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학교는 불행한가. 전성은. p213
한 국가의 학교교육은 국가가 기획하고 실행하여 생겨난 결과다.
국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국가 주도로 이루어지는 ‘인재양성교육’에는 반대한다. 학교나 국가는 본질적으로 ‘학생이라는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기관이라고 생각한다.
나라의 목적은 자유·평등·주체다. 국가의 목적은 나라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국가의 구성원이 모두 평등하게 자유를 누리며 자신의 가치를 최고로 실현시킬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일이다…군사력과 경제력을 길러 남의 나라 위에 군림하여 불평등한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것을 국가의 목표로 하는 국가, 곧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는 제국주의 국가다.
#’생각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
바른 생각은 과거를 돌아보는 일에서 가능하게 된다…과거를 돌아보지 않는 민족은 망한다. 민족이나 국가가 당면한 문제는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모두 다 반드시 과거로부터 내려온 잘못이 쌓여서 나타난 현상이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학교교육의 역사를 돌아보고 거기에서 원인을 찾아내지 않으면, 병의 증상만 보는 꼴이다.
환자도 증상은 안다.
의사와 환자의 차이는 원인을 찾아낼 줄 안다는 점이다. 우리 교육의 증상을 모르는 국민은 없다. 길 가는 아주머니, 학생, 회사원,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라.
입장에 따라 교육 문제 진단 달라….인성 대신 인격, 도덕, 윤리, 사람 되는…다른 표현들이 있지만 다 똑같은 진단이다. 환자들이기 때문이다.
증상은 의사보다 환자가 더 잘 안다.
교육부는 학부형들과 교사들이 문제다. 모두 자기들은 아니다.
교육혁신위원장으로 있을 당시 대학입시제도 개선을 위한 의견 수렴을 위한 수많은 회합과 토론회, 서로 다른 의견들? 그 이유는 각기 인간을 보는 눈이 다르고 따라서 학교교육의 목적에 대한 생각이 다른 데 그 원인이 있었다. 그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인간관과 학교교육 목적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세계관과 인생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몰라서 그런 것 같다. 스스로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게 되고 한번 주장해버리면 그걸 스스로 ‘절대’라고 믿게 되는 경향이 있다. 필자가 만나본 교육부 장관들, 각 정당의 교육 분과위원들 가운데 가장 고집이 센 사람들은 교육학을 전공하지 않은 장관과 국회의원들이었다.
그들은 대화가 되지 않았다.
이미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절대화하고 있었다. 다른 의견은 듣고 싶어 하지조차 않았다. 다른 의견을 듣고, 한 번쯤 자기의 생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았다…의사가 먼저 결론을 정해놓고 병의 원인을 진단한다면 어떻게 될까, 반성하지 않는 민족은 망한다.
과거를 돌아보고 교육 문제 진단해야. 첫째. 입장을 떠나자. 가능한 객관적으로 문제를 보자…눈(해석)만 사심 없이 바르게 뜨고 보면 보인다. 둘째, 제도의 문제에 집중하자…여기서 말하는 제도는 한 조직을 형성하고 있는 권력의 구조를 말한다. 그 구조가 계급일 수 있다. 대부분의 조직은 계급적이다. 그러나 한 조직의 권력 구조가 역할을 분담하는 보완적 관계인 조직도 있을 수 있다. 이를 민주적 제도라고 생각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나 인간을 지배하는 어떤 힘이 있다. 그것을 이기주의라는 힘이다…이기심을 전제로 한 채 가능한 답을 찾아보자…그 이기심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는 제도, 즉 이상적인 학교교육 제도를 찾아보자.
제도가 좀 나빠도 인간성이 바로 되어 있으면 괜챦다. 인간이 제도를 지배하기 때문에 인간성이 먼저다? 이는 제도라는 환경은 인간이 만든 산물일 뿐 기후와 같은 자연적 환경이 아니라는 사실을 구별하지 못한 데서 나온 생각이다.
인간성이 좋다? 나쁜 제도 밑에서 신음하는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말.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잘못된 제도를 고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민족이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인간성이 바로 된 사람이다…독립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해서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일본의 지배를 도운 사람은 아니다.
학교교육의 지향점은 평화.
이 책은 논문도 연구서도 아니다. 그냥 학교교육을, 우리나라의 학교교육뿐 아니라 온 세계 인류의 학교교육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사람들과 함께 생각하며 더 좋은 학교교육 제도를 찾아 함께 길을 가자는 초청이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지 않는 학문과 지식은 장님이 되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학문은 덫이 된다. 뒤를 돌아보고 앞을 향할 때만 진리가 된다.
나는 순수라는 말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살아왔다. 순수 음악, 순수 미술, 순수 문학.,,,내가 자라온 세월은 순수라는 이름 아래 인간과 인류의 고통을 외면하는 음악, 미술, 문학, 시,…이런 것들이 잘 팔리는, 어두운 세월이었다. 특히 내가 자라온 기독교 교회들은 순수 복음, 순수 신앙이라는 가면 속에서 온갖 불의, 독재, 전쟁, 기아, 자본의 기만과 착취를 눈감아주는 대가로 정통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내겐 생명보다 소중한 예수의 진리를 팔아 부자가 되는, ‘예수 십자가 처형’을 지켜보며 살아왔다. 너무도 슬픈 세월이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순수라는 말만 들으면 섬뜩해진다.
정치, 경제, 문화와 무관한 순수 교육학은 성립될 수 없다. 그건 사기다.
학교교육은 사회의 외딴섬이 아니다. 한 국가의 정치와 상관이 없는 학교교육은 있을 수 없다…학교교육은 국가가 기획하고 집행하여 생겨난 산물이다.
전영창 교장선생님과 원경선 이사장님 두분이 학교 문제를 가지고 의논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게 되었다…그분들에겐 언제나 ‘예수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가 기준이었다…그동안 일반 학교가 겪지 않는 일들을 참 많이도 겪었다.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고 하는 표현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특히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정권 아래에서 겪은 경험들이 학교교육에 대한 지금의 생각을 낳았다!
전영창 교장선생님에게서는 모든 아이들은 평등하다. 어떤 아이도 온 천하보다 귀하지 않은 아이는 없다는 것을 20년 동안 배웠고, 홍종만 교감선생님에게선 자율의 중요성을 10년 동안 배웠다. 그리고 나의 성서 선생님인 원경선 이사장님에게선 평화를 40년 동안 듣고 배웠다.
여시아문(如是我聞. 듣고 본 것을 그대로 믿고 따라서 기록한다) 그래서 이 책은 학문적이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이 책은 그 세분의 학교교육론이라 하겠다…이 책에 나오는 내용은 모두 앞선 분들한테 들어서 배운 것들이다. 내가 생각해낸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앞으로 다른 분들이 써주기를 바라는 책은 국가와 학교교육, 정치와 학교교육, 경제와 학교교육에 관련된 책들이다. 학교교육은 다른 분야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될 때 비로소 정확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란 무엇인가
학교는 필요와 목적, 운영에 있어서 그 출발부터 철저하게 통치 집단에 의한, 통치 집단을 위한, 통치 집단의 기관이었을 뿐 아이들을 위한 기관은 아니었다. 좋고 나쁘고의 문제를 넘어서 사실이 그러하다.
#학교는 어떻게 태어나고 자라왔는가
고위 관료 양성 교육이 국가의 목적. 사제, 고급관료, 장교 처럼 필요한 사람(인재)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이 필요했고, 이 교육은 왕이 독점했다…학교교육의 시작은 이러한 이유로 국립으로 시작되었다.
서울대학교의 전신은 경성제국대학. 이공계와 의대는 나중에. 그 이유는 조선을 통치하는 데 부려먹을 조선인 법조인은 필요했으나 이공계 기술은 나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 도에는 공업고등학교를 세워 공장에서 부려먹을 하급 기술자만 양성했다.
과연 이 대학은 누구를 위해 세운 대학인가. 일본이 식민통치 수단의 하나로 경성대학을 세웠다…서울대의 기원은 진리 탐구가 아니었다. 조선 통치를 위한 보조 수단이었다. 경성대 법과대학 출신들이 일본 총독부와 법원의 관료가 되어 한 일은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일이었지, 친일파를 잡아들여 감옥에 보내는 일을 했던 게 아니었다.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김남주, 『어떤 관료』
철저히 국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학교
아이들을 사랑해서, 무지로부터 해방시켜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려는 배려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학교는 필요와 목적, 운영에 있어 출발부터 철저하게 통치 집단에 의한, 통치 집단을 위한, 통치 집단의 기관이었을 뿐 아이들을 위한 기관이 아니었다. 좋고 나쁘고의 문제를 넘어서 사실이 그러하다.
우리나라의 신교육. 남존여비, 충과 효라는 이름으로 지배계급에 철저히 복종하는 것만을 가르쳤다
일제. 그들은 아예 학교를 세우면서 교육령에 그 교육 목적을 “충량한 황국민을 양성한다”라고 명문화했다. ..일본 사람으로 키워서 부려먹기 좋게 하기 위해 1면1소학교 정책을 시행한 것이다.
1군에 농림고등학교 하나씩 세운다. 물론 명목은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그러나 실제 목적은 소위 면서기, 군서기라고 부르던 하급 관리 양성을 목적으로 한 학교였다. 시골에서 좀 똑똑하다 싶은 아이들을 키워서 하급관리로 써먹으면 일본의 통치에 저항하는 대신에 거꾸로 일본에 협력하는 세력이 되니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공무원들? 일제 강점기 때부터의 습성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범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 사항? 내신(secret letter)? 비밀추천서? ‘이 학생은 절대로 독립사상을 가르칠 염려가 없는 학생’이라는 일본에 대한 충성 보증서. 왜 그 자랑스럽지도 못한 용어를 ‘내신 성적’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19~20세기 학교의 역사는 자국에 세워진 학교나 식민지에 세워진 학교나 모두 학교교육의 목적이 진리 탐구가 아님을 보여준다. 자국에서든 식민지에서든 국가가 필요로 하는 직업에 부려먹기 편한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인적자본’이나 ‘인적자원’? 다 그게 그 말이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사람을 자본 원료로, 경제 개념으로 보는 것은 똑같다.
박정희의 ‘교육입국’? 자유와 정의 위에 나라를 바로 세우자는 뜻이 아니다. 학교가 국가의 경제발전계획에 필요한 직업군을 길러내는 일을 하자는 뜻. 그들을 산업전사라고 불렀다. 결국 산업전사를 길러내자는 게 교육입국이라는 구호의 실체였다.
국가는 한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21세기에 들아와서도 학교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직업군의 사람을 길러내는 일을 하고 있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교육을 하는 곳이 아니다.
부처와 예수의 가르침. 인간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다
인간은 역사 속의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다는 인간관 위에 학교교육이 행해져야 한다.
아이들은 학교교육이 섬겨야 할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다. 국가보다, 종교보다, 그 어떤 가치 체계보다도 소중한 가치 초월적 존재다. 신도 섬긴 존재다. 이러한 교육적 인간관 위에 학교교육 행위가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의 학교교육 정책과 학교의 성격은 무엇인가
20세기의 경제, 정치, 사회가 법률적 평등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학교의 기능은 국가 지배 계층의 유지 및 강화를 위해 필요한 인재를 길러내던 일에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일로 바뀌었다.
페스탈로치 같은 교성(敎聖)이라고 불리는 분들이, 학교의 기능이 교육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면서, 이를 실천하여 교육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보여주었지만, 그러한 분들의 가르침이 한 국가의 교육정책이 되지는 못했다.
교육의 기능이 어떻게 목적이 되었나.
상류사회가 가진 돈과 사회를 지배라는 힘이 크면 클수록 학교교육의 제도와 정책과 운영을 상류사회에 더 유리하게 만들 수 있다. 그들은 정치, 경제는 물론 여론과 학문까지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학교교육이 사회적 불평등을 고착화시키고 강화하는 기능을 하게 된 원인이 여기에 있다.
인재 양성? 잘난 사람은 못난 사람보다 더 많은 돈과 힘이라는 보상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데올로기를 보편화하고 상식화한다…이렇게 해서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는 본인 개인들이 하기 나름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된다.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진다.
결국 과거의 신분에 다른 계급이 하늘이 정한 질서라는 카스트 이데올로기가 능력에 따른 사회적 보상의 질서라는 능력 이데올로기로 대치되었을 뿐이다.
모순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는 무력을 바탕으로 한 강압적 통제가 필수적이고, 그 힘으로 유지하는 모순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그 이데올로기는 종교와 도덕의 옷을 입는다. 그리고 언제나 ‘국익’이라는 명분이 법적 정의로서 종교와 도덕보다 더 높은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기독교 국가도 불교 국가도 이슬람 국가도 모두 국익을 위해서 전쟁을 한다고 하면 아무 말도 못할 뿐 아니라 ‘국익’을 위해서라며 기도까지 해준다.
경쟁심만 키우는 학교교육 문화가 문제.
20세기 이후 세계의 모든 국가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나, 아직도 학교교육정책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통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학교교육에 대한 민주화 수준…그 국가의 정치 민주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경쟁은 시합과 다르다. 경쟁은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다. 시합은 비길 수도 있다. 모든 스포츠가 자본의 상품이 되면서 시합이 경쟁으로 변해버린 모습을 본다…우리말 달인을 뽑는 프로그램. 시합 출연한 사람 모두가 우리말 실력이 일취월장한다. 그것은 경쟁이 아닌 시합이기 때문이다. 경쟁은 승자가 이득을 독차지한다.
경쟁의 학교교육정책을 유지하는 수단? 설립의 허가제/ 교과서 독점/ 교육과정 독점/ 평가 독점
국가에 따라 조금 다르기는 하나 교육 선진국에서는 거의 다 위의 네 가지 독점권을 내놓았다(『덴마크 자유교육』)
교과서의 내용을 독점한다는 것은 곧 정답을 독점한다는 것이다…정답의 독점은 암기식 수업을 낳고 암기식 수업은 주입식 교습 방법을 가져온다. 주입식 수업은 교사의 학생에 대한 지배권위를 필요로 하고 학생에 대한 교사의 권위주의는 상명하복의 학교 문화를 만든다. 상명하복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낳으며 악순환을 되풀이한다. 이 악순환의 되풀이는 통치 집단에게 절대로 유리한 문화다.
‘정답의 문화’는 스스로 알아보고 비교해본 뒤 내린 결론이 아님에도 신문과 TV에서 아나운서가 말한 내용을 마치 자기가 연구해서 알아낸 결론인 것처럼 믿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의견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가지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남에게 강요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에겐 공격적인 되는 문화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정당이 여러 번 바뀌어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항상 여당만 지지하게 된다. 통치 집단이 곧 정답이니까. 그리고 그것이 살아가는 데 편리하니까. 그렇게 해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문화다. 통치 집단이 제일 좋아하는 문화다.
인류의 문화 자체가 섬기는 문화가 아니고 제국주의 문화, 곧 목숨을 건 경쟁의 문화인데 어찌 학교교육만이 홀로 섬기는 문화를 실천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흐름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적어도 종교와 더불어 교육은 문화의 방향을 바꾸어 평등, 자유, 공존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의 선두에 서야 한다.
#학교교육 이념에 대한 두 가지 신화
인재 양성론의 허구. 조선총독부의 학부 책임자의 비난?
“한국에서 사립학교들(조선 사람이 세운 학교)이 잘못하고 있는 것은 정치 교육에 몰두하는 것이다. 교육과 정치를 혼동하면 안 된다. 앞으로 철저히 단속하겠다.”
자기들이 세운 공립학교들이 ‘충량한 황국민’을 길러내는 것은 정치적이 아니고 교육적이고, 조선인이 조선을 사랑하는 사람을 기르는 것은 정치적이라는 주장이다..이러한 억지는 수천 년 동안 통치 세역이 저항 세력에게 휘두른 칼의 논리다. ‘승자는 정의고 패자는 악’이라는 논리다. 영국이 인도에서, 미국이 필리핀에서, 일본이 조선에서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지배국을 위한 인재 양성은 교육적이고, 피지배국을 위한 인재 양성은 정치적이었다. 그것은 힘의 논리이지 교육의 논리는 아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언제나 국가 통치 집단이 길러낸다는 인재는 인재가 아니었다. 과거 군사독재 정부 시절에도 그랬다. 박정희 찬양 교육은 교육적이고, 민주주의 하자는 교육은 정치 행위였다. 박정희나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는 문학이었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였다…기독교 지도자들이 필자에게 한 충고는 교육만 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정치문제는 관여하거나 학생들에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바로 그분들이 김영삼 씨와 이명박 씨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서며 ‘장로 대통령 만들자’는 기치를 내걸고 설교 석상에서,…모든 기독교인들이 아는 일이다…다만 슬픈 것은 자기들이 특정인을 대통령으로 지지하는 것은 기독교 복음에 위배되지 않고, 군사독재 시절 민주주의 하자고 했던 것을 정치적이고 비복음적이라고 비난했던 것은 철저히 망각하는 모순이다. 그것은 2천년 전 예수를 죽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논리와 똑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된 논리는 역사 속에서 언제나 진리를 죽일 때 휘두른 논리이다.
통치 계급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정의이고, 거기에 저항하가 위한 인재 양성은 불의라는 주장은 힘을 가진 사람의 억지 논리다. 이건 교육의 논리가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거나 회복하기 위한 평등과 자유를 위해 일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일이 교육적이다.
교육의 목적은 인류 평화다.
지배와 억압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일이 교육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 정의다. 불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은 반역사적인 불의다.
허상뿐이 도덕교육론. 안식일 장애인을 고쳐준 예수를 비난. 이에 대해 예수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선언으로 유대사회의 도덕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분명히 밝힌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삼강오륜. 임금님과 아버지와 남자와 어른을 위한 도덕이다. 신하와 아들과 여자와 어린아이에게는 지켜야 하는 도덕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왕을 위한 도덕이다. 백성을 위한 도덕이 아니다.
인도의 카스트제도. 간디는 카스트에 들지 못하는 최하층 계층의 사람들까지 동등한 국민이라고 가르쳤다. 왕도 불가촉천민도 모두 평등하다는 말이다. 간디가 틀렸는가. 그가 틀리지 않았기 때문에 노벨상을 주지 않았나.
학교교육에서 수천 년 전부터 해온 도덕교육은 통치집단의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도덕을 절대 가치라고 가르치는 일이었다. 식민지 학교에서의 질서 교육은 지배국의 법에 복종하는 것…결국 ‘질서는 복종이다’로 귀결된다.
획일화된 교훈? 이는 우연이 아니다!
oo산 정기 받고/ oo강 끼고/ oo들 끼고 돌아/ 청운의 꿈을 펼치자
교가도 독립 정신을 기르는 가사들 대신. 이런 식으로 정형화시켰다. 정의,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인류 보편적 가치를 노래하지 못하도록 교가의 낭만화를 실시한 것이다.
교훈도 교가도 우연히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해방 후에도 그런 교가와 교훈이 계속되어 온 것은 우리 학교교육 정책을 총괄해온 교육부와 학교교육의 지도급 인사들이 얼마나 교육에 대하여 무지했던가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교육의 속내를 알면서도 자유당 정권의 시녀 역할을 하는 수단으로 학교교육을 삼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우리 대통령 이승만’ 글짓기 대회!)
우리나라 군사독재 시절의 중3 도덕교과서 첫머리는 이런 말로 시작된다?
“자유는 혼란과 무질서를 가져오기 때문에 강력한 통제가 안녕과 질서를 가져온다.”
학교교육에서 인격이 길러질 수 있을까. 2차 대전을 겪고 나서 자기 나라가 저지른 범죄행위에 경악하여, 독일의 양식 있는 신학자와 철학자, 교육학자들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참된 인격의 변화는 어떤 ‘만남’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큰 인격과의 만남에서 인격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 만남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 공식은 없다. 언제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격의 만남은 반드시 발생한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예수와 인격적으로 만나 예수의 뒤를 따라 예수처럼 산 사람은 그 수가 적다. 부처를 만난 사람은 많다. 그러나 부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은 소수다. 이 만남은 신비다. 그러나 분명히 일어났다…만남은 사건이다. 관념의 전달이 아니다. 그래서 만남이 교육에 선행한다는 명제가 태어났다.
학교는 사회의 상식에 순응하여 그 사회의 기준에 맞춰 성공하는 개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학교는 보다 자유롭고 평등하며,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재능과 관심을 최대한 발휘하고 즐기며 사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곳이어야 한다. 국가는 사회의 상식에 맞서 학교가 그러한 곳이 되도록 돕는 일을 해야 한다.
삼청교육대 2명 배정? 거창고에서는 보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30년 전의 삼청교육대는 그렇다 치고 지금의 학교는 얼마나 달라졌나. 얼마나 좋아졌나. 2011년 대치동과 목동, 중계동 같은 사교육 특구에서 부모들과 학생들을 붙잡고 학교교육이 평화를 추구하는 풍토를 만드는 데 얼마나 기여하고 있느냐 물어보자. 나는 학교교육이 30년 전보다 더 경쟁을 부추기고 있으며, 오히려 더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학교교육의 목적
학교교육의 목적은 평화여야 한다.
교육은 평화를 위한 목적 이외의 어떤 목적으로도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21세기 학교교육은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이해관계로 인한 대립이 있는 곳에 타협과 화해를 삼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평화는 교육의 목표
학교교육과 교육은 분명 다르다
백인들은 북아메리카의 토착민을 말살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말살한 것은 평화였다. 유럽의 평화를 끝장낸 로마의 문명이 북아메리카로 건너가,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평화를 끝장내버리고 만 것이다. 그것이 지금 미국의 기원이며 본모습니다.
증오는 이데올로기 교육이자 세뇌교육. “교장 선생님, 지구상 마지막 악마의 도성인 아랍에 선교사로 가기로 결단했습니다.” “부산에 악마의 세력이 나타났습니다”? “이슬람교가 드디어 들어왔습니다.” 그 졸업생을 가르친 성경 교사가 누구든, 그 후배 목사를 가르친 신학교가 어떤 신학교든, 그 신학 혹은 성경공부는 이데올로기 교육이지 신학이나 신앙교육이 아니다. 신앙이 조직 종교가 되어 이데올로기 세뇌 교육을 한 것이다.
교육은 그 어떤 상대도 악의 축이라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 굳이 악의 축이 있다면, 누구든지 자기와 다른 상대방을 악의 축이라고 믿는 사람이나 국가, 종교, 이념 집단이 오히려 악의 축이다. 악의 축이라도 싹 쓸어버려야 한다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 설령 악의 축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악의 축은 기도해야 할 대상이지 쓸어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다.
교육이 해야 할 일, 곧 교육이 하는 일의 목표는 언제나 평화여야 한다. 교육이 해야 하는 역할은 세상의 평화를 증진시키는 일이어야 한다.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을 빌려 교육의 목적을 표현해보자.
#학교교육에서의 평화는 무엇인가
평화는 평등, 자유, 공존의 세상
언제나 존중받아야 할 인간의 존엄성
“너희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선한 사람만 살아남고 악한 사람은 다 죽어야 한다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예수, 부처,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신앙도, 리영희와 간디와 안중근의 사상과 신안, 신념 모두 인류가 찾아낸 소중한 정신적 유산이다. 그러나 모두 인간을 위해 봉사할 때만 소중한 가치가 된다. 인간을 지배할 때에는 악의 도구가 된다…다르다고 죽이는 시대는 빨리 끝나야 한다. 하물며 국가의 법은 절대 가치가 아니다.
주체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영국의 수상 글래드스턴. “수단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면 100퍼센트 떨어집니다..”, ”국민을 속이고 당선되느니, 정직하게 말하고 떨어지는 게 옳소. 나는 옳은 길을 가겠소.”
결국 이 말 때문에 그는 선거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자신의 삶을 산 사람이다. 남의 삶을 산 정치가가 아니다. 자신의 인격을 살아낸 사람이다…그런 사람은 여론에 따라 살지 않는다.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 산 사람이다. 그런 삶을 주체적인 삶이라고 한다.
여론은 여론일 뿐 정의가 아니다. 여론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상식일 따름. 화폐처럼 그 시대에만 통용될 뿐이다. 당시를 산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혜롭다고 믿는 삶의 방식이다. 옳을 때가 어쩌다 있을 수 있으나, 대부분은 옳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남의 의견에 따라 살아간다. 남의 눈을 의식하고 살아간다.
문화는 다를 뿐, 우열로 나누면 안 된다
인간의 존재 조건이 자유라면, 인격의 존재 조건은 경제적 독립이다…받지 말아야 할 도움이나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될 사람에게 받는 도움은 독약이다.
1990년 교원노조 결성. 교육부의 ‘교원노조 가입 교사 파면시켜라’ 지시 거부. 협조하면 5천만 원 지원해주겠다. 제안을 받은 원경선 이사장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교육감님, 교사를 파면시키는 일은 장사가 아닙니다. 흥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교육감님도 저도 장사꾼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교육감님 산하에 철저한 신념을 가진 학교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날이 올 것입니다. 5천만 원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합시다.”
받아서는 안 될 돈을 받으면 죽는다. 개인도 죽고, 학교도 죽고, 국가도 죽고, 종교도 죽는다. 신앙도 죽고, 인격도 죽고, 문화도 죽는다.
경제적 독립은 주체적 삶의 조건인 것이다.
온 국민의 과거시험 준비는 그만둬야.
우리의 현실은 사회, 문화적 풍토 때문에 누구나 일단은 대학에 가고 보자는 식이다.
지금 우리 학교교육의 현실은 아이들이 한 인간으로 태어나 자신의 재능과 소질에 따라, 또 관심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데 최대의 장애가 되고 있다.
이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현실을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이상을 현실로 끌어내리면 발전할 수 없다.
##평화를 위한 학교교육 제도
제도는 분권, 행정은 자치로
#교육 행정은 ‘평등과 자율’
평화를 목적으로 삼는 학교교육을 위해 국가의 교육정책은 어떠해야 하나? 교육행정은 어떤 원칙이 필요한가? 그 답은 ‘평등과 자율’이다.
구조가 평등하지 않으면 ‘평등한 인간 교육’이 나올 수 없다.
부국강병은 구시대적 목표, 통치 집단을 위한 목표다. 희생은 백성이 하고 열매는 통치 집단에게 돌아가는 왕조국가의 목표다…재벌 그룹 CEO 출신인 대통령도 인정하다시피 양극화가 심해지고 대기업과 부자들만 더 부유해지는 게 현실. 경제 제일주의, 부국강병, 수정 없는 세계화는 고의적이거나 아니면 천박한 사고에서 나온 발상이다. 상류사회를 위한 발상이다.
제도의 개선으로 해야 하는 이유? 법으로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정치가들? 아마도 법을 제정하는 일이, 제도를 바꾸는 일보다 쉽기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 같은 정치가들은 자신의 임기 내에 무엇이라고 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다(그렇다면 정치로는 제도를 바꿀 수 없는가??)
교육제도 개선? 제도 문제를 거론하면 교육부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세상의 어느 집단이 존재의 위협을 받고 싶어 하겠는가!
학교교육의 혁명적 개혁은 법만으로는 부족하다. 법의 기본 성격상, 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은 운영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그 법의 취지와 다르게 운영될 소지가 언제나 있다. 교묘한 악용, 법망을 빠져나갈 방법은 항상 있다.
살인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이 세 가지 법은 최소 3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법들이 지켜지기는 커녕 위법 기술만 발달시킨 꼴이 되고 말았다…그것으로는 모든 범죄를 막지는 못한다.(제도가 필요하다!)
학교교육의 혁신을 위해서는 단연 제도 개혁이 우선이다. 왕조 시대에 비하여 국가의 통제에서 멀어진 것은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힘의 관계가 제도적으로 변화한 덕이었다.
#학교교육의 운영 원칙
학교는 통제보다 자율권 보장이 중요하다
1980년 광주민주항쟁 때의 일. 광주를 두루 살피고 온 원경선 이사장님의 전체 보고 회의.
“즉각 진실을 학생들에게 알려라. 학교가 죽더라도 교육이 살아야 한다. 학교가 살자고 교육을 죽이면 안 된다. 국가가 국민에게 거짓말을 할 때, 학교는 학생들에게 사실을 알려야 할 책임이 있다. 검은 것은 검다 하고 흰 것은 희다고 말하는 게 교육이다.”
이것이 바로 학교교육의 목적을 평화로 삼는 학교 이사회의 의무다.
##교사의 길, 학생의 길
교사가 학생을 만나는 길은, 교사가 학생의 삶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학생의 참된 이익(인격적, 정신적, 내적)을 위해 교육 활동을 할 때다. 그 학생 하나의 인격을 최우선으로 할 때 진정한 만남이 일어날 수 있다.
#교육에서 사랑이란 무엇인가
교사와 학생의 만남은 인연이다
교사의 사랑?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목숨을 건 노력의 산물이다. 사랑은 소유가 아닌 섬김이다.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인연이다(부처는 인연, 예수는 신의 섭리라고 한다)
교사와 학생의 진정한 만남을 위한 선결과제
사상, 신앙을 주입하지 않아야 한다. 사상이나 신앙을 주입하는 것을 세뇌 교육이라고 한다. 좋은 사상이나 신앙일수록 인격적 만남을 통해 전달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살아 있는 사상과 신앙이 된다. 사상과 신앙은 개인 안에서 자라나 좋은 열매를 맺는다….그러나 주입된 사상과 신앙은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해도 죽은 것이다. 따라서 자라지 않는다. 이런 사상과 신앙은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수록 이데올로기로 화석처럼 굳어진다. 그래서 죽음의 열매를 맺는다. 자기의 사상과 신앙,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우상화시켜 다른 사상, 신앙, 가치를 모두 없애야 한다는 오만과 편견의 노예가 된다.
끊임없이 전문성을 길러야 한다. 검은 것을 희다 하고 흰 것을 검다고 하는 교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역사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여러 분야에 대한 꾸준한 독서가 필요하다…문제들을 보는 시각을 길러야 한다. 특히 민주주의, 제국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에 대해서 명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검은 것을 희다 하고 흰 것을 검다고 가르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옳은 교육’을 위해서는 국가의 통제 벗어나야(덴마크의 자유교육)
1975년 겨울방학 때였다. 그날 밤은 평생 잊을 수 없다. 머리가 하얗게 센 전영창 교장선생님과 서너 명의 젊은 선생들이 사택 2층 서재에 모였다…
전영창 교장선생님, 홍종만 교감선생님, 원경선 이사장님 세 분 모두 교육학을 모르는 분들이었다.
전영창 교장선생님이 1956년 빚을 안고 학교를 인수하여, 기독교 인문계 고등학교를 시작한 첫해부터 저창고등학교가 걸어온 길은 ‘가시밭길’이었다….1961년 박정희 대통령이 ‘사립학교규제법’을 부활시킨 후로는 사사건건 교육행정기관과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사립학교규제법’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을 위한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된 사립학교들을 없애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다.
전영창 교장선생님의 비판 기준은 언제나 예수였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삼아 사회를 개혁해 나가애 우리나라가 바로 선다는 것이 평생의 신념이요, 신앙이었다.
그러던 중 1970년 초부터 파면, 재판, 복직, 유신을 겪어온 몇몇 교사들이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어차피 풍족한 생활은 바라지 않았던 교사들이었다. 그렇다면 원하는 교육이나 마음대로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가 있는 한, 국익이 정의인 국가가 있고 국가가 경제성장을 절대적 가치로 추구하는 한, 종교마저도 교세의 성장이 곧 예수의 성장인 줄로 착각하고 국가와 함께 발전과 성장을 신으로 섬기는 문화 속에서는 우리가 ‘옳은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교육을 할 수 없었다.
국가가 만들어준 교과서로, 국가가 만들어준 교육과정으로, 국가가 만들어 놓은 평가(입학시험) 방식으로, 국가가 강제하는 교육 활동을 통해서는 우리가 추구하는 교육을 할 수 없었다.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자.
자유로운 교육이 가능한 학교를 만들어보자.(덴마크 자유교육!) 학교 인가를 반납하자. 교과서와 교육과정도 우리가 만들자. 교육활동도 우리가 기획하자. 그러기 위해선 인가를 반납하고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수밖에 없다…그것이 결론이었다. 그날 밤 드디어 그 결론을 실천에 옮기기로 한 것이다.
한 달쯤 뒤에 다시 모였다. 처음 말을 꺼내 사람은 최경수 선생님이었다고 기억한다.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교육하는 학교는 홍성에 있는 풀무학교 하나면 되지 않느냐? 교육은 인격의 변화이고, 인격의 변화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또 하나님의 사업이라는 우리의 생각이 맞다면 둘 중 하나는 남아서 정규학교의 길을 가야 하지 않느냐? 아무리 국가의 통제가 심하고 국가가 만들어준 교과서와 교육과정대로 교육을 해도 그 속에서도 인격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증거를 보여줘야 하지 않느냐? 그 의무가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 아니냐? 우리나라를 위해서는 이념은 같으면서도 통제를 받지 않는 풀무학교와 우리처럼 통제를 받는 정규학교 둘 다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래야 국가의 통제를 받는 학교에서 교육받는 100만 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는 것 아닌가?”
특히 전영창 교장선생님은, 그날 밤 이후 무언가가 늘 마음에 걸렸었는데 그게 바로 그 문제였다고 했다. 100만 아이들의 문제.
이 책의 내용은 내 개인의 생각이 아니다. 거창고등학교, 샛별초등학교, 샛별중학교를 일으켜 세우신 전영창 교장선생님과 원경선 이사장님 두 분의 신앙과 교육에 대한 생각을, 때가 되어 세상에 알린 것뿐이다.
이 책의 내용을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은 『거창고등학교 이야기』, 『전영창 전집』1권, 전영창 설교집 『검은 보자기에 싸인 축복』, 원경선 이사장님의 『기독자의 궁극적 목적』을 구해 읽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