파에 이끌렸다…우리들 가운데 상당수는 현실의 자본주의를 진정 미래가 없는, 일종의 죽어가는 체제라고 여겼다. 끔찍하고 흉악한 빈곤을 양산할 뿐 아니라 민주주의 가치나 실천과 모순된 게 바로 자본주의라는 생각이었다.
오늘날 미국 자본주의의 전성기에 존재하는 엄청난 사회적 불평등, 오늘날에는 찾아보기 너무나 힘든 희망이라는게 그때(72년 무렵)는 존재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가장 특별하고 중대한 발전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디지털 혁명을, 오늘날의 가장 중요한 위기들과 연결시켜 고찰하려는 이 책은 바로 이러한 패러독스에서 비롯되었다.
사안들이 너무나 빠르게 변모하고 또 예측이 불가능해져 인터넷을 파악하는 일은 마치 폭풍우 속에서 움직이는 표적을 맞추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수많은 대중적 논의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인터넷과 그 잠재성에 관한 현재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내 주장의 핵심은 이렇다. 무엇보다 인터넷에 관한 대다수 비평가들의 이야기가 정치경제에 제대로 천착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을 주조하고 길들이는 자본주의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본주의를 언급할 때 흔히 ‘자유시장’이라는 표현을 대신 사용해버린다. 자애롭게 주어진 것을 뜻하고 민주주의의 동의어처럼 쓰는 몹쓸 단어이다.
자본주의를 둘러싼 이런저런 토론은 이런 상투어들로 가득 찬 말의 성찬으로 끝나 버리기 일쑤다. 그래서 실제로 펼쳐지고 있는 자본주의와 거의 연관성을 갖지 못한다.
만약 지금부터 펼쳐 나갈 이야기로부터 끌어내야 할 결론 또는 ‘디지털 혁명’ 자체에서 얻어 낼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1968년 5월 내걸린 저 유명한 슬로건만큼 분명한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현실적이면서도,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디지털이라는 방 안에 있는 코끼리
인터넷과 연관된 온갖 문제들, 탁월한 미국 사회과학의 전통에 따라 분리 규정하고 조사한 엄청난 많은 학문적 성과들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 주로 특정 유형의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학문적 목적을 위해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을 활용하는지 따위의 미시적인 이슈에 초점 마주고 있다.
이런 연구 조사는 사회 내 인터넷의 폭넓은 역할에 관해 좀 더 폭넓은 주장을 내놓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제도적 문제점이나 구조에 관한 문제 제기를 무시하는 측면도 있다.
‘인지과잉’, ‘지식과잉, 통찰부재’
“쓸데없는 낭비나 다름없는 텔레비전을 아무리 오래 시청한들 아인슈타인의 업적에 버금할 만한 뭔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모두 네트워크하고 그들에게 몇 초씩 위키의 물리학 관련 지식에 기여하도록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위대한 한 물리학자는 커녕 이류 물리학가 한 명이 이룬 업적을 결코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인터넷 패러독스?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바로 지금의 세상만큼 우리가 서로 더 많이 분리된 채 더 많이 외로움을 탄 적은 결코 없었다.”
평등보다는 오히려 승자독식, 독점을 부추기는 디지털 혁명? (구글,애플,페이스북…새로운 인터넷 제국들…제로투원,독점만이 디지털기업의 생존전략이다?)
“만약 소득과 부, 경제적 지위가 모두 정치의 자원이 된다면, 그리고 이 모든 게 불평등하게 배분되어 있다며 어찌 모든 시민이 정치적으로 평등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만약 시민들이 정치적으로 평등할 수가 없다는, 도대체 민주주의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노트북, 아이팟,킨들, 스마튼폰을 들고 해변으로 달려가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된 것인가?
안타깝게도, 여전히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남아 있다. 자본주의 체제가 그런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의미 있는 증거가 거의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해 단 하나의 증거도 없다.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누가 봐고 심각한 위기 상태에 와 있고, 새로운 디지털 점성술의 시대로 돌입하는 중이라는 증거는 티끌만큼도 없다.
현실에서 인터넷이 자본주의를 녹색의 민주적이고 사회주의인 유토피아가 되도록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게 지금부터 내가 주장할 핵심 내용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동격이 아니다
#벼랑 끝에 몰린 자본주의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과 인터넷
#공룡들은 어디를 배회하고 있는가
#인터넷과 자본주의, 국가
저작권처럼, 특허권도 창의성의 기반이 된 것만큼이나 그 저해 요인이 되어 온 것은 마찬가지다( 특허전쟁, 공유경제의 얼굴로 가려진 독점경제의 시대)
“좀 더 강력한 지적 재산권 보호가 좀 더 많은 혁신으로 이어질 거라는 믿음은 명백히 잘못된 것 같다.”
클라우드 컴퓨팅은 진입 장벽이라고 볼 수 있는 상당한 자본 지출이 필요한 탓에, 결국은 과점이나 독점으로 귀결되고 만다.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그렇지만 몇 가지는 이미 벌써 명료하고도 확실해졌다. 인터넷이 개인들에게 권력을 가져다주고 이들을 디지털 시대의 주인으로 만들 거라는 1990년 대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사람들이 전 지구적으로 공유된 인류의 행복을 위해 합세할 것이라는 생각도 한참 거리가 먼 기억일 뿐이다.
“인터넷이 이렇게 재미없어진 것은 참으로 고약한 일이다.” 래니어가 한탄했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대개는 좀 더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가져다주지만, 인터넷은 동시에 모든 것, 심지어 우리의 감각적 장치 그 자체를 상업화시켜 버렸다.”
#저널리즘의 운명
#’디지털 혁명’은 과연 혁명인가
우리가 선택한 발전 방식이 곧 우리 사회의 모양새를 규정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정책에 관한 논의가 과연 존재하는지, 실제 논의되는 내용은 대체 무엇인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 업계의 신문에 간간이 흘러나오는 소식을 제외하고는, 이들 주제에 관한 뉴스가 효과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탓이다!
자본주의는 필요한 수단을 갖고 수익을 무한히 만들어 내는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이러한 근본적 문제가 다름 아닌 자본주의에 고유한 것이라는 사실은, ‘로더데일 패러독스‘라는 이름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다….로더데일은 공적인 부와 사적인 부 사이에 부정적인 상관관계가 존재하기에, 사적인 부가 증대되면 공적인 부가 감소된다고 주장했다.
어떤 것이 교환 관계를 통해 가치를 획득하고 사적인 부를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희소성이 필수적이다.
생태주의자들은 로더데일 패러독스를 다음과 같은 현실 이해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한 나라의 GDP와 수익성을 노린 투자 성장이 실제로는 사회적 복리의 하락을 불러올 수 있다. 실제로 자본가들은 수익을 창출할 새로운 부문을 끊임없이 찾아내며, 여태 풍족했던 사회적 자원을 희소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인터넷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인터넷상의 정보는 사실상 거의 공짜인데, 상업적인 이해관계가 그것을 희소한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이들의 성공에 따라 GDP는 올라가겠지만 사회는 더욱 가난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이익의 사유화 비용의 사회화)
경제와 마찬가지로 미국 정치 시스템에도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느낌이 널리 퍼져 나갔다. 잘못된 경제 시스템을 고치지 않고, 정치 시스템은 오히려 그 실패를 강화시켜 왔기 때문이다.
인간 발전과 계몽의 엄청난 잠재성이 현실의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얼마나 실현이 되었던가? 스티글리츠는 최근에 자신의 고향 인디애나 주의 개리 시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커다란 철강 공장들 가운데 한 곳의 생산량이 100년 전과 똑같지만, 일하는 노동자는 그때의 6분의 1정도 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사람을 위한 기술?)
왜 자본가들이 이토록 많은 권력을 갖게 되었는가? 정부에 대한 자신들의 통제력과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배적인 위치를 어떤 식으로든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한, 부유층과 기업들은 국가 정책이 주도하는 성장 경제보다는 정체된 불황 경제를 선호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회 질서를 상상하고 좀 더 평등한 제도는 어떠한 모습일지 그려 볼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