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 ‘소비문화’라는 용어는 교과서에서 배웠지만, 서울이 고향인지라 뼛쏙까지 소비에 길들여 살아와 말뜻은 모르는 채 30여 년을 살아왔다. 그리고 정말 산골에서 평생 한자리를 지켜 온 시댁을 가게 되었는데, 문화 충격의 연속이었다. 요즘 세상에 살쾡이와 매 때문에 닭을 풀어놓지 못하고 지붕 있는 철장 안에 가두어 키우는 그런 산골에 위치한 시골집. 상상이 되시려나?
이 시댁을 주말마다 가는데, 삶의 양식 자체가 다르다. 소비가 아니라 ‘생산’이 주생활이다.
쌀, 배추, 파, 무, 대추, 밥, 떡, 심지어 참깨, 보리, 콩, 호박, 오이, 복숭아, 앵두, 도라지, 더덕, 땅콩, 잣, 대추, 밤, 떡, 심지어 닭고기까지! 집에 다 있다. 그리고 몸이 아프면 호들갑 부리며 병원으로 달려가는 게 아니라 몸이 스스로 치유되기를…

극단적인 예로 돈을 주고 듣는 연수를 설명했지만, 사실 ‘소비’라는 활동의 기준이 돈을 지불함에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가 없어지는 행위를 소비라고 보면 될 듯 싶다. 그래서 재미있는 TV프로그램을 찾아보고, 감동적인 설교를 찾아가듣고,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수업을 찾아 수강하는 그 모든 행동 역시 소비에 해당한다.
남이 만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는 이런 받아들임은 언뜻 주체가 나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가 아니라 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저 프로 재미있네. 저 목사님 오늘 설교 좋았어.” 그리고 끝. 더 이상의 고민도 성찰도, 그 어떤 생각도 뒤따르지 못한다. 그리고 일반인의 선택을 많이 받아야만 결과적으로 살아남기에, 수많은 프로그램과 영화와 설교와 강의들은 스스로를 업그레이드하는데, 그 방향은 슬프게도 자극적일 수밖에 없다. 시각과 청각과 감성을 지독하게 자극하는 지점을 향해…

그러니 보이더라. 내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연수가 얼마나 ‘소비적’이었는지를 말이다. 좋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 쪼르르 달려가고, 또 달려가곤 했었지. 그런들 내 것이 생기나? 아니지.
남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 생기게 하려면, 남이 만든 것을 돈 주고 살게 아니라 내가 직접 만들어야지.
곶감을 장에 가서 사오는 게 아니라, 감나무를 심어서 키우고, 감을 따서 깍고, 실로 꿰어 매달고, 바람 통하게 비 안 맞게 잘 익나 매일 살펴봐야지. 색깔이 좀 거멓고 파는 것처럼 모양은 안 나와도, 내 손으로 만들어 내가 먹어야 진짜 내 것 아닌가.

그렇게 삼십이 넘어서 비로소 남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닌, 내 발로 직접 여행길을 찾아 나서 본다.
굳이 따지자면 이걸 ‘진짜 공부’라고 이름 붙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세상에서는 자격증 따고 철학책 읽고 세계여행하고 박사 학위 따는 걸 소위 공부라고 말하지만, 내게 있어 공부는 모르는 세상을 만나는 일, 나를 버리고 내려놓고 낯선 사고방식과 생활과 문화에 조금씩 젖어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없어지지 않는 진짜 행복을 찾는 것이 작은 꿈이다.
이 길에서 많은 이들을 만났다. 신랑과 아이들 만났고, 동네 이웃을, 동료 선생님을,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 따뜻해지는 고마운 이들을 말이다. 그리고 그중 한 분이 바로 권정생 선생님이다. 비록 책으로나마 뵈었지만 그냥 그 순간 알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자는 묻는다. “인간이 과연 자장 진화된 동물일까?” 아,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모든 생각을 가지고서 지금과 똑같은 내일을 보낸다면 이건 정말 대단한 자기모순이요, 자신을 하느님을 배반하는 삶이 아닐까 두렵다.
적어도 나를 엄마라 부르는 아이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과는 ‘남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이 뭔지 고민해 봐야겠고, 적어도 공부를 ‘소비’하지 않도록 도와야 할 텐데, 머리가 복잡하다. 삶으로 살아내는 진짜 공부는 이제 시작이어야 한다.
이렇게 연대하려면 ,부모가 변해야 한다. 부모가 먼저 바른 공부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가령 선현의 고전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내면의 욕망을 변혁시킬 수가 있으며, 수시로 작동하는 불안 회로의 스위치는 내릴 수 있게 된다.
다른 부모들과의 연대는 그런 후에야 가능하게 된다. 그때에서야 우리 사회를 총체적으로 불행하게 만드는 공부 시스템을 바꾸고, 우리 자녀가 행복하게 공부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공부를 바꾸기 위해서 지금 당장 고전을 펼칠 것을 권한다.

도서관 서가에는 온 세상이 꽂혀 있지만 가르치려고 들지 않는다. 학력이나 성적으로 평가하지도 않는다. 그저 누구든 삶 속에서 배우고 배움을 삶으로 살아갈 힘과 의지를 존중한다. 언제라도 그 문을 열어젖혀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
조건은 하나다. 자신의 동기를 가질 것.
가르치지 않으니 어떤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을 사로잡은 것에 맘껏 빠져들 수 있다. 그래서 책과 사람이 만나는 도서관의 풍경에는 몰입의 기운이 넘친다. 교사도 없고 교과서도 없는
도서관에서 희망을 말하는 이유는 ‘진짜’ 공부를 할 권리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