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 삶과 우주.월터 아이작슨. p644
인생은 자전거 타기와 같다. 균형을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한다.-1930년 2월 2일 아들 에두아르트에게 쓴 편지
“첫 번째 논문은 복사와 빛의 에너지 성질에 대한 것으로 정말 혁명적이다.” 그 논문은 정말 혁명적이었다. 빛을 단순히 파동이 아니라 광자라는 작은 입자의 흐름으로 여길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런 주장으로부터 얻어지는 엄격한 인과관계와 확실성이 존재하지 않은 우주에 대한 함축은 평생 동안 그를 따라다니게 되었다.
그는 이미 물리학의 혁명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교수 자리도 얻지 못했고 박사학위 심사에서도 여러 차례 실패했다.(특허 사무소 심사관 취직)
이제 아인슈타인의 기록이 모두 공개되었기 때문에 그의 독행자같은 성격, 반항적 성향, 호기심, 열정, 냉대함과 같은 개인적인 측면이 정치적, 과학적 측면과 서로 얽혀 있는지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공간과 시간의 4차원 천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상상해본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상상이 어려운 것은 우리가 아인슈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아인슈타인이었다.
혁명가로 보냈던 초기의 30년과 독행자로 보냈던 후기의 30년 동안 아인슈타인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따라하지 않는 것을 편하게 느끼고, 냉담함을 즐기는 외톨이로 지내고 싶어했다. 홀로 생각하기를 좋아했던 탓에 그는 일반적인 통념에서 벗어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말년에 뉴욕 주 교육부가 그에게 학교에서 무엇을 강조해야 하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는 “역사 시간에는 독립적인 성격과 판단을 통해서 인류에게 도움을 준 인물에 대한 강도 높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아인슈타인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학생들의 비판적인 지적을 부드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많은 양의 숙제로 학생들의 독립심을 억누르면 안 된다”고 했다.
사회의 경쟁력은 학교가 곱셈과 주기율표를 얼마나 잘 가르치는지가 아니라, 학생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얼마나 잘 자극하는지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상상력이 지식보다 더 중요하다”
젊은 학생 시절의 그는 기계적인 학습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훗날 이론물리학자로서 그의 성공은 맹목적인 정신적 사고력이 아니라, 상상력과 창조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개인만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개성을 길러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견해가 아인슈타인을 자연의 조화를 경외하는 독행자로 만들었다. 그는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는 상상력과 지혜를 가진 인물이었다.
언젠가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떻게 상대성 이론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 자문해보았는데, 그 답은 다음과 같은 환경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은 공간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서 절대 고민하지 않는다. 그런 문제는 아이들이나 생각하는 유치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장이 너무 느렸던 나는 충분히 성장한 후에야 비로소 공간과 시간에 대해서 궁금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보통 아이들보다 그 문제에 대해서 훨씬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직관과 경이감을 평생동안 간직했다. 그는 보통 어른들이 평범한 것으로 여기는 자기장, 중력, 관성, 가속, 광선과 같은 자연현상의 마술적인 신비감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동시에 두 가지 생각을 하면서, 그런 생각들이 서로 모순될 경우에는 곤혹스러워하거나 근원적인 통일성의 냄새를 맡으면 감동하는 능력을 잃지 않았다. 말년에 그는 친구에게 “당신이나 나와 같은 사람들은 절대 늙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를 탄생시킨 위대한 신비 앞에 호기심 많은 아이들처럼 서 있는 일을 절대 멈추지 않는다”고 했다.
학창시절 낙제생? 아인슈타인을 낙제생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수많은 책과 웹사이트? 실제로 그는 적어도 지적으로는 훌륭한 학생이었다…그는 수학에서 낙제는커녕 “학교에서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잘했다.”
(미운털 박힌 학생, 교수들과의 불편한 관계? 교수의 권위에 순종보다 자기주장이 확실한 (적어도 교수들에겐) 건방진(도전적!) 학생이었다)
모든 형식의 규율에 대해서 반발했던 그에게 뮌헨 김나지움의 교육은 점점 더 짜증나는 말썽거리가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의 기계적인 학습이 “무의미한 질서을 반복적으로 연습해서 기계적 규율을 완성하는 프로이센 군대의 방법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불평했다.
아라우. 그 학교는 아인슈타인에게 완벽한 곳이었다. 그 학교의 교수방법은 학생들에게 이미지를 상상하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믿었던 19세기 초의 스위스의 교육개혁자 요한 하인리히 패스탈로치의 철학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패스탈로치는 아이들이 직접 관찰로부터 직관과 개념적 사고와 시각적 심상을 거쳐 스스로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식으로 시각화된 사고실험은 아인슈타인의 상징이 되었다…움직이는 기차, 가속되고 있는 승강기, 추락하는 페인트 공,…
취리히 폴리테크닉. 건방진 학생,…교수직 심사 탈락. 특허사무소 사무관. 혁명적 논문들..
아인슈타인이 1905년 보여준 창의성의 폭발은 놀라웠다. 그는 혁명적인 빛의 양자론을 고안했고, 원자의 존재를 증명하도록 도와주었으며, 브라운 운동을 설명했고,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뒤집어놓았으며, 과학에서 가장 잘 알려진 방정식을 만들었다. 그러나 처음에 그를 알아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그의 여동생에 따르면…“그러나 그는 절망했다. 논문이 발표된 후에는 얼음같은 정적이 이어졌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의 이와 같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그가 보여준 천재성의 일반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그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어서 과학자들이 거의 궁금하게 여기지 않는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의 통념이 자신의 우아한 이론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면 자신의 이론이 아니라 통념을 의심했고, 그런 고집이 효과적인 경우가 많았다. 뉴턴의 절대시간의 개념이 그랬던 것처럼,…
일반상대성과 우주론에 대한 일을 마친 후에 아인슈타인은 어는 친구에게 한탄을 했다. “정말 새로운 것을 발명하는 일은 젊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라네. 경험이 많아지고 유명해지면 더 멍청이가 되거든.”
아인슈타인은 일식 관찰 덕분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1919년에 마흔 살이 되었다. 그 후 6년 동안 그는 계속해서 양자론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멍청이는 아니었지만 양자역학에 거부감을 표시하고, 결정론적인 특성이 강한 통일 이론을 만들려는 길고, 외로우며 결국에는 실패한 노력을 시작하면서 고집이 세졌던 것처럼 보인다.
중년에 이른 아인슈타인이 혁명가에서 보수주의자로 변신했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는 1920년대 중반에 혁명적인 새로운 역학체계를 만든 양자론에 대한 그의 자세가 점점 더 경직되어갔다는 것이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God does not play dice.)”
이에 대해 보어는 “아인슈타인, 신에게 명령 하지 말게나.(Einstein, stop telling God what to do.)”는 말로 답하였다.
아인슈타인은 나머지 일생 동안 확률과 불확실성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양자역학의 주장을 거부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두 가지 중요한 이유 때문에 원자폭탄의 아버지였다. 1)미국이 폭탄 연구를 시작한 것은 그의 제안 때문이었다. 2) 원자탕을 이론적으로 가능하게 만든 것은 그의 방정식(E=mc2) 때문이었다
“자연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수학적 아이디어의 구현이다”
“이론을 만들 때 그의 방법은 예술가들이 사용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는 단순성과 아름다움을 목표로 했고, 그에게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근본적으로 단순성이었다.”
어쩌면 그의 성격에서 가장 중요한 면은 독행자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말년에 갈릴레오의 개정판 서문에서 부각시켰던 자세였다. “내가 갈릴레오의 일에서 인식한 주제는 권위를 근거로 한 어떠한 종류의 교리에 열정적으로 저항했다는 것이다.”
플랑크, 푸앵카레, 로렌츠가 모두 1905년에 아인슈타인이 이룩했던 돌파구에 가까이 다가갔었다. 그들 중에서 아인슈타인만이 수백 년 동안의 과학을 정의해왔던 기존의 사고방식을 던져버릴 만큼 용기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기본적인 신조는 자유가 창조성의 근원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과학과 창의적인 정신활동의 발전은 권위주의적인 사회적 편견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사상으로 구성된 자유를 필요로 한다”고 했다. 그는 그것을 길러주는 것이 정부의 기본적인 역할이고 교육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6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잠깐사이에 읽을수 있었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