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소리. 정민. p255
길 잃은 눈뜬 장님? 도로 눈을 감으라!
옛날에 안주하라는 주문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라는 말.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래 자리는 어디일까?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에 떠밀려 사람들은 정신없이 왔다갔다한다. 가긴 가야하겠는데, 대문이 비슷하고 골목도 많아서 제 집을 못찾고 길에서 울고 있다
옛 글을 읽다가 지금 여기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 생각들이 하나둘 모여 이 책이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다 똑같다. 달라진 것은 겉모습뿐이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변할 수가 없다. 옛 글을 읽다가 떠오른 생각들은 지금을 살면서 떠오른 생각이기도 하다. 옛날과 지금은 무시로 넘나든다.
옛 글의 숲에는 여러 갈래 길이 많다. 아무도 가지 않아 가시덤불로 막힌 길이지만, 덤불을 헤치면 지금도 그곳에는 아름다운 꽃이 난만하게 피고 진다. 그 향기의 한 자락을 더불어 나누자는 것이다. 그 맛난 과실을 함께 한 입 베어 물자는 것이다.
#책 읽는 소리
옛날의 독서는 눈으로 읽지 않고 소리내어 읽는 것이었다. 낭랑한 목소리, 가락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뇌리에 스멸들어, 뜻을 모르고도 글을 외울 수 있었다. 의미는 소리를 뒤따라왔다.
[백이열전]을 1억 1천1백번이나 외워, 그 호를 억만재라 했던 김득신
인성구기(因聲求氣). 소리를 통해서 기운을 얻는다. 따라서 백독, 천독의 목표를 세워 한 겨울을 산사에서 나곤 했다
이제 책 읽는 소리는 뚝 그쳤다…소리를 내어 상쾌한 리듬을 느끼며 읽을 만한 글이 더이상 없기 때문일까?
#옛 선비의 일상과 독서의 의미
바쁜 현대인의 일상? 낙오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막연한 공허감만 늘어갈 뿐!
물질의 진보만큼 인간적인 삶의 질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면의 기쁜은 물질의 진보와는 반비례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황폐화시키면서 속도의 노예가 되고 있다
독서로 시작하여 독서로 끝나던 옛 선비들의 한가로운 일상? 책을 읽는 일은 그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세계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일이었다. 느린 속도로 변화 없이 반복되는 느슨한 일상 속에서, 독서를 통해 그들은 삶의 팽팽한 긴장을 찾았다. 물질의 삶은 조금의 변화도 없이 되풀이되었으되, 정신의 삶은 나날이 경이로움과 지적 성취감으로 충만한 변화의 연속이었다. 그 세계의 중심에는 자신이 있었고, 생활은 조화롭고 감정 또한 균형을 잃지 않았다!
옛 선비들에게 있어 독서란 곧 세상을 읽고 나 자신을 옳게 아는 안목을 기르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서책에서 얻는 정보는 물질의 이익을 위해 쓰이지 않았다. 삶의 내적 충실을 높이는 데 쓰였다.
‘축적의 미학’이 사라진 디지털 시대. 꿈꾸었던 진보의 유토피아는 오히려 끔찍한 디스토피아의 악몽만을 안겨다주었다. 파편화된 세계 속에서 인간들은 미아로 떠돌고 있다. 가정은 붕괴되어 따뜻한 보금자리는 머나먼 실낙원의 꿈이 되고 말았다.
경험은 이제 변화의 속도를 감당해내지 못하고 그리하여 다음 세대로 전이되지 않는다. 내 부모 세대에서 당연했던 가치가 내 세대에서는 이미 낡아버린 것이다. 내 자식 세대의 생각을 나는 이미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러한 때일수록 삶의 총체성을 읽어내는 통찰력이 더욱더 소중하다. 인터넷 속에는 이런 통찰력이 없다. 끊임없는 사색과 관찰만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 사람들은 자꾸만 엉뚱한 데서 해답을 찾는다. 그래서 바빠질수록 점점 더 허탈해지는 것이다.
삶은 이제 무한 속도 경쟁의 연속일 뿐이다. 가파르게 빨라지는 삶의 속도 속에서 옛 선비들의 일상 생활과 일과를 살펴보는 일은 어찌 보면 “자네도 꽤 한가로운 사람일세” 하는 타박이나 듣기에 딱 좋다. 그러나 인간이 추구하는 진정한 삶의 모습은 미래에 있지 않고 오히려 과거 속에 있다. 이 역설을 어찌 설명해야 좋을까?(오래된 미래)
오늘날 우리가 옛 서비들의 일상 속에서 배울 것은 단순한 독서벽이 아니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조각난 세계에서 삶의 총체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정보에 끌려다니며 정보의 노예가 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주인 되는 삶이다. 그것은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일이 주어지더라도 당황하는 법 없이 정확히 맥락을 짚어내는 통찰력의 문제이다.
#옛 사람과의 맛난 만남
방심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불쑥 다가서는 옛 사람의 육성과 만나는 것은 즐겁다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가장 즐거운 일이다. 다만 게으른 사람은 언제나 이를 괴롭게 여긴다. 맑고 한가롭게 지내는 것은 가장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적막함을 괴롭게 여긴다. 괴로움을 버려 즐거움에 나아가고, 적막함을 피해 편안함을 누리자면 고상한 사람과 더불어 노닐거나 문인과 함께 이야기 하는 것만 같은 것이 없다”
책은 멀리서 찾아 온 벗이다
그러나 어찌하리. 내개서 괴로움을 걷어가고 씁쓸한 인색의 적막을 막을 고사나 회심의 벗은 둘러보아도 쉬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무연히 책을 펼쳐들 밖에 다른 길이 없다. ‘상우천고尙友千古’랬거니 곁에 마음 나눌 벗이 없으매 옛 길을 따라 고인을 벗삼자는 것이다.
#책만 읽은 바보
이덕무의 [이목구심서]
근심과 번뇌를 없애준다? 책을 읽으면 눈은 글자에 고정되고, 마음은 이치에 몰두하므로 다른 생각이 끼어들 겨를이 없다
‘옛날에는 문을 닫고 앉아 글을 읽어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었다’
#책 빌려 읽기
“..책은 정해진 주인이 없고, 선(善)을 즐거워하고 배움을 좋아하는 자가 이를 소유할 뿐입니다”
10년 독서면 천하의 일을 모두 알 수 있었다던 옛 사람들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세상을 읽는 안목과 통찰력이 모두 독서에서 나왔다. 읽은 책이라고야 몇 권 되지 않는 책을 일고 또 읽었다. 읽다못해 아예 통째로 다 외웠다. 그리고 그 몇권의 독서가 그들의 삶을 결정했다
정보의 홍수?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정보를 판단하고 제어하는 능력이다
도구적 지식이 판을 치는 사회에는 깊이가 없다. 깊이가 만들어내는 그늘도 없다. 우주를 읽고 사물을 관찰할 줄 알았던 선인들의 인문적 소양이 더없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책읽기와 깨닫기
제주는 부지런함만 못하고, 부지런함은 깨달음만 못하다
깨달은 사람의 독서는 다르다. 그냥 훌훌 넘겨도 책 한 권의 양분을 온전히 섭취한다.
깨닫고 나면 그 순간 세계가 변한다. 나는 더이상 이전의 나가 아니다. 차원이 달라진다.
#선인들의 독서론
송시열. 깊은 밤 나즈막히 목청을 돋워 책을 읽는다. 달빛에 창이 훤하길래 고개를 들다가 문득 고요를 느꼈다. 제 소리에 놀라 책읽기를 멈추니 창자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김창흡[예원의 열 가지 즐거움]. 산 독서와 죽은 독서가 있다? “책을 덮은 뒤에 그 내용이 또렷이 눈앞에 보이면 이것이 산 독서이고, 책을 펴놓았을 때에는 알았다가도 책을 덮은 뒤에 망연하면 죽은 독서”
유희창[독서명]. “널리 보고 곰곰히 생각하면, 온갖 의심이 사라져, 활연히 깨달음이 있고, 초연히 자득하리라”
입시에 절어 문제 푸는 기계가 된 요즘 아이들. 무조건 외우고, 틀리면 혼나고, 자꾸 풀어보다 보니, 어떤 문제가 나와도 척척 풀기는 하는데 정작 왜 그런 것을 배우는지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또 생각할 겨를도 없는 것이다.
유계[잡지]. “오직 책만이 부귀나 빈천, 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한 권을 읽으면 한 권의 보탬이 있고, 하루를 보면 하루의 유익이 있다. 이 인생이 배우지 않음이 한 가지 애석한 일이고, 오늘 하루를 등한히 지나보냄이 두번째 가석한 일”
#책 읽은 횟수
예전의 독서는 한번 읽고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읽고 또 읽어 완전히 꿸 때까지 읽는 반복적인 독서였다. 그것이 경전일 경우에는 특히 더했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엉덩이로 한다.
김득신의 [고문36수독수기]. 책을 많이 읽기로는 김득신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괴산 취묵당)
그 어렵기로 유명한 [이소경]과 [우공]을 줄줄 외웠던 천채들의 글은 지금 남아 전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미련하고 고지식하게 외우고 또 외웠던 곰 같은 사람들의 글은 지금도 훌륭한 문장의 귀감으로 남아 있다…머리만으로 얻는 것은 한때의 칭찬뿐이다.
#옛 사람의 기록 정신
참된 면목이 오롯이 담긴 일상의 글(일기). 이제는 아무도 이런 기억들을 글로 쓰려 하지 않는다
기록에 대한 선인들의 집착은 때로 병적으로 보일 정도다. 편지를 써도 꼭 한 벌을 따로 베껴두었다. 우암 송시열의 문집에는 거의 6천 통에 가까운 편지가 남아 있다. 따져보면 하루에 두세 통씩은 썼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 바쁜 와중에, 그 격랑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는 자신이 쓴 편지의 부본을 반드시 한 벌 씩 남겨두었다.
#관찰의 힘과 메모하는 습관
이덕무. 나비와 꽃들, 그밖의 온갖 사물들에 대해 그때그때 메모해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메모가 모여 [이목구심서]라는 참으로 아름다운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기억력만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관찰의 기록들이 글 속에는 다 적혀 있다. 모두 생활 속에 체질화된 메모하는 습관 때문이다.
정조[일득록], 이수광[지봉유설], 김만중[서포만필], 서유구 [임원경제지] 같은 책들도 기특한 메모광들의 끊임없는 기록과 사색의 결과물이다
이익[성호사설]도 자신의 관찰과 메모를 주제별로 엮은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돌고 돈다? 그 옛것도 그때에는 변해가는 하나의 과정이었을 뿐이다.
어쩌면 인간은 역사 이래로 늘 똑같은 장난을 되풀이하고 있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아비 그리운 때 보아라
“…제 아우 시켜 필사하며 제 종난매 제 숙질 글씨 간간이 쓰고 노부도 아픈 중 간신히 서너 장 등서하였으니 아비 그리운 때 보아라”-필사본 [임경업전] 뒤의 필사기, 당시는 소설책이 중요한 혼수 품목 중 하나였다!
#아버지의 편지
요즘 부모들. 제 자식 귀한 줄만 알고, 옳게 가르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자식은 부모가 하는 대로 보고 배운다. 자식을 보면 그 부모를 알 수가 있다. 어찌 부모의 자리를 삼가고 삼가지 않으랴(자식은 부모의 거울)
#한가로움의 의미
미로득한방시한(未老得閑方是閑). 젊었을 때 얻는 한가로움이라야 진정한 한가로움이다
다 늙어 한가로운 것은 할 일이 없는 것이지 한가로운 것이 아니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한가로움이다
느리게 살고 천천히 음미하며 여유롭게 즐기는 것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아니다!(느림의 미학)
#빛깔과 태깔
늘 빽빽한 한자의 숲 속에 산다. 옛 글 하면 고리타분한 생각부터 든다는 사람이 많지만, 정작 그 속에서 노는 사람 냄새 물씬하고, 때로 죽비로 뒤통수를 내리치는 듯한 정신이 번쩍 드는 이야기에 빠져 사는 재미가 쏠쏠하다. 읽을 때마다 사람을 긴장시키고 놀라게 하는 글이 있다.
연암 박지원의 글. 사물의 빛깔을 인식하는 수준을 색-광-휘-요-조 다섯 단계로 나누어 설명
“놀랍군요. 연암이 벌써 명도와 채도를 알고 있었습니다”
눈은 누구나 같지만, 보는 것은 다 다르다. 같은 사물을 보고도 들어가는 깊이는 제각각이다.
색중지광(色中之光), 색깔 속에 담긴 ‘빛깔’을 보라
형중지태(形中之態), 겉모습만 보지 말고 외형 속에 깃들인 ‘태깔’을 읽으라
어떤 사람의 주민등록번호, 거주지, 직작을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그의 색(色)이요 형(形)일 뿐이다. 그의 사람됨을 이해하고, 그의 고민을 알고, 그의 생각을 알 때 나는 그를 안다고 한다. 내가 만나야 할 것은 그의 광(光)이요 태(態)이다.
훌륭한 디자이너는 색깔 속에서 빛깔을 읽는다. 외형만 보지 않고 태깔을 본다. 남들처럼 보지 않고 나대로 본다. 예전처럼 보지 않고 새롭게 본다. 이렇게만 보지 않고 저렇게 본다.(발견은 새로운 눈을 갖는것)
비슷한 것은 가짜다! ‘꼭 닮았다’, ‘진짜 같다’, 이 말 속에는 이미 가짜라는 뜻과 다르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연암의 글은 몇백 년이 지나도 여전히 새롭다. 지금 읽어도 힘이 느껴진다. 죽비소리 같은 깨달음을 준다. 정신이 번쩍 든다.
#비슬산의 두 스님
옛 사람은 친구를 ‘제2의 나’라고 불렀다…생각만으로도 텔레파시가 통하는 말이 필요없는 벗. 그런 친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책 팔아 밥을 먹고
그 절대 궁핌 속에서 그들은 찬연한 문학의 꽃밭을 일구고, 학문의 열매를 맺었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나는 무언가? 아! 부끄럽구나.
#나의 열 가지 즐거움
옛 글을 읽다가 잠시 곁길로 빠져 이런 행복한 생각이라도 함께 할 수 있으니, 나는 그것이 기쁘다. 팍팍한 세상을 건너가다가 뜻하지 않게 만나는 짧은 순간들로 인하여, 이 인생이 새로운 원기로 충만해진다
#눈 뜬 장님
본분으로 돌아가라! 제자리로 돌아가라! 세상엔 두 눈을 멀쩡히 뜬 장님들도 너무 많다네. 두 눈만 믿고 날뛰다가 제 발등을 찍고, 가족을 망치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네.
눈을 뜨자 정말로 장님이 되어버린 장님과, 장님이 되고서야 마음의 눈을 뜬 장님 중 누가 더 나은가? 나는 혹시 길에서 울고 있는 눈 뜬 장님이 아닐까?
#부끄러움에 대하여
군자는 어찌하여 늘 스스로 만족하며/ 소인은 어찌하여 언제나 부족한가/…부족함과 족함은 모두 내게 달렸으니/ 바깥 물건 어찌하여 족함과 부족함이 되리오./내 나이 일흔에 궁곡(窮谷)에 누웠자니/ 남들이야 부족하다 해도 나는야 족해/아침에 만 봉우리에서 흰 구름 피어남 보노라면/절로 갔다 절로 오는 높은 운치가 족하고/저물 녁엔 푸른 바다 밝은 달 토함을 보면/ 가없는 금 물결에 안계가 족하도다….
만족할 줄 알면 삶이 문득 즐거운데, 사람들은 만족을 몰라 자신의 인생을 막다른 길로 몰아넣는다
부족한 대로 만족하며 그리하여 기쁨이 샘솟는 가뜬한 삶을 살겠다
#텅 빈 충만
고요히 앉아본 뒤에야 보통 때의 기운이 경박했음을 알았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조급했음을 알았다. 일을 되돌아본 뒤에야 전날에 시간을 허비했음을 알았다. 문을 닫아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예전에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다.
침묵 속에 소롯이 고여오는 이 ‘텅 빈 충만’을 이 소음의 도시 속에서 어찌 누려볼거나.
#역사책의 행간
과거는 현재와 통하고 미래와 만난다. 역사는 과거를 현재로 이어주는 가교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옛날에도 똑같이 있었다. 옛일을 기억하는 것은 옛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앞날을 위해서다. 옛 역사를 펼쳐 읽다가 인간 삶의 모습이 너무도 똑같이 반복되는 것을 느끼고 놀랄 때가 많다.
#난초와 버섯
역경 속에서만 포자를 터뜨리는 버섯, 인간의 창조력도 역경 속에서만 꽃이 피워진다
불야성을 이룬 연구실, 정작 논문이 진행되는 과정이나 결과물을 받아보면 실망스러운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사마천, 나비를 놓친 소년
2천 년도 더 된 까마득한 옛날의 일, 그런데도 이 책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독서물로서의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사기]는 인간학의 보물창고다. 세상은 돌고 돈다. 아득한 과거에 있었던 일들은 지금도 그대로 되풀이된다. 그 양태와 표현만 달라졌을 뿐 본질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역사가 필요한 까닭은 과거를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 나아가 미래를 위해서이다. [사기]의 열전은 그런 의미에서 인간을 읽고 세상을 보는 안목을 길러준다…’사기’는 춘추 전국 시개의 각박한 역사 현실 속에서 갖가지 인물 군상들이 빚어내는 한 편의 장엄한 드라마이다.
#작은 나라 적은 백성
현실은 불만스럽다. 긍정할 수가 없다. 낙원을 향한 꿈은 바로 이 불만과 부정의 언저리에서 생겨난다. 낙원을 꿈꾸는 사람들은 게으른 몽상가이거나 부지런한 개혁가이다.
되돌아갈 수 없는 무릉도원(우복동)? 찾지 못했다는 말은 애초에 없었다는 말과 같다
낙원이란 풍문만 있지 실체를 보여주는 법이 없다
유토피아. ‘u-‘의 의미는 ‘없다(ou)’와 ‘좋다(eu)’의 뜻이 다 들어 있다. ‘topia’는 장소라는 뜻.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는 않는 곳(no-place)’와 ‘좋은 곳(good-place)’의 뜻도 된다, 둘이 합치면 좋기는 좋지만 어디에도 없는 나라가 유토피아, 낙원이다.
#글쓰기와 병법
충무공이 거북선때문에 이긴 것은 아니다! 명랑해전에서 거북선 없이도 이겼다!
문제는 여기에 있는데 해답은 늘 저기서 찾는다
우리의 글쓰기 교육? 원리나 운용을 가르치지 않고 요령과 테크닉만 중시하고 있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옛 문장이론은 기술적 측면인 정법보다 원리를 운용하는 활법을 더 중시했다.
갈 길을 알고 쓰는 글은 힘이 있지만, 표현에만 신경을 쓰고 있으면 글도 써지지 않을 뿐 아니라 써놓고 나서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글쓰는 사람에게 가장 우선하는 것은 뜻을 구상하는 일이다.
글쓰기에도 법칙이 있다. 법칙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의(意)와 기(氣)이다. 그러나 의와 기를 갖추었다 해도 법으로 꾸며주지 않으면 읽히지 않는 글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 법은 일정한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다르고 글마다 다르다. 이것이 활법이다.
훌륭한 쓸거리가 있다 해도 이를 효과적으로 공략하지 못하면 독자에게 아무런 느낌을 일으키지 못하는 죽은 글이 되고 만다.
글을 잘 쓰려면 다양한 주제에 대해 많이 읽고 써보는 것 이외에 다른 비법이 없다
상동구이(尙同求異). 살아 있는 글을 쓰려면 옛 문장가의 말투를 본뜨거나, 그 글을 흉내내서는 안 된다. ‘상동구이’의 정신만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 같아지려고 하되 다름을 추구하라는 말이다. 같은 것은 정신이고 원리이다. 그러나 거기에 담기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나의 목소리. 나의 개성이어야 한다.
#그때와 지금, 여기와 저기
자나 척, 관 또는 근은 옛 도량형의 단위다. ‘지금’은 쓰지 않는다. 파운드나 피트, 마일은 서구의 단위 개념이다. ‘여기’에서는 쓰지 않는다. 우리의 옛것은 지금엔 쓰이지 않고, 서구의 지금 것은 여기서 통용되지 않는다. 우리 문화계의 정체성 혼란이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서양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학자들은 파운드나 마일로만 설명하려 든다. 고전을 공부한 학자들은 자척과 근이나 관을 고집한다.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그때’나 ‘저기’식의 해결책만 제시한다. 공허하게 들린다. 이해하려면 다시 환산하는 번거로움을 거쳐야 한다.
“찾아서 어쩌게?” “글쎄요. 아직 다 안 해봐서 모르겠네요”
의사가 수술을 통해 종양을 제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막상 환자는 죽고 만 격이다. 분석이 다 끝나고 텍스트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대학이나 대학원 강좌에 중국시론, 영미시론은 있어도 한국시론은 없다. 프랑스문학 비평사나 독일문학 비평사, 중국문학 비평사는 서점에 꽂혀 있는데, 읽을 만한 한국문학 비평사 한 권이 없다. 고전문학사와 현대문학사는 갑오경장을 기점으로 언제나 따로 논다. 도대체 갑오경장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문학사는 어찌할 뻔했을까?
한국시론, 한국소설론은 없어도 현대시론, 현대소설론 강의는 꼭 있다…한국시론이 없어서가 아니라 학문적으로 발굴하여 정리하고 오늘의 언어로 설명한는 작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전 문예이론이 없어서가 아니라 최근 몇십 년간의 현대소설을 연구하느라 너무 바빠 거기까지 손길이 미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전 문장이론 자료의 정리에 여러 해째 몰두해오고 있다…서구식 문장이론으로는 도저히 포괄할 수 없는 생생한 논리가 옛 문장이론 속에는 살아 있다. 규격화된 글쓰기의 기술을 가르치는 죽은 법이 아니라, 펄펄 살아 있는 그리하여 어디서나 활용 가능한 활법의 글쓰기다.
고전 문장이론 정리의 필요성? 세상은 쉴새없이 변화하지만 실상 본질적으로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정보의 총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도, 시를 쓰는 마음이나 문학을 향유하는 정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저기나 여기나 다를 바가 없다. 다만 그것을 설명하는 방법, 접근하는 태도가 서로 다를 뿐이다.
우리의 당면한 혼란은 여기에 살면서 저기의 방법을 익히고, 지금을 살면서 그때의 생각을 잊는 데서 비롯된다.
동서양 담론의 통합이 필요하다? 통합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지금 여기’의 우리들이다. ‘지금’이 제 위치를 잡으려면 ‘그때’를 올바로 알아야 한다. ‘여기’가 어딘지 알려 한다면 ‘저기’에서 좌표축을 이동해와야 한다.
그러자면 눈금ㅇ르 조정해 읽어내는 안목이 필요하다. 이를 예전식으로 표현해 ‘통변(通變)’이라 한다.
“궁하면 변한다. 변해야만 통한다. 통하면 오래간다(窮則變 變則通 通則可久)”
‘그때 여기’와 ‘지금 저기’의 두 좌표축
그간 우리는 ‘지금 저기’의 소식에는 민감하면서 ‘그때 여기’의 소식에는 너무 무심했다. 둘 가운데 하나의 좌표축이 워낙 부실하다 보니, 그 방향은 직선적 맹종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금’ 많이 강조되고 ‘여기’는 실종되고 말았다. ‘저기’만 따라가다 정작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주체가 없으니 객이 주인 행세를 했다.
길은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다. 애초에는 길이 없었지만 자꾸 가다 보니 길이 된 것이다. 길은 그때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안 다니다 보니 덤불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따름이다. 열린 길을 더 잘 닦고 막힌 길을 새로 뚫어, 신발끈을 조여 매고 두레박 줄을 길게 늘여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