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홍기빈. p392
지구정치경제학
비그포르스-잠정적 유토피아의 정치경제학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라는 정치경제학의 두 가지 큰 이념적 틀을 성공적으로 극복한 에른스트 비그포르스
20세기는 사회민주주의의 세기
복지 정책은 단순히 기술 관료적인 관점에서 처리할 것이 아니다. 이는 누가 무엇을 얼마만큼 어떻게 왜 가져가야 하는가라는 실로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 대해 우리 정치 공동체가 일정한 정치적 합의를 이룰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지는 단순한 경제 정책이나 사회 정책의 문제이기 이전에 정치사상의 문제다.
비그포르스는 20세기의 세계 사회(민주)주의 운동 전체에서 거의 유일하게 성공적인 결과를 낳은 이론적,실천적 혁신을 이룬 인물이다
한때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주장하던 마르크스주의는 파산했고, 현실과 동떨어진 ‘공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새로운 돌파구는 쉬이 열리지 않았다. 그람시의 말대로 “낡은 것은 명이 다했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태”, 그야말로 위기의 상황이었다
낭만주의자들이 보기에 자본주의는 인간 사회를 망치는 악이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따뜻한 공동체는 파괴되고 오로지 돈 계산을 앞세운 타산적인 개인들의 무한 경쟁만이 남게 된다.
지금 당장 눈앞의 사람들이 고통 속에 살고 인간 세상은 갈수록 이상적 공동체로부터 거리가 먼, 서로 헐뜯고 상처 내는 짐승들의 정글이 되어가는데 먼 미래의 인류 역사가 중요하다는 말인가?
공동체의 꿈? “그를 혁명가로 만든 것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뤼드베리였다”
실천 없는 이론에 빠져버린 독일 사민당과 이론 없는 실천에 매몰되어버린 영국 노동당
우리 사회민주당은 향후 100년 동안 성취할 경제 강령은 가지고 있지만, 향후 10년 동안의 경제 강령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
잠정적 유토피아? 지금 주어진 현실에서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는 유토피아! (일자리 보장, 노동 시간 단축, 연간 2 주간의 유급휴가,…)
‘천지개벽’은 누가 어떻게 이룬단 말인가? 결국 이야기는 원점으로..효과적인 행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집단적 운동이 없으니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 현실이 바뀌지 않으니 행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이디어만으로는 부족하다? ‘제5원소’와 같은 결정적인 무엇? 정치적 지도력! ‘보통사람’ 페르 알빈 한손!
보통 사람은 비전문가? 모든 이의 생각과 마음을 고루 살펴 큰 합의를 이끌어냄으로써 집단을 통합하고 다양한 시각과 주장을 사이에서 균형을 맞출 사람이야말로 가장 귀한 재능을 갖춘 귀중한 ‘전문가’
국민의 집. ‘계급’ 대신 ‘민중 일반’을, ‘계급투쟁’ 대신에 ‘협력과 협조’를
“가정의 기초는 함께한다는 것 그리고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에 있다. 훌륭한 가정에서라면 어느 한 사람이 특권을 갖거나 무시되거나 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좋은 가정이라는 언제나 평등, 배려,협조, 도움이 가득한 곳이다. 규모를 확장하여 이를 민중들과 시민들로 이루어진 가정에 적용해보자….”
혁신적인 아이디어? 어떻게 실현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잘 짜여진 계획을 마련하지 못하면 대중에게 들고 나갈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대공황과 좌파 정당의 무능력? 결국 불황에 대한 대책은 한마디로 ‘악착같이 허리띠를 졸라매라’는 말이 된다! 이러한 논리는 어처구니 없는 허구!(돈이 없어서 일도 못할 지경이라고?)
스웨덴 사민당과 비그포르스가 20세기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이들은 경제 신화에 대한 맹신과 정치적 지도력 부재라는 함정을 모두 피하여 민주주의와 문명의 가치를 유지하는 가운데서도 효과적으로 불황과 실업에 대한 모범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20세기 진보 운동의 가장 중요한 성과라고 할 진보적인 복지 국가 건설의 틀을 세웠다.
그의 주장은 획기적이었다? 실업의 원인은 사적 자본가들이 산업을 제대로 조직하지 못한 비생산성에 있으며 따라서 실업률이 높을 때는 마땅히 국가가 산업을 조직하는 임무를 떠맡아야 한다!
상속세 소동의 교훈? 경제 정책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나라 살림의 계획’? 스웨덴 사민당이 마르크스주의 경제주의로부터 해당되기 위한 길고도 험난한 노정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자본주의의 비도덕성이 아니라 비효율성에 초점, 이데올로기적 딜레마도 풀리기 시작했다
***‘돈이 없어서 일도 못할 지경이라고?’
현대 세계 정치사에서 성공한 선거 팸플릿의 고전
‘사람들의 정책’? 반대하는 논리만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 대신 무언가 적극적인 사회민주주의 정치를 제시해야만 한다
사민당 당원들의 선거운동은 신바람이 났다? 우리는 우리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당의 경제 정책을 사람들의 분명한 이해관계와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고 또 경제적인 관점을 이론적 방식이 아니라 일상적인 상식에 기초해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계속 고무되었다…이제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제 이론을 늘어놓는 쪽은 우리의 반대파뿐이었다.
비그포르스는 사람들의 소박한 경제 상식에서 시작한다? 검약으로 돈을 절약하는 목적은 그 돈으로 ‘자본을 형성’하는 데 있다. 그런데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자본 형성’이라는 핵심을 쏙 빼버리고 혹은 완전히 망각하고서 오로지 검약만을 맹목적으로 내세운다!
생산의 목적은 사람입니다….이렇게 요구하십시오. 인간이 자신들 생산 도구의 주인이 되어야 하며, 그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개혁적 유토피아? 이 전체 과정은 결코 어떤 청사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끊임없는 시행착오와 설득과 합의와 좌충우돌을 거치며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의 점진주의는, 비록 현실에는 아직 분명히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이는 잠정적 유토피아를 분명한 운동 목표로 내걸고 그것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이었다
사회민주주의의 도래는 ‘입증‘되고 말고 할 과학적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윤리적 당위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삶에서 실천으로써 ‘구현‘해야 할 문제였다.
맹목적으로 복종당하지 않는 자유? 사회 과학은 일체의 선입견과 가치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으며, 정말로 ‘더 과학적’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몇십 년, 몇백 년 후에나 찾아올 낙원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낙원이란 인류 역사의 시작에도 없었고 마지막에도 없을 것이다.
시간은 미래를 과거로 만드는 기차? 미래는 현재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도 미래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의 여기에서 다음 지점으로 내 존재 전체를 움직일 수 있도록 이끌고 꾀는 그곳이 바로 미래다.
인간들은 그 가까운 미래의 모습에 비추어 현재를 반성하고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움직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하릴없이 현재에 머물러 궁실거리기만 하는 사회는 사회가 아니라 군집일 뿐이다.
*유토피아와 미래-‘청사진’이 아니라 ‘길잡이’
잠정적 유토피아? 보이지도 않는 ‘미래’로부터 날아와 우리 머릿속에 뚝 떨어진 그런 유토피아가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현재’로부터 생겨나고 또 ‘현재’에 발을 딛고 있는 유토피아다(앞으로 투사해보는 ‘가상의 미래’)
유토피아를 만들어내는 진정한 뿌리는 ‘현존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에 있다(현재로부터 솟아 나온 미래)
구체적인 잠정적 유토피아? 이념과 가치는 책에 ‘쓰여’ 있는 죽은 언어가 아니라 사람들의 도덕적 감성과 정의감을 불러일으키고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상상력과 행동력을 폭발시켜 세상을 바꿀 힘을 끌어내는 활구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