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라시옹. 장 보드리야르. p
시뮬라크르란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 시뮬라크르는 참된 것이다.
시뮬라크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 (=가장假裝)
시뮬라시옹은 시뮬라크르의 동사적 의미 ‘시뮬라크르를 하기’
예전에는 시뮬라시옹의 가장 좋은 비유로서, 제국의 지도 제작자들이 극도로 정밀한 지도를 만들어서 결국은 지도가 제국의 전영토를 거의 정확하게 덮어버리고 만다는 보르헤스의 우화를 들 수 있었다.
오늘날의 추상은 더 이상 지도나 복제, 거울 또는 개념으로서의 추상이 아니다. 시뮬라시옹은 더 이상 영토 드리고 이미지나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 또는 어떤 실체의 시뮬라시옹이 아니다. 오늘날의 시뮬라시옹은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실재, 즉 파생실재를 모델들을 가지고 산출하는 작업이다.
무언가가 사라져버렸다. 추상의 매력을 낳았던, 어떤 것에서 다른 것 사이에 개재되었던 지고의 ‘다름’이 사라져버렸다.
이미지는 그것이 무엇이건간에 어떠한 사실성과도 무관하다. 이미지는 자가지신의 순수한 시뮬라크르이다.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기호로부터 아무것도 없음을 감추고 있는 기호로의 이전은 결정적인 전환점이다
도처에서 우리는 이상하게 원본과 유사한 세상에 살고 있다. 사물들은 거기서 자기 자체의 각본에 의해 이중화하여 있다.
*파생실재와 상상
***디즈니랜드는 모든 종류의 얽히고 설킨 시뮬라크르들의 완벽한 모델이다. 환상과 공상의 유희이다. 해적, 국경선, 미래 세계 등에서 보이듯이 사람들은 이 상상 세계가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군중들을 끄는 것은 틀림없이 상상보다는 훨씬 더 이곳이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사실이다. 실제 미국사회가 가하는 통제 그리고 그 사회가 제공하는 기쁨을 축소시켜 경험하는 데서 오는 근엄한 즐거움이다. 당신은 밖에다는 차를 주차한 다음 안에서는 줄을 서며, 출구에서는 완전히 버림받는다. 진짜 집중의 장소인 주차자으이 절대적인 고독과 이세계와의 대비는 완전하다…그러나 이것을 다른 것을 숨기고 있다. 디즈니랜드는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거기 있다(마치 감옥이 사회 전체가 그 평범한 어디서고 감방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거기 있는 것과 유사한게). 디즈니랜드는 다른 세상을 사실이라고 믿게 하기 위하여 상상적 세계로 제시된다. 그런데 사실은 그를 감싸고 있는 로스앤젤레스 전체와 미국도 더 이상 실재가 아니고 파생실재와 시뮬라시옹 질서에 속한다. 더 이상 사실성의 거짓 재현 문제(이데올로기)가 아니고, 실재가 더 이상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숨기고, 따라서 사실성의 원칙을 구하기 위한 문제이다.
*정치적 주술
워터게이트는 워터게이트 그 자체가 하나의 스캔들이었다는 생각을 주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워터게이트는 스캔들이 아니다. 이건 어떤 일이 있어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감추려고 하는 점이기 때문이다. (도청은 우연한 사건이 아닌 만연된 감추어진 현실이었다! 워터게이트는 이 현실을 감추는 데 성공했다)
#매체 속에서 의미의 함열
정보는 더욱 많고 의미는 더울 적은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의미의 파생실재성?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실재를 폐기한다
#절대적 광고, 제로 광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광고양식 속으로 잠재적인 모든 표현양식들이 흡수되는 시대이다.
모더니즘의 절대적 이데올로기는 바로 진보에 대한 믿음이다. 기독교주의와 헬레니즘의 인간주의 기반 위해서 이상적 절대를 향한 끝없는 앞으로의 나아감, 이것이 바로 모더니즘의 실체이다…모든 사회적, 제도적, 물리적 질곡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기,,,모더니즘은 진보를 향한 앞으로의 나아감, 움직임, 변화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모든 독창적인 것, 새로운 것을 높이 사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모더니즘의 기본적인 논리적 모순이 도사리고 있다. 바로 이 모순의 드러남을 우리는 후기 모더니즘 현상이라고 부른다.
금세기로 들어오며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기계주의가 탄생하고 절대와 진보는 초기의 이상적 결합을 결별한다. 새로움이 인간적 이상인 절대를 압도하게 된 것이다…따라서 모든 새로운 것은 좋은 것이다
이른바 포스트모던 사회는 기술의 형이상학에 대한 우위에 의해서 도래한 사회이다. 시간의 개념도 바뀌었다. 모더니즘 사회에서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진 직선적인 개념 속에 있었다. 과거는 현재를 결정지으며 현재는 미를 향해 방향지어진 것이다.
이러한 모더니즘의 시간개념, 그와 함께 역사도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무자비하게 무너진다. 오직 현재, 지금 여기만이 남는다. 즉자적인 시대인 것이다. 절대적인 의미의 지표, 이상이 없으니, 전통이 있을 수 없으며, 미래를 향한 이상이 없다. 오늘의 시대는 원초적으로 희망이 사라진 시대이다. 신이 죽어버림으로써 인간은 희망마저도 함께 잃어버렸다.
어떤 절대적인 진실이 없다면, 정치적 이념을 무엇으로 삼을것인가?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정치가 텅 빈 공허한 연극무대가 되게 한 것이다. 정치는, 모든 정치는 따라서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끝없이 가치와 이상을 주입하여야 하는 힘겨운 노력을 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럼에도 오늘의 정치에서 보듯이 정치가 쇼로 변하고 쇼가 정치로 변하는 것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직 즉각적인 이슈만이 난무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거로부터의 의미, 미래를 향한 의미가 있을 수 없다. 깊이 없는 담론만이 지배력을 확장한다. 새로운 것만이 좋은 것이다.
포스트모던 사회의 징후로는 교통의 발달, 정보의 발달, 원자력의 개발을 꼽는다. 그것은 극도의 발달을 이르는 것으로, 기술이 더 이상 진보할 수 없는 극에 이른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인간의 해방을 부르짖던 모더니즘은 그 원칙상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에너지, 억눌린 에너지의 해방까지를 목표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된 에너지가 그 궁극에 이르면 그 에너지는 더 이상 해방되지 못하는 극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예가 바로 원자폭탄으로 극대의 에너지는 폭발의 가능성으로만 남게 되고 그 폭발을 저지하는 반대 에너지에 의하여 균형을 이루게 된다. 이처럼 반대 에너지의 작용을 보드리야르는 저지전략이라고 부르고 있다.
속도 역시 모더니즘이 고양하던 가치 즉 움직임의 하나였다. 그러나 극도의 속도는 0의 속도에 이르게 한다. 아이러니컬하게고 자동차의 발달은 더욱더 인간을 움직이지 않도록 하고 있으며,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거리는 더욱더 좁혀 들어가서 움직일 거리가 없어진다. 움직임이 없는 사회, 거리가 없는 사회는 지극히 표면적인 사회가 된다.
시간과 거리가 사라진 공간? 모더니즘의 공간은 의미의 투명성, 명확성을 추구하려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극도의 의미의 명확성은 오히려 의미 제거를 가져온다.
정보와 통신의 발달은 동시성을 가져옴과 동시에 대중성을 유발한다. 동시에 제공되는 정보는 전체를 하나로 만들어 차이를 제거하고 거리를 제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의미를 제거한다. 정보가 제공되면 돌수록 의미는 사라진다. 모든 것이 미분화의 덩어리 속으로 함몰되기 때문이다.
대중사회는 조작의 사회? 상품과 광고는 조작의 메커니즘일 따름이고, 대중들은 중력과 자력에 이끌리는 쇳가루와도 같은 것이다.
실제가 없는 사회는 그 아노미 현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끝없이 실제를 주입하기에 힘을 쓴다. 그래서 혹은 거짓 위기를 생산하고 전파하며, 위기를 극복하여 일하는 척하거나 실제가 있는 척한다. 문제를 만들어서 극, 다름, 차이를 생산하기에 바쁘다. 이러한 정치 쇼는 어디가지나 정치 자체의 존립 이유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지 과거의 대의적인 재현적인 의미에서 다른 무엇인가를 대변하는위기나 문제는 결코 아니다. 정치 스스로 투입한 문제의 장난일 따름이다. 조작의 일종이다. 모든 경제위기, 환경위기 등도 따지고 보면 아무런 실제 없이 만들어진 실제에 불과하다. 우리는 실제가 없는 허구 속에 살고 있을 따름이다. 바로 이것이 보드리야르가 주장하는 부분이다. 도덕적 위기라는 것도 알고 보면 없는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끝없이 주창하고 거기서 이익을 얻는 자들의 조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실제사회는 그들이 주장하는 이념과 가치가 없고 적용되지 않는데 피조작자들은 바로 이 존재하지 않고 통용되지 않는 것을 지고의 가치로 배웠기 때문에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만약 가치가 무너졌음을 보여주면 붕괴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은 끝없이 시스템은 죽은 가치를 부활시킨다. 변화된 사회 사이의 단절을 틈타 이익을 취하는 종교적, 교육적, 도덕적, 애국적, 인류애적 허구가 오늘날 판을 치고 잇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가치의 주입은 역설적으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살아가는 가치를 주기 위해서는, 가치 없는 세상의 허무함을 가리기 위해서 이것들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니힐니즘의 시대이기에 이 니힐니즘을 가리기 위한 시뮬라크르적인 실재가 절실히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