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공포. 비비안느 포레스테. p274
노동의 소멸과 잉여 존재
비비안느 포레스테는 세기말의 재앙들 가운데 하나-경제제일주의-에 관해 뜨거운 사유를 시도했다.
민중이 찬탈의 진상을 감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예전에는 찬탈이 아무런 논리가 없어도 받아들여졌지만, 이제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것은 참되고 영원한 것으로 바라보도록 해야 하며, 또한 그 시작이 어떠하였는지를 감추어야 한다. 그것이 곧 끝나 버리기를 원치 않는다면 말이다.-파스칼[팡세]
#1
우리는 지금 위대한 속임수 속에서 살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사라진 세계 속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상은 온갖 정책을 동원하여 오히려 그 세계가 영원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백만 명의 운명이 바로 이같은 시대착오적 사고로 인하여 파괴당하고 소멸되었다.
오늘날 빈곤이 가져온 이 참담한 생활은 침묵에 의해 더욱 황폐해졌다. 그러나 우리는 그 황폐한 모습이 바로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불안감을 야기시키는 공허하고 케케묵은 이러한 질문들을 우리가 아직도 계속하는 까닭은, 그렇게 함으로써 가장 두려운 문제를 애써 외면하고 피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질문들을 여전히 제기할 수 있는 세계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질문에 사용된 용어들이 현실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아니 그 용어들이 현실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는 편이 나을 것이다.(생각이 삶이 아니라 삶이 생각이 된다!)
실업 통계? 바로 이점을 생각해야 한다! 통계숫자 속에 교묘하게 가리워진 사람들의 운명이 수정된 것이 아니라, 단지 계산법이 수정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처리하였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이런 식의 통계를 낼 수 있는 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숫자이다. 설령 그 숫자들이 실제 수치에도 일치하지 않고, 드러난 결과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리고 단지 숫자 트릭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숫자뿐이다! 정말 우스운 장난이 아닐 수 없다! 마치 몇 달 전, 승리를 외치며 거드름을 피우던 이전 정부가 하였던 농담처럼. 과연 그들의 말대로 실업인구가 감소하였는가? 분명코 아니다. 오히려 증가하였다. 하기야 지난해보다는 그 감소 속도가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이처럼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있는 동안, 문제의 그 수백만 명(숫자가 아니라 사람임을 유의하자!)은 무한정한 시간 동안, 아마도 죽음의 순간까지 빈곤이나 혹은 빈곤이 바로 코앞까지 가져다 놓은 위협과 동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실 가장 두려운 것은 실업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실업 뒤에 따라오는 고통이다.
머지 않아 풍요로움을 되찾고, 뜻밖의 사고로 인해 잘못 벌어진 상황들을 곧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하였던 거짓 약속에 속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 결과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사회의 비정함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소외되고 있다.
이 모든 사회적 현상이 그들로 하여금 수치심과 비하감을 갖도록 내몰고 있으며, 그로 인해 스스로 비굴한 태도를 갖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치욕감 때문에, 낮은 자존감에서 오는 체념밖에는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수치심만큼 사람을 나약하게 만들고, 생각을 마비시키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수침심이란,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을 철저하게 변질시키며, 무기력하게 만들고,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나 쉽게 지배당하게 하며, 결국은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도록 궁지로 몰고 간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자들이 그 점을 이용하고, 강요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이 느끼는 치욕감 덕분에 권력층은 그 어떤 반대도 받지 않고 법을 만들 수 있으면, 또한 그 어떤 항의도 두려워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법을 어길 수가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막다른 상황을 만들어서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진실을 포기하게 하며, 각성하여 상황을 직면하는 것을 처음부터 단념하게 하는 것이 다름아닌 바로 이 수치심이다. 수치심은 굴욕감을 거부하고, 현재의 정책에 대하여 검토해 보려는 시도를 방해한다. 그리고 이런 체념의식을 악용하고, 체념의식이 만들어낸 지독한 공포심마저 철저하게 이용하게 만드는 것 역시 수치심이다.
한번도 거론된 적이 없는 본질적인 질문? “살아갈 권리를 갖기 위해서는 살아남을 수 있는 ‘자격’이 필요한가?”
유용하다? 이용할 만하다(’착취하다’라는 말은 저속한 표현일테니까!)
‘모든 것을 빼앗긴 자’들의 노동력이 넘쳐나고 있는 오늘날에야 굳이 노예 걱정을 할 필요가 있을까!
인간에게 여전히 잠재되어 있는 야만성과 가장 잘 결합되는 것이, 다름아닌 대다수인들의 평온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이 습관적인 제도들은 겉보기에는 위험 요소들을 완화시키고, 그것이 다가오는 것을 지연시킬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고요함의 폭력’ 속에 우리가 잠들어 있게 만든다. 가장 위험스러운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잠들어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아무런 장애물도 없이 마음껏 세력을 휘두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고요함의 폭력은 끔찍하도록 오랜 세월 동안 은밀하게 계속되어 온 불법의 구속에서 나온다.
애석하게도 우리의 체념은 망각이라는 것과 기막힌 협상을 체결하였던 것이다!
“잘 사는 사람들이 늘 있어야 해. 그들이 없으면,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겠니?” 베파 아줌마야말로 진정한 정치가이며 위대한 철학자가 아닌가! 아줌마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들의 선전활동은 과연 효력이 있었다. 그러나 대중들의 속성을 정확히 판단하여 우회시키고 독점해 버리고 복종시키기 위한 선정활동을 위해 사용된 긍정적이고 매혹적인 수많은 용어들, 그것은 결코 하찮게 생각할 만한 것들이 아니다. 자유시장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이것은 결국 이익을 만들기에 자유로운 시장이라는 말인가! 사회사업계획안이라는 말은 어떤가? 사회사업이란? 수많은 남녀들을 일자리로부터 쫓아내서 살아갈 방법을 빼앗고, 더 나아가 보금자리마저 빼앗는 것을 말하는가!…’노동’이나 ‘실업’에 관련된 단어들이 본래의 의미를 잃은 채 다른 의미로 굳어진 것은,….사고의 도구로서, 문제의 진상을 표현할 수 있는 어휘가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또한 본래의 의미를 작지 못한다면,…이처럼 귀중한 단어들을 잊어버리고 있다니! 우리는 어쩌다 단순한 것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지금과 같은 기억상실증, 혹은 건망증 속에서 살게 된 것일까?
#2
#4
무관심이란 잔인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매우 활동적이며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무관심은 무엇보다도 해롭고 불결한 것인, 권력의 남용과 탈선을 허용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20세기는 바로 그러한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비극적인 증언이다.
하나의 제도를 만드는 데 있어서 국민들로부터 무관심을 얻어냈다는 것은, 부분적인 동의를 얻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승리를 거두었음을 뜻한다. 사실 어떤 체제가 대중적인 동의를 얻게 되는 것은, 다름아닌 대중들의 무관심에 의해서이다. 그때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이다.
무관심은 거의 언제난 다수파에 의해 표명되며, 제지를 당하는 법이 없다. 그런데 최근 몇 해는, 절대적인 지배력이 자리잡았다는 사실에 앞에서 평화로운 무관심을 보여줌으로써 이 분야의 챔피언이 되었던 시기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무관심과 무기력 증세가 너무나 만연해 있다.
우리의 수동성은 우리가 전세계의 상황을 포함하는 정치의 그물망 속에 걸려들게 내버려둔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 책임을 져야 할 정책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한 제도가 아무런 동요도 일으키지 않고, 아무런 논평도 비난도 받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하나의 학설로 강요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 이 비참한 상황은, 온 세상에 편재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이 새로운 제도가 생겨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다. 이 새로운 제도에 우리가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있음을 눈여겨본 자들은 그들의 속임수를 쉽게 활용하고, 또 연장시킬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우리를 위험 속에 밀어넣은 것은 상황이 아니다. 상황은 수정될 수도 있다. 정말 위험으로 안내하는 것은, 한 번 피할 수 없다고 제시된 사항이면 무조건 체념하고 맹목적으로 동의하려는 우리들의 일방적인 태도이다.
두려움을 느끼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공포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대개의 경우 그 총체성이 부차적인 결과, 예를 들면 실업문제 같은 것만 문제삼을 뿐이지, 총체성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 방식이 가지고 있는 지배력을 비난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저 운명이라고 받아들일 뿐이다.
“관습은 정당성을 갖는다. 과거에 받아들여졌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관습이 권위를 갖고 있는 신비한 근거가 바로 이것이다. 이 원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관습의 권위는 약해지고 만다.”-파스칼
그러나 문제는 관습이 아니라, 관습을 뒤엎어 버린 근본적인 혁명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혁명은 경제세계에 자유주의 제도가 뿌리박게 하였으며, 그 제도가 구체화되고 작용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자유주의 시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이 시대의 철학을 강요받고 있다. 공식적으로 표명되거나 분명한 학설로 치장된 일도 없건만, 그 철학은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기도 전에 이미 구체화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영향에 의해, 거역할 수 없는 독재적인 한 제도가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드러내고 활약할 수가 없어서, 몸을 사린 채 숨을 죽이고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으스대거나 목청을 높이지는 못하고,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곤거리고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정말 고요함의 폭력 속에서 살고 있다.
고요함과 그 속에서 자라나는 폭력의 논리는 생략의 원리를 기초로 하고 있다. 생략의 원리라니? 잘난 척하는 고요함과 무례한 폭력의 희생자가 된 비참한 자들의 존재와 빈곤이라는 문제를 아예 생략해 버리고 무시하는 원리를 말한다.
고통의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
그리고 이런 결과의 책임을 아무런 힘도 없는 그들, 즉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는 실업자들 자신에게로 돌리고 있다. 왜냐하면 ㅇ리자리가 완전히 바닥이 났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일자리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명령하고 있으니까.
이런 일은 단순히 불공평한 처사라고 보아넘길 일이 아니다. 이것은 잔인한 부조리이며,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멍청한 짓으로서, 소위 선진국이라는 우리 사회의 거만한 태도를 웃음거리로 만들고도 남을 일이다.
고용능력을 가지고 있고, 또 고용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에 ‘국가를 움직이는 힘’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바로 그 목적 때문에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고, 면세 혜택을 받는 등 아낌을 받고 있건만, 실제로는 고용창출은커녕 오히려 더 거리낌 없이 해고를 단행하고 있다. 심지어 고용창출을 위해 특별히 지정되어 특혜를 받고 있는 기업들까지도 마찬가지이다.
책 속에 나오는 가난하 불량한 청소년 가보로슈에게는 따뜻한 눈길을 보내는 그들이지만, 어쩐 일인지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수많은 가보로슈에게는 증오심을 갖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 세계의 패권은, 바로 이 세계의 논리와 지식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처참한 결과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들이 위선적으로 교묘하게 보여 주는 모습이 어떤 모습이든지간에, 실제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은 오로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위해서만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면, 무조건 모두에게도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심겠다는 거만함을 가지게 만든다. 그러니 그들의 논리를 따르면, 하급의 세계가 그들을 위해 희생당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리하여 우리는 그들의 설득력 있는 책략의 걸작품을 목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책략은 우리를 이렇게 설득한다. 즉 지금으로서는 거대한 다수를 희생한 빈곤화 현상과 사회적 붕괴 현상을 연장하거나, 심지어 이를 촉진시키는 정책들빡에는 있을 수 없다고, 또 그것만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그리고 이 모든 노력이 바로 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마치 후렴처럼 되풀이되고 있는 첫번째 논쟁거리는, 들을 때마다 마술처럼 우리를 유혹하는 ‘고용창출’이라는 장황한 약속이다. 그것이 퇴색한 상투적 문구로 이루어지는 공허한 약속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약속을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있겠지만, 그것이 곧 해결책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해결책을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검토하기도 전에 무조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협박하게 되면, 반드시 본질적인 문제를 변질시키고, 비평을 마비시키게 된다…다른 묘안이 있냐고? 물론 없다!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상대방은, 해결책이 없으면 문제도 사라진다는 것을 예상하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같은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이성적인 일인가!
해결책? 아마도 그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분노를 일으키고 있는 어떤 음모에 대해 진실을 밝히고, 불행한 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아예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인가?
바로 이런 것 때문에 날림식으로 만들어진 속임수 ‘해결책’들과 위장되고 부정되고 숨겨진 문제들, 그리고 비난받는 질문들이 무수히 난립하게 되는 것이다.
해결책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해결책이 없다는 것은, 문제가 잘못 제기되었으며, 진짜 문제는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한 가지 문제를 놓고, 그 문제가 과연 올바로 제기된 것인지를 검토하기도 전에 문제의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부터 요구하게 되면, 그 확신은 가설로 굳어지게 되고, 따라서 제기된 문제마저 왜곡시키게 된다. 그렇게 되면 본래의 문제가 당연히 만나게 될 무시할 수 없는 장애물들과 절망적인 결과에 이르지 못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된다…본질적인 문제를 우회하고 피하고 왜곡하는 데만 관심을 쏟고 있을 뿐, 정작 본질에는 조금도 다가가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본질적인 질문들을 회피하면, 지금 당장은 가장 위험한 문제가 터져 나오는 것을 면할 수 있다. 그러나 위험한 사태를 두려워하게 되면, 오히려 최악의 사회를 향해 더욱 달음질치게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정치는 이런 질문들에서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우리가 이런 질문을 하지도 못하게 막고 있다. 우리가 혹하기 쉬운 다른 질문으로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그런 질문에만 여론의 초점을 맞추며, 엉뚱한 문제들 주위에만 매달리게 하고 있다…노동이 없어졌는데고 아직까지 우리의 삶을 노동이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속이는 현상들이 이처럼 계속될 때, 엉뚱한 곳에 관심을 두고 있는 우리의 방관적인 태도의 습관은 점점 악화될 것이다.
지금이 ‘위기’의 시대라고 일컬어지고도 남을 시대인 만큼 그들의 이익은 더욱 증가하고 있으며, 그 위기가 가져다 준 효과는 경제시장에 아주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국민들은 공포로 인해 기가 꺽이고, 정신이 아득한 상태로 있게 되었으며, 게다가 임금은 아주 헐값으로 떨어진 것이다. 또한 정부는 너무나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경제에 예속되어 있거나, 적어도 그 어느 때보다도 사경제에 의존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사경제가 누리고 있는 이점으로 작용한다([21세기자본],자본소득율이 노동소득율을 앞질렀다)
진실이 밝혀지지도 않은 채 계속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 급하게 접목된 대부분의 ‘해결책’도 사경제의 이익에 한몫 하고 있다. 대충 허술하게 엉터리로 조작된 이 ‘해결책’들이 실패를 하고 있다는 것은, 현상황이 안고 있는 문제에는 단 하나의 해답밖에 없음을 증명해 준다. 그 해답은 바로 이 모든 상황을 그저 곰팡이가 생기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장된 껍질, 그 모순들까지 살펴보기 위해서 그 사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바라볼 때, 비로소 위장되지 않은 사건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조작된 필연적 귀결 속에 숨지 않은 본연의 모습을…
허구적인 해결책이 없어졌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를 헷갈리게 하지 않는 진정한 문제들을 인식할 기회가 올 것이다.
#5
합법적으로 소속될 수 있는 유일한 곳인 사회가 그들에게는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유일하게 활동중인 사회가 그들을 거부하였고, 또한 유일하게 그들 가까이에 있는 사회가 그들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에 존재하는 한 가지 모순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곧 노동시장이 위험상태에 빠져 소멸되어 가고 있는데도 우리 사회가 여전히 ‘노동’, 즉 고용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권리를 상실한 아이들? 그들을 위한 일자리가 없다!(고용이 없다!)
#6
지성의 사명은? 잘난 척하는 그들의 한심한 태도와 말에 대해 비평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고, 비평할 수 있는 방식을 제시하는 것. 그리고 그들의 말이 아닌 다른 말도 들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침묵의 소리라도 좋다….쓸데없는 말의 홍수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사고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될 것이다.
사고는 확실히 저절로 배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라도 구할 수 있는 것이며, 그 무엇보다도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두뇌를 가진 인간인 이상 가장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장 쉽게 외면하며 피하는 것 또한 사고이다.
사고한다는 것은 아예 잊혀질 수도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사고하는 일을 잊어버리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우리가 사고하는 것을 반대하고, 심지어 우리 자신부터도 반대하는 만큼, 사고에 열중하려면 뻔뻔할 정도의 대담성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사고만큼 우리를 잘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듯 맥없이 포기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사고는 모든 행위 준에서도 극치의 행동이다. 사고만큼 모든 것을 전복시킬 수 있는 행동은 없다. 사고보다 더 두려움을 줄 수 있는 것도 없다…사고한다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사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고한다는 그 ‘행동’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그 어느때보다도 사고하지 못하게 하고, 사고하는 능력을 갖지 못하게 하려는 음모가 은밀하게 번지고 있다. 그리고 은밀한 만큼 더 큰 효과를 얻고 있다.
그러나 대중들을 모으고 더욱 복종시키기 위해서, 권력을 가진 자들은 사고하는 데 필요한 힘들고 위험한 연습을 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의식구조를 다른 곳으로 돌린다. 그리고 대중들을 더욱 손쉽게 다루기 위해서 문제의 정확성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며, 연구하지도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사고를 위한 훈련은 몇몇 사람들에게만 주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들만이 자신들의 권력을 지켜 나갈 것이다.
“Mallarme is a machine gun!(말라르메는 기관총이다!)”
#7
‘어려운’ 지역의 젊은 주민들에게 있어서 말레르메의 이름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기관총의 이름이 아니라 공허감이다. 여러 가지 계획, 장래, 마음에 그리는 행복, 아주 작은 소망, 이런 것들의 부재와 거기에서 오는 공허감…
교육은 좀더 ‘현실적’이어야 한다? 오로지 ‘직장에 끼워넣기’만을 점점 더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권고한다. 하지만 직장에 아이들을 끼워넣을 수 있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교육과 사회가 말하고 있는, 소위 ‘구체적’이라는 방법과 계획이다.
직업을 찾는 일에 전념하는 동안은, 그들을 그림처럼 얌전한 자들로 붙들어둘 수가 있을 것이다. ‘한쪽으로 제쳐놓은 자처럼’이라는 말은 반 고흐가 한 표현이다. 이런 표현을 쓴 것을 보면, 그는 뭔가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이 표현처럼 지금의 젊은이들은 이런 말을 표어처럼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자처럼 존재하는 것이 더 낫다.”
#8
정부 보조금, 세금혜택,..친절하게도 기업은 이러한 조건을 모두 받아들인다. 그러나 고용은 확대하지 않는다. 게다가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성싶으면 다른 지방으로 겨가거나, 아니면 그렇게 하겠다고 위협한다. 그러자 실업이 증가한다. 정부는 다시 조건을 제시한다. 기업은 이를 받아들인다. 고용을 확대하지 않는다. 실업이 증가한다….(기업의 목적은 고용확대가 아니라 이윤 추구일뿐!)
정말로 기업의 성장이 고용을 창출하리라고 믿었던 것인가? 그렇다. 그들은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다. 아니 그렇게 믿으려 애쓰고 있거나, 적어도 그렇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업에 대한 보조금’을 지급함으로써 창출된 고용의 수는, 기대했던 수치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것도 조금이 아니라 엄청나게 못 미친 것이었으나, 그러나 이것은 이미 예측한 바였다…지금은 그 사실이 어엿이 입증되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고집을 부리다니!
그렇다면 기업이 더 이상 고용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고용을 하지 않는다는 그 뚜렷한 현실을, 우리가 직시하지 않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분명하게 이 상황에 직면해야 한다.
새로운 ‘부의 창조’ 방식? 노동이 필요없는 금융게임!
예전에는 노동이 필수적인 것이었지만, 이제는 전혀 필요없게 된 세상에서 살고 있단느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포함하지 않고, 실재적인 재화를 생산하지도 않는 이 시장에다 기업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점점 더 자주, 점점 더 많은 것을 투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익은 다른 곳에서보다 더 빠르게 얻어지고, 더 많이 얻어진다. 이 기업들이 고용을 확대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허락한 보조금과 그밖의 혜택들이, 바로 이같은 아주 유리한 금융게임을 허락한 것이다!
가장 빠르고 손쉬운 이윤 성과를 올리는 방법? 고용비용절감!
비록 존재하지도 않는 일자리 속에 어떤 비싼 값을 치르고라도 국민들을 집어넣으려 하고, 고용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음이 확연한 회사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용의 자리를 마련하려고 하는 이상한 편집증…다른 길을 찾아보려는 시도를 완강히 거부하게 만들고 있지만…실은 그 길을 걷는 사람 모두를 몰락케 만드는 길이다.
그 편집증은 랭보가 상기시켜 준 공포, 곧 ‘경제가 주는 공포’로부터 오는 불행이 영원히 계속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공포를 새로운 시대가 문을 열기 전에 항상 만나게 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강조한다.
“불안감이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준 덕분에 고용주들이 그들의 인건비를 줄일 수 있게 되었으며, 간혹 고용도 창출할 수 있게 되었는데…그 고용이라는 것은, 임금도 아주 낮을 뿐만 아니라 임시직에 불과한 서비스 부분에서의 고용을 말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앞으로 최악의 사태에 직면하게 될 국민들이 미리 적응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국민들이 최악의 상황을 직면토록 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미 마취된 무감각한 상태에서 그 상황을 참고 견디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아직은 몇 자리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 수가 극히 적은 일자리를 얻도록 이들을 ‘자극’하는 유일한 이유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불행한 자들이 어쩔 수 없이 수락한 비참한 가격의 노동력을 이들 고용주들이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아마 고용창출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이들이 먼저 창출하는 것은 불안감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불안감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하다못해 다른 대륙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간다.
#9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혁명을 겪었다. 그것은 근본적인 혁명이었음에도 사전에 선언된 이론도 없이, 밝혀진 이념도 없이 소리없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아무런 선언도, 아무런 주석도, 아무런 통고도 없이 지극히 조용히 일어난 사건들에 의해 사건들 속에서 인정된 혁명이다. 역사 속에, 우리가 존재한느 이 무대 위에 소리없이 정착한 사건들…그 혁명은 자리가 완저히 잡히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난, 그리고 나타나기도 전에 앞으로 자신에게 반대하게 될 저항세력을 미리 막고, 마비시킬 줄 알았던 거대한 운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10
#11
#12
이처럼 암암리에 위협을 받고 있는 우리들은, 그들은 저주받은 사회적 공간 속에 밀어 놓고 꼼짝 못하게 만들고 있다. 무정부 상태와도 같은 이곳은 자체네에서 스스로 붕괴하도록 되어 있지만, 정신을 잃고 있는 우리들은 이상하게도 그 안에 계속해서 머물고 싶다는 열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이 세계의 장래는 다소 고의적으로 프로그램된 우리 존재의 부재와 관련하여 계획되고 조작된다.
사랑은 모호하고 선언하기 쉬운 것이다…그런 아주 조금의 사랑을 기대하기보다, 좀더 대담한 것을 소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까? 좀더 껄끄럽고,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고, 다루기 힘들 정도로 엄격한 감정, 어떤 예외도 거부하는 대담한 감정을 우리 모두에게 기대한다면 미련한 짓일까? 즉…존중심을…

“경제적 공포 | 뜨거운 사유”에 대한 1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