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미래. 월터 카우프만. p369
The future of Humanities: Teaching Art, Religion, Philosophy, Literature and History
대표적인 미국의 인문학자 카우프만. 인문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현장에 대한 진단은 그의 인식만큼 선명하지 못했다.
인간은 모든 이성적이 행위가 그러하듯이 학문과 교육은 반드시 비전을 추구하고 목표를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은 학문과 교육은 존재의 본연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이를 위해 대학과 인문학은 인간에게 무엇이 귀중한 가치인지 물어야 하며, 그것을 어떻게 보존하고 발전시킬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인문학자와 교육자가 얼마나 될지는 의문스럽다…가장 중요한 것은 학자나 교수들이 비전을 추구하며, 미래의 인류를 위해 탐구하는 일이다.
#지식인의 실종과 인문학의 반성
지식인이 시대의 양심으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각종 불의와 차별에 분노했던 것도 지식인들이었으며, 사회의 부조리를 앞에 두고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부끄러워했던 것도 지식인들이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시대의 양심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려는 지식인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뿐 아니라 오늘날 지식인은 첨단 기술산업의 미래를 선도해 나갈 역군들이나 능숙하게 외국어를 구사하면서 세계화의 추세에 발맞추어 자신의 전공분야를 세밀하게 파고드는 전문가들에 떠밀려 실종되는 추세이다…그리고 이들에게 대학의 의미와 역할을 묻는다면 어떤 망설임도 없이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발판이라고 답할 것이다.
대학과 대학생은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필요에 의한 주종관계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판매자와 구매자의 관계에 가깝다. 대학생들에세 대학은 점차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스펙의 하나이자 자신이 가진 지식자본을 투입해서 얻어낸 일종의 상품이 되고 있다.
전문가는 많지만 지식인은 찾기 쉽지 않은 시대, 대학에도 개혁이 필요하다고 요구하는 시대, 그리고 인문학의 추락과 위기를 말하는 시대의 한 가지 공통점은 우리가 당장의 안락을 위해서 미래의 비전에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양심이라 칭송되는 사르트르의 비판처럼 전문가는 자신의 분야에는 최선을 다할지 몰라도 사회 전반의 불의와 모순에 대해서는 귀와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런데 대학이 지식인을 포기하고 전문가 양성만을 목표로 삼는다면, 젊은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는 성공 담론뿐이다. 또한 안정된 직장과 평안한 노후생활에 저당 잡힌 젊은이들의 시야를 인문학이 앞장서서 깨뜨리고 넓혀주지 않는다면, 인문학의 위기는 시대적인 역풍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자초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인문학이 결코 시장의 생산성과 역행하지 않으며, 보다 폭넓은 상상력을 제공함으로써 보다 창의적인 인재양성에 기여할 수 있다? 조직구조에 경직된 전문직의 사고로는 신속하게 변화하는 시장의 요구를 파악할 수 없으며, 인문학만이 특유의 비전문성과 비논리성을 통해서 창조적인 생각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우리가 미래 세대에게 진정으로 주어야 하는 것은 풍족한 기술의 혜택이나 안락한 생활이 아니라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에 대한 청사진이다.
#인문학 교육이 곧 인류의 미래다
나의 목적은 인문학의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영향을 주는 것이다.
한때는 인문학이 가장 명망 있다고 여겨졌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자연과학이 가장 높은 명성과 경제적인 후원을 누리고 있다.
인문학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
인문학은 표류하고 있다.노를 젓는 사람들은 충분히 많지만 대부분의 교수들이나 학생들은 배의 방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방향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지금과 같이 급변하는 시대에 위험한 일이다.(방향이 잘못 되면 속도는 의미 없다-간디)
#네 가지 유형의 마음가짐
1)통찰가visionaries 와 2)사변가scholastics
통찰가는 외로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 시대의 일반적인 상식과 단절되며,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자신들의 비전을 알리기 위해 계속 시도한다. 대개 이들은 현실의 언어가 불충분하다고 여기며 그로 인해 때때로 심각한 의사소통 장애를 겪기도 한다.
반면 사변가는 자신의 엄격함과 전문성에 자부심이 있으며, 자기 분야의 공론이나 공통의 노하우를 지나치게 신뢰하고, 이 학교 저 학교를 떠돌아다닌다.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토마스 쿤은…이와 반대로 근면한 연구자들의 작업이 얼마나 필수적인지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의 책이 끼친 영향은 지금까지도 엄청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을 낭비하면서 보내지만” 크릭은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이 언급한 것만큼은 아니지만 왓슨 역시 분명 대다수의 사변가에 대해 경멸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에 반해 쿤은 사변가들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통찰가들은 장인정신을 가진 어떤 인물로도 대체할 수 없다.
탁월한 비전을 간결하게 설명하려는 지속적인 시도는 기술에도 능통할 것을 필요로 한다. 비전이 있지만 그것을 지속적인 방식으로 체계화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우리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17세기와 18세기에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철학자들은 학생을 가르치지도 않았고 어떤 학파에도 속하지 않았던 통찰가들이었다. 이런 통찰가들 중에서도 특히 프란시스 베이컨, 홉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로크, 라이프니츠, 버클리, 흄, 루소는 기억할 만한 사람들로 꼽을 수 있다. 또한 칸트는 교수직을 맡았던 가장 위대한 첫 번째 근대 철학자였다.
3)저널리스트 유형
세 번째 유형의 인물이 지닌 가장 중요한 특징은 줄기찬 비판 능력이다….이런 비평가 중 몇 명은 사변가이며 대다수는 저널리스트이다.
저널리스트는 즉각적인 소비를 위해, 그날그날을 위해 글을 쓴다. 저널리스트의 상품들은 내일이면 진부해지기 때문에 지금 당장 팔려야 한다. 저널리스트는 폭넓은 연구를 할 만한 시간이 없으며 학자적인 엄격함에 대한 취향도 갖고 있지 않다.(SNS, 미디어의 개인화, 디지털 미디어의 시대는 저널리즘의 시대?)
지금 당장 팔려야 한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내일과 모레의 인간’으로서의 철학자가 ‘자기 시대의 오늘과 맞서야’ 한다는 통찰이었다.
저널리스트 유형이 갖고 있는 에토스는 첫 눈에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서 읽어볼 만한 원고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면 그것에 대한 흥미가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며, 면밀한 검토를 한다고 기대할 수도 없다.
저널리즘과 사변주의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변가는 엄격함과 견실함에 가치를 두고, 저널리스트는 신속함과 관심을 끄는 것에 가치를 둔다.
이런 저널리스트적 성향은 인문학의 미래에 엄청난 위협을 가한다. 한물간 예전의 인문학자들은 10번 이상 읽을 만한 가치가 없는 책은 아예 읽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저널리스트적인 교사의 ‘새로운 것’에 대한 선호와 최근 것에 대한 관심은 인간 정신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품들의 보존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작년의 헤드라인 신문기사처럼 시대에 뒤떨어지고 잊혀져버릴 최신 자료와 서적을 대량으로 읽으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심지어 미술사가들 중에서도 성경을 아는 이가 드물다.
4)소크라테스 유형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를 자각하는 지각이 있다고 말했다. 소크라테스의 사명 중 하나는 자신이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무지와 그들이 주장하는 지식의 허위를 폭록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들어서면서 독일 대학은 순수 직업전문교육의 도덕적 파산을 보여주는 완벽한 표본이 됐다. 지도력 있는 대부분의 독일 학자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신녀므 도덕, 정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 어쨌든 그것은 그들의 직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봉급을 받는 이유는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학생들은 사변가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양심의 잣대를 어떻게 사회의 신념이나 도덕, 정치에 적용해야 하는지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다. 반대로 지상 원칙의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는 신념과 도덕이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믿어버리게끔 교육을 받았다. 가치의 영역이 선입견과 정열의 도피처가 되어버린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교사는 통찰가가 될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자신만의 관점을 발전시킬 필요가 없다…학생들이 일련의 도전과 마주할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소크라테스적 에토스가 자리 잡을 수가 없었으며, 대학에서도 결코 용인되지 않았다. 그외의 나라에서 목격되는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엄청난 숫자의 학생들이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점이다. 고등교육은 더 이상 몇몇 소수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었고, 학생들은 경쟁적으로 여기에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상당히 급작스럽게 엄청난 숫자의 새로운 교사들이 필요해졌고, 이 과정에서 학문은 훨씬 더 전문적이고 사변적이며 반-소크라테스적인 것이 됐다.
현미경주의가 급속한 확산과 학계 전반에 만연하고 있다…점점 더 많은 교수들이 광범위한 분야를 포괄할 수 있는 전문 지식이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승진을 위해 반드시 출판해야 하는 그들의 논문은 기껏해야 철학자 한 사람의 저서 한 권중에서 한 가지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철학 학술지들은 비역사적인 논문을 선호하게 됐다. 그리하여 점차 사람들은 과거보다는 현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아직까지 제공하고 있는 철학사 과목들은 점점 더 비역사적인 과목들로 대체되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관점을 오늘날의 통념이 지닌 문제점과 비교하는 소크라테스적 질문은 좁은 주제에 대한 기계적인 토론에 점점 더 많은 자리를 내주고 있다.
문학관련 학과에서는 소위 신비평이 전성기를 맞았으며, 그것은 현미경적이고 반-소크라테스적인 방향의 선봉장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인간적인 시인이나 소설가를 만나볼 수 없게 되었고, 사회에 대한 그들의 가차 없는 비판이나 그들의 세계관에 대해서 관심을 닫아버렸다. 대신 사람들은 그들의 어법에 들어있는 형상화나 세부 양식들을 뒤쫓게 됐다.
그리하여 우리는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가고 있다. 오늘날은 전혀 누구도 하지 않는 일을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이 뛰어나게 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문제는 우리가 미래에 어떤 도전을 해야 하는가이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제기되지 않는다
연구자들이 내세울만한 연구 주제? 가장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 것은 넘 세밀한 주제여서 장황한 설명 없이는 질문자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문학이 죽어가는 동안에도 수천 명의 교수들은 번창의 가도를 달렸다.
사변가는 일반적으로 전체에 대한 안목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로 인해 더 큰 맥락을 통찰하지 못한다. 역사 감각의 부재와 자신이 속한 학파나 관점의 역사적인 문맥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은 이런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다수 나라의 고등교육 기관드은 전례없이 많은 사변가들을 배출해 냈다. 또한 소크라테스적 교사들이 거의 멸종 수준까지 감소한데 반해, 대학에 소속된 사변가적 교사들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독서의 기술
독서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핵심이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잘 읽는 법에 대해 배우는 경우가 드물다.
대학원생들도 다양한 독서법에 대한 학습이 필요하다. 그러나 교수와 학자는 서로 극단적인 방식으로 독서를 하며, 그들 중 대다수는 다른 방식으로 읽는 것에 대해 전혀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는다.
변증법적 독서
저자나 우리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와 우리는 이해력이 있어. 그러니 그와 우리는 공동의 탐구를 통해 몇 가지 오류를 넘어서서 너라고 할 수 있는 텍스트의 목소리와 마주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변증법적 독서의 세 가지 핵심 요소? 소크라테스적/대화적/역사-철학적
인문학에서는 특히, 학생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치지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는 교육개혁을 이룬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증등교육과정에서 너무 잘못된 방식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학생들이 많은 훌륭한 작품들을 외면하고, 젊은이들이 관심을 잃을 점 때문만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로부터 몇 년 후에 학생들과 졸업생들이 어떤 텍스트에 관심이 생겼을 때, 어떻게 읽어야 할지를 몰라서 포기해 버린다는 데 있다.
텍스트를 읽어내는 독서 기술을 잃어버리고 만다면 그때는 텔레비젼도 컴퓨터도 인문학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서평의 정치학, 번역과 편집의 윤리학
서평은 정치다.
서평에서 알게 된 책의 대부분을 읽을 만한 시간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서평을 읽기 전에 먼저 책을 읽는 경우도 드물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서평들이 왜곡된 설명과 명백한 실수로 가득 차 있는지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
번역자의 제일 중요한 의무는 저자의 목소리가 언어의 장벽을 넘고 들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원저자의 화려한 스타일을 따분하고 지루한 표현으로 바꾸어버린다면, 또는 저자가 말하지 않는 것을 그가 말한 것처럼 만들어버린다면, 그는 작가를 잘못된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고등교육과 종교의 위상
‘multum in parvo적음 속에 많음이 있다’-라틴어 속담처럼 절제된 표현
#비전은 가르칠 수 있는가
맹목blindness은 배울 수 있으면 심지어 여러 세기 동안 그것을 가르쳐 왔다. 교육의 상당 부분은 항상 주입식이었다.
학생들은 무엇을 믿을지 교육받았고, 불필요한 사실이나 대안, 심지어는 자신의 신념까지 무시하도록 권고를 받아왔다. 경건함이란 자신이 들은 것을 믿으면서 맹목이라는 어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반면 한걸음 뒤로 물러나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관찰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고 혼자 힘으로 알아보는 것은 불경한 일이었다.
진정제와 진통제, 그리고 자극제로도 사용되고 있는 사변가의 만병통치약은 바로 고도의 전문화이다.
다량으로 섭취하면, 이 약물은 바로 눈을 멀게 만드는 메틸알코올과 동일한 효과가 있다. 맹목은 또한 좀 더 낮은 수준에서 훨씬 더 분명한 방식으로 교육된다. 상상력과 아이디어가 풍부한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가면 비-창조적이고 반-창조적인 훈육자들에게 억압을 당한다.
찻잔의 시대를 급작스럽게 대체한 것은 전문화 시대였다…전문화 시대가 도래하게 된 주요한 원인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대학 인구의 급속한 팽창 때문이었다.
인문학의 미래를 예측하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경향들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들과 사람들이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런 의문들과 함께 또한 우리는,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물어야 한다.
전형적인 인문학 수업들은 강의, 독서, 토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상당히 모범적인 것으로, 그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독서이다. 강의와 토론은 보조적인 것이지만, 이것들을 불필요하다고 연긴다면 이것들을 가르치는 대학들 또한 필요가 없을 것이다. 도서관만으로도 충분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스스로 독서하는 방법에 대해 배워야 한다. 그런 점에서 강의와 토론은 사람들에게 이런 기술들을 가르쳐주고 그들이 혼자 읽을 때보다 많은 것을 독서에서 얻어낼 수 있도록 고안해야 한다.
훌륭한 교사는 생동감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두더지를 독수리로 변화시킬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을 열어주는 것이 바로 교육의 목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