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삶을 먹다 Bring It to the Table: On Farming and Food. 웬델 베리Wendell Berry. p315
대지의 청지기 웬델 베리의 먹거리, 농사, 땅에 대한 성찰
웬델 베리, 이 시대의 예언자
우리는 이제 소로우 이후에는 웬델 베리가 있다고 감히 말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의 농업 시스템 전체가 값싼 석유에 의존하고 있다”-오바마
“흙과 동식물과 사람의 건강 문제를 모두 하나의 큰 주제로”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알버트 하워드
값싼 먹거리에 드는 진짜 비용과 건실한 농업의 가치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먹거리 문제는 그 시절 사람들도 여전히 가치를 인정하고 관심을 갖는 주제였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땅이나 농민의 수고와는 연결 지어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자연과 문화 사이에 튼튼한 다리를 놓아준 웬델 베리, 그는 우리에게 더 이상 방관자가 아니라 참여자로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다
보존론자가 왜 농사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가장 명백한 이유는 본존론자도 먹는다.
먹거리에 관심이 있으면서 먹거리 생산에 관심이 없다는 건 명백한 부조리다. 도시에 사는 보존론자는 자신이 농민이 아니므로 먹거리 생산에 무관심해도 좋다고 생각할지 모른다…그들은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위해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지어야만 먹을 수 있다.
*“먹는다는 게 농업적인 행위”? 우리 모두가 농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먹거리의 정치학은 우리의 자유와 연관이 있다. 우리의 정신과 목소리가 다른 누군가의 통제를 받을 경우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은 아직은 잊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먹거리와 그 원천이 다른 누군가의 통제를 받을 경우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은 간과해 왔다. 수동적인 먹거리 소비자로서의 조건은 민주적인 조건이 아니다. 책임 있게 먹어야 하는 이류 하나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다.
#살림을 되살리는 일
트랙터를 비롯한 농기계들이 떠나 버린 농민들의 일손을 덜어 준 건 사실이지만, 남은 사람들은 전보다 더 고되게 오래 일하고 있었다…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왜 그런지를 질문해 보기 시작했다.
우리가 농사짓는 방식이 지역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지역사회의 경제가 우리가 농사짓는 방식이 지역 생태계의 건강과 온전함에 영향을 끼치고,…우리는 더 이상 농업을 부품만 갈아 끼우면 되는 ‘경제 기계‘ 같은 것으로 취급할 수 없다.
그들의 대규모 경제는 이해로나 계산으로나 땅과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았다.
트랙터는 멀리서 공급되는 물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농업과는 별상관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경제에 속한다는 사실을 내가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트랙터의 도래는 다른 무엇보다, 농업이 무상의 태양에너지에 거의 전적으로 기대다가 이제는 돈이 드는 화석연료에 절처히 의존하는 상태로 변화함을 알리는 신호였다. 하지만 1950년의 나는 당시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값싼 연료의 공급에 한계가 있을지 모른다고 어렴풋이 자각하게 되기까지 여러 해를 보내야 했다.
그무렵 우리는 한계를 모르는 환각의 시대에 접어든 셈이었는데, 그럴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다…이 세상에서 한계는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불가결한 것임을 다시 알게 되기까지는 여러 해 동안의 독서와 사고와 경험이 필요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사용하는 수단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확실히 영향을 끼친다? 트랙터는 지치는 법이 없이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최고의 속도로 작업을 할 수 있다. 이제는 일을 멈추고 쉬기에 좋은 그늘진 곳을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다…소년은 땅을 가능한 빨리, 되도록이면 쉬지 않고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게 되면서, 고속도로나 비행기로 이동하는 사람의 심리를 갖게 되었다. 소년의 관심은 장소에서 기술로 이동해 버리고 말았다.
*이제 나는 우리가 기계로 일을 하면 세상이 기계처럼 보이고, 살아 있는 가축을 데리고 일하면 세상이 살아 있는 대상으로 보이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한다. 아무튼 기계로 농사를 지으면 분명 땅과 가축에 대해 기계적인 생각을 하기 쉽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기계적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트랙터의 지치지 않은 특성은 인간의 경험에 새로운 차원의 피곤함을 가져다 주었다. 게다가 건강과 가족생활이라는 충분히 계산하지 않았던 비용까지 치르면서 말이다.
농장과 농부의 생각이 충분히 기계적인 것으로 바뀌면, 산업농업은 유지나 관리보다는 생산에만 초점을 맞추게 된다. 여기서는 문제는 극대화된다. 거의 전적으로 생산만을 강조하다보니…생산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농장과 모든 고려 사항은 사실상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런 곳의 농부도 사실상 사라져 버렸다.
인간사에 전혀 새롭고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농가 사람들이 자기 먹거리를 전부 사먹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살림을 과학으로? 어떤 학문 분과가 과학으로 만들어지거나 과학으로 불릴 경우, 우리는 그것이 훨씬 정확하고 복잡하고 위신이 높아졌다고 생각하기 쉽다..실은 과도하게 단순화한 것이 되어 버린다!
농가의 동식물을 ‘생산물’로만 본다는 것은 과격하고도 파괴적인 과도한 단순화일 뿐이다
과학으로 대체될 수 없는 살림? 살림을 과학으로 축소시키는 것은 실은 동물 배설물을 농업 ‘폐기물’이라며 오염물질로 바꿔버리는 일이며, 돌려짓기를 하면서 다년초와 풀 뜯는 동물을 제외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그런 농업은 미국을 주인이 많은 나라에서 종업원이 많은 나라로 바꾸어 버렸다.
농사를 잘 짓는 일은 동식물 가릴 것 없이 모든 생명에게 정성을 들이는 일이다.
“맥락을 벗어나면 최고의 정신이 최악의 해악을 끼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농업의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모든 수단을 새로이 하고 살리는 일이다. 지금 살림을 되살리는 일은, 실제로는 지극히 복잡한데 단순화되어 버린 대상을 보내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일이다. 그러자면 생태계의 건강을, 농장을, 인간의 공동체를 농업의 궁극적인 기준으로 다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문화적인 움직임은 개별적인 것이어야만 존속될 수 있다(다양성을 위한 개별성). 나는 농업 과학자든 아니든 우리 모두가 갈수록 덜 전문화되어야 하고, 혹은 전문화 때문에 고립되는 경우가 줄어들어야 한다는 게 점점 더 분명해지리라 믿는다.
#집중의 어리석음
산업축산의 크나큰 어리석음, 동물 공장의 원칙? 감금, 집중, 분리
동물의 배설물은 적절히 분산되면 비옥함의 훌륭한 원천이 되지만, 집중되면 기껏해야 쓰레기고 최악의 경우 독이 된다!
농업의 산업화는 집중과 분리의 경향능 띰으로써, 건강한 생태계와 건실한 농장의 다양성과 균형에 내재된 견제력을 없애 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전례 없는 과잉생산 능력을 갖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상대적으로 농가의 소득은 감소하고 더 많은 농민이 농촌을 떠나게 되었다. 동물공장은 전통적이고 독립적인 많은 소규모 가족농장 농민을 임금노동자로 대체해 버렸고, 그들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불쾌하고 불건전한 여건에 갇혀 버리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비용을 치르며 늘어난 생산은 일시적일 뿐이다. 결국 인간적이고 생태적인 생산력의 감소라는 대가까지 치러야 한다.
동물공장은 정부가 단기 경제학에 중독된 탓에 존재할 수 있다. 단기 경제학은 장기적인 효과는 무시하면서,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최대한 많은 돈을 벌겠다는 방식이다. 단기 경제학은 이기심과 탐심의 경제학이다. 단기 경제학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이들은 막대한 ‘외부’ 비용을 발생시키고, 그 부담을 미래로 떠넘긴다. 달리 말해 온 세계와 만인의 자손에게 빚을 떠넘기는 것이다.
노스캐롤라이의 여러 강과 그 하구는 ‘민간’ 동물공장 하나가 얼마나 빨리 생태적 재앙이자 공공의 부채가 될 수 있는지를 확실히 증언해 준다(화강산업!)
공장식 축산을 옹호하는 사람은 농업을 옹호하는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
지속가능성의 관점에서 실패한 지금의 농업 경제? 가장 큰 이유는, 지금의 농업 경제가 농민을 생산 과정의 소모성 ‘자원’으로 이용한다는 점이다(거대한 ‘농업 기계’의 부품으로)
#농업 문제는 농업으로 풀자
현대 사회의 가장 강력하고 파괴적인 변화는 언어의 변화였는지도 모른다? 기계의 이미지나 메타포가 크게 부상한 것이다!
살림도 아니고 심지어 농사도 아니다. ‘농산업’이라는 하나의 산업이다. 이 산업은 농장을 ‘공장’으로 보며, 농민이나 식물, 동물, 땅을 교체 가능한 부품이나 ‘생산산단위’로 본다.
산업농업이 실패작인 둘째 이유는 쓰레기를 양산한다는 점이다. 자연계나 생물계에서는 쓰레기가 발생하지 않는다…자연에는 생산 같은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실은 재생산만이 있을 뿐이다(생태 순환)
산업 활동은 ‘회귀’라는 과정이 없으므로 순환을 완성하지 못하며 그 때문에 두 가지 전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데, 고갈과 오염이 그것이다!
그런데 산업농업의 실패가 더 분명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실패로 인한 최악의 사회경제적 여파가 도시로 집중되어 엉뚱하게도 ‘도시 문제’라 불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농업 인구가 워낙 적기 때문에 대부분이 농사에 대해 전혀 모르며, 문제를 봐도 그게 농업의 문제인지를 알아보지 못한다.
들일을 사람 대신 기계가 한다고 해서 꼭 발전인가? 일꾼의 역할이 줄고 기계의 역할이 느는 게 꼭 향상인가?…산업 농업의 언어…어쨌든 이 언어로는 농업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 농업 문제를 농업 문제로 이해하거나 규정하지 못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농토의 크기는 농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다. 가바른 산비탈의 안데스의 농민들이 침식을 막는 방법? 그들이 알고 있는 온갖 수단과 방법 중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농토를 작게 유지하는 일이다.
균형의 문제를 해결하면 농장의 생산이 웬만큰 일정해진다. 그리고 더 이상 시장가격의 등락에 따라 농사를 짓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농사는 농사가 아니라 산업경제의 모방이니 말이다.
산업농업은 농부를 ‘노동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건실한 농부가 최고 단계의 장인이라는 사실을, 일종의 예술가라는 사실을 간과해 왔다…산업주의 경제학은 그러한 사실은 무시하고서, 농장에서 부실한 작업을 하도록 부추켰다. 부실한 작업은 쉽게 값을 매길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건실한 작업은 경제학자의 예측을 뛰어넘기 때문에 가치를 따질 수 있되 값을 매길 수는 없다.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에 내다팔 목적으로만 생산하는 사람들은 주로 양적인 관심만 있는 반면, 자기가 생산한 것을 생존 수단으로 이용하여 생활하는 사람들은 양뿐만 아니라 질에 대해서도 고심하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건실한 생산은 건실한 농사의 결과일 뿐이다.
#가족농을 옹호한다
가족농업은 건실한 농업과 동의어나 마찬가지다
토양 침식이 심각하다? 땅을 이용할 농민은 충분하되 땅을 보호하면서 이용할 농민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 땅을 오래 소유하면 지식과 애정이 쌓이고, 오래된 지식과 애정은 그 값을 한다.
“분업은 노동활동을 팔다리 잘린 몸짓으로 축소시켜 버린다”-로버트 하일브로너
산업화와 더불어 손으로 하는 일은 대체로 평가절하되고 말았다
성장률,수익성? (땅과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숫자) 우리의 경제는 갈수록 추상적인 것이 되어 가고 있다. (그들은 경제의 건강성을 금액으로만 측정할 수 있다)
‘일을 덜어 줄’ 것이라는 말에 넘어가 이용한 기계와 농약과 대출이 실은 이웃을 대체하는 노릇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웃은 대가없이 서로 도와주는 반면, 기계와 농약과 대출은 이웃이 ‘아니던’ 이들이 정한 대가를 치러햐 했다.
요컨대 내가 제안하는 바는, 농민이 산업경제라는 사기 도박장에서 헤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이웃공동체, 지역공동체를 되살리자)
아주 어려운 시기 동안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번창해 온 소농들의 공동체? 아미시
#판단은 농장에 맡기자
작은 섬, 65가지 품종의 양! 이러한 지역별 적응은 어디서든 농업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일종의 어휘력과도 같다.
농장이 판단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지역별 적응이란 게 있을 수 없다
품평회의 유혹? 우리 시대의 가축 육종은 상업적 요구와 품평회의 유혹 때문에 특정 품종에 집중해 혼 경향이 있다(다양성 상실).
대부분 몸집이 크고 풀 대신 곡물을 먹고 살아야 하는 것도 다 그런 까닭이다.
곡물 사료와 감금식 사육? 어떤 육종가도 지역에 맞는 적응력을 갖춘 품종을 길러 낼 수 없다
#농업과 에너지
훨씬 더 독립적인 옛날 방식? 한 마리 말에서 비롯된 에너지 이용
***도덕적 무지? 우리가 부유한 이유는 우리가 후세 사람들이 타고날 권리와 살아갈 수단을 우리 시대에 다 팔고 써버리는 법을 배웠으며 기꺼이 그러고자 한다는 것뿐이다
에너지는 단순한 연료가 아니다. 에너지는 강력한 사회적,문화적 영향력이다. 에너지의 종류와 양은 우리 삶의 종류와 질을 결정한다.
옛날 농업은 때 맞춰 하는 것이 미덕, 산업농업의 미덕은 속도.
우리는 ‘석유달러’의 유출을 벌충하기 위해 ‘농업달러’를 쓰고 있다. 사실상 우리는 트랙터를 굴리기 위해 표토를 수출하고 있는 셈이다.
#위생과 소농
지난 삼십년 동안 농장의 생산방식을 지배해 온 위생법의 타당성과 정직성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새로운 위생법은 늘 더 많이, 더 비싼 장비를 요구하는가? 왜 항상 소규모 생산자의 역행하는 결과를 낳았는가? 돈이 많이 들지 않으면서 건강하고 깨끗할 수는 없는가?
‘소비자 보호’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일들? 하지만 소비자와 생산자의 사이를 점점 더 멀어지게 하고, 중개인과 대리인과 검사관이 자꾸 늘어나게 만드는 시스템이 어떻게 소비자를 보호할 수 있는가?(얼굴없는 생산자와 소비자)
아마도 지금 시스템의 가장 큰 오류는 대규모 기술에 적합하지 않은 땅과 그런 기술을 쓸 형편이 못 되는 사람을 생산으로부터 배제한다는 점일 것이다
#척도로서의 자연
생산의 딜레마? 수요는 상승하는데 생산을 감당할 농촌사회의 기반을 저하되고 있다!
생산성만을 기준으로 삼는 방식은 실패했다. 이제 우리는 생산성이라는 유일 기준을 보다 포괄적인 것으로 대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바로 자연이라는 기준이다.(생산성이라는 ‘단일한’ 척도, 자연의 척도는 훨씬 복잡하다)
#흙과 건강에 대하여
농장이 ‘지속가능한’ 것이 되어야 한다면 아무것도 버려서는 안 된다. 농장은 모든 과정에서 하워드가 “되돌림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을 준수해야 한다(생태순환)
병은 선생? 작물이 병이 들면,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기 때문, 그러면서 진짜 농업을 배우게 되었다. 결국 병해충을 없애는 것은 농업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회피하는 일인 것이다
경제를 목적으로 삼거나 척도로 삼는다? 모든 것은 상품으로 축소되고 만다!
#먹는 즐거움
“도시 사람들은 무얼 할 수 있을까요?”
“책임 있게 먹어야 합니다.”
먼저 나는 먹는다는 게 농업적인 행위라는 주장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먹는다는 건 씨를 뿌리고 싹이 트는 것으로 시작되는 먹거리 경제의 한 해 드라마를 마무리하는 일이다. 하지만 먹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사실을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먹거리를 농산물이라 생각할지는 몰라도 자신을 ‘소비자’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 이상을 생각한다면, 자신이 수동적인 소비자임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들은 구할 수 있는 것들의 범위 내에서 원하는 것을, 혹은 원하도록 설득당한 것을 산다.
대부분 도시 쇼핑객들은 먹거리는 농장에서 생산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그것이 어떤 농장인지 혹은 어떤 종류의 농장인지, 농장이 어디에 있는지, 농사에 어떤 지식이나 기술이 이용되는지 알지 못한다.
식품산업이 주는 대로 받아먹는 사람은 먹는다는 게 농업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다. 먹는 일과 땅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거나 상상하지 못하며, 그래서 수동적이고 무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희생자인 것이다! 먹는 사람이 먹거리가 농사나 땅과 상관이 있다는 생각을 더 이상 하지 못한다면, 그는 아주 위험스러운 일종의 문화적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셈이다.
여느 정치학과 마찬가지로 먹거리의 정치학은 우리의 자유와 연관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과 목소리가 누군가의 통제를 받을 경우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아직은 잊지 않고 있다(언론,표현의 자유). 하지만 우리의 먹거리와 그 원천이 다른 누군가의 통제를 받을 경우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은 간과해 왔다. 수동적인 먹거리 소비자로서의 조건은 민주적인 조건이 아니다. 책임 있게 먹어야 하는 이유 하나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다!
이런 무감각함은 식품산업의 광고에서 너무나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갖가지 먹거리가 살아 있는 생명체였다는 사실(살아 있는 생명을 먹는다)
양에 대한 집착? 양을 늘리기 위한 규모 확대, 원가 절감. 하지만 규모가 커질수록 다양성은 떨어진다. 다양성이 떨어지면 건강이 부실해지고, 건강이 부실해지면 약품이나 화학물질에 대한 의존조다 높아질 수밖에 없다. 자본은 노동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사람인 일꾼을, 땅의 천연적인 건강과 비옥함을 기계와 약품과 화학물질로 교체해 버린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먹거리 생산에 가능한 참여한다/ 음식을 직접 조리한다/ 원산지를 알고, 가까이서 생산된 먹거리를 산다/ 직거래/..먹거리 종이 생기고 자라는 과정에 대해, 가능하면 직접적인 관찰이나 경험을 통해 많이 배운다
충분히 다 즐기면서, 무지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을 누리면서 먹는다는 건, 어쩌면 우리와 천지만물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가장 심오하게 표현한 일일 것이다. 이 즐거움을 통해 우리는 의존하기에 감사해야 하는 존재임을 체험하고 축복할 수 있다.
하느님의 몸 말고는/ 먹을 게 없으니,/ 있으면 찾아보라/ 신성한 식물과 바다는/ 하느님의 몸을/ 상상에 내맡긴다.-William Carlos Williams
우리가 먹고 있는 모든 먹거리는 자연에서 얻는다. 공기로 숨을 쉬고 물을 마시고 온갖 동식물을 잡아먹고 산다. 결국 우리 몸속에는 온갖 것이 다 들어와서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움직인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함께 내 몸속에서 살고 있다.-권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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