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의 건축. 정기용. p382
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 감응? 시간, 식물, 사람의 회복
아직도 농촌을 ‘개량’의 대상이나 구제해야 할 문제로만 바라보는 한 아무것도 제대로 해결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잘못된 질문을 바로 잡아야 한다. 농촌을 타자화하는 버릇을 버려야 하고, 세계시장 속에서만 바라보는 농업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농촌은 없다. 우리들의 소중한 국토가 있을 뿐이며, 농촌과 도시 사이만 있을 뿐이다. 농촌을 늘 변방으로 보고 자기가 자신의 일부를 식민지 경영하듯 하는 자가당착을 벗어던져야 한다. 지금 농촌은 도시민들의 최후의 보루처럼 남아 있다. 살기는 모두 도시에 살면서 늙은 부모들을 인질로 잡고 있다. 그 후손은 전 국토를 반나절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농촌 식당에서도 미국산 수입쇠고기 태우는 냄새가 진동한다. 전국은 이미 오래전 세계화 되었다. 모든 농촌은 ‘도시화’의 오랜 휴유증을 앓고 있으면서 동시에 세계화의 여파에 시달리는 중이다. 따라서 이제는 형식과 구호에만 머무는 ‘마을 만들기’ 식의 사고에서 탈피해 농업과 농촌의 문제를 전국토의 공간 재편 문제와 함께 생각할 때가 온 것이다.
농촌의 현실? 이 모든 현실적 문제를 사실은 주민들은 다 알고 있다. 소위 ‘전문가’들만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무주 안성면 노인들이 왜 봉고차를 빌려서 대전에 가서 목욕을 하고 오는지, 주민들에게는 면사무소보다 더 필요한 것이 면 단위 공중목욕탕이라는 것을 소위 공간의 전문가들이란 사람들만 알지 못한다. 아주 사소한 이런 것들을 섬세하게 배려하는 일이 전문가들과 공공의 서비스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다.
의외로 문제는 간단하고 해법은 명료한다. 문제도 안성면에 있고 해법도 안성면에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대체로 해결할 문제가 있거나 새로운 과제가 있으면 모두들 ‘선진 사례’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사례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례에 불과하다. 외국의 사례이면 더욱더 그렇다. 땅과 기후가 다르고, 예산의 배정과 규모가 다르며, 발주방식과 건물의 가치를 계량하는 방식이 다르고, 공사단가가 다르며, 공사방법이 다르고, 유지관리 방법이나 기술이 다 다르다. 모든 것이 다 다른 이질적인 나라의 것을 껍데기만 모방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숨겨진 문제를 올바르게 알아내기 위해서는 ‘정확한’ 질문, ‘필요한’ 질문이 우선되어야 한다(질문이 답이다!)
“어떻게 건축을 해야 할 것인다?” 이 책은 바로 이런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기록이고 고백이다
언제 끝날 줄 모르는 인구 감소세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모든 도시기본계획서들은 인구 증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서 다른 질문을 던질 것이다. 도시냐 농촌이냐도 아니고, 전원주택이냐 아니냐 하는 상업적 용어에 매몰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디에서 나는 자연과 더불어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 하는 점으로 이행할 것이다. ‘인간답게란’ 혼자서 외롭게 자기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따로 또 같이’의 가치관을 다시 공유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도시유목민은 다시 인간이 될 것이다. “이웃과 따로 그러나 함께” 살, 소위 잊혔던 공동체의 힘을 살아날 것이다.
지금 이 땅은 모듬살이의 목적과 방법에 큰 전환기를 맞고 있다. 고정된 답은 없다. 우리가 답이다. 우리의 옛 역사와 문화의 지혜에 강제로라도 접속하고 변화를 성찰적으로 맞이하면서 미래를 도모해야 한다면, 이제 하나의 비전을 세우자. 성찰적 대한민국(meta. Korea)을 위해 높고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자. 마음만 먹으면, 우리가 서로를 믿는 주체가 된다면 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내가 무주에서 배운 평범하지만 확실한 진실이다.
##우연과 필연: 다섯 가지 만남의 풍경들
#첫번째 만남: 국토
모든 역사가 그렇듯, 우연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의 결합은 매우 중요하다. 우연한 사건이 어떻게 필연적인 것에 역이는지 또는 필연적인 것이 어떻게 우연한 사건에 의해 전환되는지가 필자와 무주의 인연에도 담겨 있기 때문이다(무주 군수와의 인연)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보이는 모습만을 보고 욕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어휴, 저것도 건축이야?” “아니 어떻게 저런 곳에서 사람이 살수 있어?” “저 건물은 은행인지, 파출소인지, 관공서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등등 한국의 건조환경에 대해 자조와 부정으로 일관해 왔다. 이에 대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성찰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의 문제라는 게 공감했다.
길은 풍경의 저장창고다. 할아버지가 보았던 풍경을 아버지가 바라보고 나도 같이 동일한 풍경을 본다는 것은, 나 또한 길의 역사에 편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토기행: 구미-안동-무주
그 시점에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사는 도시에 대해 ‘판단’하기 이전에 올바르게 알고 그 사실들을 축적하는 것이었다.
현존하는 도시는 모두가 이중적이고, 설익은 과일처럼 미완성이다. 그런 풍경이 짧은 국토여행에서 느껴진 서글픔이다.
#두번째 만남: 땅과 사람들
평생 잊지 못할 풍경? 무주 안성벌판? ‘아니 한국 땅에 변치 않고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풍경이 아직 남아 있다니!’ 아파트가 없는 순수한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이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농촌의 개발? 땅값 올리기? 결국 한국의 많은 농촌 거주민들은 ‘높은 가격으로 땅을 팔고 농촌을 탈출하는 것’에 기대를 걸고 자본에 굴복하게 된다…모든 농촌을 자본의 논리로 개발한다면 누가 남아서 오래된 땅을 지키고 살아갈 것인가?
이렇게 오래된 만남은 또 다른 만남을 예비하고 있었다!
마을회관 상량식, 김세웅 무주 군수와의 만남. “서울의 큰 집만 짓던 분이 어떻게 이 작은 마을에 와서 마을회관에 손을 대게 되었습니까?”
공공건축은 문화적인 일이다. 한 사회의 문화적 지표가 되고 나아가서는 삶이 문화로 전환되는 것이기 때문에, 건축이 문화가 되게끔 이끌어 갈 수 있는 원칙과 능력, 책임이 따라야 한다
사람들이 농촌에서 살아가는 것에 조금이라도 자부심을 느낄 때, 농촌의 미래는 희망이 있다.
그리고 특별하게 무주에서 배우게 된 중요한 사실은 바로 사람과 식물과 시간이라는 요소에 관한 것이다. 이 세 가지는 어떻게 보면 무주 프로젝트의 핵심을 이루는 큰 줄거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축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과 식물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지, 건축가각 처음부터 다 건축을 완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식물은 무엇으로 건축을 완성시키는 것인가? 바로 흐르는 시간이다.
건축가들의 가장 본질적인 모순은 자기가 설계한 건물에 살지 않는다는 점이다…그래서 건축가들의 어려움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기에 앞서 미래를 예측해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가장 큰 어려움은 지금까지 축적된 지혜와 지식을 동원해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오늘 결정해야 하는 데 있다. 그래서 건축가는 이런 어려움에 대응하는 방법은 건축이 지닌 근원적인 모순을 직시하고 그 한계를 미리 예측하며, 불확정적인 것까지 오늘 확정할 수 있는 지혜와 상상력을 겸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건축가가 하는 일은 궁극적으로는, 공간이 아닌 시간을 설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간은 수단에 불과하고, 시간은 건축의 목적이 된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여러 변화에도 불구하고 건축이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요소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찮게 바라보는 풀과 나무다. 바로 이 식물들이 사람들의 삶과 정지된 건축을 감성적으로 역어내는 기능을 한다. 그런 풀과 나무들을 필자는 무주에서 새롭게 만났다(하나뿐인 등나무 공설운동장)
*도시와 농촌의 건축, 이웃과 자연의 소명
도시의 삶은 ‘본래 그들이 원하지 않았던 삶’이기 때문에 모든도시민이 존재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농촌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우리는 도시에 있으면서 없다? 정주하면서도 정주하기를 거부하는 이율배반적인 삶의 형식을 고착화하는 아파트…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웃과 자연으로부터 멀어진 것이 아닐까?
모든 이웃은 잠정적일 뿐이다. 도시의 주민은 있는데 시민은 없다.
주민들이 원하는 안성주민자치센터(면사무소)? 공중목욕탕
부남면 주민자치센터. 부남면의 정체성 찾기: 별 보는 집, 천문대, 어떻게 하늘의 별들을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사람의 삶, 자연의 삶
#공설운동장: 감응
모더니즘 건축에서 우리가 놓쳤다고 하는 자연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자연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고 ‘조경’이라고 하는 부수적인 요소 속에서 인공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여보게 군수, 우리가 미쳤나! 군수만 본부석에서 비와 햇볕을 피해 앉아 있고 우린 땡볕에 서 있으라고 하는 게 대체 무슨 경우인가. 우리가 무슨 벌 받을 일 있나? 우린 안 가네.”
필자는 그 순간 스탣드 외곽에 작은 등나무를 심어놓은 군수의 행동 자체가 건축을 다 해놓은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등나무를 심으면 파고라와 같이 등나무가 타고 올라가서 그늘을 만들 것이라는 이 평범한 발상! 그의 평범한 경험과 관찰에서 나온 이 발상은 무엇보다도 군수가 주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군수가 거의 다 설계해 놓은 이 꿈의 ‘그림자 프로젝트’에서 필자가 한 일은 군수의 말이 현실이 되게 번역해 낸 것 뿐이다!
총체적으로 접근하는 건축? 공공디자인이라고 하는 것은 급조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건축과 역사와 시간이 만들어내는 공동의 창작품이다
#무주시장, 현대화프로젝트
우리나라의 모든 재래시장은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그것은 무주에서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농촌의 5일장과 같은 시장은 풍전등화와 같이 아주 가늘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도시화, 현대화한다는 것은 대자본이 소자본을 질식시켜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24시간 편의점, 대형 할인마트 등이 대도시는 물론 무주 같은 작은 읍 당위에도 침투해 들어와 재래시장은 거의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해 있다.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는 대전-통영 간에 펼쳐진 작은 도시들의 교통을 평리하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작은 마을들의 영세한 상권마저도 위태롭게 하고 있을 것이다.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은 지역이 균형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이 아니라 불균형이 증대된다는 것은 의미한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지역균형발전은 정부가 정책을 어떻게 수립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오늘 농촌으로 가서 살 결심을 하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제 농촌은 60,70년대의 농촌이 아니다. 도시에서처럼 모든 편리함을 다 갖출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편리하게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건축의 총체적 접근
#청소년수련관: 풍경과 집합
무주의 작업들을 통해서 깊이 느낀 점이 있다면, 사실상 문제도 무주에 있고 그 해법도 무주의 땅과 무주의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좋은 사례가 늘 외국이나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필자는 ‘등나무 운동장’에서도, 안성명 주민자치센터를 계획하면서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외국이나 다른 고장의 성공적인 사례들은 단순히 참고할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어떠한 공공건축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을 열심히 관찰하고 읽어내는 속에서 저절로 해답이 떠오를 것이라는 확신이다.
#곤충박물관과 자연학교: 곤충과 공생
최재천 교수의 설명, “곤충이라는 것은 말이죠.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종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식물이 없으면 홀로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식물 또한 곤충이 없으면 지속할 수 없지요.”
그 순간 최채천 교수의 말을 쫓아가면서 설계를 다 마쳐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설계도면을 그렸다는 것이 아니라 필자가 곤충박물관에서 다루어야 하는 것은 곤충 그 자체가 아니라 곤충과 식물의 공생관계라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그래서 필자는 최재천 교수의 말에 감응해 곤충박물관에 식물원을 접목시키기로 했다.
##농촌의 문제인가
#농민의 집: 준비되지 않은 미래
#된장공장: 새로운 도전
한국사회가 근대화운동을 벌이면서 산업화의 길목에 들어서면서부터 농촌은 늘 개량의 대상이고, 보살펴야 하는 영역이고, ‘농가 소득 증대’라는 기치 아래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에서 구출해야 하는 대상이다. 한마디로 산업화가 도시화를 의미한다면, 도시화는 농촌의 몰락을 딛고 자라나는 괴물인 셈이다. 도마뱀이 자기 꼬리를 잘라 먹듯, 농촌의 문제는 도시화와 연관해 있고, 참으로 비극적이게도 농촌은 상대적으로 산업화의 걸림돌이고 도시에 비해 늘 미개한 사회로 간주된다.
그러나 역설정으로 사람들은 명절이 되면 고향/농촌을 찾아 자신의 뿌리를 확인한다. 뿌리가 병들고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몸부리을 쳐도 외관상으로 옛날과 비슷한 형상만 있으면 고향 땅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건축가에 대한 개념이 전무한 실정? 집의 형상과 구조를 물리적으로 고안해내는 사람? 그것은 수단이고 생각의 결과물일 뿐이다. 그 건축 속에서 진행될 오늘과 내일의 삶을 조직하며, 또한 시대마다 건축에 위임하고 싶은 정신과 삶을 반영한는 일을 하는 사람이 건축가다!
##지속가능한 사회
정보화 사회와 전국이 일일생활권으로 진입한 지금 모두가 도시에서만 살기를 원하는 것은 문제다. 특히 자녀가 다 성정해 노후를 맞이한 사람들은 물론 수많은 독신근로자, 자영업자, 지식인 등은 앞으로 공기 좋고 물 맑고 모든 복지시설이 갖추어진 무주와 같은 농촌으로 유턴할 것을 필자는 확신한다.
#종합복지관: 평등한 사회, 사회가 원하는 건축
지금 이 시대는 사회적 강자로서 ‘세계화’라고 하는 배애 올라탄 사람들과 세계화는커녕 하루하루의 생존조차 힘든 서민들로 나뉘어 있다…하지만 소외계층이나 서민들은 극빈자들처럼 구호의 대상이 아니라 평등하게 살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름 붙인 것이 바로 ‘사회적 약자’일 것이다.
건축은 대충하고 인테리어만 잘하면 된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골조로 아파트가 지어진 다음 번쩍번쩍하는 재료로 내부공간을 치장하고 희한한 조명으로 연출한 공간의 효과가 신기루 같은 허상을 만들어내면서부터 사람들에게는 인테리어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믿음이 생겨났다.
#노인전문요양원: 따로 또 같이, 내 집 같은 공간에서
#무주 추모의 집(무주공설납골당): 영혼을 위한 밝은 집
죽음을 학살한 역사가 한국사의 근대사? 제주 4.3 사건으로부터…광주민주화항쟁. 청문회를 통해 우리는 죽은 사람은 많은데 죽인 자, 살인자는 찾아내지 못했다. 수백명이 죽었는데도 역사의 진실 앞에서 “그것은 내 탓이다”라고 고백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죽은 사람은 수백만인데 살이자는 없는 그런 역설이 한국의 근대사인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부정부패, 심지어는 지역감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불합리함의 근거 또한 죽음을 책임지지 않는 사회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내 이익을 위해 타인의 죽음을 쉽게 생각하고, 내가 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천민자본주의의 속성도 살인자를 정당하게 처벌하지 않는, 이러한 사회 분위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우리는 죽음을 삶 속에서 함께 지속시키며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근대화의 여정 속에서 죽음을 처형해 버렸다.
#새로운 사회적 의제: 성찰적 한국(meta. Korea)
무주 프로젝트의 기본 개념: 뜻있는 그림일기
길을 의미 깊은 그림일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어떤 길목에서 할아버지가 보던 풍경을 똑같이 아버지가 바라보았고, 나 또한 같은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대한 사건이자 역사다. 동일한 풍경을 동일한 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길은 풍경을 기록하고 보존한다. 길은 풍경을 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홈 파인 레코드판이 소리를 저장하듯 말이다. 인류학자들은 이렇게 오래된 길들을 그림일기figurative journal라고 부르는 것이다
공동체와 건축
“건축을 완성하는 것은 시간이며, 그것은 사람과 식물들에 의해 헤아려지면서 가능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건축을 오브제처럼 단독적이고도,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으로 확장된 전일적 접근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이 손을 대지 않을수록 자연은 풍성하고 아름다워진다
자연을 관통하는 것은 다양성의 법칙이다. 자연은 단일하고 획일적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호 유기적으로 보완하고 존중하기 위해서 경쟁한다. 그러면서 결국 궁극적으로는 풍성한 쪽으로 이동한다…30년 뒤? 똑같은 나무를 여럿 심은 것보다 여러 품종을 섞은 그룹이 훨씬 풍성하고 오묘한 풍경을 만들어낼 것이다.
모더니즘에서 배제한 것들
친환경적 건축은 태양열과 풍력에너지를 활용하고 단열 효과를 높이는 데만 있는 것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열린 공강의 건축을 다시 자연을 향해서도 열어두고 몸(건축)을 맡기는 일, 그런 일도 중요하다. 나무로 조경을 하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건축과 더불어 건축하는 일, 그런 것은 가능한 것이다.
공공건축이란? 첫번째 본질은 필요성,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주도하면서 ‘자본이 생산해 낼 수 없는 공간‘을 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감응, correspondence, 쌍방적인 것
감응은 쌍방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주민과의 소통? 그냥 주민들한테 물어보면 된다(질문이 답!) ”면사무소 짓는데 무슨 공간이 필요합니까?”
무주에서 많이 배웠는데, 모더니즘건축에서 제외된 것이 농촌이다! 모더니즘의 역사에서는 도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 모든 관심은 녹지공원, 도시공간 등에 집약된 채 농촌은 제외되어 있다. 농촌에서 무슨 건축을 할지 모든 사람들이 당황스러워 하는데, 모더니즘 건축이 제외시킨 것들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내가 무주에서 느낀 것 중 가장 큰 것이 ‘시간성’인 것 같다. 시간성은 땅에 버티고 10년, 20년, 30년 가는 것인데, 이것이 모더니즘건축이 가진 가장 큰 모순이다. 건축가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지금 다 결정해 버린다. 건축가들은 늘 미래를 위해서 건축을 하는데, 결정은 지금 해야 한다.
건축가는 설계사이기 이전에 세상에 대한 번역가이고, 세상을 읽어주는 사람이고, 사회를 제안하는 사람이다. 다른 나라의 사례에서 답을 찾을 게 아니라 해법은 이 땅에 있다는 점을 무주에서 가장 크게 느꼈다.
“이제는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예전에 우리가 생각했던 사람들이 아니다. 시골 사람들 역시 도시인과 마찬가지다. 비가 들이치며 마루를 닦아야 하니, 불편하다, 그런 생각들이다. 옛날에 정자라는 것이 어디에 유리창을 달았는가.
난 시골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달라졌다는 걸 몰랐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선 그들에게 이러한 ‘삶의 방식’이 옳다고 ‘강요’했던 셈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방을 원했는데, 나는 정자를 만들어줬던 것이다.”
정기용 선생은 공간의 생사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도시는 슬럼의 확대, 빈곤의 심화 같은 치유가 불가능한 질병으로 인해 시간을 오래 끌다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는다. 그에 비하면 농촌의 죽음은 깨끗하다. 주변에 피고름 같은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다만 시골에 산느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면서 서서히 죽음을 맞게 된다.”
문제도 무주에, 해법도 무주에. 모든 것이 무주 주민의 땅에서 나오고, 무주의 땅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는 건축가들이 사물의 핵심에 들어가지 않고 표면에서만 답을 찾고, 사회적 맥락에서 땅과 사람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종국엔 건물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형태에만 매달리는 것을 ‘오류’라고 말했다.
관찰력이란 ‘차이’와 ‘반복’을 알아채는 능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건축가의 관찰력은, 우리의 농촌과 도시에서, 반복되는 문제들이 무엇인지, 또한 그럼에도 어제와 오늘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그리고 우리 땅의 문제점은 외국의 것과 어떤 차이를 갖는지를 예민하게 포착하는 것일 게다.
“우리도 역시 무주에선 ‘서울 건축가’였다”? 당시 우리는 처음부터 ‘제도판’을 들고 무주에 내려갔어야 했다.
“정기용 선생님한테선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다. 건축에 대한 열정과 진정성을….배워도 배워도 따라갈 수 없다. 그래서 그런 분의 스태프로 일하는 게 정말 자랑스럽다.”
누군가, 재능이란 열정을 지속적으로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이말을 이어 생각해 보자면, 그 재능을 지속적으로 갈고닦는 것이 요즘 자주 말하는 진정성인 것 같다. 그런데 이 열정과 진정성은 모두 ‘시간’속에서 벼려진다. 한 사람의 유한한 인생 속에서 무한히 계속되는 노력. 매일매일 자국은 남지만 마침표는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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