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물정의 사회학.노명우. p266
이 책은 사회학자가 아카데미의 좁은 틀을 벗어나 세속을 살고 있는 개인의 자격으로 자신의 삶과 마주하고 나누었던 독백의 기록이자,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세속 풍경에 대한 비평적 방백이기도 하다.
술집과 카페, 그리고 버스와 지하철에서 엿들을 수 있는 세상 사람들의 대화는 그 어떤 사회학적 텍스트보다 생생하게 날 것 그대로 우리의 세속 풍경을 증언하고 있었다.
삶의 평범성이 학문적 보편성의 근원? 학문의 보편성은 그 사람이 교양 독자든 전문학자든 학생이든 상관없이 누구나 노출되어 있고 공유할 수밖에 없는 삶의 평범성에 있다
쌀은 누룩을 만나야만 술이 된다 했다. 이 책은 이름난 명주는 아닐지라도 잔치를 위해 정성과 관심으로 빚은 술과 같다.
소비는 풍요를 약속하는 듯해도, 또 다른 소비로 이어지는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독과도 같다.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욕망이라 한다. 욕망은 채울 수 있다는 기대로 포장된 유혹이다.
좋은 삶과 착한 삶은 동일하지 않다. 좋은 삶은 선한 의지로만 이루어질 수 없다.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교활해서는 안 되지만 영리할 필요는 있다. 영리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타락한 처세술? 세상과 교류하는 방법을 처세하 한다. 처세만큼 타락하여 슬프게 들리는 단어도 없다. 복원된 처세술을 위해서는 자기계발서 대신 세상물정의 이치와 냉정하게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세상물정의 사회학? 삶에 대한 생생한 느낌과 냉정한 사회학의 균형을 이루는 시도
비판이란 본래 투덜대지 않으면서 세상에게 불만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러한 비판 고유의 능력은 세속이라는 리얼리티와의 용감함 대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에겐 용기가 필요하다.
#1 세속이라는 리얼리티
#상식_상식의 배반, 양식의 딜레마
부자 되세요, 부자 되기가 유일한 상식이 되는 순간 몰상식이 시작된다. 하나의 상식만 존재하는 사회는 비상식적인 사건을 낳을 뿐이다. 상식은 괴물이 된다.
상식은 힘이 세다? 우둔한 사람은 힘으로 지배하지만, 교묘한 사람은 상식을 이용해 사람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 평범한 사람들은 상식의 명령대로 살아간다.
‘서민’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상식을 자극한다. 정치인들은 빈민정책보다는 “서민의 살림살이”를 언급하고…상식을 자극한 효과가 지지율 상승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한다.(빈민, 저소득층보다 더 많이 사용되는 서민!)
***양식은 상식 앞에서 무력하다? 상식을 이용하는 세력과 상식을 교정하려는 세력이 싸움을 벌일 때, 보통 상식을 이용하는 편이 승리한다.
상식을 자극하는 “경제를 살리겠다”는 슬로건을 내세운 보수정당은 ‘서민’의 표를 얻고, 경제정의를 외치는 진보정당은 빈민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다.
상식을 이용하는 베스트셀러는 승승장구, 양식을 설파하는 추천도서는 서가 구석에 처박힌다.
양식이 왜 늘 지고 마는 것일까? 이유는 상식과 양식의 말투 차이에 있다! 상식은 상냥하고 어루만져 주는 어투를 사용하지만, 양식은 공식적이고 엄격하고 훈계하는 말투를 사용한다.
훈계의 말투로만 말하는 학자는상식을 교정하지 못한다!
진보주의가 가르치는 말투를 유지하는 한, 상식을 이용하되 상식의 잘못된 점은 문제 삼지 않는 대중문화와의 싸움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
말투의 차이로 인한 설들력 때문에 올바른 내용일수록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지독한 역설이 벌어진다.
앎, 이해, 느낌…지식인의 오류는 이해나 심지어 느낌 및 열정 없이도 알 수 있다고 믿는 데 있다
대중의 상식과 유리된 지식인들
앎은 지식과 이해와 느낌의 결합체이다! 이해되지 않는 지식, 느낌을 전달하지 못하는 어투로 말하는 지식은 지식 그 자체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반쪽짜리 지식)
“우익은 거짓을 말하고 있지만 인간에게 말하고, 좌파는 진실을 말하고 있지만 사물에게 말하고 있다”
***거짓말은 달콤하다. 유혹적이다. 올바른 말의 말투가 바뀌지 않는 한, 감각을 자극하는 거짓말의 현혹에서 사람들은 벗어나지 못한다.
[옥중수고],[감옥에서 보내 편지],[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집요함이 필요 없는 무게를 던져 버린 자세와 만나면 어떤 지식인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문장, 상식의 잘못을 지적하고 양식을 일깨우되 그 말투에서 잘난 척의 흔적은 완벽하게 사라진 너무나도 아름다운 문장이 만들어진다.
이상한 상식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를 목이 쉬도록 저주하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 가슴속에서 솟아나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은 양식을 전달하는 새로운 말투를 익힐 때 해소된다. 그람시의 [옥중수고]에서 상식의 허구와 양식의 공허함을 배웠다면, 그 공허함이 냉소주의로 변하지 않는 방법은 [감옥에서 보낸 편지] 속에 있다.
#명품_럭셔리라는 마법의 수수께끼
소비주의? 우리는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도록 만들어진다. 소비주의가 빚어내는 풍경을 이해하기 위해선 아주 끈질긴 사유의 관습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우리의 뇌를 자극하는 부러움? ‘셀레브러티’는 상류층를 대신해서 상류층의 삶을 전시하는 살아 있는 마네킹과도 같다
이번 주말에도 사라들은 자본주의의 훈장을 수집하러 차를 몰고 교통마비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아웃렛으로 몰려간다.
#프랜차이즈_맥도날드에 대한 명상
악화에 의해 양화가 밀려날 때, 양화는 악화만을 탓한다…하지만 비난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화학조미료를 탓하기보다 천연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내는 게 더 중요하다
합리화의 끝에서 만나는 어이없는 비합리성? 맥도날드화는 진보처럼 보인다. 합리화의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낡은 것들은 녹아내린다. 합리화의 비를 맞고 화려한 꽃들이 활짝 피기를 기대했지만, 합리화 그 이후 펼쳐지는 풍경은 모노톤이다(다양성이 사라진 획일화된 표준화)
쇠감옥? 작은 합리적 선택이 쌓여 빚어낸 거대한 비합리성 속에서 자본의 지배가 확대되면 우리는 자본의 울타리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쇠 감옥’에 갇힌 꼴이 된다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빵집 주인들이 전쟁에서 이기겠다고 고용한 내레이터 모델이 흥겹게 춤추며 마이크 볼륨을 높이고 있다.
마주 보고 있어도 곁에 있어도 서로 이웃일 수 없는 비합리적인 무한의 생존경쟁을 반복하고 있다. 비합리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살벌한 도시 풍경!
#열광_열광이라는 열병
아이돌 가수에 열광하고 집단 실신하는 소녀 팬들 뒤에는 괴벨스의 충실한 후계자인 보이지 않는 기획자가 있다. 광적인 훌리건을 비판하기는 쉽다.하지만 훌리건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동안, 정작 훌리건으로 인해 이득을 보고 있는 집단은 꼭꼭 숨어 있다.
공중 vs 군중
#언론_여론의 흥망성쇠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타인의 의견에는 관심 없다
많은 칼럼은 사실상 공직을 구한다는 이력서에 가깝기도 하다
#기억_역사라는 이름의 공허한 기억
시청률 저조한 기념일 프로그램? 감정의 사이보그에 다름없는 그들의 천부적인 재능으로 악어새의 눈물 연기를 펼치는 대히서사극 중계가 시작되면, 텔레비전 밖의 사람들은 재빨리 리모콘을 눌러 버린다
#불안_위험은 기술을 먹고 자란다 [위험사회]
모든 것이 불안하다? 진보한 지식의 체계가 선물하는 일기 예보가 있는 한, 태풍의 핵 속으로 항해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우리의 상식대로라면 근대화된 사회는 안전해야 한다. 하지만?
근대화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위협은 전근대적인 위협과는 다르다..새로운 불안은 기술적 진보 때문에 발생한다
기술관료적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합리적 사회의 부메랑 효과로 탄생한 위험, [위험사회]
저발달 사회에는 원자력발전소도 없다
위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위험은 발생하고 난 후에야 가시화된다!
현실의 위험은 실험실에서 예측될 수 없다? 제한된 실험 조건들, 그러나 통제할 수 없는 현실
#종교_자본주의가 종교를 만날때
“걱정들은 자본주의 시대에 고유한 정신병이다”-벤야민
종교는 ‘걱정’을 건드리고, ‘걱정’을 대신해 ‘구원’을 약속한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이다.
#2 삶의 평범성에 대하여
#이웃_나홀로 고스톱
이웃한 사람의 가치는 내가, 그 사람이 오랜 기간동안 그곳에 머무를 때만 의미를 지닌다. 나그네끼리는 원래 관심이 없는 법이다.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옆 집 사람보다 부동산 가치의 동향이 더 궁금하다.
‘이웃’을 찾아 오늘도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에 목숨을 건다
#성공_자기계발서의 장르 규칙
역설적이게도 자기계발서의 독자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뿐이다. 자기계발서는 ‘계급 법칙’을 숨긴다.
#명예_명예의 기원 [호모루덴스]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은 타인을 적이 아닌 친구 혹은 숭배자, 팬으로 만들어야 한다. 명예는 자기 선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정을 통해서 획득되기 때문이다..명예를 위한 경쟁은 타인을 친구로 만들려 한다.
#수치심_수치심, 자기통제의 덫
창피하다는 느낌, 수치심은 문명인의 전유물이다. 문명이 바람직하다고 간주하는 행동 양식에서 벗어났을 때 울리는 경고음. 수치심은 자기통제를 강화한다.
소비자본주의, ‘리이프스타일’ 조차도 단어의 뜻이 바뀌어 소비의 대상이 된다. ‘라이프스타일’이 수치심을 자극하는 소비주의의 타깃이 되면, 삶을 영위하는 방법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텔레비전 예절학교에 의해 수치심이 끝없이 속류화되면, 수치심의 영역은 점점 사소한 대상으로 축소된다다. 우리가 ‘입 냄새’와 ‘떡진 머리’ 같은 사소한 수치심에만 예민해져 있을 때, ‘공금횡령’, ‘불법상속’, ‘논문 표절’, ‘위장 전입’과 같은 짓을 하는 후안무치라는 단어로도 부족한 사람들이 텔레비전에 등장해 속류화된 수치를 가르치고 있다. 속류화된 수치에만 민감해진 문명화된 사회의 지독한 역설이다.
#3 좋은 삶을 위한 공격과 방어의 기술
#노동_임금노동의 운명 [임금노동과 자본]
자본주의 발생 이전? 그들은 과다하게 노동할 필요가 없었고, 내키지 않을 때 이외에는 더 이상 일하지 않았다…노동은 그 자체로 이미 그들에겐 오락이었으며, 이웃의 오락과 놀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우리와는 다른 농부? 적어도 자기 땅을 갖고 있었다
임금노동이 시작되는 순간 그의 삶은 정지한다. 그는 자신의 삶을 퇴근할 때야 되찾을 수 있다. 임금노동이 시작되는 순간 개성이나 성격은 자취를 감춘다. 사교적이지도 않은 성격의 소유자도 승무원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감정노동을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세상에서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며 친절한 성격인 척해야 한다.
해결책은 꿈이 아니라 현실 속에 있다고 깨달은 사람은 더 이상 복권 따위에 기대를 걸지 않는다. 세상에는 여전히 복권을 사는 사람과 더이상 복권에 기대하지 않고 연대라는 죽어버린 단어에 귀 기울이는 두 종류의 임금노동자가 있다.
#게으름_노동과 게으름에 대한 불편한 진실
생물체를 파괴하는 과잉노동, 상품의 과잉생산
“으흠, 그렇긴 그렇지요. 기술은 산업혁명 당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는데, 노동시간은 도통 줄어들지 않았으니 그건 저도 참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는데, 노동하는 사람에겐 고생 끝이란 표현은 그림의 떡인 것 같습니다.”
심지어 집에까지 일감을 들고 가야 하며, 정시 퇴근은 근로기준법의 사문화된 조항에 불과하고, 장기 휴가는 언감생신인 정말 부지런한 개미들과 만났다.
#집
인간은 정주를 꿈꾸지만, 자본은 정주를 업신여긴다. 자본은 ‘부동’의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자본은 정주하고 싶은 사람의 꿈을 하찮게 여기며 유동의 자유를 강조한다.
방랑해야 하는 운명을 지닌 경제적 난민을 끝없이 만들어 내는 자본의 놀라운 유동에 제동을 거는 브레이크 장치는 어디에 있을까?
#성숙_배운 괴물들의 사회
경제성장? 성장과 성숙이 일치하지 않는 사회에서 교육은 위인을 길러 내는 것이 아니라 범죄를 저리르는 괴물의 생산 공장으로 전락한다.
성장했지만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배운 지식을 사용해 금융 사기를 친다
배웠지만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이렇듯 괴벨스처럼 위험한 괴물에 다름 아니다
높은 교육열과 화려한 교육 통계지표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 사회에서 나타나는 ‘배운 괴물’들이 벌이는 악행들의 ‘쇼쇼쇼!’가 끝나는 순간은 대체 언제일까?
#죽음_죽음에 대한 성찰 [타인의 고통]
뉴스의 숨겨진 장르 규칙 하나? 뉴스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죽음을 보도한다…하지만 죽음 소식을 듣고도 우리의 마음속에선 동요가 일지 않는다.
구경꺼리로 전락한 죽음, 우리는 죽음의 축적을 보고도 무덤덤하다. 그게 관음증이다.
얼굴의 주름이 아니라 지혜가 먼저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삶의 리얼리티와 용감하게 대면하여 좋은 삶을 위한 공격과 방어의 기술을 익혔기 때문일 것이다. 원숙한 노인의 얼굴은 인생의 동지에서도 달빛 아래 오히려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사회로부터 고립당할 위험에 처한 사회학자의 고백
“한 생명을 구한 자는 전 세계를 구한 것과 같고, 한 생명을 파괴하는 자는 전 세계를 파괴하는 것과 같다”-탈무드
사람들의 ‘세상으로서의 사회’ vs 아카데미의 ‘세계로서의 사회’
“왜 사회학자들이 해석하는 세계와 내가 경험한 세상은 어긋날까?”
“사회학자는 나보다 세상물정을 알지 못해!”
우리의 말은 우리의 생각을 담는 도구가 되지 못했다. 이제 막 학문의 언어로 시민권을 얻은 한국어는 서양 텍스트에 주석을 다는 언어로 전락했다. 단지 차이는 모범생의 텍스트가 동양 고전에서 서양 고전으로 바뀌었을 뿐, 책을 읽는 방법에 관한 한 ‘모범생’의 책 읽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모범생는 책 읽는 기계, 암기하는 기계에 가깝다. 기계의 책 읽기는 즐거움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고통을 치유해 준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는 사실? 당신의 고통은 당신 탓이 아니다!
콜드 팩트cold fact? 당신의 고통은 당신 탓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는 고통에 당신은 책임이 없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당신 마음 속의 고통을 끝없이 만들어 내는 어떤 존재가 있다…그렇기에 상처받은 삶은 상처받은 사회를 치유하지 않은 채 치유될 수 없다.
나의 불행의 근원이 모두 기구한 팔자 때문이라고 믿게 만드는 환등상의 불을 끄고 그 어둠속에서 세속의 리얼리티와 마주칠 때 그리고 ‘콜드 팩트’를 찾아낼 때 우리는 비로소 힐링의 대상은 나의 마음이 아니라 각자가 살고있는 사회임을 깨닫게 된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은 죄가 없는 개인들이 죄가 많은 사회에게 불만을 말하는 애처로운 시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