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을 위하여. 강신주. p405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김수영
자유가 없다면 인문정신은 숨을 쉴 수도 없고, 창조적인 수많은 작품도 존재할 수 없다.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벙법을 가진 삶은 삶이 아니다. 미래의 삶을 현재에만 타당한 방법으로 통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방법을 가진 삶은 박제된 삶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예술도….미리 정해진 방법이 있다면, 예술은 창조성을 잃고 단순한 기술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인 김수영도 온몸으로 밀어붙이면 그것이 바로 시가 되고, 삶이 되고, 사랑이 된다고 이야기 한다.
미리 정해진 방법이 없기에 우리는 자신의 온몸으로 밀어붙일 수밖에. 이럴 때 삶도 사랑도 예술도 자신의 것이 되니까. 온몸이 알몸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만의 옷을 입기 위해서 우리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벗어던져야만 한다. 옷을 벗어던지면 춥거나 부끄로울 거라며 두려워하지 말자. 한마디로, 알몸이 되는 것에 쫄지 말자.
한 번밖에 없는 자신의 삶을 자신의 스타일로 살아 내야 한다! 이것이야밀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자 인문학 이 추구하는 자유정신 아니겠는가.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張勉)이란
관리가 우겨 대니나는 잠이 깰 수 밖에
4.19 혁명 이후 등장한 장면 민주당 정권이 이승만 독재 정권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김일성시 낭독으로 시작한 강연. 당혹스런 표정의 청중들!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우리에게 김수영이란 인문정신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우리가 아직 50년 전 김수영이 도달한 인문정신 근처에도 다다르지 못했다는 사실이. 권력을 무서워하고 검열에 찌든 정신이 어떻게 자유정신과 민주주의를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문정신이 나약해진 이유? 정치권력과 거대자본 사이의 공모 때문일 것이다. 분명 권력이나 자본은 과거보다 훨씬 더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는 허용된 자유가 기만적인 자유라는 사실, 다시 말해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에 갇힌 동물보다 자연공원에 방목된 동물이 더 자유로운가. 겉으로는 자유로워 보이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하나도 없다. 자유를 표방한 기묘한 억압에 지나지 않는다.
“한계를 넘지 않는다면, 너희들 마음대로 해도 좋다.” 이것이 바로 허용된 자유의 논리이다. 허용된 자유를 자유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검열하게 된다.
자유정신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니까 살아 낼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모방하는 삶이나 억압된 삶은 모두 자신의 삶을 자기 것으로 살아내지 못하는 실패한 삶이다.
권위주의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무색무취의 마취가스를 내뿜을 때, 김수영은 그것을 알리는 비상경보기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날 선 시인은 자기만의 풍경을 그린다. 그래서 시는 불친절하다.
김수영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시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시인이 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벽(壁)’을 보면 된다. ‘벽’이란 한계점이다. 고치려야 고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다.
시가 완성되었는데도 시인이 변하지 않는다며, 시가 제대로 쓰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시가 완성에 가까워진 만큼, 시인은 딴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칸트는 자유란 “새롭게 행동을 개시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자유를 각인시킨 거제도 포로수용소
“나는 지금 자유를 연구하기 위하여 [나는 자유를 선택하였다]의 두꺼운 책장을 들춰 볼 필요가 없다”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작품? 다시 말해 “자기의 나름의 스타일”을 가진 시를 쓰는 순간 시인은 외칠 것이다. “이제 죽어도 좋다”고 말이다
김수영은 박인환이나 김춘수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그들이 자신만큼 바닥까지 내려간 삶을 체험하지 않았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의 눈에 동시대 모더니즘 작가들의 시는 현란한 기교만 난무할 뿐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이 사랑을 찾는 듯한 절박감과 진실함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농부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삽질을 한다. 진짜 농부는 부삽질을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자기의 노동을 모르고 있다. 내가 나의 시를 모르듯이 그는 그의 노동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단독성을 밝히는 지성의 화염
단독성?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성
일반성과 특수성의 도식이 가장 극적으로 적용되는 사례가 자본주의다
돈은 ‘일반성’을, 사람이나 사물은 ‘특수성’을 상징. 일반성이 특수성을 지배한다는 지배와 위계의 논리가 탄생한다
일반성/특수성에서 단독성/보편성으로(들뢰즈,[차이와 반복])
대체할 수 있는 개별자 vs 대체 불가능한 단독자
오직 단독적인 삶을 살아 낸 사람만이 보편성에 이를 수 있다
‘아이’와 ‘아이들’의 차이?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바꿀 수 없는 단독적인 아이라면, ‘아이들’은 아이라는 일반성에 포섭되는 특수한 아이들을 가리킨다(대체 가능한 아이)
불행히도 오늘 김수영은 자신이 아들의 내면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선생뿐 아니라 “나는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거꾸로다? 아이의 내면보다는 자신의 교육관이 더 중요하다고 전도된 생각도 여기서 출발한다
김수영이 추구했던 새로움은 단독성의 발견에서 오는 새로움이었다…반면 김춘수와 같은 모더니스트들은 새로운 시적 테크닉은 시도했지만 단독성을 포착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당연히 그들의 시는 그만큼 시적 보편성도 상실했다…머리로만 쓰는 시와 온몸으로 쓰는 시가 이토록 확연히 다른 운명을 걸을 수밖에 없다
단독적인 것이 아니면, 감상만 남을 뿐 아무 의미도 없다.
#가장 구체적이어서 가장 단독적인 것, 시
시인 본인의 단독성이 응결되지 않은 시는 가짜 시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동시대의 시인들은 현실의 낡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시만 새롭게 쓰려고 한다. 그들은 결국 남의 제스처, 정확히 말해 서양 시민들의 제스처만을 흉내 내는 것이다.
‘반시대적’, ‘시대착오적’? 진정한 시인은 세상 물정을 제대로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에 발을 딛고 미래에서의 단독적인 삶을 꿈꾸는 모든 사람에게 불가피한 숙명인지도 모른다.
시는 감성적인 글? 시를 통해 독자들은 사태에 예민해지는 경험을 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벌어지는 일종의 착시 효과일 뿐이다. 오히려 우리가 강조해야 할 것은 시인의 지성이나 의지와 같은 지적인 측면 아닐까? 시인은 인문정싱의 수행자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단독성은 개인의 자유를 가능하게 하고, 보편성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를 가능케 한다.
구름 위의 시인? 이제 우리는 안다. 시가 난해한 이유는 그것이 추상적이어서가 아니라 구체적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추상적인 사유에서 우리의 삶이나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물들은 모두 교환 가능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인의 눈에는 지금 존재하는 모든 인간과 사물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경험된다.
각자 도는 팽이. 모든 돌고 있는 팽이는 자기만의 중심을 가지고 돈다. 그런데 두 팽이가 마주친다는 것은, 어느 하나다 다른 팽이의 회전 스타일을 수용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팽이도 쓰러지고 만다. 팽이만 그런가. 인간도 마찬가지 아닐까? 자신만의 스타일로 살지 못하고 남의 스타일을 답습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내지 못한다.
공공연한 친일 행각의 서정주의 유려한 서정시?
“분단과 독재의 시대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아로르노
거짓없이 자신의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모더니티다
“부디 공부 좀 해라…철학을 통해서 현대 공부를 철저히 하고 대성하라. 부탁한다.”-고은에게 보내는 편지. 당연히 자칫하면 김춘수처럼 내용 없이 이미지의 시만 남발하는 테크니션으로 전락할 수 있다
“이제 시의 시대는 끝났다. 곧 지루한 산문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파리 코뮌 지배 당시 승리에 취한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신문 컬럼의 일부
#언어의 숙명과 시인의 소명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
“우리는 불행처럼 우리를 자극하는 책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아주 깊이 상처를 남기는 책이 필요하다. 이런 책들은 우리가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느껴지고,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숲으로 추방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심지어 자살처럼 느껴질 것이다. 책은 우리 내면에 얼어 있는 바다를 내려치는 도끼 같은 것이어야만 한다.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카프카[친구, 가족, 그리고 퍈집자들에게 보내는 서신]
#자기 힘으로 도는 팽이가 되어라
위태로운 4.19혁명
모든 권위에 침을 뱉어라
#자유를 살아 내다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패거리 정신을 박차는 일은 또 다른 억압과 시험의 시작이다
자유로운 것만이 새롭다
순수와 참여를 넘어서는 온몸의 시학
#불온함은 긍지다
경직된 이념을 넘어 생생한 삶으로
정치적 자유가 없다면 문학도 없다
자유가 없는 곳. 인간이 제각기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힘들어지는 사회가 바로 억압 사회다. 밖으로 소리를 낼 수 없으니, 소리는 내면으로 침잠하게 된다.
구조의 억압은 한시도 쉬지 않는다. 항상 자유를 읊고, 자유를 살아라
야만의 사회를 끝내는 메시아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때 들리는 불협화음’이다
#편집자의 말
나는 늘 “특이한 아이”였다. 내가 ‘남다르다’고 평가받은 이유는 생각보다 평범하다. 옳다고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말해야 하고, 때로는 자기 의견을 관철하고자 싸울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가르침이었고, 나는 그 말을 따랐기 때문이다. 일상적이고 단순한 진리 같지만, 실제로 이렇게 사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도 잘 꺽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주변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남다른 사람은 불편하고, 불편을 준다. ‘특이한’ 사람은 불편한 사람이 되고, 불편한 사람은 외로워진다. 자연히 삶은 고통스러웠고, 나는 홀로 서러웠다. 그때, 김수영을 만났다.
“인문학은 다른 학문과 달리 고유명사의 학문이다. 그래서 정몽주의 시와 김수영의 시는 다르고, 공자의 철학과 니체의 철학은 다르다. 당연히 사람들에게 정몽주가 쓴 시의 형식과 내용을 반복하라고 강제하거나 공자의 철학만을 읊조리라고 강요하는 것은 인문정신에 반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강신주라면 다른 누구도 아닌 강신주다운 글을 써야만 하고, 쓸 수 있어야만 한다. 정치적 억압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검열 의식이 인문정신을 고사시킬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인문정신이 목숨 걸고 정치적 억압에 맞서 싸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김수영을 위하여 | 김일성 만세?!”에 대한 2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