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로부터 배운다는 것. 심상정.
역경을 거꾸로 하면 경력이 된다. 참 오묘한 우리말인데, 그만큼 우리네 사람살이도 오묘하지 않은가? 심상정 의원이 우리 시대의 역경을 이겨내고 희망을 만드는 경력, 새로운 정치를 만드는 경력을 가질 것으로 믿는다. 그 길이 바로 이 책에 기록되어 있다.-박원순
요즘 한 인문학자의 노자 강의에 흠뻑 빠져 있습니다. 노자의 말 중에 ‘거피취차去彼取此’라는 말이 있어요.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 하는 뜻입니다. 저 멀리 걸려 있으면서 인간과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과 결별하고, 바로 여기 있는 구체적이고 자발적인 생명력에 주목하라는 말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개인이 겪고 있는 삶의 고단함이 인문학 열풍을 불렀다고 봅니다. 그런데 왜 그 열풍만큼 고단함은 해소되지 않고 있는 걸까요? 지금 필요한 것은 자기와 세계가 마주하고 있는 곳에서, 자신의 선택이 무엇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경험을 자꾸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결정을 계속 유보하면 그 빈 공간은 점점 더 커지기만 합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공부를 하면서 그 공간이 메워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스스로 자기 결정을 해야 그게 진짜 학습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보 정치가 내걸었던 ‘거대한 소수’라는 전략은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진보 정치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이겁니다. “그런데 되겠어?” 이 말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지요. ‘무상 의료, 무상 급식, 그런 거 다 좋은데, 진짜로 할 수 있겠어? 진보 정당이 옳은 건 알겠는데 그래서 세상을 바꿀 수 있겠어?’ 자존심 상하는 말이지요.
많은 실패를 해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버릴 것과 지킬 것의 사이에서, 우리는 계속 배우고 있는 겁니다. 한때 강점이었던 것도 과감히 버리고, 한때 받아들일 수 없던 것들도 취하면서.
그렇다면 왜 양질의 인사들이 민주당에 대거 수혈되었는데도 민주당은 대선에서 패배한 것일까요? 왜 민주당은 새누리당과 뚜렷이 구별되는 대안을 제시하고 새누리당에 맞서 정치투쟁을 벌일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것일까요? 그것은 내부에 민주당을 변화시킬 가치와 내용을 가진, 즉 새로운 민주당을 만들 방향과 비전을 제시할 세력이 존재하지 않거나, 스스로가 그런 세력을 키울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이 보기에 박정희는 아주 멀리 있지요. 반면 노무현은 너무 가깝습니다. 멀리 있는 것은 ‘과過’가 눈에 잘 안 드러나고, 가까운 것은 ‘공功’이 눈에 잘 안 띄는 법이지요. 박정희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독재자였지만 보릿고개를 이긴 대통령으로 기억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여전히 고통의 기억이 생생한 전임 정권의 책임자였습니다. 즉 선행 책임의 기억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이죠.
제가 정치권에 들어오기 전 노동운동을 할 때에는, 그 무엇에 앞서 제가 갖고 있는 신념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정치는 막스 베버의 말처럼 ‘신념 윤리’보다는 ‘책임 윤리’가 굉장히 중요한 것이더군요.
그 책임 윤리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이것이 새롭게 닥쳐온 문제들이었습니다. 가르쳐주는 사람도, 배울 사람도 주변에 없었지요. 하나하나 직접 겪어보면서 터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청년 실업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청년 실업은 큰 문제예요.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최고 수준의 대학 진학률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대학 졸업자 중에 정규직이 되는 사람은 65퍼센트도 되지 않습니다. 개인과 사회가 엄청난 비용을 투여해서 고학력의 비정규직을 만들어내는 꼴이지요. 실업 문제에다가 비정규직 일자리까지.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입니다.
이 문제를 개인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젊은이들에게 정치의 문제가 중요하게 부상하는 것입니다. 정치의 도움이 가장 절실한 세대가 2030세대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들이 미래의 3040세대가 될 것입니다. 가장 무기력한 세대가 우리 사회의 허리가 되었을 때,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가 되겠습니까? 모두의 공동체를 위해서라도 이들을 위한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한 번이라도 자신의 인생과 관련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 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보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까? 우리 때는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 엄혹한 시절에도 우리는 대학에서 낭만과 지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중고교생 때부터 경쟁에 내몰려서 그런 생각을 한번 해볼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런 생각에 몰두해보세요. 거기에 내 인생의 승부를 한번 걸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학생들이 많이 공감합니다. 그런 반응을 보면 진보 정치인도 개인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의 관점에서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한국의 대부분 학생들은 현재의 엘리트 경쟁에서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실패하고 나면, 그 순간부터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막막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실패했다는 것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반드시 이것을 하고 싶고, 내가 이것을 해야 한다’라는 마음이 분명했으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될 수 있지요. 그런데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마치 물고기 떼가 먹이를 쫓아 몰려다니듯이, 부모와 사회의 기대와 압박에 밀려 비슷한 목표를 향해서 무작정 달려왔거든요. 그렇게 살다가 실패를 하게 되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난감해지는 것이지요.
“골리앗의 시대에는 다윗을 읽자”라는 말은, 러시아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책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에 나오는 것입니다
“진보 정당과 민주당의 차이가 무엇이냐?” 저의 답은 이것입니다. ‘인간이 처한 삶의 조건에 대해 측은지심을 갖고 있느냐. 그리고 그것에 대해 공동의 책임감을 함께 느끼느냐.’ 이것이 차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인간의 본질적인 측면에 대한 유대감과 이해 없이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각 정당의 이념적 차이보다 그런 삶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더 우선하지요. 너와 내가 다르다 하더라도, 가장 기본으로 삼는 기준이 무엇인지, 그것을 확인하는 경우에는 신뢰가 생깁니다
타인의 삶에 대해 측은지심이 있느냐.
그것이 진보와 기득권 세력의 본질적 차이입니다.
그 마음은 동정심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이해입니다.
나 또한 그런 인간이고,
그것에 공동의 책임을 느끼는 것,
그런 이해가 없이 좋은 정치를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아쉬워하는 것은 과거의 ‘오류’ 자체는 아닙니다. 그런 선택의 이유를 주변 사람들, 특히 함께하는 진보 정당의 당원들과 적극적으로 나누는 작업이 부족했다는 겁니다.
실패를 하면 여러 가지 고민들이 다 사라져버려요. 가장 본질적인 것만 남지요.
지금 청년들이 매우 어렵다는 건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런 것을 인정하고 공감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텐데, 저는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 이런 질문만 던지고 있는 거지요. 그러니 청년들이야말로 진보 정치가 절실한데, 정작 그들에게는 진보 정치가 낯설고 어렵고 기피하고 싶은 것이죠.
그러나 인생에서 낙오자가 되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 이후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가 어느새 ‘위너’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루저’가 되지 않기 위한 것으로 변했습니다
세금이란 기본적으로 나눔의 정신입니다. 스웨덴에서 금융 위기 이후 조세수입이 많이 줄어드니까 여론 조사를 했습니다. 그때 과세율을 높여서라도 현재의 복지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답변이 70퍼센트에 이르렀습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면세 대상자인데도 증세 얘기를 하면 ‘세금 폭탄’을 던지는 것이라고 반발합니다. 즉 스웨덴 사람들은 세금을 나눔이라 여기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금을 약탈로 여기는 것이죠. 그만큼 조세 저항이 큽니다.
보수의 복지는 시혜적 복지이고, 진보의 복지는 권리로서의 복지입니다. 보수의 복지는 기본적으로는 시장을 통해 생활을 해결하고, 시장이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만 복지를 논하는 것입니다. 그 범위 안에서만 국가가 사회 안전망을 형성하고 책임지려는 것이죠. ‘잔여 복지’라는 말이 그래서 생긴 것이에요. 시장을 보완하는 개념인 것입니다. 반면 진보가 말하는 권리로서의 복지는 공공의 복지입니다. 인간의 기본권을 시장에 맡겨둘 수 없으니 정부와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북유럽의 복지가 그것입니다. 시장경제만으로는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기 어렵고, 공동체가 유지되기도 어렵기 때문에 국가나 사회의 힘으로 복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보수의 복지는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자는 것이고, 진보의 복지는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지자는 것입니다. 보수의 복지는 현재를 보완하는 것이지만, 진보의 복지는 새로운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입니다.
보수의 경제민주화는 시장경제의 성장을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성장을 주도하고 있는 재벌과 대기업 중심의 공정 질서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이럴 때 대단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요. 원천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반면 진보의 경제민주화는 그 중심이 소득을 얻는 이들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제 한국 경제를 소득 주도의 경제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죠. 그렇게 우리 경제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정치적 리더는 어떤 정책을 만드느냐보다, 어떤 가치관을 갖고 국민들과 어떤 종류의 유대감을 만드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지금 결혼 비용 중 67퍼센트가 주거 비용이라고 합니다. 집값이 너무 비싸니 전세금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사회 초년생에게는 그마저 없어 결혼을 못 하는 거예요. 그걸 보면 부동산을 소유한 부모 세대가 집을 얻어야 하는 자식 세대를 착취하는 구조가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죠.
서로의 생각과 언어가 다르면 같이하기 어렵지요.
‘공적권력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정치적 소극성이야말로 정치적 범죄라고 하지요.
좋은 정치인을 키워내기.위해서는 반드시 정치적인 힘을 갖춘 정당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이론이, 어떤 설계가 더 우수하나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봐야 하는 게 정치예요.
수구는 버려야 할 것을 지키는 것이다. 보수는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것이다. 진보는 버려야 할 것을 버리는 것이다.
정치와 운동의 차이?
진보 정치가 재도약하기 위해서는 정치와 운동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운동에서는 신념 윤리가 기본이지만, 정치에서는 책임 윤리가 아주 중요하다
실패를 한번 해보면, 그 순간 자기 주변의 모든 것들이 싹 정리되는 느낌이 듭니다. 그 순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져요. 그런 것을 경험해봐야 합니다.
편견은 지우고, 오해는 해명하며 한계는 뛰어넘자
마중 나갈 수준의 자유주의가 무엇이냐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대한민국의 핵심 과제가 노동의 문제라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