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세계를 약탈하는가 Stolen Harvest. 반다나 시바. p186
지난 20년 동안 나는 생태 운동가이자 유기적 지식인(organic intellectural)의 한사람으로서, 산업 경제에서 소위 “성장”이란 것이 사실은 자연과 사람들로부터 약탈임을 폭로하는 일에 참여해 왔다.
산업용 원료로 사용하기 위해 숲을 베어 내거나 자연림을 소나무와 유칼립투스를 재배하는 단일 재배로 전용하는 것은 확실히 소득과 성장을 보장한다. 그러나 이 성장은 숲으로부터 숲이 지닌 생물 다양성 및 토양과 물을 보존하는 능력을 빼앗는 데 기초한 것이다. 또 이 성장은 삼림 지역 공동체로부터 식량, 사료, 연료, 옷감, 약품의 공급원을 빼앗고, 홍수와 가뭄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지 못한다.
임업에서와 마찬가지로 농업에서도 성장에 대한 환상은 자연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약탈을 은폐하고, 빈곤의 생산을 성장으로 위장하고 있다. 이러한 약탈은 경제의 세계화와 더불어 가속화되고 있다.
GATT의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과 WTO의 창설은 자연과 인간으로부터 약탈한 수확에 기반을 둔 기업의 성장을 제도화하고 합법화했다. WTO의 무역 관련 지적재산권 협정은 종자 비축과 종자 공유를 불법화하고 있다. 농업에 관한 협정은 유전자 변형 식품을 각국에 판매하는 것을 합법화했고, 다양한 먹거리 체계(식품 체계)의 기초가 되는 생물학적 다양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보호하는 행위를 불법화시켰다.
1987년 닥 함마르시욀드 재단은 “생명의 법칙”…그 회의에서, 나는 저항을 통해서 그리고 창조적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이후 10년 동안의 나의 삶을 생명과 생물 자원의 독점을 방지하는 데 바치기로 결심했다.
첫번째 조치는 생물 다양성을 보호하고 독점적 통제로부터 종자와 농업을 지키기 위한 종자 비축 운동인 나브다냐 운동을 시작
거대 기업의 이윤을 창출하기 위하여 제3세계 가난한 사람들의 자원을 약탈하는 방법에는 WTO 규정에 의해 각국에 강요되고 있는 종자 특허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1988년 8월에 나는 콩기름의 강매로 인해 인도 식용유 경제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런 유형은 농업과 식품 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재연되고 있다. 여성 운동 단체와 농민 운동 단체는 자신들의 생계와 전통적인 음식 문화가 파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보조금을 받는 콩기름의 수입에 반대했다.
“몬산토, 인도를 떠나라”
이 책은 식량 체계와 농업 체계를 파괴하는 세계적 기업에 관한 이야기이자, 그러한 파괴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운동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진정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식량이라는 간단하고도 기본적인 것이 다면적이고 다양한 해방운동을 위한 공간이 되고 있다.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누구든지 그리고 어디서든지- 해방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세계 식량 공급의 강탈
식량은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이며, 바로 생명의 원료이다.
고대 인도의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태어나는 모든 것은 안나(anna식량)에서 태어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안나에서 태어나서 안나를 먹고살고, 종국에는 안나로 변한다. 안나야말로 모든 존재 가운데 맨 처음 생겨난 것이다.”
1943년 뱅갈 대기근, 350만 명 이상이 굶어죽었다. 식민지 수탈.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곡물 수출은 계속되었다…뱅갈 기근이 있은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새롭고 교묘한 체계가 그 자리에 들어서서 다시 한번 수확물의 수탈을 정당화하고 수확물을 지키는 행위를 범죄화하고 있다. 복잡한 자유 무역 조약들 뒤에는 자연의 수확과 종자의 수확 그리고 식량의 수확을 수탈하는 혁신적인 방법이 숨겨져 있다.
기업에 의한 식량과 농업의 강탈.
나는 식량에 대한 기업의 통제와 농업의 세계화가 어떻게 수백만 명의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생계와 식량에 대한 권리를 빼앗았는지를 인도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농민들은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변질되어 기업이 특허권을 소유한 농업 제품을 소비하고 있으며, 지방 시장과 국내 시장은 붕괴되는데 반해 세계 시장은 확대되고 있다. 이에 따라, “자유 무역”의 신화와 세계 경제는 부유한 나라가 가난한 나라의 식량권과 심지어 생명권을 강탈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세계 인구의 절대 다수-70%-가 식량을 생산해서 자신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농민들의 다수는 여성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산업화된 국가에서는 인구의 겨우 2%만이 농민일 뿐이다.
식량 안보는 종자에 있다
농민들에게 종자는 장차 작물과 식량이 될 단순한 씨앗이 아니라, 문화와 역사의 저장소이다. 종자는 식량 사슬의 첫번째 고리이다. 종자는 식량 안보의 궁극적 상징이다.
농민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종자의 교환은 식량 안보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생물 다양성을 유지하는 바탕이었다. 이 교환은 협동과 호혜성을 기초로 한 것이다…농민들 사이의 자유 교환은 단순한 종자 교환을 넘어서는 것이다.그것은 생각과 지식의 교환, 문화와 유산의 교환을 내포한다. 그것은 전통의 축적이자 종자를 다루는 방법에 관한 지식의 축적이다.
WTO의 무역 관련 지적 재산권 협정. 새로운 지적 재산권 체계는, 기업들이 종자에 대한 지식을 빼앗아서 그것을 자신들의 사유 재산이라고 주장하며 독점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종자의 약탈)…수세기에 걸친 농민과 소작농들의 집단적 혁신의 산물인 종자와 식물들이, 그것들에 대해 지적 재산권을 주장하는 기업들에 의해 강탈당하고 있다.
“자유 무역”인가 아니면 “강요된 무역”인가?
단지 5개 기업들이 전세계 곡물 무역을 통제하고 있다.
멕시코. NAFTA사례.”보다 값싼 수입 먹거리는 결코 멕시코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필리핀에서는 설탕 수입이 경제를 파괴했다…케냐에서는 옥수수 수입이 가격 붕괴를 초래하여 지방 농민들은 생산비도 건지지 못하게 되었다.
몬산토. 기업의 잡종 종자가 지방 농민들의 다양한 품종 대처. 새로운 잡종 종자들은 해충에 취약하기 때문에 더 많은 살충제를 필요로 한다. 극빈층의 농민들은 종자와 농약 모두를 같은 회사에서 외상으로 구입한다. 해충의 창궐이나 대규모 불량 종자로 인해 농사에 실패하게 되면, 많은 농민들이 빚을 내어 구입한 바로 그 살충제를 먹고 자살했다.
환금작물을 재배하라는 이 같은 압력 아래에서 인도의 많은 주들은 개인 기업의 대규모 토지 소유를 허용하였다.
농민들은 자신들이 기를 작물을 선택할 권리를 빼앗겼으며, 소비자들은 자신들이 먹을 것을 선택할 자유마저 강탈당하고 있다.
빈곤을 낳는 단일 재배.
세계적인 화학 회사(농약 회사)들은 최근에 “생명 과학” 회사로 변모하면서 자기들과 자기들의 특허품이 없다면 세계는 식량 부족 사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식량은 모든 생명 종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우파니샤드가 인간에게 그들의 영향력 안에 있는 모든 존재를 먹여 살릴 것을 요구한 이유이다.
산업형 농업은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지 못한다. 그것은 다양한 먹거리의 원천을 파괴해 왔고, 더 많은 양의 특정 상품을 시장에 출하하기 위해서 다른 종으로부터 식량을 약탈해 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화석 연료와 물과 유독성 농약을 사용해 왔다.
녹색 혁명에 의한 기적의 품종이 많은 수확을 가져와 기근을 방지했다? 그러나 이 높은 수확이라고 하는 것도 농작물의 전체 수확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짚을 적게 생산하는 것은 가축에게 먹일 사료의 부족을 의미한다. 또 토양을 만들어 내고 비옥하게 하는 수백만의 토양 생물을 먹여 살리는 유기물의 부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밀이나 옥수수의 수확 증대는 농장 동물과 토양 생물들의 먹이를 빼앗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가축과 땅속에서 사는 벌레는 식량 생산의 협력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먹이를 빼앗는 것은 식량 생산을 장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부분적인 수확 증가가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업형 농업 하에서 밀과 옥수수의 수확 증가는 소규모 농장이 제공하는 다른 먹거리 수확을 희생한 대가로 얻어진다.
세계 시장에서 교역할 곡물이 많아지는 것은 자연과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식량을 약탈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농업 관행에서는 아주 적은 외부적 투입만이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통 농업의 생산성을 항상 높았다. 녹색 혁명은 절대적 의미에서 생산성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장려되어 왔다. 하지만 자원 사용을 고려할 때, 그것은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임이 밝혀졌다.
낭비가 심한 산업형 농업의 단일 재배 체계? 따라서 산업형 농업은 사람들을 먹이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사람들을 굶주리게 하는 방법이다.
자원의 낭비는 배고픔을 낳는다. 새로운 생명 공학 기술은 집약적인 외부 투입으로 유지되는 일차원적인 단일재배를 통해 자원을 낭비함으로써 식량 불안과 기아를 낳는다.
수입의 위험성. 면화와 같은 환금 작물의 재배가 증가함에 따라 주식으로 먹는 작물의 생산은 감소한다. 따라서 그 가격은 상승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소비는 감소한다.
집약적인 새우 양식업을 지속 불가능한 활동이다. UN 산하 기관들이 표현한 대로 그것은 “약탈하고 도망가는” 산업이다.
자연의 수확에 대한 약탈.
유전 공학을 응용한 모든 분야에서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른 종들의 식량을 약탈한다.
“잡초가 햇빛을 훔친다”라고 주장하는 몬산토. 이것은 빈곤에 기초한 세계관이다. 이에 비해…문지방에 개미를 위해 먹을 것을 남겨두는 인도 여성의 세계관은 풍요의 세계관이다…이 풍요의 세계관은 다른 생물과 다른 종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식량 안보의 조건들을 유지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개별적인 생명체는 다른 종과 밀접하게 연관된 시스템의 일부로 일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떤 종도 다른 종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끝없이 증가하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자연의 자원을 과도하게 이용하는 이기적인 사람은 도둑일 뿐이다. 왜냐하면 필요 이상으로 자원을 이용하는 것은 다른 사람 몫의 자원을 사용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생태학적 세계관의 입장에서 보면, 필요 이상으로 소비를 하거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자연을 착취하는 것은 도둑질을 하는 것이다. 농업 관련 기업들의 반생명적 관점에서 보면, 스스로를 재생하고 유지하는 자연이야말로 도둑이다. 그러한 세계관은 풍요를 빈곤으로, 비옥함을 볼모로 바꾸어 버린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수탈을 마치 필수적인 시장의 원리인 양 합리화시키고, 효율성과 생산선 안에 그것을 은폐시켜 버린다.
식량 민주주의. 식량 전체주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식량 체계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민 운동뿐이다…우리는 우리의 종자를 비축할 권리와 생물 다양성에 대한 권리를. 음식물과 식품의 안전성에 대한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과 자연에 대한 기업의 수탈을 막아야 한다. 식량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새로운 의제이며, 생태학적 지속 가능성과 사회 정의를 위한 새로운 의제인 것이다.
#콩 제국주의와 지역 음식 문화의 파괴
전형적인 텃밭에는 100가지에 달하는 서로 다른 종의 작물들을 함께 재배할 수도 있다.
산업화된 국가에서 보조금을 받아 생산된 수출품이 농업 사회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그것들은 농업 사회의 생계와 생물 다양성과 먹거리 문화의 다양성을 파괴한다…세계 시장은 지역 경제와 문화를 소멸시킴으로써 팽창한다.
농업 관련 기업의 이윤은 증대하는 반면, 미국 농민들의 콩 수매가는 폭락했다. 미국 농민과 인도 농민 모두 세계화된 자유 무역 체계에서는 패자일 뿐이다. 세계화된 자유 무역 체계는 세계적인 기업들만을 이롭게 할 뿐이다.
세계적인 콩 무역업자. 재래종 콩에 유전자 변형 콩이 섞이는 것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현재 산업적으로 가공되는 식품의 80%는 콩을 함유하고 있다.
“겨자를 구하고, 콩을 버리자”. 식용유를 사고 음식을 만드는 단순한 행위 안에는 자유와 노예 상태, 민주주의와 독재, 다양성과 단일 문화 사이의 고차원적인 정치, 경제적 갈등이 내재해 있다.
#약탈당한 바다의 수확물
수세기 동안 연안에서는 사람과 거북이 공존해 왔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개발 기금을 통해서, 그리고 “현대화”라는 미명 아래 기계화된 트롤선(저인망 어선)들이 인도 연안에 도입됨에 따라, 거북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산업형 새우 트롤선들은 10시간 안에 1제곱킬로미터의 바다 밑을 긁어 올릴 수 있다. 이로 인해 매년 대략 15만 마리의 거북이들이 대형 트롤선의 저인망에 걸려서 죽는다.
트롤선단은 물고기 떼를 모조리 긁어 올리는 그물을 사용한다. 이렇게 잡힌 대다수의 물고기들이 생태계에는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지지만 상업적 가치는 없는 것들이다.
생계, 종의 다양성, 미래의 지속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상업적 가치가 있는 어획량을 단기간에 극대화하고자 하는 산업형 어업 기술들은 오히려 비효율적이다.
무지한 미국 환경주의자들? 미국의 환경 단체는 새우 트롤 어업에 대한 금지와 그렇게 잡은 새우에 대한 소비자 불매 운동을 주장하는 인도 환경주의자들의 요구에는 동참하지 않았다…그들은 단지 거북 구조 장치를 사용하지 않는 배에서 잡은 새우의 수출 금지를 지지했을 뿐이다.
WTO의 판결은 어떤 나라나 어떤 생태계에도 애착을 가지지 않는 무역 이익의 승리. 그것은 결코 인도의 승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인도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 새우 산업이 아니라, 인도의 해안과 해안선, 산과 강, 농장과 숲이기 때문이다…인도에게 중요한 것은 인도의 거북들이지 새우 산업이 아니다.
사적 이윤을 위한 공적 자원(불편한 보조금의 진실)
#미친 소와 성스러운 소
인도의 소는 그들이 소비하는 것보다 많은 먹거리를 제공해 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미국의 목축업에서 소들은 그들이 생산하는 것보다 여섯 배나 많은 먹이를 소비한다. 게다가 인도의 소들은 매년 7억 톤의 재생 가능한 거름을 배설한다. 절반은 연료로, 나머지 절반은 비료로 사용된다. 소똥 연료는 2,700만 톤의 등유, 3,500만 톤의 석탄, 6,800만 톤의 나무와 맞먹는 열을 내는데, 등유나 석탄, 나무는 모두 인도에서는 희소한 자원들이다.
그러나 소의 다양한 쓰임새를 기초로 한 매우 효율적인 이 식량 체계는 바로 그 효율성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되어 왔다. 녹색 혁명은 기본이 되는 농업용 비료를 재생 가능한 유기 비료에서 재생 불가능한 화학비료로 바꾸어 버렸다.
백색 혁명은, 가축과 작물이 생태학적으로 통합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소를 단순한 우유 기계로 격하시켜 버렸다.
많은 양을 생산하지 못하는 소농들과 생물 자원들은 불필요하다고 간주하는 데서 백색 혁명 고유의 폭력성이 드러난다. 인도의 소를 “비생산적인” 것으로 만드는 바로 그 세계적 상품화 과정이 동시에 과도한 생산성으로 인해 유럽의 소들을 필요 없게 만들고 있다. 다양한 가축이 멸종됨에 따라 생명의 원천인 생물 자원들을 보호하고 보존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도 사라진다. 생물 자원의 보호는 부농의 이익 보호와 농업 관련 기업의 통제로 대체된다.
작물은 모든 생물을 위한 식량이다. 작물은 인간과 가축의 식량일 뿐만 아니라, 토양 속에 사는 수많은 생물의 먹이이기도 하다. 이같이 유기물을 머금은 토양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수백만의 미생물들의 고향이다.
집약적 축산 경제.유럽의 집약적 축산 경제에서는 소 먹이를 생산하는데 유럽이외의 지역보다 7배나 많은 땅을 필요로 한다. 사료 생산에 필요한 이 같은 “알려지지 않은 땅”은 사실상 자원을 집약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조방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먹이를 생산하는 데는 땅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가축들을 움직일 수도 없는 곳에 몰아넣고 공간을 절약한다.
집약적인 축산 경제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윤을 얻기 위해서 최소의 공간 안에 얼마나 많은 동물들을 밀어 넣을 수 있는가?”라는 효율성의 문제이다(일차원적 효율성? 다차원적 비효율성)
이것은 지속 불가능성과 동물에 대한 폭력을 초래하며, 모든 체계들을 평가해 볼 때 더 낮은 생산성을 초래한다.
경계의 파괴: 초식동물의 육식동물화. 농장에서 가축 사료가 사라짐에 따라, 죽은 동물의 시체를 비롯하여 다른 먹이 공급원에 가축 사료를 의존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광우병이 유행하게 된 이유이다.
점점 더 인공 소 사료에 의존하게 된 영국 농민들은 소 사료의 원료 표시를 요구했다. 그러나 사료 회사는 농민과 소비자의 “알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사료 회사는 사료의 화학 성분을 표시함으로써 사료의 생물학적 원료를 감추고 있다.
#약탈당한 종자 수확
만 년 이상 농민들은 자연과 협력하면서 다양한 기후와 문화에 알맞은 수천 가지 작물 품종을 개량해 왔다. 인도 농민들은 수천 가지 쌀 품종을 개량해 왔다.
이같이 엄청난 다양성이 우리의 식량 공급의 기초를 이루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이 같은 다양성은 유전자 침식과 유전자 해적 행위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단일 재배와 독점이 자연과 농업 문화에 의해 수천 년 동안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 풍부한 종자 수확을 파괴하고 있다.
오늘날 살아 있는 25만 내지 30만 종의 식물들 가운데 먹을 수 있는 식물은 적어도 1만에서 5만 종에 달한다. 이 가운데 7,000종이 재배되어 식량으로 이용되어 왔다. 그런데 단지 30종의 작물이 전세계 칼로리 섭취량의 90%를 제공하며, 이 중에서도 단지 네 가지 종-쌀, 옥수수, 밀, 콩-이 세계 무역을 통해 전세계가 소비하는 칼로리와 단백질의 대부분을 제공하고 있다.
다양한 작물 재배, 농민들이 계속 다양한 품종을 발전시키고 종자와 식물 품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지역 시장과 지역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종자와 식물들을 보존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들이 계속 재배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단일 재배와 독점. 산업형 농업은 식량 생산과 분배에 대한 집중화된 통제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단일 재배를 증가시킨다. 이런 식으로 단일 재배와 기업의 독점은 서로를 강화한다.
“미국의 종자 산업의 대부분을 듀폰 사와 몬산토 사가 효과적으로 분할하게 되었다.”-월 스트리트 저널
터미네이터 논리: 유전 공학을 통한 완전한 통제
자연적으로 주변 식물들에게 이동했을 때? 종자 식물들 사이에 생식 불능의 상태가 점진적으로 확산된다면 그 결과는 궁극적으로 지구에서 인간을 포함한 고등 생물들이 전멸하는 전 지구적인 대재앙이 될 것이다.
터미네이터 기술은 뛰어난 과학이고 아마 틀림없이 “좋은 사업”이 되겠지만, 그것은 넘지 말아야 할 선, 천재성과 광기 사이에 그어진 희미한 선을 넘어 버렸다. 위험하고 나쁜 생각은 금지되어야 한다.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종자 해적 행위. 최근에는 특허 제도가 농민들의 (종자,품종 개량)혁신을 약탈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으며, 쌀 무역을 독점하고 있다.
생물 해적 행위(biopiracy). 바스마티에 대한 해적 행위는 기업들이 제3세계의 생물 다양성과 자생적 혁신에 대해 “지적 재산권”을 주장하고, 그럼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이 세계 시장 밖에서 생존할 수 있게 해주는 마지막 자원을 빼앗는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밖에 다른 예로 후추, 생강, 겨자, 님나무, 심황에 대한 특허를 들 수 있다.
밀 경제는 전체적으로 규모가 크다. 수입 밀. 종자 공급의 파괴, 그리고 지역 사인과 지역 제분소 파괴함으로써 종자를 가지고 농민들을 직접적으로 종속시키려고 한다. 값싸고 신선한 밀가루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먹이 사슬의 현대화”? 포장된 식품을 먹는 것은 부자 나라의 식품 문화? 산업화된 나라에서 부유한 사람들을 신선한 식품을 먹지, 포장 식품을 먹지 않는다. 많이 가공된 포장 식품을 먹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밀 경제가 산업화되면, 먹거리의 모든 긍정적인 면들-신선함, 지역 공급 체계, 저렴한 비용, 낮은 환경 영향, 풍부한 영양가-은 파괴되고 부정적인 면들-낮은 신선도, 원거리 공급 체계, 높은 비용, 환경에 미치는 과도한 충격, 과도한 가공으로 인한 낮은 영양가-로 대체된다.
WTO와 생물 해적 행위의 조장. 생물 해적 행위는 미국의 법률과 서구식의 “지적 재산권”을 세계화하는 WTO 협정들에 의해서 조장되고 있다.
#유전 공학과 식량 안보
유전 공학은 자연과 생물 다양성을 보호해 줄 녹색 기술이라고 선전되어 왔다. 그러나 유전 공학의 수단들은 자연의 수확물을 훔치도록 고안된 것이다. 유전 공학적 수단들은 생물 다양성을 파괴하고, 제초제와 살충제의 사용을 증가시키며, 돌이킬 수 없는 유전자 오염의 위험성을 확산시킨다.
“잡초가 햇빛을 훔친다”
몬산토 사의 회장인 헨드릭 버페일리에 의하면,
그들이 특허를 소유하지 않은 모든 다양한 생물 종들은 “햇빛을 훔치는” 잡초에 불과하다.
그러나 다양한 종이 만들어 내는 자영의 수확물을 훔치는 것은 오히려 유전 공학을 조장하는 회사들이다.
“세계를 먹여 살린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몬산토 사는 회사 총수입의 대부분을 농약 판매를 통해 벌어들이고 있다. 이것은 자기 회사가 “생명 과학” 회사라는 몬산토 사의 주장이 거짓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지속 가능성이라는 환상의 날조. 유전자 변형 작물이 지속 가능하다는 “녹색” 이미지는 기업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농약이 감소한다는 신화. 농업 분야에서 진행되는 생명 공학 연구의 80% 이상이 제초제와 살충제 내성을 지닌 작물을 개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유전 공학이 잡초와 해충과 질병을 구제하기보다는 오히려 농약 사용을 증가시키고 슈퍼 잡초, 슈퍼 해충, 슈퍼 바이러스를 만들어 낸다는 증거가 있다.
수확과 수입이 증가한다는 신화. 클리포드 기어츠는 22개 농업 시스템에 대한 비교 분석함으로써, 생물 다양성과 노동 집약성이야말로 수확을 증가시키는 가장 효과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법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유전자 변형 종자의 사회 경제적 비용. 유전자 변형 작물들을 재배하는 데는 많은 종자 비용과 기술 사용료가 필요로 하고, 농약 사용이 증가하기 때문에 전통적 작물을 재배하는 것보다 많은 비용이 든다. 유기 농업에서는 종자를 비축해 다음 철에 재배하며, 종자 재배를 위해 필요한 다른 모든 것들은 농장에서 조달된다. 이에 비해 유전자 변형 종자를 재배한다면,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돈을 주고 사야 하기 때문에 농민들은 불가피하게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이 같은 비용의 증가는 농민들을 파산시킬 것이며, 심각한 경우 농민들의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
“제초제 내성 유전자는 그 자체만으로는 수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식량 민주주의의 회복
오늘날처럼 소수의 다국적 기업들이 세계 식량 공급을 통제하고, 자신들의 이윤과 권력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그것을 재편하고 있는 식량 독재의 시대에서, 식량 민주주의는 하나의 명령이다. 식량 민주주의는 환경 민주주의와 지속 가능한 농업 운동, 농민 운동, 소비자 운동, 공익에 관심을 갖는 과학자들의 운동들 간의 새로운 연대를 통해 창출되고 있다.
기업 전체주의의 “자유 무역” 질서를 생태학적이고 정의로운 식량 생산 분배 체계로 대체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체계를 통해서만 지구와 농민, 그리고 소비자들이 보호될 수 있다.
식량 생산에서 민주주의를 되찾는 것은 모든 종이 각자 자기 몫의 영양에 대한 권리를 되찾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같은 생태학적 조치를 통해 미래 세대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식량에 대한 권리를 되찾는 것을 의미한다.
포괄적인 식량 민주주의는 형평과 민주주의의 최고 형태이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우리를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종들은 우리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스스로 먹고살면서, 우리를 먹여 살리기 때문이다.
유기농 운동.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농민들은 유기 농업을 하는 농민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농약과 화학 비료를 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생태적 유기 농업은 모든 생물에 종에 대한 연민과 농업에서의 생물 다양성 보호에 기초하고 있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생태적 유기 농업을 종종 아힘식 크리쉬 또는 “비폭력 농업”이라고 부른다.
유기농은 적은 투입과 적은 비용이 드는 농업 방식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부자들의 사치”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산업형 농업에 의해 생산된 식품이 저렴하고 유기농 식품이 비싼 것은 그것들을 생산하는 데 드는 생산 비용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산업형 농업에 지불되는 막대한 보조금을 반영하는 것이다(세계화? 보조금의 진실!)
“민중이 부당한 법에 복종해야 한다는 미신이 존재하는 만큼 노예 상태는 오래 존손할 것이다. 그리고 비폭력적 저항만이 그와 같은 미신을 제거할 수 있다.”-간디
소금 사티아그라하, 평화적 비타협 운동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연대 또한 필수적이다.
우리가 펼치고 있는 생물 다양성 회복 운동과 지식 공유 운동은 식량 체계 민주화의 토대이다. 한편으로 생명의 다양성을 기업의 발명이나 재산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모든 종의 본래적 가치와 그들의 자기 조직화 능력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생물 자원의 사유화에 반대, 자연의 자본에 의존하는 것)
WTO는 세계 독재 기구? WTO(World Tyranny Organization)
WTO는 자유 무역이 아니라 강요된 무역을 제도화하고 있다.
WTO의 독재는 시애틀의 거리와 협상이 열렸던 워싱턴 주 컨벤션 센터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독재의 특징인 민주적 반대파에 대한 불관용이 시애틀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언론 매체들은 시위대가 공포와 무지에서 행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WTO가 얼마나 비민주적인지, 기업이 우리 삶의 전 영역-식량,건강,환경,노동,미래-을 통제할 있도록 WTO의 규칙들이 어떻게 강요되는지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분노했던 것이다.
약탈당한 수확물을 되찾고, 좋은 먹거리를 재배하여 공급하는 것을 최고의 선물이자 가장 혁명적인 행위로 찬양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누가 세계를 약탈하는가 | 보이지 않는 도둑”에 대한 1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