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도정일,최재천. p602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도정일
“몇 년 동안 소리없이 엎드려 있었다”
그가 대외적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쉰 살이 넘어서이다. 꿈을 포기한 중년의 노후설계가 아니라면 나이 50에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건 분명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떤 평론가는 그에게 물은 적이 있다. 도대체 1990년대 이전에는 무얼 하고 있었냐고.
그리스 신화의 핵심? “모순을 공존하게 하는 상상력”
인문학적 소양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능력
자본주의 문화는 자아의 문화, 나르시즘의 문화죠.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이해만 따지고, 절대로 문을 열지 않고, 접촉은 이해관계가 통할 때만 하고, 그런 문화 속에서 장나라가 불리는 단단한 문의 폐쇄화가 끊임없이 일어나죠. 이럴 때일수록 껍질을 깨지는 상상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나는 예술이 수행하는 가장 위대한 인문학적 경험은 고통을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자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인문학적 삶의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내가 첫 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이 ‘가슴을 여는 사회’입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자기 존재이 울타리를 걷어치울 줄도 알아야 하죠. 그래야 타자가 들어오거나 자기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인문학적 삶의 제1조예요.
최재천은 과학을 과학자들의 커뮤니티 바깥으로 끌고 나온 귀한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과학과 대중의 소통, 자연과학자와 인문학자의 대화를 강조해왔다.
모르기 때문이 미워한다? 알면 사랑한다?
“저는 서로 잘 모르기 때문에 미워하고 시기한다고 믿습니다. 아무리 돌을 맞아 사람도 왜 그런 일을 저질러야만 했는가 알고 나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심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욱 가르치고자 한다. 그는 자신이 연구하고 고민하면서 알게 된 것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매일 시골 가는 꿈만 꿨어요”
직장에 다니면서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는 거였죠
그처럼 우연적이면서 필연적인 흐름이 있었어요
그는 노년의 생물학자에게서 강릉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의 자기 얼굴을 보았다. 일로서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노는 것으로 연구를 하는, 연구 자체를 놀이처럼 즐기는 사람이 그 앞에 있었던 것이다.
“알면 사랑합니다. 알아야 제대로 사랑할 수 있죠”
“알면 사랑한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이라도 알리고 싶어한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자연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잘 알지 못하면 보호한다는 것이 오히려 파괴하는 것이 되죠. 알아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자연에 대해 점점 더 알게 되면 될수록 저절로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함께 살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젊은 친구들을 20년 정도만 열심히 가르치면 그뒤 우리 사회의 주인이 되었을 때 환경은 저절로 보호될 겁니다. 지나치게 이상적인 생각이라고 탓할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엔 그게 그래도 빠르고 현실적일 것 같아요.
##즐거운 몽상과 끔찍한 현실
…신과 인간을 갈라놓는 결정적인 차이는 유한성과 불멸성입니다. 지금 생명공학은 인간이 불멸성의 문턱에 올라설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하고 있습니다.
생명과학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래는 모든 사람이 최대 수명인 120세까지 질병없이 행복하게 사는 겁니다.
거꾸로 된 나라 이야기
장사 안 되는 기초 과학? 당장에 시장에 내다 팔 지식만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는 미래를 도살하는 나라예요…인문학은 문화산업의 기초 자원이죠.
매 순간의 우리 판단과 선택과 행동에서 행복을 얻기보다는 행복을 붙잡기 위해 일한다고 생각합니다. 행복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아주 위험한 사태가 벌어집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나쁜 짓이라도 오케이…이게 행복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입니다.
유전자도 중요하지만 환경적인 요인도 그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우생학? 옥수수를 우생학적으로 개량하는 것은 가능하죠. 옥수수의 삶을 증진시키는 게 아니라 옥수수의 낱알을 증진시키는 것이니까요.
환경과 관련된 것은 싹 빼버리고 ‘생물학적=유전학적’이라는 편견이 지배하고 있는 거죠
#통섭 (統攝,Consilience)
학문의 경계란 자연에 실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이 진리의 궤적을 추적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그어놓은 거니까요…중세에는 지금 우리가 그어놓은 학문의 구획이 없었잖아요. 사실 따지고 보면 르네상스 시기에도 학자라면 대개 거의 모든 분야에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죠.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갖춘 이들을 가리켜 ‘르네상스인’이라고 하죠. 지식은 대체로 16세기에 들어서서야 쪼개지기 시작하기 않습니까?…아무리 부분이 대한 지식을 축적하여 한데 붙여봐도 결국 전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걸 이제 우린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깨닫고 있어요.
부족했던 것은 과학하기에 필요한 비판,분석,실험,검증,논박의 절차들을 ‘자유롭게’ 허용하는 문화입니다.
생각해봐야 할 중요한 화두 중 하나? 정신의 자유 확장이 과학 정신이란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일일 겁니다.
사회적으로 과학보다 기술이, 연구보다는 정치가 인정받는 것은 사실이죠
과학적 기술? 지금은 기술이 과학을 압도합니다(기술과학이란 표현이 적합?!)
“정삼각형의 세 같은 같다”라는 말을 들으면 “그래서? 너 그거 가지고 뭐할 건데?”라고 당장 반문하겠죠. 이게 아직도 우리 사회의 정신 수준입니다. 과학으로서의 생물학무기 생명공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더 압도적이죠.
이공계 대학 졸업자들이 모두 ‘벤처’로 내몰리고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불안에 떨며 돈벌이에 나서야만 제구실을 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는 과학이 어렵습니다.
한국의 제도 안에서는 개인의 유전적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길이 거의 없습니다. 생존의 게임 자체가 시험발사 획일화된 기준으로 기획되어 있기 때문에 신분 상승의 욕망은 그렇게 왜곡된 형태로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자연은 매우 다양하고 그 자연에 적응하여 사는 방법 또한 무척이나 다양한데 우리는 단 한 개의 잣대로 모든 걸 가늠하려 합니다.
신화나 종교가 추구하는 것과 과학이 추구하는 것은 서로 차원이 다릅니다.
생물학이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들, 그러나 인간이 포기할 수 없는 질문들이 있죠.
신화는 답이 아니라 질문일 때가 많습니다.
과학은 답을 추구하고 인문학은 질문을 추구합니다
우리의 머리카락 색을 결정하는 유전자도 아직 못 찾았습니다. 과연 몇 개의 유전자가 관여하고 있는지도 아직 찾지 못했죠. 그처럼 간단한 형질을 결의안은 유전자의 존재도 모르는 상황에서 ‘평화 유전자’, ‘폭력유전자’ 운운하는 것은…
나는 인문학의 핵심적 질문으로 세 가지를 꼽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왜 여기에 있는가?”
다윈혁명? 2,000년이나 서양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던 이원론의 허구를 일깨우고 다시금 일원론의 지혜를 선사한 혁명적인 사상가였죠.
어떤 속성을 대표할 수 있는 유전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이 유전자가 수많은 형질들을 형성할 뿐 아니라, 하나의 형질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수도 엄청납니다. 즉 한 가지 일만 달랑 하는 유전자란 없다는 겁니다.
다윈의 진정한 공헌은 그러한 일종의 인간 중심성을 깨뜨려버린 데 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가 한 계통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유전자 안에는 그 모든 역사의 기록이 다 들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유전학자들이 찾아낸 것은 유전자의 차이뿐입니다
‘다윈의 어설픈 전도사’들? 무지가 종종 용맹을 낳지 않습니까
과학적 사고가 필요한 시대? ‘과학적 사고’는 없고 기술만 있다.
인간이 하는 행동 가운데 동물하고 다른 것, 가장 신기한 것 하나가 뭔지 아세요? 바로 강의예요…우리는 아예 출발선을 들고 옮기며 사는 동물인 셈입니다.
저는 언제나 자유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구성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원한 삶? 죽음이 삶을 허락하는 겁니다. 그러니 모두가 죽지 않게 되는 날이 모두가 함께 죽기 시작하는 날이 되는 겁니다
생물학자인 제가 보기에는 영혼도 DNA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DNA의 ‘확장된 표현형’ 같은 걸로 볼 수 있겠죠. DNA 가 없다면 영혼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게 상당히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영혼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영혼도 DNA 의 씨앗일 수밖에 없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유전적 완벽성이 아니라 결함이다”
유전상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 결함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 인간적 위대성이죠. 완벽한 유전자 덕분에 특출한 능력을 발휘한다면 그건 인간적 위대성과는 이미 품질이 알아요. 약 먹고 잘 뛰는 단거리 선수 같은 경우죠.
##21세기형 인간, 호모 심비우스의 번식을 위하여
농업혁명이라는 게 다른 말로 하면 공생이거든요. 자연에서 혼자 사는 식물을 데려다가 키워주고, 그 식물들이 공생을 통해서 굉장한 번식을 이룬 거죠. 공생 덕택에 우리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이란 사실을 이해한다면 결국 우리가 자연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무기는 공생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저는 우리 인간이 이번 세기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다시금 공생인간, 즉 호모 심비우스로 거듭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를 얇게 만드는 세계화? 저는 세계화 문제가 지극히 생물학적인 문제라도 생각하기 때문에 굉장히 관심이 많아요…다양성의 종말?!
정보가 너무 많아졌어요. 인간이 인지 능력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정보의 무한 공간이 생겨버린 거예요. 너무 많으 정보가 흐르면 사람들은 위축되고 혼란에 빠지고 무기력해집니다…정보의 바다로 떠내려간다고 합니다..사실 빠져 죽는 거죠..인터넷에는 그런 구체적/인간적/능동적 접촉이 없습니다. 얇은 접속만 있죠.
“서로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의 삶의 제1조가 아닐까”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는 법‘은 모든 사람들이 삶의 기초로 삼아야 할 정신이자 기초학문으로서의 인문학적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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