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비용 제로 사회. 제러미 리프킨. p
Zero Marginal Cost Society
#패러다임 대전환, 시장 자본주의에서 협력적 공유사회로
‘협력적 공유사회Collaborative Commons’라는 새로운 경제 시스템이 세계 무대에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19세기 초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출현 이후 처음으로 세상에 뿌리내리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이다.
한계비용제로, 가장 효율적인 경제? 이윤 추구 시스템에서 이윤 제로! 이 딜레마가 바로 자본주의 이론과 실제의 기저를 이루는 본질적인 모순인 것이다.
그들은 “경제적 효율성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가격이 한계비용과 동일해지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나아가 그들은 “정보 상품의 경우 유통의 사회적 비용과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깝다”라는 데에 동의했다. 그래서 역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독점이 작용하는 방식은 모든 경제학자들이 알다시피 잠재적 경쟁자가 생산성을 향상하고 한계비용을 낮추며 판매가를 떨어뜨리는 새로운 혁신을 도입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그럼에도 서머스와 들롱은 ‘새로운 경제’하에서는 이것이 진보의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결론지었다.
한계비용제로? 자본주의가 아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희소성보다는 풍요가 특징인 시대에서 경제생활을 구성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에 자리를 내 줄 것이다.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고정되어 있으며, 총 엔트로피는 계속 증가한다”
전통적인 경제학자들은 열역학법칙이 모든 경제활동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경제학계는 대체로 여전히 경제활동이 열역학법칙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모든 경제활동은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고체나 액체, 기체 형태의 에너지를 활용해 재화와 서비스를 창출하는 데서 비롯된다. 생산과 저장, 유통 과정의 모든 단계에서 에너지는 자연의 자원을 완성된 제품으로 전환하는 데 이용된다. 재화나 서비스에 내포된 에너지는 그 무엇이든 가치사슬을 따라 경제활동을 전개하면서 이용되거나 상실된 에너지의 대가이다. 그리고 매번 그에 상응하는 ‘엔트로피 청구서’가 발생한다. 결국 우리가 생산하는 재화는 소비되고 버려져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고 엔트로피 증가에 기여한다는 말이다…이용가능한 에너지의 손실만 있을뿐 에너지의 순증가는 결코 있을 수 없음을 지적한다. 자연 자원을 경제적 가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늘 그렇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제 한 가지 질문만 남는다. 과연 엔트로피 청구서의 만기는 언제가 될 것인가?
사물인터넷은 떠오르는 협력적 공유사회의 기술적 ‘소울메이트’이다…사물인터넷의 운용 논리는 수평적 대중 협업과 보편적 접속, 비배제성을 최적화하는 것이다.
중대한 변화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서서히 막을 내려 가고 그 대신 협력적 공유사회가 부상하는 변화 말이다. 협력적 공유사회에서는 경제적 복지가 시장 자본의 축적이 아닌 사회적 자본의 집적으로 측정될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이 완전히 사라질 것 같지는 않지만, 더 이상 문명을 위한 경제적 아젠다를 독점적으로 정의하지는 못할 것이다.
자본주의 이후의 삶을 상상하는 게 이렇듯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태동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자본주의의 실로 대단한 역사
#유럽의 인클로저 운동과 시장경제의 탄생
#제로 수준 한계비용 사회
극단적 생산성? 원본과 복제본의 차이가 없는 디지털 컨텐츠
#개방형 온라인 강좌와 한계비용 제로 교육
풍요가 희소성을 대신하는 한계비용 제로 사회는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과는 전혀 다르다.
20억 학생이 수업받는 하나의 교실
#사라져 가는 노동자
자동화와 노동의 종말
#협력적 공유사회의 부상
#공유의 희극
공유지의 재발견? ‘공유지의 비극’에서 공유지에 대한 하딘의 묘사는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영겁의 역사 동안 공유사회 모델을 지속시킨 가장 핵심적인 요인을 누락했다. 바로 참여의 조건으로 구성원들이 동의하는 자기규제 및 자기강제의 규약과 이에 수반하는 처벌이다. 자체의 규약과 처벌이 없는 경우 공유지의 비극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하딘은 거버넌스를 빠뜨린 것이다.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점은 하딘이 공유에 악역을 맡기고 근현대기의 고의적인 탐욕과 파괴를 촉발한 책임까지 뒤집어씌운 부분이다.
관습권의 흥미로운 면은 대개 공유물의 적절한 관리를 보장하기 위한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인 관리 규약을 동반한다는 점이다.
‘많을수록 더 즐거운’이라는 문구로 아주 멋들어지게 표현할 수 있는 ‘공유지의 희극’인 것이다.
로즈의 연구는 무임승차로 “모든” 공유물은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하딘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경제학자들의 오랫동안 품어 온, 시장에서 개인은 목적의 사리사욕만을 추구한다는 케케묵은 생각에 의문을 제기했다.
고전경제학의 단순한 이론? 불가능한 문제를 가능한 문제로 변형
#풍요의 경제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까운 수준으로 줄어들면 이윤은 고갈되고 만다. 재화와 서비스가 시장가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재화와 서비스는 본질적으로 공짜가 된다. 대부분의 사물이 공짜가 되면,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구성 메커니즘으로서의 자본주의는 그 작동 근거를 잃는다. 자본주의의 동력은 희소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자본주의 시스템은 희소성과 더불어 사람들의 의존성에서 이익을 얻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희소성과 교환가치가 아니라 풍요와 사용가치 및 공유가치를 중심으로 경제활동을 조직한다는 생각은 경제 이론이나 경제 관행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과 너무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쾌락의 쳇바퀴? 하지만 이 쾌락의 환상에 빠질 때마가 사람들은 불행해지며 탈출구가 없는 중독의 악순환에 빠져든다. 결국 그 쳇바퀴에서 내려와 행복으로 향하는 다른 길을 추구할 때까지 말이다.
부를 추구하는 목표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목표에 관심이 덜한 사람들보다 낮은 수준의 심리적 웰빙을 보여준다…물질주의적 가치가 삶의 중심에 자리 잡을수록, 삶의 질은 더욱더 떨어진다.
물질주의가 그토록 유해한 이유는, 인간 종에 생기를 불어넣는 기본적인 욕구인 공감 본성을 앗아 가기 때문이다.
물질주의자에게 광고는 중독을 키우는 강력한 마약이다. 광고는 사람들이 부족하고 외롭다고 느끼길 바란다. 그리고 상품과 서비스가 인격과 정체성을 향상해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매력적이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 거라고 약속한다.
그들은 2008년 대침체가 시작되면서 가치관이 뒤집히는 놀라운 결과를 발견했다. 해를 거듭하며 타인에 대한 공감이 줄어들고 물질주의가 점점 만연하던 추세는 2008년 이후 젊은 밀레니엄 세대 사에에서 갑자기 뒤집혔다. 이들의 “타인에 대한 관심은 더 늘어났고 물질적 이익에 대한 관심은 줄었다.” 이 새로운 조사 결과는 물질주의적 유행의 추종과, 생활방식이 되어버린 강박적 소비주의에 대한 밀레니어 세대의 관심이 줄었음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