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년 식물 탐구의 역사. 애너 파보르드. p
The Naming of Names
식물의 명명 체계, 분류학Taxonomy이 탄생하게 된 역사를 다룬 책
오늘날 우리는 당연한 것처럼 라틴어 두 단어로 구성된 이명법(二名法)을 사용하고 있다. 같은 식물이라 할지라도 나라, 언어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기 마련이지만 이 라틴어 이름만큼은 만국 공통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혼란을 막아준다. 이 이명법의 기반을 마련한 사람은 18세기의 스웨덴 학자 칼 폰 린네지만, 수천 년에 걸쳐 린네보다 앞선 수많은 학자들이 자연의 체계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을 리 없다. 아이작 뉴턴이 인용한 “거인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라는 표현 그대로, 이 책은 린네에게 기꺼이 어깨를 빌려주어 식물 분류의 틀을 세울 수 있도록 해준 거인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가이아나 열대우림…거대한 나무들의 발치에 펼쳐져 있는 복잡하고 뺵뺵한 덤불 숲속에 서식하는 생물 가운데 그 어떤 것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나는 손을 뻗어 개암나무 잎사귀와 비슷하지만 좀 더 두껍고 질긴 잎사귀 하나를 땄다. 내 생각에는 카부리 모기에 물린 상처를 진정시켜주는 잎인 것 같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혹 독이 들어 있어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멈추어버릴 위험이 있으므로 아주 잠깐이라도 절대 만지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들은 그 잎이면 어쩌지?
두 식물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는 중요한 차이점은 무엇일까? 어디서, 누군가가 식물 사이의 차이점을 연구하고, 그것을 기록하고, 그림을 의뢰하고, 설명을 달고, 각 식물을 특정한 군으로 분류하고, 식물의 속과 종을 나타내는 두 단어로 된 이름을 부여했다.
이 작업은 세계 어느 곳이든 해당 지역 주민들의 생존에 꼭 필요한 현지 식물에 대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각 식물에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이름을 붙이기 위한 포괄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지식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곳에 와 있기 때문에 마치 중세 유럽에서와 같이 그 식물을 식량이나 약초, 혹은 마법 등의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라는 유용성의 기준에서 정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도, 심지어 같은 아메리카 인디언인 이웃 부족 마추시나 와이 와이조차도 파티모나 족 사람들이 그 고무진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는 이름을 알지 못한다.
약품을 다루는 일이 직업인 사람들로서 식물은 끓이고, 증류하고, 달여서 물약이나 강장제를 만드는 귀중한 원재료였다…이러한 전문 약제상들조차 원재료를 구하기 위해서는 식물을 채집하고 판매하는 늙은 여자 약초꾼들에세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약제상들이 약초꾼들에게 감쪽같이 속고 있는 것일까? 종제라고 생각하고 산 것이 실은 떡잎이 아닐까?
약초 시장에서는 거의 매일같이 약제상들이 약초 뿌리를 파는 노파들에게 속아 넘어가는데, 이는 환자에게는 크나큰 위협이 아닐 수 없다…그래서 8년간의 약제상 도제 수업을 마친 존슨은 몇몇 동료 약제상들과 함께 켄트 카운티에 자생하는 식물을 자세하게 파악하기 위해 첫 번째 여행을 떠나려고 하고 있었다.
사물에 올바른 이름을 붙이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난 데에는 식물이 약제의 재료로 쓰인다는 실용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또 다른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자연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은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중세 유럽을 지배했던 종교적이고 사색적인 사고방식이 점차 적극적으로,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시대의 정신과 문화는 고전적인 학문, 과학적 발견, 지리적 탐험을 장려하고 인간 마음의 잠재력이라는 인식을 일깨웠다. 예술은 종교적인 제약에서 벗어났다.
최초의 인쇄된 식물 관련 약초 의학서의 성공? 대강 끼워 맞춘 글 때문이 아니라 데생 화가이자 판화가인 한스 바이디츠가 제작한 목판화 때문이었다. 한스는 기존의 그림을 복제하지 않고 약초 의학서에 실린 모든 식물의 실물을 보고 직접 그렸다!
바이디츠가 모델로 삼은 인물이자 스승은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 알브레히트 뒤러였다. 뒤러는 “자연의 지시를 따르라”는 글을 남겼다.
“자연에서 멀어져 스스로가 자연보다 더 훌륭한 묘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예술은 자연에 숨겨져 있으며, 그것을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은 예술 자체를 소유하게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뒤러의 꽃 그림은 자연계를 놀라울 만큼 생생하게 묘사한 것으로 그야말로 들판에서 그대로 따왔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기원
테오프라스토스는 자연계의 현란한 다양성 속에 반드시 어떤 형태의 질서가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이 질서를 찾기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최초의 인물이었다? 마침내 17세기 말에 이르러 전체적인 그림의 윤관이 잡히기 시작. 오늘날 이름이 붙어 있는 식물은 42만 2000종에 달한다. 테오프라스토스가 파악했던 식물의 종류는 약 500가지였고. 그중 절반은 이미 그리스의 시, 연극, 에세이에 등장한 바 있다. 그러나 식물의 이름을 짓는 일에 진지하게 임한 사람은 테오프라스토스가 처음이었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육악으로 볼 수 있었던 것만 묘사했다.
당시에는 아직 안경이 발명되지 않았던 시대였다. 확대경이나 현미경도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잎사귀의 잎맥을 볼 수 있었지만 식물의 몸 안팎으로 산소와 이산화탄소가 드나드는 작은 구멍, 즉 기공은 볼 수 없었다. 더욱이 이산화탄소는 말할 것도 없고 잎사귀가 호흡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다.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식물에 대한 테오프라토스의 탐구에는 든든한 기반이 된 것은 바로 철학이었다. 아몬드부터 포도나무까지 알파벳순으로 식물을 나열하고 이것들을 구별하기 위해 중요한 특징을 깔끔하게 정리해놓은 식물백과사전을 쓰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식물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식물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식물을 분류하는 데는 어떤 방법이 가장 유용한가? 꽃이나 과일을 식물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가?..식물의 영혼은 어디에 깃들어 있는가? 영혼이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으므로 반드시 식물도 영혼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알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태어난다
테오프라토스는 최초로 식물 연구해서 저서로 남겼을 뿐 아니라 농부, 목동, 채소 재배인, 목수, 염색업자. 축융공, 의료인, 마법사 등 직업상 식물과 필연적으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서 정보를 모아 처음으로 식물에 이름을 붙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사실은 아테네의 소유 학원에서 실시한 연구 자체가 인류가 걸어온 길고 긴 탐구 과정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표절자 플리니우스
#의사
#율리아나의 책
#테오프라토스 다시 태어나다
오래된 그림들의 질이 형편없이 떨어져 쓸모가 없어지게 되었을 즈음 새로 등장한 화가들은 과거의 유산을 청산하고 새 출발을 하여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