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기쁨. 피에르 신부. p255
“타인들 없이 행복할 것인가, 타인과 더불어 행복할 것인가?”
삶의’해답’이 아닌 ‘공식’을 깨닫게 해주는 책-한비야
믿음, 기도, 용서, 고통, 죽음, 이 진부하기 짝이 없는 말을 어쩌면 이렇게도 산뜻하고 따뜻하고 친근하게 하는지. 마치 이른 아침 단둘이 숲길을 걸으면서 얘기를 나누는 듯한 느낌이다.
듣기만 해도 설레는 단어들-자유, 행복, 사랑, 희망, 이런 것을 얻기 위해 평생 어떤 노력을 해왔는가를 깊은 목소리로 들려준다.
그는 말한다. ‘말이나 상상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고!
***프랑스인들이 뽑은 금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 안락한 삶을 버리고 고통받는 약자들 편에 서서 넝마를 줍는 피에르 신부
그는 한평생 투사였다. 세상의 빈곤과 불평등과 불의에 맞서 전쟁을 선포한 투사였다. 그의 행동은 거침없다. 교회와 성직자가 범한 오류를 과감히 질타하고, 법을 어기고서라도 집 없는 자들에게 집을 지어준다.
강자들이 약자를 짓밟는 걸 두고보거나 고통받는 약자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세상의 저열함에 분개하는 그는 ‘더불어 살기’를 외친다. 사르트르에게 ‘타인’이 지옥이라면 피에르 신부에게는 ‘타인 없는 나’야말로 지옥이다. 타인없이 나 혼자 행복할 것인가 더불어 행복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내려야할 근본적인 선택이라고 그는 말한다.
인생의 황혼기, 삶의 고백? 내 삶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를 고백할 필요를 느낀다. 내게 주어졌던 그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할 필요 또한 느낀다.
생애 마지막 날에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우리가 용서하듯 우리를 용서하소서’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 책이 그 어느 때보다 특히 오늘날 삶의 의미를 묻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1 상처입은 독수리들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사르트르는 썼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반대라고 확신한다. 타인들과 단절된 자기자신이야말로 지옥이다.
엠마우스, 수치스러움에 기죽어 있던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들이 이제 그들 표현대로 ‘당당하게 선 인간’으로 되돌아 온 모습을 본 것이다. 이것이 내 머릿속에 무엇보다 먼저 떠오른 강렬한 기쁨이다.
“..피에르 신부님께 표를 던지지 않을 겁니다. 왜냐햐면 그분과 정치적 견해를 같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방금 들은 욕설만큼은 참을 수가 없군요…독일군 점령 당시…피난…헌 슬리퍼를 신고 있는 걸 보신 신부님께서는 당신의 구두를 벗어주시고 눈길을 맨발로 돌아가셨습니다.”
정치는 사람을 분리시키지만 연대행동은 사람을 결합시키는 법이다.
모든 극적인 기억들! 나의 긴 생애를 수놓은 이 현실적이면서도 기이한 기쁨들에 대한 기억은, 인간이 광대한 지평과 무한한 공간을 갈구하는 존재인 동시에, 마치 상처입은 독수리처럼 진정한 비상을 할 수 없도록 구속받은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다.
#엠마우스-우리는 가난하지만 궁핍을 뛰어넘고 베푸는 자들이다
38개국 350개 단체 공동체
세 가지 규칙? 1)우리가 먹을 것은 우리가 노동을 해서 번다(어떠한 지원금도 받지 않는다)/ 2)우리는 모든 걸 나눠가진다/ 3)멸시받고 소외된 주변인들인 우리는 베푸는 사람이 되는 사치를 누리기 위해 생활하는 데 충분한 정도 이상의 노동을 한다
자살 미수범, 조르주와의 만남
“…당신을 위해 내가 해줄 게 없군요. 한데 당신은 죽기를 원하니 거치적거릴 게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집이 다 지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어머니들을 생각해서라도 집짓기가 빨리 끝날 수 있도록 죽기 전에 나를 좀 도와주지 않겠소?” 그의 얼굴빛이 변했다.
“신부님께서 돈이든 집이든 일이든 그저 베푸셨더라면 아마도 저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겁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그후 그는 자신보다 더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았다. 절망한 자에서 구원자가 된 것이다. 엠마우스는 그렇게 생겨났다.
“신부님, 저는 제가 한 공부에 있어서는 전문가요 제 일도 잘 압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을 알 수 있도록 얼마 동안 제가 여기 와서 함께 지내도 될까요?”- 첫번째 봉사자, 기업가의 아들
나는 인간의 마음이 상처입은 독수리와 같다고 여긴다. 그림자와 빛으로 짜여져, 영웅적인 행동과 비겁한 행동 둘다를 할 수 있는 게 인간의 마음이요, 광대한 지평을 갈망하지만 끊임없이 온갖 장애물에, 대개의 경우 내면적인 장애물에 부딪히는 게 바로 인간의 마음인 것이다.
#가난한 자들의 복음
예수께서 건강한 자들과 관례를 잘 따르는 자들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 길 잃은 자들, 죄인들, 의심하는 자들을 위해 왔다
엠마우스의 초기 추억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서가 들려주는 내용 또한 인간조건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우리는 자유와 존엄과 광대한 지평과 행복과 건강과 형제애를 갈구하면서, 대부분 두려움과 수치심과 낙담과 추위와 전쟁과 질병 속에 살고 있다. 어느 위치에 있건 우리 모두는 상처입은 독수리들인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들려주는 게 다른 얘기이던가?
#열광적인 환멸
전후 젊은이들에게서 발견한 놀라운 점? 승자 쪽이건 패자 쪽이건 간에 전쟁이 끝난 기쁨에 도취되기보다는 슬퍼했으며 삶을 두려워했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지를 본 젊은이들은 인간성 자체에 대해 의혹을 품었다. 삶이란 게 살아갈 가치가 있는지조차 의심했다. 나는 환멸을 느낀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복음서를 읽다가 엠마우스의 제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루가복음의 한 대목(24장)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스도가 죽은 후 예루살렘을 떠나가는 그 두사람의 절망이 내게 절실히 다가왔다.
메시아는 그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승리자의 모습이 아니라 고난받는 초라한 모습이었다(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부활과 ‘뜨거운 감동’, 그들이 맏음을 되찾은 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이다.
‘엠마우스(엠마오)의 순례자들’ 복음서 구절을 읽다가 떠오른 인생 철학? 열광적인 환멸!
삶이란 그것이 시작된 순간부터 우리에게 환상을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삶이란 점차 우리가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현실에 다가가도록 인도한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열광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그런데 이 결합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환상으로부터 해방되어야만 한다.
“여러분들은 환멸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 벗어나서 삶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희망과 소망을 혼동하지 말자
토론이 앞서 주요 단어들의 의미에 대해 합의부터 한다면 얼마나 많은 언쟁을 피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온갖 종류의 수천 가지 소망을 가질 수 있지만 희망은 단 하나뿐이다
개개인의 소망들…희망은 전혀 다른 것이다? 희망이란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환멸로부터 구원이 필요하다? 환상과 더불어 열정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무한자를, 영원을 향한 열망을 품고 사는 인간, 근본적으로, 존재론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이다. 이 점을 의식하지 못할 때 인간은 무엇보다 근원적인 열망들을 소유의 영역에다 쏟는다. 끊임없이 물질적 재산과 즉각적인 쾌락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를 채워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영원히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가 진정한 재산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명석하게 보지 못할 때 인간은 자기자신조차 속이고, 만족스럽다는 환상이나 또는 잘못된 방식으로도 만족에 이를 수 있다는 환상 속에서 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만족을 느끼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겠는가?
기술과 과학의 발전이 찬란한 내일을 가져온다?
“내가 당신들을 딱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가져다주는 물질적 발전은 확인할 수 있을지 몰라도, 도덕적 발전과 행복은 그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점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한창 전쟁중입니다. 전쟁은 깨끗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덧붙이자면 나는 이 20세기를 사는 우리가 인간에 대한 환멸의 끝을 경험하고 있은 게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당신들이 ‘염세주의’라고 부르는 관점에서 출발한 나는, 악도 있지만 선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환희 속에 내 생을 마칠 것입니다.
#부조리와 신비
소크라테스, 부처, 에픽테토스, 예수 그리고 그 외의 또 다른 역사 속 인물들이 마비상태에 빠져 있는 인간을 깨워서 환상을 벗게 하고 구원의 필요성을 일깨우려 애써왔다.
한편 부조리를 일깨우고 절망을 가르치는 이들 또한 있다. 특히 사르트르의 경우가 그렇다고 난 생각한다…그는 자신을 열광적인 환멸로 인도할 유일한 길인 희망을 끝내 찾지 못했다.
부조리의 철학자 카뮈, 그는 사르트르와 분명히 다른 방식이긴 하면서도 사르트르만큼이나 부조리를 일깨우는 자로 남고 말았다. 그는 세상 곳곳, 인간의 마음 속을 지배하는 악을 볼 줄 알았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 속에 빈자리로 각인해놓으신 사랑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희망은 감춰진 그 신비한 사랑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비극적인 최후 앞에서 사도들 역시 부조리와 신비 가운데 선택을 해야만 했다.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사용하지도 않은 채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걸 본다는 게 그야말로 환멸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그러자 사도들은 달아난다. 배드로와 유다..두 사람 모두가 환상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했던 사실로 인해 애통하게 울 만큼 희망을 버리지 않은 반면, 유다는 그 같은 부조리하고 처참한 광경 앞에서 아연실색하여 일시적인 승리자들과 동조하게 된다. 그는 부정적인 환멸에 머물렀으며, 그것이 그를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친구를 배반하게 한 이 절망은 결국 그를 자살로 몰고 간다.
인간의 삶은 희망과 절망, 빛과 어둠이 번갈아가며 이어진다.
“명철한 시각으로 삶을 바라보면 신비와 부조리 사이에서 양자택일할 도리밖에 없어.” (부조리는 절망으로 인도한다, 신비는 희망의 원천이다)
#2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확신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난 걸까요?” 그러면 나는 그저 이렇게 대답한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지요.”
*타인과 공감하는 자, 홀로 만족하는 자
‘나는 안다’와 ‘나는 믿는다’?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이란 논리적 추론의 결과도 수학적 계산의 귀결도 아닌 것이다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지고 네가 고통받으면 나도 고통받는다, 라는 진리를 일깨워 준 아버지의 말씀?
“너는 너밖에 모르느냐? 너는 다른 사람이 행복한 걸 보고 기뻐해줄 줄 모른단 말이냐?”
지혜란 우리가 현명해져서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오. 지혜란 라틴어로 ‘sapere’ 즉 ‘음미하다’ 또는 ‘맛보다‘라는 뜻입니다. 당신은 그 기쁨의 순간에 사랑한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를 맛본 것입니다.
나는 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비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간에 근본적인 구분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자신을 숭배하는 자’와 ‘타인과 공감하는 자’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입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과 타인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길 거부하는 사람들 간의 구분이 있을 뿐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마음이 가난한 자? 매일 저녁 ‘나의 능력과 특권과 재능과 학식을 가지고 약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무얼 했는가?’라고 자문하는 자
“왜 그 사실을 한번도 가르쳐주지 않았느냐?” 사탄과 지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이 벌하실 것이다’라고 가르치던 카톨릭 교육’, 그는 하느님을 사랑과 자유에 연결지어 얘기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노라고 덧붙였다.
사랑은 타인의 자유에 대한 절대적 존중을 전제로 한다!
자유가 없다면 사랑도 없을 것이며, 인생은 흥미도 의미도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다니 하느님이 큰 실수를 하신거예요!”, 자유가 없는 인간? 자동 인형!
자유, 깨어나야 한다
#3 만남을 향하여
유일한 신성모독은 사랑에 대한 모독뿐이다.
“그건 복음전파가 아니라 정치입니다! 글을 가르치는 건 정치란 말입니다!”? 맞는 얘기! 의식을 깨쳐 권력에 덜 조종앙하도록 해주기 때문
신앙 생활이 현실생활의 참여를 연루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 것이며, 인간들간이 정당한 분배를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불의에 맞설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부유한 성직자, 필연적으로 정치 영역에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킬 복음서의 수많은 글들? 부유한 통치자들이 성직자들을 매수함으로써 그들과 손을 잡고 복음서 일부가 절대로 알려지지 않도록 해온 것을 역사를 통해 항시 보아왔으며, 불행하게도 오늘날에조차도 보고 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에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사회적 영향이 연루되어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 이 신학은 복음을 마르크스주의의 부속물로 만들기도 했다. (복음의 긍극적 목표를 잊은 채)
자유는 외부의 적이 퍼붓는 공격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것의 진정한 목표인 사랑을 부인하기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다…부가 넘쳐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최저생활비조차 보장되지 않는 이 땅에서…오늘날 서양인들이게 자유의 의미를 되찾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다.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롭기 위해 자유롭겠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단절과 궁지와 공허 그 자체이다.(그리스도가 이땅에 온 이유? 내면적 해방의 가능성을 가져다 줌으로써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유를 구원하기 하기 위해서)
#인류형제들
예수께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 이외의 그 무엇도 가르치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모두가 같은 목표, 즉 행복을 추구한다. 진짜 문제는 어떤 방법을 선택하느냐이다.
두 가지 길 가운대 선택하게 마련이다. 타인들 없이 행복할 것인가 아니면 타인들과 더불이 행복할 것인가. 혼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타인과 공감할 것인가. 매일 아침 새롭게 다짐해야 할 이 선택은 그 무엇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그 선택이 우리의 삶의 실체를 결정짓고 우리를 만든다.
약자와 고통받는 자들를 위해 봉사하는 연대적인 사회를 원하는가? 약자를 짓밟도록 내려두는 혹은 길가에 내버려두는 개인적인 사회를 원하는가? 전자의 경우라면 우리는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전력투구할 것이며, 지속적인 사회적 평화가 보장될 것이다. 후자의 경우라면 격차와 부당한 상황들이 점점 늘어가도록 내버려둘 것이며, 항구적인 사회적 분노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 후자는 불행히도 가장 풍요로운 사회들이 선택한 것으로 보여지는 길이 아닌가?
나는 6년이 약간 넘는 기간 동안 국회의원으로 지내면서 아주 단순한 사실 한 가지를 터득했다. 정치인들의 할 일은 근본적으로 누구에게서 돈을 얻어내어 재분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적으로 가장 강한 자들을 위할 것인지 아니면 가장 약한 자들을 위해 봉사할 것인지는 우리가 내려야 할 진정한 사회적 선택이다. 이 선택이야말로 한 가정이, 한 종족이, 한 나라가 또는 한 문화가 위대한지 또는 저급한지를 결정짓는 것이다.
#고통의 힘
고통은 인간조건의 심오한 현실이다.
두 가지 태도? 고통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거나 항거하는 것.
다른 그 어떤 경험보다도 고통은 인간을 ‘부조리냐 신비냐’라는 거친 선택 앞애 몰아세운다.
고통은 인간을 압도하거나 반대로 인간의 마음을 크게 한다. 그것은 우리를 암흑 속에 빠뜨리거나 새로운 지평선을 열어준다. 우리 모두는 이 양 극단을 오갈 수 있다.
고통받는 자들에게 충고를 하려 들지 않도록 주의하자. 그들에게 멋진 설교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다만 애정어리고 걱정어린 몸짓으로 그 고통이 함께함으로써 우리가 곁에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그런 조심성, 그런 신중함을 갖도록 하자.
죽음은 삶의 일부, 죽음이란 오랫동안 늦춰진 친구와의 만남과 같은 거요.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구분은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구분은 ‘홀로 족한 자‘와 ‘공감하는 자‘ 사이에, 타인들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자와 그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받아들이는 자 사이에 있다.
삶에 대해 몽상하지 말자. 삶을 만들어가자. 공허한 말에 만족하지 말고 사랑하자. 그리하여 시간의 어둠에서 빠져나갈 때, 모든 사랑의 원천에 다가서는 우리의 마음은 타는 듯 뜨거우리라.
길은 계속된다
용서는 언제나 높은 곳에서 보다 넓은 시각으로 바라볼 것을 전제하며, 그것은 사랑 안에서만 이루어줄 수 있는 것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려 쳐라”
용서는 희망의 궁극적 토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