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당신 실수한 거야! 외르크 치틀라루. p176
진화에 맞선 동물들의 유쾌한 반란
“자연에 오류란 없다. 오직 너희에게 있을 뿐.”-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 만능천재가 보기에 자연의 삼라만상은 지극히 완벽해서 어디가 잘못됐다고 의심할 만한 구석이 한 군데도 없었다. 그래서 자연에 대한 의심은 그 원인이 객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에 있어야 했다. 바꿔 말해 자연에서 어떤 오류가 발견된다면 그것은 자연 탓이 아니라 우리의 엉성한 인식기관 탓인 것이었다.
오류는 언제나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자연은 신의 영역이므로 조금도 흠잡을 데가 없다.
다윈의 진화론?
‘적자생존’으로 역사에 기록된 이 원칙은 그러나 온갖 오해의 산실이 되고 만다. 특히 심각한 오해는 진화하면서 오직 강자만이 살아남고 약자는 멸종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다. 소위 진화의 법칙은 권력욕과 폭력을 강자의 권리로 포장하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어차피 곧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패배자들의 이별가쯤으로 축소·왜곡시키는 방편으로 되풀이해 인간사회에 작용한다. 하지만 실제로 인간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은 진화와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많은 면에서 그 반대다.
다윈의 이론은 진보 개념으로 보는 시각 역시 대표적인 오해에 속한다…신의 창조 행위는 어디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인간을 ‘창조의 절정’으로 보는 특권적 가설이 슬그머니 들어앉은 형국이다. 이 구도에는 허영심이 작용한 게 분명하며 사실은 전혀 다른 모습니다.
인간은 신체적으로 열등한 존재. 약하고 느리고 다치기 쉬우며, 다른 동물에 비해 잘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냄새도 잘 못 맡는다. 인간이 유일하게 나은 점은 두뇌의 성능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진화에 유리할까? ‘두뇌 실험’이 지금까지는 제대로 작동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본격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고작 수천 년에 불과하다. 이것은 진화의 나머지 기간과 비교해볼 때 일생에서 단 몇 초 정도에 불과한 시간이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의 변화를 보면 인간과 인간의 뇌는 스스로는 물로 지구 전체까지 파멸로 끌고 갈 수도 있는 괴이한 파괴 충동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절대로 진보가 아니며 오히려 면도날 위에서 스스로의 파멸을 희롱하며 춤추는, 진화의 위태로운 유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진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꿀 필요가 있다. 진화가 ‘무자비한 생존투쟁의 장’이라는 생각부터 먼저 버려야 한다.
고래는 파란색 색맹? 창조적인 자는 주어진 조건이 다소 미흡해도 이처럼 삶을 잘 헤챠 나간다.
#적응하고 살아야지
#부족한 채로 살아가기
#넘쳐서 큰일이야
우아한 비행에 가려진 알바트로스의 진실? 헛된 이륙시도 되풀이하기
알바트로스가 비행하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미적 아름다움과 더불어 완벽한 공기역학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새가 이륙하는 장면이나 착지할 때의 모습은 완벽함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알바트로스의 무거운 몸이 땅에서 떠오르려면 최소한 시속 12킬로미터 이상의 맞바람이 필요하다. 이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알바트로스는 육지를 떠날 수가 없는데, 이는 규칙적으로 먹이를 공급받아야 하는 새끼 알바트로스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알바트로스는 바람이 언제 필요한 속도에 도달하는지 미리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새는 헛된 이륙시도를 계속해서 되풀이해야 하는데, 이때 시간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에너지가 낭비된다…반대로 착륙할 때의 알바트로스에게는 정형외과 의사가 필요하다. 이 새의 날개가 대단히 크기는 하나 착륙할 때 브레이크 기능을 하기에는 적합한 구조가 아니다. 하는 수 없이 공기저항을 높이기 위해 물갈퀴가 달린 발을 곧추세워 앞으로 뻗어보지만, 거대한 몸집을 착륙에 알맞게 멈춰 세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알바트로스의 착륙은 의도하지 않은 텀블링으로 끝맺기 일쑤다. 아니면 추락사고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날개가 꺽이거나 심지어 목이 부러지는 일도 발생한다. 알바트로스가 우아한 비행을 선보이기 위해 얼마나 값비싼 비용을 지불하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몸길이와 맞먹는 홍오리의 페니스
갈기로 사치부리기.거대한 갈기는 사자에게 어떤 실재적인 쓸모가 있을까? 사자의 일상에서 그것은 아무런 이점도 제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갈기는 무엇보다 사냥에 방해된다. 은밀하게 먹이감에게 접근하는 사자를 쉽게 눈에 띄게 하고, 덤불 속을 질주할 때 가지에 걸려 자주 멈추게 한다…게다가 각종 기생충들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다…어떤 특별한 의미나 심오한 뜻이 담긴 게 아니라 맹수들에게 나타난 일종의 유행이자 진화가 부린 사치!
하루살이는 장기의 기능이 변형돼 있다. 하루살이의 장기는 더는 소화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장기의 속은 공기로 채워져 있고 그 외피가 강화된 일종의 ‘뼈’로서 기능해 안정성을 추가로 확보해준다. 하루살이는 먹고 소화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애벌레로서의 삶을 끝내면 오래 버틸 수 없다. 번식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만을 향한 삶은 당연히 문제가 많다. 하루살이는 짝찟기와 산란을 되도록 빨리 해치워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이를 신속히 해결하지 않으면 여분의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만다. 그렇지만 하루살이들은 늘 멋지게 해냈다…공중짝짓기가 성공 모델임을 입증하는 확실한 예가 아닐 수 없다…그러나 최그 이 가녀린 하루살이들의 번식방법은 한계에 부딪힌 듯 보인다. 동물학자들은 최근 하루살이 암컷이 아스팔트 도로 위에 산란하는 경우가 점차 증가한다고 보고했다.. 원래 하루살이는 시냇물이나 연못, 작은 강 등에 알을 낳은다. 아스팔트 위의 알은 부화하자마자 죽게 돼 있다. 왜 암컷들은 거기에 알을 낳는 것일까?
답은 이렇다. 하루살이는 편광을 감지할 수 있는 겹눈을 갖고 있다. 극히 다양한 표면에서 진동하는 태양광이 수면에 닿을 경우, 반사된 광파는 상당부분 수직으로 방사된다. 물에 반사된 빛은 주로 평행으로 진동하는데 하루살이는 이 빛을 가장 잘 인식한다.되도록 잔잔한 물에 알을 낳아야 하는 하루살이 암컷으로서는 당연하다. 에상하다시피 아스팔트 도로에서는 빛의 진동이 조용한 수면 위와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하루살이의 착각에 인간은 책임이 없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진화의 줄타기’를 해야 하는…하지만 착각을 하는 동물이 하루살이만은 아니다.
#진화 최대의 오류는 인간인가?
종말 초래하기: 머리 속에 기생하는 괴물, 뇌?
해부학적으로 인간은 실패작에 가깝다.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할 털도 없을 뿐 아니라, 도핑에 의지하지 않는한 그다지 빠르거나 힘이 세지도 않다….인간에게 창조행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체 산소량의 20퍼센트를 혼자서 사용하는 엄청난 크기의 두뇌를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괴물같은 기관이 인간과 세상에게 과연 축복일까?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뇌와 이성의 계락은 “인간을 점점 더 사악한 야수로 만드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다윈은 생명의 진화를 주장하지 않았다? 다윈이 말하려고 했던 것에 대한 오해는 다양한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다윈은 ‘변이를 수반한 유전’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 용어는 당시 식민지 개발에 열중하던 영국의 분위기와 정치적인 성향이 있던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에 의해서 진화론으로 규정. 사람들도 좀 더 나은 상태로 진화했다는 용어를 좋아하였고, 그 진화의 최종 상태가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모든 생명은 서로 돕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